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불의 도시, 람빵 세라믹 로드

2026/09/08 11:18:53

흙과 불의 도시, 람빵 세라믹 로드 람빵을 ‘태국 도자기의 수도’라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째홈(Chae Hom) 일대에서 발견된 양질의 카올린과 중국계 도공의 기술, 지역 공장과 장인들의 축적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다만 ‘태국 도자기 산업의 70% 이상을 책임진다’거나 ‘태국에서 순도가 가장 높은 백토가 가장 많이 매장돼 있다’는 수치는 현재의 공신력 있는 통계로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쨋든 현재 태국에서 람빵이 태국을 대표하는 세라믹 생산지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➊ 다나바디 세라믹 박물관 : 닭그릇의 계보를 정확히 만나는 곳 Dhanavadee Ceramic Museum 태국 닭그릇의 람빵 역사는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계 이주 도공 심유 새친(Simyu Sae-chin)은 째홈 지역에서 카올린을 찾아낸 뒤 동료들과 함께 람빵 최초의 닭그릇 공장으로 알려진 루암사막키(Ruamsamakkee) 공장을 세웠다. 오늘의 다나바디는 그 가족 계보를 잇는 사업체이자 박물관이다. 박물관에서는 람빵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소개되는 용가마(Dragon Kiln), 성형과 유약, 소성, 장인의 닭 문양 핸드페인팅을 차례로 볼 수 있다. 닭·모란·바나나나무가 어우러진 그림은 중국 남부 도자 전통에서 왔지만, 람빵의 흙과 장인의 손을 거치며 태국인의 일상 그릇이 됐다. 직접 그릇을 꾸미는 워크숍도 있어 아이와 함께 가기 좋다. *여기서 잠깐 카올린은 어떤 흙일까? 카올린(Kaolin)은 우리말로 흔히 ‘고령토’라고 부르는 흰색 점토다. 중국 장시성 징더전 인근의 가오링산(高嶺山)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주성분은 카올리나이트(Kaolinite)라는 점토 광물이다. 철분과 불순물 함량이 비교적 적어 구웠을 때 밝고 깨끗한 색을 내고, 높은 온도에서도 형태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카올린은 접시와 찻잔 같은 생활도자기는 물론 포슬린, 위생도기, 타일 제작에 널리 사용된다. 다만 흔히 말하는 ‘백토’가 모두 카올린인 것은 아니다. 백토는 색이 흰 점토를 폭넓게 부르는 표현이고, 카올린은 그 가운데 광물 성분과 성질이 구분되는 도자기 원료다. 람빵에서는 째홈(Chae Hom) 일대에서 카올린이 발견되면서 도자기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중국계 도공들의 기술과 지역의 흙, 장작가마 문화가 결합해 오늘날 람빵을 상징하는 닭그릇과 생활도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카올린은 단순히 흰 흙이 아니라, 람빵의 산업과 생활문화를 함께 빚어낸 도시의 중요한 자원인 셈이다. 운영 : 매일 08:30~17:00. 가이드 투어는 오전 08:30·09:00·10:00·11:00, 오후 13:00·14:00·15:00·16:00. 입장료 : 태국인 성인 60바트, 학생 30바트, 외국인 100바트. 60세 이상·13세 미만·장애인·성직자는 무료. 워크숍 : 15~30분, 품목에 따라 50~390바트. 완성품 배송 가능. ➋ 인드라 아울렛 : 공장도 가격으로 만나는 람빵의 생활도자기 전문매장 Indra Ceramic Outlet 인드라 아울렛(Indra Outlet)은 한두 개 브랜드의 쇼룸이 아니라, 인드라의 수출용 스톤웨어와 람빵 내 30여 개 다른 공장의 제품을 함께 볼 수 있는 대형 판매장이다. 손으로 그린 식기, 머그와 티포트, 장식품, 업소용 식기까지 선택 폭이 넓다. 단, 매년 그때그때마다 할인 코너와 행사는 가격과 품종이 달라진다. 본점 : 382 Moo 1, Vajiravudh Damnoen Road Km 1, Phrabat, Mueang Lampang 운영 : 매일 09:00~17:30. 공식 사이트에는 딘도이(Din Doi) 카페가 함께 안내돼 있다. 3. 어스 앤 파이어 : 전통 산업의 다음 장 왓 프라탓 람빵 루앙에서 약 1km 떨어진 어스 앤 파이어(Earth & Fire Ceramics)는 람빵 도자기의 현재를 보여준다. 단정한 형태와 자연스러운 유약, 일본 미감을 연상시키는 테이블웨어·조명·생활 오브제를 만든다. 공장형 기념품 매장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같은 공간의 세리 아트 갤러리(Seri Art Gallery)에서는 도자와 현대미술 전시·행사가 열리고, 카페와 워크숍도 운영된다. ‘숲속 스페셜티 드립 카페’ 같은 수식보다 공방, 갤러리, 카페가 한 생활문화 공간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 이곳의 실제 매력이다. 주소 : 371 Moo 11, Lampang Luang, Ko Kha District 운영 : 최근 공식·현지 안내 기준 매일 08:00~17:00. 전시·워크숍은 사전 확인 권장.

마차의 방울 소리와 백토의 숨결이 머무는 곳 태국 람빵(Lampang) 탐방

2026/09/07 10:51:22

마차의 방울 소리와 백토의 숨결이 머무는 곳 태국 람빵(Lampang) 탐방 란나의 오래된 사원에서 온천 숲과 닭그릇의 공방까지 천천히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북부의 도시 치앙마이에서 기차로 두 시간 남짓. 쿤딴 고개를 넘어 람빵역에 내리면 도시의 속도가 한 박자 느려진다. 왕강(Wang River)을 따라 오래된 상점과 사원이 이어지고, 자동차 사이로 마차가 지나간다. 골목의 도자기 가게에는 태국의 국수집에서 한 번쯤 보았을 수탉 그릇이 수북이 쌓여 있다. 화려한 볼거리보다 시간이 남긴 결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도시, 람빵이다. 람빵을 흔히 ‘북부 제2의 도시’라고 소개하지만, 도시 규모를 무엇으로 재느냐에 따라 순위가 달라지는 만큼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람빵의 가치는 서열에 있지 않다. 옛 이름 껠랑나컨(Khelang Nakhon)의 기억, 란나 불교문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티크 목재 산업과 교역이 남긴 다문화 건축, 1916년 철도 개통과 함께 자리 잡은 마차 문화가 지금도 한 도시 안에서 겹쳐 보인다는 데 있다. 이번 특별기획은 사원과 온천, 세 곳의 식당, 그리고 람빵의 도자기 현장을 잇는다. 빠르게 ‘인증 사진’을 모으는 일정이 아니라, 사람과 공간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2박 3일 여정이다. 제1부 마차가 느리게 통과하는 도시 람빵의 구시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왕강을 보아야 한다. 깟껑따(Kad Kong Ta)는 강을 끼고 성장한 옛 상업지구다. 라마 5세 시기 북부 교역이 활기를 띠자 중국계 상인과 버마계와 영국계 사업가들이 드나들었고, 목조 상가와 유럽풍 건축양식에 란나식 지붕이 한 거리에 나란히 들어섰다. 오늘의 람빵이 단순한 ‘옛 란나 도시’가 아니라 여러 문화가 교차한 생활도시였음을 보여주는 거리다. 마차는 이 도시의 시간을 가장 잘 들려주는 상징이다. 람빵역이 문을 연 1916년 무렵 등장해 역과 시장, 관공서를 잇던 교통수단은 자동차 시대에도 관광과 지역 정체성의 일부로 남았다. 최근 현장 요금은 15~20분 짧은 코스가 마차 한 대당 약 300바트, 긴 구시가 코스가 약 400~500바트 선으로 안내되는 경우가 많다. 주말의 람빵 깟껑따 워킹스트리트는 토·일요일 오후 5시 무렵부터 밤 10시까지 열린다. 금요일에는 왕느아 거리의 문화 워킹스트리트가 오후 4시부터 9시까지 이어진다. 시장이 없는 평일에도 건축과 강변 산책 자체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제2부 란나의 숨결과 태고의 자연 1. 왓 프라탓 람빵 루앙: 성벽 안에 남은 란나 건축의 정수 람빵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약 18km, 꺼카(Ko Kha)의 낮은 언덕 위에 왓 프라탓 람빵 루앙(Wat Phra That Lampang Luang)이 서 있다. 흙벽과 성문이 사원을 감싼 요새형 배치부터가 남다르다. 나가 난간을 따라 계단을 오르고 빠뚜 컹(Pratu Khong) 문을 통과하면, 목조 법당과 쩨디가 한 축 위에 놓인 고전적인 란나 공간이 열린다. 사원의 중심인 위한 루앙(Viharn Luang)은 불기 2019년, 서기로 1476년에 세워졌다. 외벽을 두르지 않고 목조 기둥으로 삼단 지붕을 받친 개방형 법당이다. 내부의 금박 칠기 장식과 오래된 목재, 지붕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장식보다 구조 자체를 먼저 보게 한다. 그 뒤에는 약 45m 높이의 프라탓 쩨디가 서 있다. 눈부신 금박 쩨디라기보다 세월을 머금은 동과 청동판 표면이 이 사원의 분위기에 더 가깝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거꾸로 맺히는 쩨디의 그림자’다. 작은 구멍으로 들어온 빛이 어두운 실내에 외부 풍경을 뒤집어 투영하는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다. 위한 프라풋과 허 프라풋타밧(Ho Phra Phutthabat)에서 관련 현상이 알려져 있는데, 대표 관람 공간인 호 프라풋타밧은 전통 관습에 따라 여성 출입이 제한된다. 따라서 여성들은 해당 건축물에 발을 들여놓으면 안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위치 : 271 Lampang Luang, Ko Kha District, Lampang 관람 : 통상 매일 07:30~17:00. 복장은 어깨와 무릎을 가리고 법당 입장 전 신발을 벗는다. 입장 : 무료·기부 방식으로 안내되는 자료가 많으나 최근 외국인 40바트 현장 안내 사례도 있다. 방문일 현장 고지를 확인한다. 2. 째손 국립공원 : 뜨거운 물과 차가운 계곡이 만나는 숲 람빵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70~75km 떨어진 므앙판(Mueang Pan)의 산자락에는 째손 국립공원(Chae Son National Park)이 있다. 바위 틈에서 70~80°C의 온천수가 솟고, 가까운 숲에서는 6단으로 이어지는 째손 폭포가 흐른다. 이른 아침이면 수증기가 숲 사이를 떠다녀 공원 전체가 거대한 노천탕처럼 보인다. 원천수는 몸을 담그기에는 지나치게 뜨겁다. 산책로 아래쪽의 족욕 공간이나 희석된 온천수를 쓰는 개인 온천실을 이용해야 한다. 온천 웅덩이에 달걀을 약 15분 담가 익히는 체험은 이곳의 오래된 재미다. 익힘 정도는 수온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므로 현장 안내를 따르는 것이 좋다. 폭포까지 보려면 미끄럼 방지 신발이 필요하다. 특히 우기에는 수량이 늘어 풍경은 좋아지지만, 낙석·급류나 정기적인 탐방로 폐쇄 가능성이 있다. 출발 전 국립공원 공지와 당일 기상 상태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6단의 폭포는 최종 6단 앞까지 등반이 가능하나 우기에는 많이 미끄러우니 슬리퍼 차림으로 쉽게 올라가지는 말자. 폭포를 따라 올라가는 장관은 그야말로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폭포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 역시 커다란 재미를 준다. 한때는 물고기 먹일 사료를 폭포 앞에서 판매했으나 지금은 물고기에게 먹이 주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폭포에 살고있는 물고기들은 포획이 금지되어 있으니 만지거나 잡으려 하지말고 그냥 관상만 하자. 폭포는 곳에따라 위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들어가볼 수 있다. 의외로 꽤 차가운 폭포수를 만져볼 수 있다. 하지만 음용은 하지말도록 하자. 운영 : 주요 시설은 통상 06:00~18:00. 식당·매점과 일부 서비스는 더 일찍 마칠 수 있다. 입장료 : 외국인 성인 200바트·어린이 100바트, 태국인 성인 40바트·어린이 20바트. 승용차 30바트. 온천욕 : 개인 온천실은 최근 자료 기준 1인 약 50바트. 현장 사정에 따라 대기하거나 운영이 달라질 수 있다. 글 사진 | 김종민 편집국장

1981 소울 앤 솔드

2026/08/25 12:14:47

낡은 것의 우아한 부활 ‘1981 소울 앤 솔드(1981 Soul & Sold)’ 13억 바트 들여 되살린 더 몰 람캄행 빈티지와 음악, 예술, 중고 거래를 한데 묶은 ‘뉴스탤지어’의 실험 방콕의 쇼핑몰은 늘 새 것을 앞세워 경쟁해 왔다. 더 높고, 더 크고, 더 화려한 건물이 생길 때마다 오래된 몰은 이름을 바꾸거나 조용히 사라졌다. 그런 방콕에서 낡은 건물의 흔적을 지우지 않은 채 다시 문을 연 공간이 있다. 람캄행 소이 15와 17 사이, 한때 이 지역의 생활 중심이었던 더 몰 람캄행 자리에 들어선 ‘1981 소울 앤 솔드(1981 Soul & Sold)’다. 더 몰 그룹은 이곳에 13억 바트 이상을 투입해 연면적 약 10만㎡, 5개 층 규모의 문화·상업 공간으로 손질했다. 1983년부터 람캄행의 풍경 한쪽을 지켜 온 옛 건물은 2026년 7월 2일, 빈티지 패션과 중고 거래, 음악, 미술, 타투, 음식, 공연을 한 지붕 아래 묶은 새 공간으로 공식 개장했다. 주차 가능 대수는 약 1,300대로 소개됐다. 그러나 이곳을 그저 ‘복고풍으로 꾸민 쇼핑몰’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1981 소울 앤 솔드가 내세우는 것은 물건보다 취향이고, 매장보다 사람이다. 대형 브랜드를 층마다 세우던 익숙한 백화점 문법에서 한발 물러나 수집가와 소규모 상인, 디자이너, 음악가와 창작자가 함께 판을 만드는 공간을 택했다. 전통적인 쇼핑몰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무대에 가깝다. 왜 하필 ‘1981’인가 이름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1981’은 더 몰 람캄행의 개점 연도가 아니다. 더 몰 그룹이 라차담리에 첫 점포를 열며 출발한 해가 1981년이고, 람캄행점은 그보다 뒤인 1983년 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프로젝트 측은 1981년을 아날로그 세계가 개인용 컴퓨터와 비디오, 휴대용 음악기기 등 새로운 기술과 만나기 시작한 전환기로 해석한다. 과거를 그대로 복제하는 대신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사용하는 ‘뉴스탤지어(Newstalgia)’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오래된 건물에 새 페인트만 입힌 것이 아니라, 더 몰 그룹 자신의 출발점을 지금의 소비문화와 연결한 셈이다. 공간 곳곳에서 이 생각이 드러난다. 기존 구조의 거친 콘크리트와 낡은 재료를 살리고, 클래식 자동차와 오래된 음향기기, 브라운관 TV를 전시물처럼 배치했다. 패션·액세서리, 음악·미디어, 아날로그 기술, 예술·공예·디자인, 수집품, 생활 서비스, 식음료, 커뮤니티 등 여덟 분야가 느슨하게 섞인다. 반듯하게 칸을 나눈 쇼핑몰보다는 여러 취향이 한 건물 안에서 부딪히는 거대한 시장에 가깝다. 브라운관이 다시 켜진 자리 눈길을 붙잡는 것은 아날로그 감성으로 꾸민 엘리베이터 ‘야날로그(YAANALOG)’와 그 주변 공간이다. 구형 TV와 빈티지 사운드 시스템을 탑처럼 쌓아 올린 설치물 앞에서는 라이브 음악과 각종 커뮤니티 행사가 열린다. 스마트폰의 얇고 매끈한 화면에 익숙한 세대에게 두툼한 브라운관은 오히려 낯설고 새로운 오브제가 됐다. 1981년은 미국 MTV가 방송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당시 첫 전파를 탄 뮤직비디오는 더 버글스(The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였다. 이곳의 TV 설치물을 두고 현지 문화 매체들이 ‘MTV 혁명에 대한 오마주’라고 표현한 것도 그래서이다. 다만 ‘야날로그’라는 공식 명칭은 기본적으로 아날로그풍 엘리베이터를 가리킨다. 브라운관 탑 전체의 고유명사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물건을 파는 가게보다 이야기를 만드는 공간 1층 ‘레트로 클럽’의 항통 바(Hang Thong Bar)는 영화 세트가 현실로 빠져나온 듯한 곳이다. 태국 영화 ‘몬락 낙팍(มนต์รักนักพากย์)’과 시리즈 ‘사투 2’ 등의 미술 작업에 참여한 판투앙 아트워크(พันธุ์ทางอาร์ตเวิร์ค) 팀이 공간을 만들었다. 옛 금은방을 연상시키는 장식과 태국식 복고 미학이 서구식 빈티지 바와는 다른 맛을 낸다. 같은 층의 1981 갤러리 라이브러리는 책을 조용히 꽂아 두는 도서관과 거리가 있다. 영상과 소리를 결합한 ‘소리 나는 문학 공간’을 표방하며, 책의 구입·판매·교환 뿐 아니라 커뮤니티 토크, 음악 치유, 예술 프로그램을 위한 장소로 기획됐다. 책을 매개로 사람들이 머물고 대화하도록 만든 일종의 현대식 살롱이다. 2층의 타투 브라더스×1981 스튜디오는 타투를 은밀한 하위문화로 감추지 않고 동시대 예술의 한 장르로 꺼내 놓는다. 태국 안팎의 타투이스트가 작업하며 전시와 아트워크의 주제를 매달 바꾸는 방식이다. 한편 랩 라이브 룸(LAB LIVE ROOM)은 온라인 판매자와 크리에이터가 바로 방송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춘 라이브 스트리밍 공간이다. 한쪽에서는 낡은 청바지와 LP를 고르고, 다른 쪽에서는 실시간 온라인 판매가 진행된다. 이 어색할 듯한 공존이 오히려 이곳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 4층에는 400~500명가량을 수용하는 1981 라이브 홀이 들어섰다. 음악 공연과 전시, 커뮤니티 행사를 한 건물 안에서 이어 가려는 장치다. 쇼핑을 마친 뒤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공연과 전시를 보러 온 사람이 자연스럽게 가게와 식당을 둘러보게 만드는 구조다. ‘헌 옷 시장’에서 ‘취향의 아카이브’로 태국의 중고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란야쁘라텟의 론끌루아 시장을 비롯해 짜뚜짝과 빠타위껀 같은 시장은 오래 전부터 헌옷과 중고품이 모이고 흩어지는 유통 거점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모든 중고품이 빈티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느 시대 물건인지, 상태와 희소성이 어떤지에 따라 가치가 갈린다. 싼값에 ‘구제’를 사는 시장과 맥락을 읽고 ‘아카이브’를 고르는 시장은 엄연히 다르다. 최근 태국의 변화는 바로 이 간격에서 나타난다. 오래된 밴드 티셔츠와 데님, 워크웨어, 군용품, 카메라와 음반이 단순한 헌 물건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수집품으로 거래된다. 판매자 역시 물건을 쌓아 놓는 데서 그치지 않고 출처와 연대, 스타일을 설명하는 큐레이터가 된다. 1981 소울 앤 솔드는 길거리와 주말시장, 온라인에서 자라난 이 문화를 대형 유통기업의 건물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이곳을 ‘태국 빈티지 왕국의 완성판’이라고 치켜세울 필요는 없다. 중고품 유통의 상당 부분이 어디에서 들어오는지에 대한 공식 통계는 제한적이며, 미국·일본·한국산 물량이 국경시장을 거쳐 태국 전역으로 공급된다는 설명도 품목과 유통 경로에 따라 달라진다. 더운 기후가 빈티지 소비를 키웠다는 주장 역시 흥미로운 관찰일 수는 있어도 시장 성장의 원인으로 단정할 근거는 부족하다. 일부러 ‘완성하지 않은’ 쇼핑몰 1981 소울 앤 솔드가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입점 방식을 고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운영사는 유명 빈티지 숍 같은 앵커 판매자뿐 아니라 특정 분야의 전문점, 수선·커스텀 서비스, 신진 창작자에게도 자리를 배분하고, 장기 임대와 매달 바뀌는 팝업을 함께 운영한다. ‘입점이 덜 끝난 몰’이라기보다 변화 자체를 운영 방식으로 삼은 셈이다. 물론 방문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거칠고 들쭉날쭉하게 느껴질 수 있다. 어떤 매장은 문을 열고, 어떤 공간은 다음 행사를 준비한다. 빈틈없이 완성된 백화점을 기대한다면 낯설 수 있다. 반대로 방콕의 소규모 창작자와 수집가들이 무엇에 열광하는지 보고 싶다면, 그 미완성의 움직임이야말로 가장 볼 만한 장면이다. 현재 프로젝트가 안내하는 기본 운영시간은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다. 다만 개별 매장과 바, 공연·행사 시간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방문 전 공식 소셜미디어를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 주소는 49 Ramkhamhaeng Road, Hua Mak, Bang Kapi이며 람캄행 소이 15와 17 사이에 있다. 1981 소울 앤 솔드의 성패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13억 바트의 투자가 ‘사진 잘 나오는 복고 공간’에 그칠지, 아니면 람캄행에 새로운 상권과 문화적 활력을 만들어 낼지는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새 건물을 올리는 일만이 도시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 자리에 있던 기억을 지우지 않고, 다음 세대가 사용할 언어로 다시 번역하는 일도 도시 재생이다. 낡은 것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되살아나지 않는다. 아직 쓸모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볼 때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람캄행의 오래된 몰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도 바로 그것이다. 글 사진 | 김종민 편집국장

방콕 외곽에서 만난 뜻밖의 시네마 천국 : 태국 영화박물관

2026/08/10 11:41:12

방콕 외곽에서 만난 뜻밖의 시네마 천국 태국 영화박물관 방콕에서 나콘파톰으로 향하는 길, 도심을 벗어나 차로 약 한 시간 남짓 달리다 보면 쌀라야(Salaya) 지역에 뜬금없이 거대한 테마파크 같은 공간이 나타난다. 바로 태국 영화박물관(Thai Film Archive)이다. 동선상 저녁 식사 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가벼운 마음으로 들르기 좋은 곳이지만, 막상 발을 들이면 생각보다 훨씬 방대하고 깊이 있는 태국 영화의 역사에 놀라게 된다. 바코드가 찍힌 레트로한 티켓을 들고 곳곳을 누비다 보면, 과거 뜨거웠던 태국인들의 영화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지금은 그 열기가 예전만 못한 것 같아 묘한 아쉬움도 남지만, 태국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교민이나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숨은 보석 같은 공간이다. 놀랍게도 이 모든 시설이 무료 관람이다. ◈ 작은 테마파크에 온 듯한 몰입감, '무앙 마야(Maya City)' 박물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는 곳은 야외 세트장인 무앙 마야(Maya City)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관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오픈 세트장처럼 꾸며져 있다.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 파리의 그랑 카페(세계 최초의 영화 상영장)부터 토머스 에디슨의 초기 스튜디오인 '블랙 마리아'까지, 세계 영화사의 중요한 이정표들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았다. ✽아날로그 감성의 끝판왕: 곳곳에 서 있는 태국인 큐레이터들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구경하다 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세기 초반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구석구석 사진 찍기 좋은 스폿이 넘쳐나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도 금세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빠진다. ✽실내 박물관과 기차 전시관: 야외 세트장 외에도 시청각 자료가 가득한 실내 전시관, 옛 태국 영화 제작자들과 왕립 철도의 역사를 기리는 빈티지 증기 기관차 전시관 등 소소하지만 알찬 볼거리가 가득하다. 옛날 영화를 감상하며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여행 중 잠시 숨을 고르기에도 완벽하다. ◈ 100년이 넘는 깊은 뿌리, 태국 영화의 르네상스 영화박물관을 둘러보며 가장 놀라운 점은 태국 영화의 역사가 무려 100년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이다. 1897년 방콕에서 처음으로 서양의 영화가 상영된 이후, 태국은 라마 5세 국왕의 동생인 통태임 삼파사트 왕자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왕실 의식을 촬영할 정도로 초기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값비싼 35mm 필름 대신 저렴한 16mm 필름을 활용해 수백 편의 대중 영화를 쏟아내며 그들만의 황금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태국 영화는 서구권 영화와는 다른 독특한 질감을 가진다. 인구 대다수가 믿는 불교적 세계관과 영혼을 믿는 애니미즘(토속 신앙)이 서사에 깊게 뿌리내려 있으며, 공포 영화에 코미디를 섞고, 슬픈 로맨스에 스릴러를 가미하는 등 과감한 장르 혼합(Genre-Blending)에 매우 능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침체기를 겪기도 했지만, 이를 기점으로 오히려 감각적인 연출력을 무장한 '뉴 타이 시네마'가 등장하며 세계 무대에서 다시금 인정받기 시작했다. ◈ 한국인의 뇌리에 꽂힌 '그' 태국 영화들 태국 영화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한국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명작들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미 태국 영화의 매력에 깊이 빠져본 경험이 있다. 1. 와이어 없는 날것의 액션 《옹박 (Ong-Bak, 2003)》 "무에타이의 진수를 보여준 전설적인 작품" CG와 와이어 액션이 난무하던 시절, 오직 맨몸으로 모든 스턴트를 소화해 낸 토니 자(Tony Jaa)의 액션은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한국에서도 "옹박!”, “또는 창 꾸 유나이!!(내 코끼리 어디있어)”이라는 외침과 함께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2. 아시아 호러의 바이블 《셔터 (Shutter, 2004)》 "사진에 찍힌 귀신, 태국 공포 영화의 매운맛"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을 베이스로 한 태국 특유의 공포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한국 개봉 당시 수많은 관객을 비명 지르게 했으며, 이후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될 정도로 탄탄한 시나리오를 자랑한다. 3. 트렌디한 감각의 끝판왕 《배드 지니어스 (Bad Genius, 2017)》 "컨닝이라는 소재를 범죄 스릴러로 승화시키다" 현대 태국 상업 영화의 세련미를 증명한 작품. 학교 시험의 부정행위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손에 땀을 쥐는 케이퍼 무비 형식으로 풀어내며 한국의 젊은 관객층에게 극찬을 받았다. 4. 한국과 태국의 소름 돋는 합작 《랑종 (The Medium, 2021)》 "태국 이산 지역의 무속 신앙을 파고들다" 한국의 나홍진 감독이 제작하고 태국의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연출한 영화. 태국 토속 신앙의 어둡고 습한 분위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아내며 한국 극장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태국 영화 특유의 애니미즘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최신작이다. ◈ Info. 태국 영화박물관 방문 팁 방콕 외곽이나 나콘파톰, 살라야 지역을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일정표 마지막 코스로 이곳을 꼭 끼워 넣기를 권한다. 과거 영화를 향해 불태웠던 태국인들의 열정과 애정을 무료로, 그리고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위치 : ถ.พุทธมณฑลสาย 5 ศาลายา (방콕 도심에서 차로 약 1시간) ✽운영 시간 : 오전 9시 30분 ~ 오후 5시 30분 (화요일~일요일 운영, 월요일 휴무) ✽입장료 : 무료 (내부 박물관 및 야외 세트장 모두) ✽이동 방법 : 방콕 전승기념탑에서 515번 버스, 혹은 BTS 모칫역에서 4-70E 버스 이용. 자차 이용 시 넉넉한 주차 공간 구비.

방콕 쿤스트할레 Bangkok Kunsthalle

2026/07/27 12:26:35

방콕 쿤스트할레 Bangkok Kunsthalle 불탄 인쇄소에서 다시 피어난 예술 방콕 쿤스트할레와 강릉, 상처의 경계에서 마주 보다 방콕 차이나타운 야와랏 일대는 오래된 상업지와 주거지, 사원과 시장이 한데 뒤섞인 곳이다. 거리마다 금은방과 한약방, 식당과 노점이 이어지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관광객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오래된 방콕의 생활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복잡한 도시의 한복판에 불에 그을린 콘크리트 건물이 서 있다. 외벽에는 화재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고, 내부는 철골과 배관, 갈라진 바닥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래된 공장을 말끔한 상업시설로 바꾸는 일반적인 도시재생 방식과는 거리가 먼 모양새다. 이곳은 2024년 1월 문을 연 현대미술 공간 ‘방콕 쿤스트할레(Bangkok Kunsthalle)’다. 방콕 쿤스트할레는 폐건물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새로운 벽을 세우고 균일한 조명을 설치해 과거를 덮는 대신, 화재로 손상된 벽과 거친 건물 구조를 전시 공간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한때 기능을 잃고 방치됐던 장소가 동시대 작가들의 실험과 토론이 이어지는 예술 공간으로 다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소장품 대신 새로운 시도를 담는 공간 ‘쿤스트할레(Kunsthalle)’는 독일어로 예술을 뜻하는 ‘쿤스트(Kunst)’와 공간 또는 홀을 뜻하는 ‘할레(Halle)’가 합쳐진 말이다. 일반적인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영구 소장품을 중심으로 운영하기보다, 기획전과 프로젝트를 통해 동시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을 소개하는 전시 공간을 가리킨다. 방콕 쿤스트할레 역시 완성된 작품을 정돈된 전시장에 진열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작가가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공간을 시험할 수 있는 일종의 실험실을 지향한다. 전시 공간은 여러 시기에 지어진 세 개 동의 산업 건축물로 이뤄져 있다. 가장 오래된 부분은 70년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출 콘크리트와 육중한 구조가 두드러지는 건물은 과거 인쇄소와 교과서 제작 공장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2001년 발생한 큰불로 상층부를 비롯한 건물 일부가 심각하게 훼손됐고, 이후 오랫동안 활용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수많은 문자와 지식을 종이에 찍어내던 장소가 화재로 기능을 잃은 뒤, 다시 이미지와 소리, 몸짓을 담는 예술 공간으로 돌아온 셈이다. 이 공간을 이끈 인물은 예술 후원가이자 카오야이 아트(Khao Yai Art) 설립자인 마리사 지아라와논(Marisa Chearavanont)이다. 예술감독은 런던의 현대미술 갤러리 하우저 앤 워스(Hauser & Wirth)에서 활동한 스테파노 라볼리 판세라(Stefano Rabolli Pansera)가 맡았다. 이들은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복구하거나 새것처럼 단장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불탄 벽과 깨진 표면, 열린 구조를 유지하면서 공간이 지닌 시간과 기억이 작품에 개입하도록 했다. 방콕 쿤스트할레가 다른 미술관과 구별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화재의 기억 위에 놓인 강릉의 이야기 2026년 7월 15일부터 8월 9일까지 방콕 쿤스트할레에서 열리는 국제협력전 ‘경계에서 함께 보기(Watching Together at the Boundary)’는 이 공간의 역사와 유난히 긴밀하게 호응한다. 파마리서치문화재단과 방콕 쿤스트할레가 공동으로 마련한 이번 전시는 2025년 강릉에서 개최된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의 주요 영상 작품을 방콕의 도시적 맥락과 전시 공간에 맞춰 다시 소개한다. 강릉과 방콕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두 도시가 경험해 온 역사와 생활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자연재해와 화재의 기억, 공동체의 회복, 전통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방식이라는 몇 가지 공통된 질문을 통해 두 지역을 연결한다. 강릉은 대형 산불로 숲과 삶의 터전이 훼손되는 아픔을 겪었다. 방콕 쿤스트할레 역시 큰불로 기능을 잃었던 건물에서 출발했다. 산불 피해 지역을 바라보는 영상 작품이 화재의 상흔이 남은 인쇄소 벽에 비치는 순간, 작품과 장소는 서로 다른 기억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강릉단오제와 태국의 송크란에도 주목한다. 두 전통은 모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의례의 형식과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공동체가 함께 모여 안녕을 기원하고 새로운 시기를 맞이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맞닿아 있다. 전시 기획진은 이러한 공통점을 회복과 재생이라는 주제로 연결한다. 전통을 고정된 옛 풍습으로 제시하기보다, 재난과 변화 속에서도 공동체를 다시 묶어주는 살아 있는 힘으로 바라본다. 잿빛 콘크리트 사이에 울린 강릉의 장단 개막 행사에서는 강릉의 전통연희집단 ‘푸너리’가 공연을 선보였다. 개막 현장을 취재한 보도에 따르면, 공연은 특별한 무대 장치 없이 뼈대가 드러난 옛 인쇄소 건물 사이에서 진행됐다. 연희자들은 공간을 이동하며 징과 꽹과리, 장구를 울렸고, 타악기의 소리는 높은 천장과 거친 콘크리트 벽을 타고 전시장 안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의 전통 연희에서 징과 꽹과리의 소리는 단순한 음악적 장치를 넘어선다. 액운을 물리치고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는다. 물을 통해 묵은 것을 씻어내고 새해의 복을 기원하는 태국 송크란의 정서와도 일정 부분 맞닿아 있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출발한 의례와 축제가 방콕의 폐건물 안에서 소리와 몸짓으로 만난 것이다. 불에 타 멈춰 있던 옛 인쇄소가 강릉의 장단을 통해 잠시 다시 움직이는 듯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문화적 해석은 관람객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타악과 몸짓이 한국과 태국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통로가 됐다는 점이다. 재난을 기록하는 데서 삶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전시장에서는 정연두, 고등어, 이양희, 홍이현숙 등 한국 작가들과 태국 작가 아라야 라스잠리안숙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재난의 참상을 직접 보여주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재난 이후의 일상, 사라진 것과 남겨진 것, 자연과 인간의 관계, 공동체가 기억을 이어가는 방식을 각기 다른 영상 언어로 풀어낸다. 정연두의 ‘싱코페이션 #5’는 강릉단오제를 준비하는 제의적 과정과 산불 피해 지역의 풍경, 서로 마주 놓인 두 대의 피아노를 교차시킨 작품이다. 강릉단오제를 앞두고 주민들이 쌀을 모아 신주를 빚는 과정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조금씩 마음과 물자를 보태야 비로소 공동체의 의례가 시작된다. 산불 이후 삶의 터전을 복구하는 일 역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어렵다. 작품 속 두 대의 피아노 가운데 한 대는 현이 제거돼 정상적인 소리를 내지 못한다. 건반을 눌러도 소리가 완성되지 않는 피아노의 모습은 자연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과, 그럼에도 계속 움직이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몸짓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상이 한때 교과서를 찍어내던 인쇄소의 불탄 벽에 투사된다는 점도 의미를 더한다. 문자를 통해 지식을 전달하던 장소가 이제는 이미지와 소리를 통해 재난 이후의 기억을 전하고 있다. 장소와 작품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설명하는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 불탄 건물은 산불 이후의 풍경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강릉의 영상은 방콕 쿤스트할레가 품고 있는 화재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방콕의 폐허에서 카오야이의 숲으로 방콕 쿤스트할레의 예술적 실험은 차이나타운의 옛 인쇄소에만 머물지 않는다. 운영진은 2025년 2월 나콘라차시마주 빡청 지역에 ‘카오야이 아트 포레스트(Khao Yai Art Forest)’를 개관했다. 방콕 도심에서는 교통 상황과 출발 지점에 따라 차량으로 약 2시간 30분에서 3시간가량 걸린다. 카오야이 아트 포레스트에는 리처드 롱, 루이즈 부르주아, 후지코 나카야, 엘름그린 & 드라그셋 등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이 숲과 지형을 따라 설치돼 있다. 방콕 쿤스트할레가 화재로 손상된 도시의 건축물과 예술의 관계를 탐구한다면, 카오야이 아트 포레스트는 작품이 나무와 풀, 비와 바람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 두 공간은 겉모습은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된 방향을 갖고 있다. 미술관의 벽과 온도, 빛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이른바 ‘화이트 큐브’에서 벗어나 작품이 실제 장소의 역사와 환경 속에서 존재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방콕에서는 불탄 벽과 노출된 구조가 전시의 일부가 되고, 카오야이에서는 숲의 성장과 계절의 변화가 작품에 개입한다. 예술을 건물 안에 가두기보다 도시와 자연 속에서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다. 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불꽃을 이어가는 일 전시장 한편에는 구스타프 말러의 말로 널리 알려진 문장이 소개돼 있다. “전통은 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불꽃을 이어가는 것이다.” 정확한 원전과 발언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있는 문장이지만, 이번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는 적절한 실마리가 된다. 전통은 과거의 형식을 그대로 반복한다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강릉의 장단이 방콕의 옛 인쇄소에서 울리고, 강릉단오제의 공동체 정신이 태국 송크란의 정서와 나란히 놓일 때 전통은 새로운 장소와 시대 속에서 다시 해석된다. 방콕 쿤스트할레와 강릉의 만남 역시 과거의 상처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불탄 공장과 산불 피해 지역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재난 이후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다시 삶을 이어가는지를 묻는다. 방콕 차이나타운의 콘크리트 건물에는 여전히 불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버려진 폐허가 아니다. 예술가가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고, 관람객이 서로 다른 도시의 기억을 마주하며, 지역의 경험이 국경을 넘어 연결되는 장소가 됐다. 폐허를 과거의 흔적으로 남겨두는 것과 그 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다르다. 방콕 쿤스트할레와 강릉의 이번 만남은 예술이 상처를 지워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상처를 함께 바라보고 다음 단계로 옮겨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글 사진 | 김종민 교민잡지 편집국장 www.facebook.com/BangkokKunsthalle khaoyaiart.org

1980년대 방콕으로의 타임슬립

2026/07/14 09:50:20

1980년대 방콕으로의 타임슬립 왕궁 곁에 숨은 세 갈래 골목, 쌈프랭을 걷다 방콕에는 너무 유명해져 버린 얼굴들이 있다. 왕궁, 왓포, 카오산로드, 아이콘시암, 루프탑 바, 대형 쇼핑몰. 처음 방콕을 찾은 여행자라면 당연히 그곳으로 향한다. 화려하고, 편리하고, 사진도 잘 나온다. 그런데 방콕이라는 도시는 늘 그런 식으로만 자신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조금만 옆으로 비켜서면 전혀 다른 방콕이 나타난다. 네온사인과 음악 소리가 멀어지고, 오토바이 소리마저 한 박자 늦게 들리는 골목. 낡은 셔터문, 바랜 간판, 좁은 보도 위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 오래된 집 앞을 지키는 고양이 한 마리. 그 풍경 속에 들어서면 이상하게도 시간이 느려진다. 카오산로드와 왕궁 사이, 방콕 올드타운 한복판에 그런 동네가 있다. 이름은 쌈프랭(Sam Phraeng). 방콕을 여러 번 다녀간 사람도, 방콕에 꽤 오래 산 사람도 의외로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그러나 한 번 제대로 걸어보면 알게 된다. 이곳은 낡아서 남은 동네가 아니라, 시간이 쌓여 살아남은 동네라는 것을. 세 왕자의 거리, 쌈프랭 쌈프랭이라는 이름에는 방콕 구도심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태국어로 ‘쌈’은 숫자 3을 뜻한다. 쌈프랭은 말 그대로 세 개의 ‘프랭’, 즉 세 갈래 거리와 골목을 가리킨다. 프랭 푸톤(Phraeng Phuthon), 프랭 나라(Phraeng Nara), 프랭 싸파쌋(Phraeng Sapphasat). 라따나코신 시대 왕가와 관련된 이 세 구역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쌈프랭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이 일대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19세기 이후 방콕이 근대 도시로 변해가던 시절, 이곳에는 유럽풍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상점과 주거 건물이 들어섰다. 왕궁과 관청, 상업지구가 가까웠던 만큼 한때는 방콕에서도 꽤 번화한 구역이었다. 지금도 골목을 걷다 보면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반듯한 창틀, 오래된 벽면, 낮은 처마, 손때 묻은 문패 같은 것들이다. 쌈프랭의 매력은 요란하지 않다. 새로 만든 레트로가 아니라, 세월이 저절로 만든 레트로다. 일부러 낡게 꾸민 카페 거리와는 다르다. 이곳의 낡음에는 생활이 있고, 장사가 있고, 동네 사람들의 하루가 있다. 그래서 사진으로만 보면 심심해 보일 수 있지만, 직접 걸어보면 오래된 방콕의 결이 손에 잡힌다. 카오산 옆에 이런 방콕이 있었다 쌈프랭이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위치 때문이다. 이곳은 방콕의 대표 관광지와 멀리 떨어진 외곽 마을이 아니다. 카오산로드, 왕궁, 왓포, 방콕 시청 일대와 가까운 구도심 한가운데 있다. 그런데도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카오산로드가 밤의 방콕이라면, 쌈프랭은 낮의 방콕이다. 카오산이 외국 여행자의 에너지로 뜨겁다면, 쌈프랭은 동네 사람들의 생활 리듬으로 조용히 움직인다. 길 하나,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시의 표정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방콕답다. 방콕은 늘 이렇게 양면적이다. 최신 쇼핑몰과 100년 된 시장이 공존하고, 고급 호텔 뒤편에 오래된 국수집이 숨어 있으며, 관광객으로 붐비는 길 옆에 현지인만 아는 골목이 이어진다. 쌈쁘랭은 그 방콕의 양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동네 중 하나다. 개발되지 않아서 남은 것이 아니라, 지켜져서 남은 것 방콕의 많은 지역은 빠르게 변했다. 오래된 목조 주택은 콘도미니엄으로 바뀌고, 로컬 상점은 프랜차이즈 매장으로 교체되고, 골목 풍경은 어느 순간 비슷비슷해진다. 그러나 쌈쁘랭은 비교적 느리게 변했다. 왕궁과 구도심이라는 지리적 특성, 오래된 건축물과 생활권의 연속성, 그리고 이 지역을 지켜온 주민들의 시간이 겹치며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물론 쌈프랭도 영원히 그대로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방콕의 젊은 세대는 이미 올드타운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있다. 딸랏너이, 쏭왓, 방람푸가 그랬듯이, 오래된 동네는 어느 순간 새로운 문화지대로 읽히기 시작한다. 오래된 창고가 갤러리가 되고, 허름한 상점가에 작은 카페가 생기고, 낡은 골목은 산책 코스로 다시 불린다. 쌈프랭도 그 길목에 서 있다. 아직은 송왓처럼 크게 알려지지 않았고,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도 아니다. 바로 그래서 지금 가볼 만하다. 아직 동네의 호흡이 남아 있을 때, 아직 간판과 셔터와 시장의 냄새가 그대로 있을 때, 쌈프랭은 가장 쌈프랭답다. 세월을 먹는 골목, 쌈프랭 미식 산책 쌈프랭 산책의 즐거움은 건물만 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동네를 제대로 느끼려면 반드시 먹어봐야 한다. 오래된 방콕의 맛은 화려한 플레이팅보다 깊은 국물, 기름 냄새, 달콤한 차 한 잔, 손으로 만든 아이스크림 안에 남아 있다. 치갓차 카페(Chi Kat Cha Cafe) 쌈프랭의 분위기를 가장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아날로그 박물관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된 장난감, 포스터, 소품들이 공간을 채운다. 요즘 유행을 따라 만든 빈티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어린 시절이 그대로 쌓인 듯한 느낌이다. 이곳에서는 핑크 밀크, 태국식 밀크티 같은 익숙한 음료가 잘 어울린다. 특별히 대단한 메뉴를 기대하기보다, 천천히 앉아 주변을 둘러보는 시간이 더 좋다. 방콕의 오래된 카페 문화가 꼭 고급 커피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소다. 세리(Seri) 쌈프랭에서 조금 더 깊은 맛을 찾는다면 세리를 들러볼 만하다. 태국 왕실 요리의 흐름을 보다 편안한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음식은 자극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 재료의 맛과 조리의 균형을 살리는 쪽에 가깝다. 한국인 입맛에도 비교적 편하게 다가오는 메뉴로는 마늘 새우튀김을 꼽을 수 있다. 바삭하게 튀긴 새우에 마늘 향이 더해져 밥과도 잘 어울리고, 가볍게 나눠 먹기에도 좋다. 태국 음식이 늘 맵고 강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조금 내려놓게 만드는 맛이다. 타이탐 까오라우 싸멍무(Thai Tham) 쌈프랭 미식 산책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길 만한 곳이다. 대표 메뉴는 돼지 뇌 수프다. 이름만 들으면 망설여질 수 있다. 그러나 방콕 로컬 음식의 세계를 조금 더 넓게 경험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하다. 맑은 국물에 부드럽게 익은 돼지 뇌가 들어간 이 음식은 식감이 독특하다. 진하고 고소하며, 입안에서 부드럽게 풀어진다. 익숙한 맛은 아니지만, 오래된 방콕 식문화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보여주는 메뉴다. 여행은 때로 이런 낯섦을 만나는 일이다. 나타폰 아이스크림(Nuttaporn Ice Cream) 쌈프랭 산책의 마무리로는 나타폰 아이스크림이 좋다. 전통 방식의 코코넛 밀크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지나치게 달지 않고, 코코넛 특유의 고소함과 산뜻함이 살아 있다. 방콕의 더운 오후, 골목을 한참 걷고 난 뒤 먹는 코코넛 아이스크림은 그 자체로 훌륭한 디저트다. 화려한 카페 디저트는 아니지만, 방콕 올드타운에는 이런 단순한 맛이 더 잘 어울린다. 아침의 방콕을 보고 싶다면, 딸랏 뜨록 머 시장(Trok More Morning Market) 쌈프랭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아침에 가보는 것도 좋다. 인근의 뜨록 머 시장(Trok Mor Market)은 방콕의 오래된 아침 시장 분위기를 간직한 곳이다. 새벽부터 정오 무렵까지 활기를 띠는 시장으로, 관광객을 위한 연출된 공간이라기보다 현지인의 하루가 시작되는 생활 시장에 가깝다. 갓 튀긴 간식 냄새, 채소와 생선을 고르는 사람들, 빠르게 오가는 상인들의 목소리, 그리고 아침 탁발을 나선 승려들의 모습까지. 이곳에서는 방콕의 아침이 어떤 속도로 열리는지 볼 수 있다. 대형 호텔 조식 뷔페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장면이다. 뜨록 머 시장을 먼저 둘러본 뒤 쌈프랭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면 이 동네의 질감이 훨씬 선명해진다. 시장, 골목, 오래된 상점, 작은 식당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지금 쌈프랭을 걸어야 하는 이유 방콕에는 늘 새롭게 뜨는 동네가 있다. 몇 년 전에는 딸랏너이였고, 최근에는 쏭왓이 그랬다. 오래된 창고와 골목, 중국계 상점가와 예술 공간이 만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쌈프랭도 언젠가는 그런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릴지 모른다. 하지만 쌈프랭의 현재는 아직 조용하다. 그래서 더 좋다. 사진을 찍기 위해 만들어진 배경이 아니라, 생활이 먼저 있고 여행자가 그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동네다. 그 점이 쌈쁘랭을 방콕의 숨은 관광 명소로 자라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왕궁을 보고, 왓포를 보고, 카오산로드를 지나쳤다면 그다음에는 쌈프랭으로 걸어가 보자. 특별한 입장권도, 정해진 관람 동선도 필요 없다. 다만 서두르지 않는 걸음이면 충분하다. 골목을 따라 걷고, 오래된 간판을 읽고, 국물 한 그릇을 먹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들고 다시 천천히 걸으면 된다. 방콕을 오래 살수록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이 도시는 유명한 곳보다 유명해지기 전의 장소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쌈프랭은 그런 방콕의 한 장면이다. 왕궁 곁에 숨어 있었지만, 이제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있는 오래된 동네. 방콕의 과거가 박제처럼 남은 곳이 아니라, 오늘도 조용히 숨 쉬고 있는 골목이다. 이번 주말, 익숙한 방콕을 잠시 비켜나 보자. 카오산의 소음에서 몇 걸음만 벗어나면, 1980년대 어느 오후처럼 느리게 흐르는 방콕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이 바로 쌈프랭이다. COVER NOTE 쌈프랭 산책은 오전 시간이 좋다. 뜨록 머(Trok Mor) 시장을 먼저 둘러보고, 쌈프랭 골목으로 들어가 로컬 식당과 카페를 차례로 방문하는 동선이 자연스럽다. 다만 올드타운의 오래된 식당들은 영업시간이 유동적인 경우가 있으므로 방문 전 지도 앱이나 전화 확인을 권한다. “방콕을 오래 살다 보면, 이 도시의 매력은 늘 유명한 장소 바깥에서 더 선명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쌈프랭은 그런 곳이다. 왕궁 곁에 있으면서도 왕궁의 그림자에 가려졌고, 카오산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카오산의 소음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온 골목이다. 오래된 건물과 로컬 식당, 아침 시장과 작은 카페가 이어지는 이 동네는 방콕이 아직 관광상품이 되기 전의 얼굴을 간직하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도시 속에서 이런 장소가 남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에 가깝다. 그리고 그 행운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 주말, 익숙한 방콕을 잠시 비켜나 보자. 카오산의 소음에서 몇 걸음만 벗어나면, 1980년대 어느 오후처럼 느리게 흐르는 방콕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이 바로 쌈프랭이다.” 글과 사진 | 김종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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