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방콕으로의 타임슬립
왕궁 곁에 숨은 세 갈래 골목, 쌈프랭을 걷다
방콕에는 너무 유명해져 버린 얼굴들이 있다. 왕궁, 왓포, 카오산로드, 아이콘시암, 루프탑 바, 대형 쇼핑몰. 처음 방콕을 찾은 여행자라면 당연히 그곳으로 향한다. 화려하고, 편리하고, 사진도 잘 나온다. 그런데 방콕이라는 도시는 늘 그런 식으로만 자신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조금만 옆으로 비켜서면 전혀 다른 방콕이 나타난다. 네온사인과 음악 소리가 멀어지고, 오토바이 소리마저 한 박자 늦게 들리는 골목. 낡은 셔터문, 바랜 간판, 좁은 보도 위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 오래된 집 앞을 지키는 고양이 한 마리. 그 풍경 속에 들어서면 이상하게도 시간이 느려진다.
카오산로드와 왕궁 사이, 방콕 올드타운 한복판에 그런 동네가 있다. 이름은 쌈프랭(Sam Phraeng). 방콕을 여러 번 다녀간 사람도, 방콕에 꽤 오래 산 사람도 의외로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그러나 한 번 제대로 걸어보면 알게 된다. 이곳은 낡아서 남은 동네가 아니라, 시간이 쌓여 살아남은 동네라는 것을.
세 왕자의 거리, 쌈프랭
쌈프랭이라는 이름에는 방콕 구도심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태국어로 ‘쌈’은 숫자 3을 뜻한다. 쌈프랭은 말 그대로 세 개의 ‘프랭’, 즉 세 갈래 거리와 골목을 가리킨다. 프랭 푸톤(Phraeng Phuthon), 프랭 나라(Phraeng Nara), 프랭 싸파쌋(Phraeng Sapphasat). 라따나코신 시대 왕가와 관련된 이 세 구역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쌈프랭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이 일대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19세기 이후 방콕이 근대 도시로 변해가던 시절, 이곳에는 유럽풍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상점과 주거 건물이 들어섰다. 왕궁과 관청, 상업지구가 가까웠던 만큼 한때는 방콕에서도 꽤 번화한 구역이었다. 지금도 골목을 걷다 보면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반듯한 창틀, 오래된 벽면, 낮은 처마, 손때 묻은 문패 같은 것들이다.
쌈프랭의 매력은 요란하지 않다. 새로 만든 레트로가 아니라, 세월이 저절로 만든 레트로다. 일부러 낡게 꾸민 카페 거리와는 다르다. 이곳의 낡음에는 생활이 있고, 장사가 있고, 동네 사람들의 하루가 있다. 그래서 사진으로만 보면 심심해 보일 수 있지만, 직접 걸어보면 오래된 방콕의 결이 손에 잡힌다.
카오산 옆에 이런 방콕이 있었다
쌈프랭이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위치 때문이다. 이곳은 방콕의 대표 관광지와 멀리 떨어진 외곽 마을이 아니다. 카오산로드, 왕궁, 왓포, 방콕 시청 일대와 가까운 구도심 한가운데 있다. 그런데도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카오산로드가 밤의 방콕이라면, 쌈프랭은 낮의 방콕이다. 카오산이 외국 여행자의 에너지로 뜨겁다면, 쌈프랭은 동네 사람들의 생활 리듬으로 조용히 움직인다. 길 하나,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시의 표정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방콕답다.
방콕은 늘 이렇게 양면적이다. 최신 쇼핑몰과 100년 된 시장이 공존하고, 고급 호텔 뒤편에 오래된 국수집이 숨어 있으며, 관광객으로 붐비는 길 옆에 현지인만 아는 골목이 이어진다. 쌈쁘랭은 그 방콕의 양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동네 중 하나다.
개발되지 않아서 남은 것이 아니라, 지켜져서 남은 것
방콕의 많은 지역은 빠르게 변했다. 오래된 목조 주택은 콘도미니엄으로 바뀌고, 로컬 상점은 프랜차이즈 매장으로 교체되고, 골목 풍경은 어느 순간 비슷비슷해진다. 그러나 쌈쁘랭은 비교적 느리게 변했다. 왕궁과 구도심이라는 지리적 특성, 오래된 건축물과 생활권의 연속성, 그리고 이 지역을 지켜온 주민들의 시간이 겹치며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물론 쌈프랭도 영원히 그대로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방콕의 젊은 세대는 이미 올드타운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있다. 딸랏너이, 쏭왓, 방람푸가 그랬듯이, 오래된 동네는 어느 순간 새로운 문화지대로 읽히기 시작한다. 오래된 창고가 갤러리가 되고, 허름한 상점가에 작은 카페가 생기고, 낡은 골목은 산책 코스로 다시 불린다.
쌈프랭도 그 길목에 서 있다. 아직은 송왓처럼 크게 알려지지 않았고,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도 아니다. 바로 그래서 지금 가볼 만하다. 아직 동네의 호흡이 남아 있을 때, 아직 간판과 셔터와 시장의 냄새가 그대로 있을 때, 쌈프랭은 가장 쌈프랭답다.
세월을 먹는 골목, 쌈프랭 미식 산책
쌈프랭 산책의 즐거움은 건물만 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동네를 제대로 느끼려면 반드시 먹어봐야 한다. 오래된 방콕의 맛은 화려한 플레이팅보다 깊은 국물, 기름 냄새, 달콤한 차 한 잔, 손으로 만든 아이스크림 안에 남아 있다.
치갓차 카페(Chi Kat Cha Cafe)
쌈프랭의 분위기를 가장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아날로그 박물관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된 장난감, 포스터, 소품들이 공간을 채운다. 요즘 유행을 따라 만든 빈티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어린 시절이 그대로 쌓인 듯한 느낌이다.
이곳에서는 핑크 밀크, 태국식 밀크티 같은 익숙한 음료가 잘 어울린다. 특별히 대단한 메뉴를 기대하기보다, 천천히 앉아 주변을 둘러보는 시간이 더 좋다. 방콕의 오래된 카페 문화가 꼭 고급 커피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소다.
세리(Seri)
쌈프랭에서 조금 더 깊은 맛을 찾는다면 세리를 들러볼 만하다. 태국 왕실 요리의 흐름을 보다 편안한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음식은 자극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 재료의 맛과 조리의 균형을 살리는 쪽에 가깝다.
한국인 입맛에도 비교적 편하게 다가오는 메뉴로는 마늘 새우튀김을 꼽을 수 있다. 바삭하게 튀긴 새우에 마늘 향이 더해져 밥과도 잘 어울리고, 가볍게 나눠 먹기에도 좋다. 태국 음식이 늘 맵고 강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조금 내려놓게 만드는 맛이다.
타이탐 까오라우 싸멍무(Thai Tham)
쌈프랭 미식 산책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길 만한 곳이다. 대표 메뉴는 돼지 뇌 수프다. 이름만 들으면 망설여질 수 있다. 그러나 방콕 로컬 음식의 세계를 조금 더 넓게 경험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하다.
맑은 국물에 부드럽게 익은 돼지 뇌가 들어간 이 음식은 식감이 독특하다. 진하고 고소하며, 입안에서 부드럽게 풀어진다. 익숙한 맛은 아니지만, 오래된 방콕 식문화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보여주는 메뉴다. 여행은 때로 이런 낯섦을 만나는 일이다.
나타폰 아이스크림(Nuttaporn Ice Cream)
쌈프랭 산책의 마무리로는 나타폰 아이스크림이 좋다. 전통 방식의 코코넛 밀크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지나치게 달지 않고, 코코넛 특유의 고소함과 산뜻함이 살아 있다.
방콕의 더운 오후, 골목을 한참 걷고 난 뒤 먹는 코코넛 아이스크림은 그 자체로 훌륭한 디저트다. 화려한 카페 디저트는 아니지만, 방콕 올드타운에는 이런 단순한 맛이 더 잘 어울린다.
아침의 방콕을 보고 싶다면, 딸랏 뜨록 머 시장(Trok More Morning Market)
쌈프랭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아침에 가보는 것도 좋다. 인근의 뜨록 머 시장(Trok Mor Market)은 방콕의 오래된 아침 시장 분위기를 간직한 곳이다. 새벽부터 정오 무렵까지 활기를 띠는 시장으로, 관광객을 위한 연출된 공간이라기보다 현지인의 하루가 시작되는 생활 시장에 가깝다.
갓 튀긴 간식 냄새, 채소와 생선을 고르는 사람들, 빠르게 오가는 상인들의 목소리, 그리고 아침 탁발을 나선 승려들의 모습까지. 이곳에서는 방콕의 아침이 어떤 속도로 열리는지 볼 수 있다. 대형 호텔 조식 뷔페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장면이다.
뜨록 머 시장을 먼저 둘러본 뒤 쌈프랭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면 이 동네의 질감이 훨씬 선명해진다. 시장, 골목, 오래된 상점, 작은 식당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지금 쌈프랭을 걸어야 하는 이유
방콕에는 늘 새롭게 뜨는 동네가 있다. 몇 년 전에는 딸랏너이였고, 최근에는 쏭왓이 그랬다. 오래된 창고와 골목, 중국계 상점가와 예술 공간이 만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쌈프랭도 언젠가는 그런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릴지 모른다. 하지만 쌈프랭의 현재는 아직 조용하다. 그래서 더 좋다. 사진을 찍기 위해 만들어진 배경이 아니라, 생활이 먼저 있고 여행자가 그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동네다. 그 점이 쌈쁘랭을 방콕의 숨은 관광 명소로 자라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왕궁을 보고, 왓포를 보고, 카오산로드를 지나쳤다면 그다음에는 쌈프랭으로 걸어가 보자. 특별한 입장권도, 정해진 관람 동선도 필요 없다. 다만 서두르지 않는 걸음이면 충분하다. 골목을 따라 걷고, 오래된 간판을 읽고, 국물 한 그릇을 먹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들고 다시 천천히 걸으면 된다.
방콕을 오래 살수록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이 도시는 유명한 곳보다 유명해지기 전의 장소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쌈프랭은 그런 방콕의 한 장면이다. 왕궁 곁에 숨어 있었지만, 이제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있는 오래된 동네. 방콕의 과거가 박제처럼 남은 곳이 아니라, 오늘도 조용히 숨 쉬고 있는 골목이다.
이번 주말, 익숙한 방콕을 잠시 비켜나 보자. 카오산의 소음에서 몇 걸음만 벗어나면, 1980년대 어느 오후처럼 느리게 흐르는 방콕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이 바로 쌈프랭이다.
COVER NOTE
쌈프랭 산책은 오전 시간이 좋다. 뜨록 머(Trok Mor) 시장을 먼저 둘러보고, 쌈프랭 골목으로 들어가 로컬 식당과 카페를 차례로 방문하는 동선이 자연스럽다. 다만 올드타운의 오래된 식당들은 영업시간이 유동적인 경우가 있으므로 방문 전 지도 앱이나 전화 확인을 권한다.
“방콕을 오래 살다 보면, 이 도시의 매력은 늘 유명한 장소 바깥에서 더 선명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쌈프랭은 그런 곳이다. 왕궁 곁에 있으면서도 왕궁의 그림자에 가려졌고, 카오산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카오산의 소음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온 골목이다.
오래된 건물과 로컬 식당, 아침 시장과 작은 카페가 이어지는 이 동네는 방콕이 아직 관광상품이 되기 전의 얼굴을 간직하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도시 속에서 이런 장소가 남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에 가깝다. 그리고 그 행운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 주말, 익숙한 방콕을 잠시 비켜나 보자. 카오산의 소음에서 몇 걸음만 벗어나면, 1980년대 어느 오후처럼 느리게 흐르는 방콕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이 바로 쌈프랭이다.”
글과 사진 | 김종민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