비빔밥이 소시지 속으로

2026/10/06 16:16:17

비빔밥이 소시지 속으로 더비빔밥, 태국 세븐일레븐에 한식 신제품 선보여 CP그룹 계열 CPF와 공동 개발 쌀과 채소 담은 ‘비빔밥 소시지’ 출시 비빔밥을 소시지로 만들면 어떤 맛일까. 태국에서 한식당을 운영해 온 ‘더비빔밥’이 CP그룹 계열 식품기업 CPF와 함께 그 답을 내놓았다. 쌀알과 당근, 버섯, 시금치 등을 넣은 ‘비빔밥 소시지’다. 식당에서 한 그릇으로 먹던 비빔밥을 편의점에서 간편하게 즐기는 먹거리로 바꾼 것이다. 더비빔밥은 지난 9월 15일 방콕 CP그룹 본사 사옥에서 신제품 발표회를 열고 비빔밥 소시지의 출시를 알렸다. 업체 측에 따르면 판매망은 태국 전역의 세븐일레븐 약 1만 5,000곳이다. 방콕 주요 쇼핑몰의 한식당에서 출발한 브랜드가 전국 편의점 매대로 무대를 넓힌 셈이다. 이번 제품의 특징은 소시지 안에 담긴 재료에 있다. 한국식 양념으로 맛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비빔밥에 쓰이는 쌀과 채소를 함께 넣었다. 더비빔밥은 비빔밥의 맛과 재료 구성을 맡고, CPF는 소시지 개발과 생산·유통 역량을 보탰다는 설명이다. 직접 먹어보니 먼저 쫀득한 식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즐겨 먹던 소시지를 떠올리게 하는 탄력이 있다. 한입 베어 물면 ‘뽀드득’ 씹히면서 속에 박힌 밥알이 모습을 드러낸다. 당근과 버섯, 시금치가 한데 어우러져 비빔밥 특유의 풍미도 느껴졌다. 그대로 먹어도 맛있지만, 떡볶이에 곁들이거나 김치찌개에 스팸 대신 넣어도 잘 어울릴 듯했다. 전자레인지에 데워 간단한 맥주 안주로 내놓기에도 딱이다. 태국 소비자에게 소시지는 낯선 음식이 아니다. 북부의 ‘싸이우어(Sai Ua)’, 동북부의 ‘싸이끌럭 이싼(Sai Krok Isan)’처럼 지역마다 개성 있는 소시지가 있고, 편의점에서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더비빔밥은 이 익숙한 먹거리에 비빔밥을 접목했다. 한식당을 따로 찾아가지 않아도 동네 세븐일레븐에서 한국 음식의 맛을 접하게 하겠다는 취지다. 전창관 더비빔밥 대표는 “태국에서 오랜 시간 한식을 알려온 브랜드로서, 비빔밥이라는 한국 대표 음식이 태국 소비자에게 친숙한 소시지와 만나 새로운 형태의 K-푸드로 탄생하게 돼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세븐일레븐을 통해 태국 소비자들이 일상에서 한식을 더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CPF 글로벌 푸드 솔루션의 노라차이 라따나반쯘 부사장은 기존 ‘닭고기 끄라파오 소시지’에 이어 비빔밥으로 제품 개발 범위를 넓혔다고 설명했다. 더비빔밥의 메뉴를 현대 소비자의 생활 방식에 맞춰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개발했다는 것이다. 이번 협업은 한식당의 메뉴가 현지 대형 식품기업의 생산·유통망을 통해 가공식품으로 판매된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식당을 늘리는 방식과는 또 다른 경로로 소비자를 만나는 시도다. 비빔밥이라는 이름이 실제 구매와 재구매로 이어질지는 앞으로 소비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더비빔밥은 삼성전자 태국 주재원 출신인 전창관 대표가 2010년 방콕 수쿰윗 24에 첫 매장을 열며 시작했다. 현재 아이콘시암, 엠쿼티어, 시암파라곤, 센트럴 계열 쇼핑몰 등에서 15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비빔밥 외에도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김밥, 떡볶이, 삼겹살 등 다양한 한식을 선보인다. 2024년에는 방콕 유엔콘퍼런스센터(UNCC)에도 입점했다. 식당 운영과 함께 ‘더김치’와 ‘더도시락’ 브랜드로 김치와 한식 도시락도 판매하고 있다. 공연과 스포츠 현장에서도 태국 소비자들과 만나 왔다. 블랙핑크 지수, 김준수, 아이유를 비롯해 박보검, 김우빈, 이종석, 정해인 등 한국 가수와 배우의 태국 행사를 후원했으며, 태국 프로축구팀 무앙통 유나이티드의 2024~2025시즌 공식 파트너로도 참여했다. 오는 10월 25일 방콕 엠스피어에서 열리는 소녀시대 티파니 영 공연에도 공식 후원사로 참여할 예정이다. ✽ 김종민 편집국장 ✽ 기사·사진 제공: 더비빔밥

세계가 반한 골목 서울엔 종로3가, 방콕엔 딸랏너이

2026/10/06 11:39:00

세계가 반한 골목 서울엔 종로3가, 방콕엔 딸랏너이 타임아웃 '2026 세계에서 가장 쿨한 동네 40곳'… 종로3가 1위, 딸랏너이 14위 종로3가가 세계에서 가장 쿨한 동네 1위에 올랐다. 방콕에서는 딸랏너이가 14위. 반짝이는 새 건물이나 대형 쇼핑몰을 앞세운 동네가 아니라는 점이 재밌다. 한쪽에는 한옥 사이로 난 골목과 포장마차가, 다른 쪽에는 중국계 주민들의 오래된 집과 자동차 부품 가게가 있다. 도시가 정신없이 달리는 동안 제 자리를 지켜온 동네들이 세계 무대에서 나란히 박수를 받은 셈이다. 순위를 발표한 곳은 글로벌 도시문화·여행 매체 타임아웃(Time Out)이다. 서울과 방콕을 오가며 사는 우리 교민에게는 남의 얘기가 아니다. 서울에서 좋아하던 골목의 맛을 방콕에서 다시 찾기도 하고, 방콕에서 정든 풍경 덕분에 서울이 새롭게 보이기도 하니까. 길 하나가 아니라 동네 통째로 먼저 하나만 짚고 가자. 이 목록은 '거리'가 아니라 '동네' 순위다. 영어로는 스트리트가 아니라 네이버후드. 길 하나, 상점가 하나가 아니라 골목 여러 개와 거기 사는 사람들까지 통째로 본다는 뜻이다. 뽑는 방식도 독특하다. 관광객 수나 매출은 세지 않았다. 도시마다 현지 필진과 전문가가 후보를 추천하면, 타임아웃 편집진이 음식과 술, 밤 문화, 개성 있는 독립 상점, 생활환경과 공동체를 두루 따져 순위를 정했다. 그러니 1위가 14위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고 읽을 필요는 없다. "요즘 도시들이 이런 동네를 재밌어하는구나" 하고 읽는 편이 훨씬 남는 장사다. 참고로 종로3가는 2021년 같은 목록에서 3위였고, 올해 정상에 섰다. 딸랏너이의 14위는 이 연례 목록에서 방콕 동네가 받은 역대 최고 순위다. 익선동 한옥 골목 또는 돈화문로11길 포장마차의 저녁 풍경, 해가 지면 종로3가는 길가 식탁으로 자리를 옮긴다. 종로3가, 한옥 카페에서 포장마차까지 종로3가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누군가는 귀금속 상점과 오래된 식당을, 누군가는 익선동 한옥 카페와 저녁 술자리를 말한다. 같은 역에서 내려도 서로 다른 서울을 만나는 동네다. 타임아웃이 소개한 종로3가는 행정구역 경계보다 훨씬 넓다. 익선동 한옥 골목, 돈화문로11길 포장마차, 종묘 옆 서순라길이 한 줄로 이어진다. 낮에는 커피 한잔하고 작은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해가 지면 길가에 앉아 안주를 나눠 먹는 하루다. 올해 타임아웃이 특히 눈여겨본 것도 포장마차로 되살아난 저녁의 활기였다. 낮은 지붕과 좁은 골목은 걸음을 절로 늦춘다. 큰길에서는 간판을 보고 목적지를 찾지만, 이런 골목에서는 모퉁이를 돌다 뜻밖의 가게와 마주친다. 오래 드나든 사람과 처음 온 사람이 같은 골목을 쓰고, 최신 유행 가게 옆에 오래된 가게가 그대로 있다. 딸랏너이, 커피 향만으론 모자란 골목 자, 이제 방콕이다. 짜오프라야강 가까이에 자리한 딸랏너이(Talat Noi)는 강변 교역의 역사에 중국계 공동체, 자동차 엔진과 중고 부품 가게가 겹겹이 쌓인 동네다. 요즘은 거기에 오래된 건물을 고친 카페와 문화공간이 들어왔다. 그렇다고 '요즘 뜨는 카페 동네'로만 부르면 설명이 반쪽이다. 이 동네의 개성은 커피 마시는 자리와 먹고사는 자리가 딱 붙어 있다는 데 있다. 타임아웃도 아래층 자동차 수리와 위층 카페가 한 건물에서 이어지는 풍경을 콕 짚었다. 원문에 이름이 오른 곳은 마더 로스터(Mother Roaster), 옛 숍하우스를 쓰는 965bkk, 바와 마켓이 어우러진 더 웨어하우스(The Warehouse)다. 가게와 살림집을 한 건물에 합친 숍하우스를 카페로 쓰는 건 한옥 카페와 견줄 만하다. 생김새도, 그 안에 쌓인 생활의 역사도 다르지만. 정비소와 카페가 한 골목에 붙어 있는 딸랏너이 골목 종로3가 낮 풍경 (비교용) 익선동 + 인사동 + 을지로 = 딸랏너이? 딸랏너이를 한국 독자에게 어떻게 소개할까 고민하다 나온 공식이 있다. '익선동과 인사동을 섞어놓은 동네', 거기에 을지로 한 스푼. 익선동에서 빌려온 건 공간을 쓰는 방법이다. 옛집의 모양과 골목 크기를 살려 카페와 작은 가게를 앉혔다. 인사동에서 빌려온 건 문화를 구경하며 걷는 기분이다. 다만 인사동처럼 전통 공예품과 화랑이 주인공은 아니다. 여기서 만나는 문화는 중국계 주민의 생활과 신앙, 오래된 건축, 골목 미술, 새 창작공간이 뒤섞인 모습이라, 닮은 건 산책의 기분까지다 그리고 을지로. 딸랏너이 골목에서는 지금도 부품을 사고팔고 기계를 손본다. 카페에서 잠깐 쉬고 나와도 누군가의 일은 계속되고 있다. 그 위에 짜오프라야강과 중국계 공동체의 역사가 얹힌다. 한국의 어느 동네와 닮았다는 얘기를 다 지나고 나면, 결국 방콕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남는다. 참, 가까운 쏭왓(Song Wat)과 헷갈리기 쉬운데 이번 14위의 주인공은 딸랏너이다. 이웃한 두 동네를 한 이름으로 뭉뚱그리지 말고 골목별로 나눠 걸으면 산책이 더 재밌어진다. 딸랏너이 산책 팁 ✽ 카페에만 머물지 말고 골목 구경할 시간을 남겨두자. ✽ 부품 나르는 통로는 비켜주고, 사람이나 실내를 가까이 찍을 땐 먼저 물어보자. 우리 눈엔 근사한 풍경이 누군가에겐 작업장이고 집 앞이다. ✽ 밤에 갈 바나 행사가 있다면 운영시간은 따로 확인하자. 오래된 동네를 좋아한다는 것 이번 40곳을 훑어보면 되풀이되는 풍경이 있다. 시장, 동네 식당, 독립 서점, 작은 술집, 공장과 창고의 새로운 쓰임 같은 것들이다. 오사카 기타카가야는 조선업의 흔적 위에 예술공간이 들어섰고, 싱가포르 잘란브사르에서는 오래된 철물·부품 가게와 새 디자인·커피 문화가 이웃한다. 물론 유명해지면 숙제도 생긴다. 사람들이 좋아했던 작은 가게와 오랜 주민이 앞으로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이번 순위만으로 임대료나 주민 이탈을 판단할 순 없지만, 동네의 생활이 매력이라면 그 생활이 이어질 여건에도 눈길을 줘야 한다. 우리 교민들에게 딸랏너이는 비행기 안 타고 새로 읽어볼 수 있는 방콕이다. 한국에 가면 종로3가도 다시 걸어보자. 어느 쪽이 더 멋진지 점수를 매기려는 게 아니라, 익숙한 도시에도 아직 안 본 표정이 있다는 걸 확인하러 가는 것이다. 딸랏너이에서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았다면 커피를 다 마신 뒤 골목을 한 바퀴 더 돌아보자. 그 카페가 왜 하필 그 자리인지, 옆집은 뭘 하는 곳인지. 재미는 대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딸랏너이의 중국 사당 또는 가톨릭 성당, 부품 가게 앞 일상 벽화와 카페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이런 골목을 지나고 있다. ✽✽위 사진들은 ‘지역 분위기를 재구성한 AI 생성 이미지’입니다. 글 | 김종민 편집국장

지갑은 얇아도 속은 든든하게 한국과 태국, 서민의 소울푸드

2026/09/21 12:19:58

지갑은 얇아도 속은 든든하게 한국과 태국, 서민의 소울푸드 월급날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지갑은 벌써 홀쭉해졌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으로 배를 채울까. 최근 태국 SNS에서 '돈 없을 때 먹는 음식'이 화제인데, 쌀죽과 달걀프라이, 인스턴트 라면 같은 태국식 가성비 메뉴들이 한국의 서민 음식과 신기할 만큼 닮아 있다. 주머니가 가벼운 날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건 역시 라면이다. 태국 국민 라면 '마마'에 달걀 하나 톡 깨 넣으면 그날의 단백질은 해결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아서, 매콤한 라면 국물에 찬밥 한 덩이 말면 그만이다. 달걀만으로 한 끼가 되기도 한다. 기름을 두르고 짭짤하게 부쳐낸 태국식 오믈렛 '카이찌여우'가 밥반찬이라면, 한국에는 뜨거운 밥에 간장과 참기름을 쓱쓱 비빈 간장계란밥이 있다. 냉장고가 비어 있어도 이 두 가지만 있으면 걱정이 없다. 태국에는 한국에 없는 독특한 조합도 있다. 찹쌀밥에 바나나를 곁들인 '카오니여오 끄루어이'다. 열대 기후 특유의 이 조합은 쫀득한 찹쌀과 달콤한 바나나로 포만감과 에너지를 동시에 채우는 생존형 간식이다. 한국식으로 굳이 견주자면, 삶은 고구마에 신김치를 얹어 먹던 겨울철 간식 정도랄까. 거리로 나가면 서민의 삶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방콕 딸랏플루 골목이나 지상철역 아래에는 숯불에 굽는 무삥 냄새가 진동한다. 돼지고기 꼬치에 찹쌀밥 한 덩이면 몇 십 바트로 든든한 한 끼가 완성된다. 한국의 출근길을 책임지던 냄새는 길거리 토스트였다. 두툼한 양배추 달걀 부침에 설탕과 케첩을 듬뿍 뿌린 그 토스트, 그리고 하굣길 쌈짓돈으로 사 먹던 컵 떡볶이와 무한리필 어묵 국물은 그 시절 몸도 마음도 덥혀주던 메뉴였다. 특별한 날, 주머니는 가벼워도 기분은 내고 싶을 때 한국인 곁에는 짜장면이 있었다. 이사하는 날이나 졸업식 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던 검은 면발에는 서민의 애환과 기쁨이 함께 담겼다. 태국인이 속이 헛헛할 때 찾는 쌀죽 ‘쪽’이나 '카오똠'도 비슷한 위로를 건넨다.

후아힌에서 붙잡힌 한국인 사기 피의자, '동포라서 믿었다'는 말의 무게

2026/09/21 11:47:59

후아힌에서 붙잡힌 한국인 사기 피의자, '동포라서 믿었다'는 말의 무게 부동산 투자 사기 혐의로 67세 한국인 검거… 태국 내 관련 4건, 신고 피해액 1억 4,700만 바트(약 60억) 넘어 외국에서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마음이 놓인다. 관공서 서류 한 장 떼는 일조차 만만치 않은 타국살이에서, 현지 사정을 잘 아는 동포의 도움은 그만큼 귀하다. 사업이나 부동산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고마움이 "돈을 맡겨도 된다"는 확신으로 넘어가는 순간에는 한 번쯤 멈춰볼 필요가 있다. 최근 후아힌에서 검거된 한국인 부동산 투자 사기 피의자 사건이 바로 그 지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태국 중앙수사국(CIB)은 지난 9월 8일 쁘라쭈압키리칸주 후아힌 힌렉파이 지역의 한 주택에서 한국인 한 모 씨(67)를 공동 사기 혐의로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경찰이 연관성을 파악한 태국 내 사건은 4건이며, 신고된 피해액은 1억 4,700만 바트(약 60억)를 넘는다. 다만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인 만큼 '혐의'와 '확정된 범죄 사실'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Pattaya Mail 보도) 사건은 202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찰 설명에 따르면 한 씨 일행은 한국인 투자자에게 태국 내 토지와 콘도미니엄 투자를 권유했다. 이후 별도 회사를 세워 투자자에게 지분과 투자 관리 권한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투자자는 이를 믿고 추가로 8,900만 바트(약 36억)를 송금했다고 한다. 그러나 투자금이 애초 약속과 달리 토지 매입에 온전히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Pattaya Mail 보도)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회사 설립'과 '지분 제공'이라는 장치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단순히 누군가에게 돈을 맡기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느꼈을 법하다. 자기 이름이 회사 서류에 오르고 의사결정에도 참여할 수 있다면, 재산을 스스로 관리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회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투자금의 실제 쓰임새까지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지분을 받는다'는 설명과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 사이에도 간극이 있을 수 있다. 결국 따져봐야 할 것은 훨씬 구체적이다. 회사 자금을 실제로 누가 움직이는지, 어떤 부동산을 얼마에 사들이는지, 매입이 끝난 뒤 등기는 누구 명의로 되는지다. 이 질문에 서류로 답하지 못한다면, 송금을 서두를 이유는 없다. 이번 사건에는 '30년 은신'이라는 자극적인 표현도 따라붙었다. 후아힌 투데이는 경찰 설명을 인용해, 한 씨가 약 30년 전 말레이시아를 거쳐 비공식 국경 통로로 태국에 들어왔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그가 출입국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본인 명의의 금융거래나 소셜미디어 사용도 피해온 탓에 추적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Hua Hin Today 보도) 다만 30년이라는 체류 기간을 곧바로 이번 투자 사기의 범행 기간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드러난 사건 경위와 피의자의 과거 행적은 별개로 확인해야 할 사안이다. 오래 숨어 지냈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피해자들에게 정작 절실한 문제는 자신의 돈이 어디로 흘러갔고 얼마나 돌려받을 수 있느냐다. 같은 보도에는 당국이 840만 바트(약 3억5천만원)를 동결하고 자금세탁 혐의 가능성을 함께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물론 동결된 자금이 곧바로 피해자에게 돌아간다는 뜻은 아니다. 관련 자산과 자금 흐름을 명확히 밝히고, 이를 실제 피해 회복으로 연결하는 후속 절차를 계속 지켜볼 일이다. (Hua Hin Today 보도) 교민 사회가 이런 사건을 접할 때 경계해야 할 태도도 있다. 피해자를 향해 "큰돈을 벌려다 그런 것 아니냐"고 쉽게 말하는 일이다. 그런 시선이 앞서면 피해를 입고도 주변에 알리기를 주저하게 된다. 신고가 늦어지고 정보가 흩어지면, 결국 피해 경위를 밝히는 일 자체가 더 어려워진다. 피해를 호소하는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되, 소문과 확인된 사실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피해액이 어떤 사건들을 합산한 수치인지, 수사 중인 혐의인지 아니면 판결로 확정된 사실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숫자를 부풀리거나 확인되지 않은 뒷이야기를 덧붙인다고 피해자의 사정이 더 잘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 투자를 앞둔 교민이라면 소개자의 경력이나 친분을 확인하는 선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계약 상대방과 등기상 소유자가 실제로 같은 사람인지, 회사의 지분과 서명 권한은 어떻게 짜여 있는지, 송금받는 계좌가 계약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는지까지 살펴야 한다. 태국 경찰 역시 이번 사건과 관련해 토지사무소에서 소유권 서류를 직접 확인하고, 회사 구조와 거래 상대방의 이력을 독립적으로 점검할 것을 당부했다. (Pattaya Mail 보도) 필요하다면 투자 권유자와 이해관계가 없는 현지 변호사에게 계약서와 관련 서류를 검토받는 편이 낫다. 설명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다들 이렇게 한다"는 말만 믿고 서명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확인을 요구하는 것을 상대에 대한 결례로 여길 필요도 없다. 큰돈이 오가는 거래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절차일 뿐이다. 타국에서 쌓아온 동포 간의 신뢰는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 신뢰가 오래가려면, 오히려 돈이 오가는 자리에서는 서로 더 명확해져야 한다. 계약서를 꼼꼼히 읽고, 권리관계를 확인하고, 거래 기록을 남기는 습관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지켜준다. 이번 검거가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회복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교민 사회 역시 이 사건을 한때의 화제로 소비하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에 투자 제안을 받았을 때 서류 한 장을 더 확인해보는 습관, 그 작은 변화라도 남기를 바란다. 글 | 김종민 교민잡지 편집국장

람빵의 고요 속 날카로운 시선

2026/09/06 13:24:33

람빵의 고요 속 날카로운 시선 사진작가 권학봉, 새 스튜디오에서 다음 장을 열다 PX3 2025 파인아트 부문 1위 역사와 현재를 포갠 ‘독립운동 : 겹쳐진 시선’ 방콕과 치앙마이에 비하면 람빵(Lampang)의 하루는 한결 느리다. 관광객을 붙잡으려는 요란한 간판도, 유행을 좇아 하루가 다르게 모습을 바꾸는 거리도 드물다. 오래된 목조 가옥과 마차가 아직 도시 풍경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는 곳. 한국 교민에게는 익숙한 여행지는 아니지만, 그 고요한 북부 도시를 작업의 거점으로 삼은 한국 사진가가 있다. 다큐멘터리와 순수예술 사진의 경계를 오가며 인간과 사회를 기록해 온 권학봉 작가다. 권 작가는 교민잡지 독자에게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다. 그동안 개인전과 그룹전, 한국과 태국 사진가들의 교류전 소식을 통해 여러 차례 그의 작업을 소개해 왔다. 그는 2017년부터 람빵에 살며 한국과 태국을 오가고 있다. 단국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기업 디자이너로 일했던 그는 이후 사진으로 방향을 틀었다. 디자인에서 익힌 화면 구성과 조명, 후반작업의 감각은 현장의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한 장의 이미지 안에 작가의 질문을 치밀하게 배치하는 그의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 곳들은 대체로 관광 안내서의 바깥에 있었다. 100년 넘게 지하 석탄층이 타고 있는 인도 자리아(Jharia)의 탄광마을에서는 생존과 환경 파괴가 한데 얽힌 현실을 기록했고, 방글라데시의 로힝야 난민촌에서는 고향과 국적을 잃은 사람들의 삶과 증언을 담았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이어진 ‘Faces of Zomia’ 작업은 국가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동남아시아 고산지대, 이른바 조미아(Zomia)의 소수민족 공동체를 오랫동안 지켜본 기록이다. 사건의 참혹함을 앞세우기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과 존엄을 놓치지 않는 것이 권학봉 사진의 한결같은 태도다. 그의 작업은 현장 기록에만 머물지 않는다. 2014년 인도 자리아 작업으로 온빛사진상 선정 작가 11인에 들었고, 2018년에는 로힝야 난민 기록으로 제8회 온빛상을 받았다. 이후 ‘WORSHIP’과 ‘Denial Scenery’ 같은 순수예술 연작을 통해 인간의 믿음과 욕망,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를 탐구했다. 2019년부터는 한·태 사진 교류 프로젝트 ‘PhapThaySajin’을 공동 기획하며 두 나라 사진가들이 함께 전시하고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왔다. 2025년 7월에는 치앙마이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비주얼아트 석사과정을 마쳤다. 역사 위에 떠오른 한 소녀 최근 그의 이름을 다시 국제무대에 올린 작품은 ‘독립운동: 겹쳐진 시선(The Independence Movement: Layered Gazes)’이다. 이 연작은 프랑스 파리의 국제사진상 PX3(Prix de la Photographie, Paris) 2025에서 전문작가 파인아트 분야 1위에 올라 ‘Fine Art Photographer of the Year’로 선정됐으며, 세부 부문인 Fine Art/Other에서도 금상을 받았다. 사진 속에는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 이화학당 교복 차림의 소녀가 등장한다.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특정 인물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함께 상징하는 존재다. 소녀는 탑골공원과 서대문형무소, 유관순 열사 생가, 병천오일장, 천도교 중앙대교당, 옛 태화관 터 같은 역사적 장소의 지면에서 살짝 떠오른 채 어딘가를 응시한다. 이 ‘부유’가 작품의 핵심 장치다. 인물이 땅에 발을 딛지 않은 모습은 과거가 이미 끝났다는 안도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기억 사이의 거리를 드러낸다. 익숙한 사적지는 낯선 공간으로 바뀌고, 기념비 뒤에 가려졌던 사람들의 시간이 오늘의 풍경 위로 다시 떠오른다. 람빵에 마련한 새로운 작업 거점 이 작품을 구상하고 정리한 장소가 람빵이다. 작가가 남긴 작업 노트의 끝에는 ‘2025년 5월, 람빵에서’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국제적인 수상 결과는 파리에서 발표됐지만, 그 시선을 벼린 시간은 북부 도시의 조용한 작업실에서 흘렀다. 권 작가는 근래 람빵에 새 스튜디오를 꾸리고 촬영 설비도 갖췄다. 현재 확인되는 성격은 일반 관람객을 위한 상설 갤러리라기보다 작품 제작과 인물 촬영, 소규모 조명 수업과 워크숍을 함께 진행하는 개인 작업 거점에 가깝다. 사진 조명과 포토샵·라이트룸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쓰고 교육 콘텐츠를 만들어 온 그에게 이곳은 촬영 현장이면서 연구실이고, 후배 사진가들과 경험을 나누는 교실이기도 하다.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이 스튜디오가 한 사람의 완성된 이력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인 작업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권 작가는 ‘독립운동: 겹쳐진 시선’을 국내 사적지에 한정하지 않고 해외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까지 넓혀가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조미아를 10년에 걸쳐 기록했던 것처럼, 이번 연작 역시 긴 호흡의 프로젝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 북부의 느린 도시에서 다시 빛을 세우고 한 장의 사진을 고르는 권학봉 작가. 그의 다음 작품이 우리 앞에 어떤 질문을 가져올지, 이제 차분히 지켜볼 일이다. 글 사진 | 김종민 편집국장

패션이 된 부적

2026/08/10 16:52:24

패션이 된 부적 방콕 아뮬렛 시장의 새로운 바람 탑 속 봉안물에서 현대 주얼리까지… 작은 성물에 담긴 태국인의 믿음과 욕망 방콕 왕궁 뒤편, 타프라짠(Tha Phra Chan)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진열대에는 손톱만 한 불상과 메달, 금속관 모양의 부적이 빼곡하고, 손님들은 돋보기로 표면의 균열과 문양을 살핀다. 상인과 수집가 사이에는 어느 사원에서 나왔는지, 누가 만들고 축복했는지, 어떤 사연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를 묻는 대화가 오간다. 태국인에게 ‘아뮬렛(Amulet)’은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다. 무에타이 선수가 링에 오를 때 몸에 두르는 성물에서부터 군인과 경찰이 목에 거는 불상, 상점 주인이 계산대 곁에 모시는 낭꽉(Nang Kwak)에 이르기까지, 아뮬렛은 신앙과 불안, 소망이 응축된 일상의 물건이다. 최근 이 오래된 시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오래될수록 귀하게 여겨졌던 성물을 금과 은, 진주와 보석, 현대적인 체인에 결합해 젊은 세대의 주얼리로 다시 내놓는 움직임이다. 그 중심에 방콕의 주얼리 브랜드 ‘콩(Khong·ฃอง)’과 설립자 쏘피 슈머스-로저스(Sophie Schuemers-Rogers)가 있다. 처음부터 목에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태국인이 목에 거는 불교 아뮬렛은 ‘프라 크르엉(Phra Khrueang)’이라 부른다. 그 프리는 ‘프라 핌(Phra Phim)’이라는 작은 불교 조상판에서 찾을 수 있다. 프라 핌은 젖은 점토를 틀에 눌러 찍어낸 작은 불상이나 불교 도상이다. 태국에서 발견된 몬·드바라바티 시대의 7∼9세기 테라코타 조상판에서도 이러한 형태가 확인된다. 크기가 작고 틀을 이용해 여러 점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과 도상을 넓은 지역으로 전하는 데 적합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개인이 목에 걸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니었다. 많은 프라 핌은 공덕을 쌓고 불법이 오래 이어지기를 기원하며 수천, 수만 점씩 제작돼 불탑과 동굴에 봉안됐다. 개인의 호신물이라기보다 불교 공동체가 미래 세대에 남긴 ‘공덕의 저장고’였던 셈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래된 쩨디(Chedi)가 무너지거나 보수되는 과정에서 그 안에 봉안됐던 성물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는 수집 대상이 됐고, 일부는 사람의 몸에 지니는 보호물로 바뀌었다. 탑 안에서 불법을 지키던 작은 불상이 이제는 누군가의 가슴 위에서 그를 지키게 된 것이다. 재료도 점토에만 머물지 않았다. 석회와 꽃가루, 약초, 향, 금속, 나무 등이 사용됐고, 제작 전후에는 독경과 의식을 통해 성물의 힘을 깨운다고 믿는 ‘쁠룩섹(Pluk Sek)’ 의식이 행해졌다. 태국 민속학에서 쁠룩섹은 단순한 축복이라기보다 물건에 잠재된 영적 힘을 일깨우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아뮬렛은 ‘사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것’ 태국 아뮬렛 시장에는 흥미로운 언어 습관이 있다. 불상이나 성물을 거래할 때 ‘산다’는 뜻의 ‘쓰(ซื้อ)’보다 ‘빌린다’는 뜻의 ‘차오(เช่า)’를 사용한다. 아뮬렛을 구했다는 말도 흔히 ‘차오 프라(เช่าพระ)’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돈이 오가니 경제적으로는 매매가 맞다. 그런데도 ‘빌린다’고 말하는 데에는 성물을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일반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담겨 있다. 영원히 내 것이 되는 물건이 아니라 일정 기간 그 공덕과 보호를 맡아 모신다는 뜻이다. 가격도 재료값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어느 사원에서 나왔는지, 누가 제작하고 축복했는지, 어느 시기에 어떤 틀로 찍었는지, 보존 상태와 소장 경로가 어떠한지가 함께 작용한다. 같은 점토와 금속으로 만들어졌더라도 ‘누가, 언제, 어디에서 만들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다. 위조품의 역사도 짧지 않다. 1960년대 태국 아뮬렛 연구에도 오래된 불탑에서 발견된 성물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면서 가짜가 등장했고, 진품과 위조품을 구별하는 일이 하나의 전문 기술이 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금도 타프라짠에서 돋보기를 든 감정가들이 성물의 표면과 재질을 들여다보는 이유다. 최고의 아뮬렛 다섯 점은 커피숍에서 태어났다 태국 아뮬렛 수집가들이 최고로 꼽는 조합이 ‘프라 벤짜파키(Phra Benjaphakhi)’다. 프라솜뎃 왓라캉, 프라낭파야, 프라롯, 프라쑴꼬, 프라퐁수판 등 다섯 계열의 유명 아뮬렛을 한 세트로 부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수백 년 전부터 정해져 내려온 종교적 규범처럼 보이는 이 조합의 탄생 과정은 의외로 현대적이다. 태국 수집가 사회에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1947년 무렵 방콕 민사법원 인근에는 아뮬렛 애호가들이 즐겨 찾던 커피숍이 있었다. 주인의 이름을 따 ‘바 마하판(Bar Maha Phan)’이라 불린 곳이다. ‘뜨리얌파와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유명 아뮬렛 연구가와 군인 출신 수집가들은 이곳에 모여 “목걸이에 어떤 성물을 함께 걸어야 가장 품격 있고 균형이 좋을까”를 논의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프라솜뎃을 가운데 두고 프라낭파야와 프라롯을 양옆에 배치한 세 점의 ‘뜨라이파키’ 구성이었다. 그러나 크기와 모양의 균형이 맞지 않자 프라쑴꼬와 프라퐁수판을 추가했다. 그렇게 다섯 점이 한 줄에 조화를 이루는 벤짜파키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영험함과 희소성뿐 아니라 크기와 형태, 목걸이에 걸었을 때의 좌우 균형도 선정 기준이었다는 사실이다. 태국 최고의 아뮬렛 조합에도 이미 ‘디자인의 눈’이 개입돼 있었던 셈이다. 다만 이 이야기는 고고학적으로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태국 수집가 사회가 기록하고 전해온 시장의 야사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기에 더욱 인간적이고 흥미롭다. 오늘날 거액에 거래되는 권위 있는 조합의 출발점이 사원이 아니라 수집가들이 모이던 작은 커피숍이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금녀의 시장’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권위 구조 태국의 아뮬렛 세계는 흔히 남성들의 시장으로 불린다. 승려와 감정가, 유명 수집가와 딜러를 중심으로 형성된 권위 구조가 오랫동안 남성 중심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여성이 아뮬렛 문화에서 배제됐던 것은 아니다. 여성들도 오랫동안 성물을 모시고 거래해 왔다. 1960년대 민속 기록에는 손짓으로 손님과 재물을 부른다고 믿는 낭꽉이 여성 상인들 사이에서 특히 널리 모셔졌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따라서 쏘피와 콩의 의미를 단순히 ‘금녀의 벽을 깼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보다 남성 감정가들이 진위와 계보를 결정해 온 시장에 여성 디자이너가 들어가 성물의 미적 가치와 착용 방식을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오래된 믿음에 새 옷을 입힌 ‘콩’ 쏘피는 방콕에서 보석학자의 딸로 성장했다. 이후 스위스에서 생활하며 진주를 중심으로 한 주얼리 브랜드 파차리(Pacharee)를 설립했고, 수년간 생산팀과 세공 기술을 축적했다. 2025년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창작의 방향을 잃었던 그는 친구들과 방콕 강변의 한 사원을 찾았다. 사원 앞 불상 가판대에서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불상만이 아니었다. 형광색 승복과 기하학적인 형태, 금속 체인과 작은 성물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독특한 조형미였다. 그날의 경험은 놀라운 속도로 브랜드가 됐다. 이름과 로고를 정하고 첫 디자인을 완성해 방콕에 선보이기까지 불과 2주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속도는 하루아침의 우연이 아니었다. 파차리를 운영하며 쌓은 세공 경험과 숙련된 생산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쏘피는 콩의 방향을 설명하면서 ‘백마술(White Magic)’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백마술과 흑마술은 태국 종교계를 공식적으로 나누는 기준이 아니다. 착용자에게 두려움이나 타인에 대한 지배가 아닌 자신감과 보호받는 느낌, 착용의 즐거움을 주는 물건을 만들겠다는 브랜드의 선언에 가깝다. 축복 의식이 필요한 작업은 신뢰할 만한 사원과 협력해 절차를 따르고, 축복받은 성물과 순수하게 상징과 디자인으로 제작된 제품은 구분한다. 불상뿐 아니라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 가네샤, 나가, 살리카, 호랑이, 낭꽉과 태국 전통 얀트라 문양까지 다루는 것도 특징이다. 가톨릭 신자인 쏘피에게 믿음의 물건은 한 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는 콩을 특정 종교의 성물 브랜드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신앙을 주얼리라는 언어로 연결하는 ‘믿음의 오브제’ 브랜드로 키우고 싶어 한다. 치아 사이에 넣었던 ‘황금 혀’ 쌀리카 콩의 컬렉션에 등장하는 쌀리카(Sarika)에는 재미있는 민간신앙이 전해진다. 쌀리카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구관조 계열의 새를 뜻한다. 태국어에는 말을 잘하고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을 ‘쌀리카 린텅(Salika Lin Thong)’, 즉 ‘황금 혀를 가진 쌀리카’라고 부르는 표현도 있다. 태국 민속학자 프라야 아누만 라차톤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에는 아주 작은 쌀리카 따끄룻을 치아 사이에 넣으면 목소리가 부드러워지고 상대의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도 했다. 치아 사이에 넣기 불편할 경우 얇은 판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실제 효능이 검증된 이야기는 아니다. 말과 소리에도 힘이 깃든다고 여겼던 옛 민간신앙의 한 장면이다. 콩이 선보인 쌀리카 하트 펜던트는 이 오래된 ‘말의 부적’을 현대 주얼리로 번역한 작품이다. 한때 치아 사이에 감춰졌던 작은 부적이 이제는 보석을 두른 채 가슴 위에 드러나는 장신구가 됐다. 믿음이 사라졌다기보다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남의 역사를 잠시 맡는 비스포크 작업 콩의 작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객이 이미 소장하고 있는 아뮬렛을 새로운 주얼리로 세팅하는 비스포크 서비스다. 오래된 성물에는 가격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억이 담겨 있다. 부모에게 물려받았거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사원에서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콩은 이러한 물건이 공방에 불필요하게 오래 머물지 않도록 먼저 치수만 정확하게 측정한 뒤 고객에게 돌려준다. 세팅 틀이 완성됐을 때만 다시 성물을 가져오게 해 결합한다. 디자이너는 성물의 주인이 되지 않는다. 잠시 다른 사람의 역사와 믿음을 맡아 다음 세대가 착용할 수 있는 형태로 연결할 뿐이다. 태국인이 아뮬렛을 ‘산다’고 하지 않고 ‘빌린다’고 말해온 오래된 관념과도 묘하게 맞닿아 있다. 신앙이 패션이 된 것인가 아뮬렛의 상업화를 둘러싼 논쟁은 새롭지 않다. 믿음을 가격표가 붙은 상품으로 만드는 것 아니냐는 비판은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태국에서 성물의 제작과 유통은 오래전부터 사원 보수와 학교 운영, 지역 축제, 장인과 소상공인의 생계와 연결돼 왔다. 아뮬렛 시장을 단순히 불교의 타락이나 미신 산업으로만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물론 전통 사원의 성물과 영리를 목적으로 한 주얼리 브랜드의 제품을 똑같이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이 출처와 제작 과정, 축복 여부를 투명하게 밝히고 종교적 상징을 이국적인 장식으로만 소비하지 않는 태도다. 콩이 만든 것은 타프라짠을 대신할 새로운 시장이 아니다. 기존 시장으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입구에 가깝다. 전통 시장이 연대와 출처, 승려의 명성, 희소성으로 가치를 정해 왔다면 콩은 여기에 장인 정신과 디자인, 착용자의 사연을 더한다. 쏘피는 100년 뒤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브랜드의 명성을 말하지 않았다. 그동안 어떤 성물도 착용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콩의 작품이 생애 첫 성물이었으면 한다고 답했다. 탑 속에 봉안됐던 작은 불상이 목걸이가 되고, 방콕의 커피숍에서 논의된 다섯 성물이 최고의 조합으로 자리 잡았듯 태국의 아뮬렛은 시대마다 새로운 그릇을 찾아왔다. 이제 그 그릇이 금과 은, 진주와 보석으로 바뀌고 있다. 이를 신앙의 가벼움으로 볼 것인지, 오래된 믿음의 새로운 생명력으로 볼 것인지는 결국 착용자에게 달려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태국의 아뮬렛은 박물관이나 골동품 시장에 멈춰 있는 과거가 아니다. 지금도 방콕의 거리에서 형태를 바꾸며 살아 움직이는, 현재진행형의 문화다. ❖ 콩 관련 내용은 2026년 7월 24일 자 타임아웃 방콕의 쏘피 슈머스-로저스 인터뷰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역사와 민속 부분은 쭐라롱꼰대학교 연구, 시암학회 자료,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품 해설 및 태국 아뮬렛 감정가협회 자료 등을 참고했다. 성물의 효능과 관련된 내용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태국의 전승과 민간신앙으로 구분해 서술했다. 글 | 김종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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