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말]한글날과 문해력 그리고 실천

2026/10/21 10:45:29

한글날과 문해력 그리고 실천 한글날은 문자의 날이지만, 우리는 언어의 날까지 넓혀서 생각합니다. 바른말을 쓰자고 하거나 외국어 사용을 조심하자고 하는 것도 모두 언어의 문제로 넓힌 겁니다. 그래서 한글날은 이제 한국어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글과 우리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날이 한글날인 셈입니다. 하지만 늘 지적하듯이 한글날만 한글날입니다. 그러니 변화가 힘듭니다. 한글날은 문자의 날이어서 한자 사용을 죄악시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그런 태도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간판에 한자가 쓰여있으면 중국 같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중국에서 쓰는 한자와 우리가 쓰는 한자가 다른데도 말입니다. 한자는 펄쩍 뛰면서도 알파벳은 무덤덤합니다. 길가에 수많은 알파벳이 있습니다. 아니 텔레비전만 켜도 알파벳 천지입니다. 한글날은 한글의 날입니다. 한자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알파벳의 문제도 공정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조차도 한자를 아주 쓰지 말자는 생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저도 알파벳을 쓰지 말자는 말은 아닙니다. 한자도 알파벳도 생각하면서 써야 합니다. 한글날만 되면 문해력 이야기로 언론이 도배가 됩니다. 아이들의 문해력이 떨어졌다고 특이한 예를 들어서 희화화(戲畫化) 하기도 합니다. 아이들 문해력 저하의 원인으로 스마트폰이나 게임, 독서 부족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한자를 배우지 않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빠지지 않죠. 한자 교육에 대한 찬반 입장은 ‘날’이 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자를 가르치면 문해력이 좋아질까요? 사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문해력과 어휘력의 구별은 쉽지 않은 듯합니다. 우리말에 한자어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자를 몰라서보다는 어휘 공부를 하지 않아서 어휘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휘(語彙)’의 한자는 무슨 뜻인가요? 아이들의 문해력을 걱정하는 어른을 보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아이의 스마트폰 사용을 걱정하지만, 성인의 스마트폰 사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이들의 게임을 걱정하지만, 성인은 유튜브에 하루 종일 빠져있기도 합니다. 청소년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어른은 더 심각합니다. 우리나라 성인의 독서율은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2025년 성인 독서 실태 조사에서 1년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사람이 10명 중 6명이라고 합니다. 본인은 책을 전혀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의 독서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책은 청소년이 성인보다 훨씬 많이 읽습니다. 아이에게 독서를 권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범을 보이는 겁니다. 올해 나는 책을 몇 권 읽었습니까? 한자를 가르칠 것인가 하는 논쟁에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가르칠 사람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자를 가르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사실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려운 한자가 아니라 기본적인 한자도 모릅니다. 몇 십 년 전 대학교재에는 한자가 많았습니다. 지금 그 책들은 대부분 폐기 대상입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습니다. 한자를 반드시 쓰게 하는 학술지도 있는데, 한자가 많으면 인용률이 떨어집니다. 읽지 못하니 인용을 못합니다. 모두 한자를 배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자, 한문’의 전문가 양성이 심각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우리 학자들이 예전에 쓴 책을 읽고 이해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글이 있어서 우리 언어생활이 풍요로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도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할 겁니다. 종교인이어도 성경을 못 읽고, 불경을 못 읽겠지요. 간단한 편지를 쓰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문자도 보내지도 읽지도 못하는 답답한 세상일 겁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한글 창제는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한글이 보여주는 세상도 기억해야 합니다. 글을 몰라 불쌍한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글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 글 때문에 손해 보는 세상은 옳지 않습니다. 어찌 글뿐이겠습니까? 외국어를 몰라서 차별받아도 안 됩니다. 한국어를 몰라서 차별받아도 안 됩니다. 그 무엇 때문이라도 차별받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문해력의 핵심은 이해가 아니라 실천입니다. 글을 읽었다면,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세종의 한글 창제에 관한 글을 제대로 읽었다면, ‘우리다움’을 고민해야 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어야 합니다. 그게 한글이 꿈꾸는 세상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아름다운 우리말] 사랑의 의미

2026/09/21 14:58:22

사랑의 의미 사랑의 정의와 어원은 하나로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정답을 말하는 이도 제각각입니다. 한편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옛 노래의 가사는 참으로 옳습니다. 사랑에서 우리는 결말이 정해진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결국에는 헤어지는 결말입니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새드엔딩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헤어진다면 평범한 마무리입니다. ‘사랑하다’의 원 의미는 ‘생각하다’입니다. 중세국어에서 사랑하는 것은 생각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누구나 사랑하면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나면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은데 못 보면 그립고 괴롭고 아프죠. 애당초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다지도 슬프지는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은 참으로 명답입니다. 무관심에 아픔이 있을까요? 사랑하는데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사랑은 생각이기에 사랑은 그대로 배려고 양보입니다. 때로는 내가 힘든 게 낫고, 내가 아픈 게 낫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대신하여 아프고 싶었다면 그게 바로 사랑하는 겁니다. 아픈 사람만큼 나도 고통스러웠다면 그게 사랑입니다. 아픈 이보다 더 아프다면 그건 큰 사랑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이거나 애끓는 사랑, 그것도 아니라면 신의 사랑일 겁니다. 사랑이 어찌 슬프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늘 아픕니다. 그래서 기쁩니다. 우리는 사랑이 고통인지 알지만 그래도 사랑합니다. 그게 삶이죠. 사랑하며 사는 삶이죠. 사랑은 상대의 아픔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지는 게 가장 큰 고통이라는 애별리고(愛別離苦)인 줄 알면서도 그 가슴 가쁜 기억으로, 그 추억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랑이죠. 서로 아팠던 기억이 추억이 되고, 상대의 기쁨이나 슬픔이나 아픔까지 모두 사랑이 되죠. 그런 사람이 사랑이라면, 식구 같은 사람이 없죠. 사랑에는. 저는 할 수만 있다면 하루 더 기쁘고 하루 덜 슬프기를 빌어봅니다. 큰 욕심보다는 하루를 줄이고, 하루를 늘이는 거죠. 되돌아보니 사랑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사랑받을 수 있어서 참 기뻤습니다. 사랑은 그래서 기도입니다. 덜 아프기 바라고 더 기쁘기 바라며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아프기 바랍니다. 엄마, 아빠는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아프고 딸, 아들은 사랑받았기에 행복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식은 내 짐을 대신 들고, 저만치 걸어가고, 스스로 아프지만 기쁜 사랑을 합니다. 난 그런 자식을 멀리서 보면서 사랑하며 아파합니다. 사랑하기에 아프고, 아프기에 기도하고, 내가 대신 아프고 싶어 애씁니다. 사랑 참 아프지만, 사랑하고 살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이런 게 행복이지 싶습니다. 사랑 참 고맙습니다. 가족과 함께한 이 삶이 행복입니다. 저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35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저의 큰아들은 작년에 일본으로 가서 결혼하여 살고 있습니다. 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곳을 지키고 있고, 그리움을 사랑으로, 고통을 사랑으로, 기쁨을 사랑으로, 행복을 사랑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입니까?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아름다운 우리말] 이재, 또 넘어져도 나 다시 일어나

2026/08/27 11:50:33

이재, 또 넘어져도 나 다시 일어나 살면서 넘어지는 일은 언제나 있습니다. 넘어지는 일이 늘 있다는 것은 다시 일어나는 일도 늘 있다는 말입니다. 넘어져서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는 게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잊습니다. 아니, 믿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것은 끝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넘어지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늘 다시 일어난다는 말에서 간절함과 함께 짜릿한 흥분을 느낍니다. 어려움에 빠졌지만, 그 일을 딛고 일어난 이야기에 우리는 감동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변에 너무나 흔한 이야기고, 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넘어졌던 순간들을 기억해 봅니다. 참 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립니다. 사랑이 힘들고, 사람이 힘들고, 삶이 힘듭니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부럽다고 합니다. 내가 너라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행복해 보인다고 말합니다. 칭찬과 부러움일 겁니다. 이 말은 내가 남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하지만 종종 나는 내가 불쌍합니다. 힘들었던 시간을 아프게 살아온 내가 가엽기도 합니다. 외로웠던 내 모습이 떠오릅니다. 거울 속에 드러나 있는 내가 가여워 눈가가 젖기도 합니다. 누구나 행복하지만, 누구나 외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서로에게 위로가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나 혼자 걸어가고 있습니다. 별도 달도 모습을 감추어 희망이란 말이 사치처럼 여겨지는 나날입니다. 외로움이나 슬픔이란 말이 내 몸을 감싸고, 스스로를 가여워 하면서 길을 걷습니다. 때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수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때 나는 하늘에 별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달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단지 지금 안 보이는 것뿐인데, 나는 희망의 별마저 놓아 버렸습니다. 넘어져 일어나서 다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나둘씩 별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니 한두 개가 아닙니다. 어둠에서 숨어있던 달도 모습을 나타냅니다. 아, 별이 있었네요. 달이 있었네요. 그때 주변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길에 나 혼자 걷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둠 속에 나를 닮은 사람이 있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들도 넘어지고, 그들도 다시 일어나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혼자서 일어날 때는 참으로 힘들었는데, 옆 사람이 내민 손을 잡으니 한결 수월합니다. 먼저 이 길을 걸은 사람의 한마디 한마디가 응원이 됩니다. 나보다 먼저 넘어지고, 나보다 먼저 일어난 사람들이 하늘의 별을 이야기합니다. 저 별을 따라 걸으라고 합니다. 별이 길이 되고, 별이 희망이 되고, 별이 친구가 됩니다. 이제 넘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의 모습이 잘 보입니다. 내가 이제 그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기도 합니다. 이제 이 길은 함께 걷는 길입니다. 케데헌의 ‘골든’이라는 곡으로 유명해진 ‘이재’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이재의 걸어온 길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 역사입니다. 이재의 일어남에는 수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을 겁니다. 고통이 있었기에 기쁨이 더 컸겠지요. 좌절이 있었기에 환희도 더 컸을 겁니다. 저는 이재의 스토리를 보면서 많은 사람에게 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유명 연예인을 스타라고 하는 것은 바로 희망의 별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재가 2026년 월드컵 공식 주제가인 DNA를 개막식에서 불렀습니다. 세계적 거장 ‘보첼리’와 함께 하는 공연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특히 제 가슴을 뛰게 한 것은 한국어로 시작되는 가사였습니다. <또 넘어져도 나 다시 일어나>라는 가사는 월드컵을 준비한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이고, 이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그 가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제 이야기이기도 하죠. 아직 넘어져서 울고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이 노래의 가사가 별이 되기 바랍니다. 다시 일어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기쁘게 한 걸음을 내딛기 바랍니다. 또 넘어져도 우리 다시 일어나 어둠 속을 걸어가기 바랍니다. 그곳에 수많은 우리가 있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아름다운 우리말] 제 머리 못 깎는다

2026/07/30 11:45:11

제 머리 못 깎는다 요즘 저는 긍정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긍정심리학은 인간의 긍정적 사고가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지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과학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이런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생활하면 좋은 결말이 있을 거라고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긍정심리학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긍정심리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것은 언어교육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언어교육의 설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일면 동의하는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정말 언어교육은 이렇게 사라지게 될까요? 언어를 배우는 일이 무가치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저는 과거에서 찾습니다. 새로운 교육 방안처럼 이야기하는 많은 교수법이나 교육철학은 이미 오래전에 실시하였거나 구상하였거나 깊이 통찰하였던 내용입니다. 저는 통찰력의 측면에서는 현대인이 선인들을 넘어서기 어렵다고 봅니다. 고전을 수없이 읽고, 외우고, 수행하는 속에서 깨달은 사고의 깊이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러한 사고를 찾아가면서 현재와 미래의 언어교육에 길을 보이고 싶습니다. 그중 한 방법이 속담을 살피는 겁니다. 속담(俗談)은 한국인의 사고를 나타냅니다. ‘속(俗)’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인 누구나 알 수 있고, 알고 있는 내용이 속담입니다. 풍자성과 교훈성을 주로 담고 있는 표현이죠. 그런데 속담을 잘 살펴보면 긍정심리학과 맞닿아 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라는 속담을 다시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 속담이 심리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심리학이 제 전공은 아니니 깊은 연구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듯합니다. 과학적 연구 말입니다.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은 마음이 약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보다 자신감이 지나친 사람이 위험하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도 오히려 깊은 수렁에 빠지기도 합니다. 저는 이때 생각해야 하는 속담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입니다. 이 속담은 기본적으로 자신에 관한 일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남의 어려움은 잘 도와주지만 자신의 일 앞에서는 헤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풍자한 말이겠죠. 풍자를 교훈으로 돌리면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속담이 자신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난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혼자서 처리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충고로 보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때로는 고통이 됩니다. 해도 안 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오히려 절망감이 커지기도 합니다. 남에게는 힘이 되었지만, 나의 일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내가 남에게 힘이 되었듯이 남이 내게 힘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의 머리를 깎아주었듯이, 내 머리를 깎아줄 사람이 있음은 행복한 일입니다. 나의 일을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나를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워서입니다. 나를 저만치 떨어져서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를 객관적으로 봐줄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글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내 머리가 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 앞을 가리네요. 자를 때가 되었나 봅니다. 어서 글을 마치고, 머리를 자르러 가야겠습니다. 제 머리를 제가 자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웃으며 이 글을 마칩니다. 여러분도 이 글을 읽고 웃으셨거나 머리를 자르러 가실 생각을 했다면 다행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아름다운 우리말] 또 넘어져도 나 다시 일어나

2026/07/14 11:17:48

또 넘어져도 나 다시 일어나 살면서 넘어지는 일은 언제나 있습니다. 넘어지는 일이 늘 있다는 것은 다시 일어나는 일도 늘 있다는 말입니다. 넘어져서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는 게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잊습니다. 아니, 믿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것은 끝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넘어지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늘 다시 일어난다는 말에서 간절함과 함께 짜릿한 흥분을 느낍니다. 어려움에 빠졌지만, 그 일을 딛고 일어난 이야기에 우리는 감동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변에 너무나 흔한 이야기고, 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넘어졌던 순간들을 기억해 봅니다. 참 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립니다. 사랑이 힘들고, 사람이 힘들고, 삶이 힘듭니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부럽다고 합니다. 내가 너라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행복해 보인다고 말합니다. 칭찬과 부러움일 겁니다. 이 말은 내가 남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하지만 종종 나는 내가 불쌍합니다. 힘들었던 시간을 아프게 살아온 내가 가엽기도 합니다. 외로웠던 내 모습이 떠오릅니다. 거울 속에 드러나 있는 내가 가여워 눈가가 젖기도 합니다. 누구나 행복하지만, 누구나 외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서로에게 위로가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나 혼자 걸어가고 있습니다. 별도 달도 모습을 감추어 희망이란 말이 사치처럼 여겨지는 나날입니다. 외로움이나 슬픔이란 말이 내 몸을 감싸고, 스스로를 가여워 하면서 길을 걷습니다. 때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수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때 나는 하늘에 별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달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단지 지금 안 보이는 것뿐인데, 나는 희망의 별마저 놓아 버렸습니다. 넘어져 일어나서 다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나둘씩 별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니 한두 개가 아닙니다. 어둠에서 숨어있던 달도 모습을 나타냅니다. 아, 별이 있었네요. 달이 있었네요. 그때 주변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길에 나 혼자 걷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둠 속에 나를 닮은 사람이 있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들도 넘어지고, 그들도 다시 일어나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혼자서 일어날 때는 참으로 힘들었는데, 옆 사람이 내민 손을 잡으니 한결 수월합니다. 먼저 이 길을 걸은 사람의 한마디 한마디가 응원이 됩니다. 나보다 먼저 넘어지고, 나보다 먼저 일어난 사람들이 하늘의 별을 이야기합니다. 저 별을 따라 걸으라고 합니다. 별이 길이 되고, 별이 희망이 되고, 별이 친구가 됩니다. 이제 넘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의 모습이 잘 보입니다. 내가 이제 그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기도 합니다. 이제 이 길은 함께 걷는 길입니다. 케데헌의 ‘골든’이라는 곡으로 유명해진 ‘이재’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이재의 걸어온 길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 역사입니다. 이재의 일어남에는 수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을 겁니다. 고통이 있었기에 기쁨이 더 컸겠지요. 좌절이 있었기에 환희도 더 컸을 겁니다. 저는 이재의 스토리를 보면서 많은 사람에게 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유명 연예인을 스타라고 하는 것은 바로 희망의 별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재가 2026년 월드컵 공식 주제가인 DNA를 개막식에서 불렀습니다. 세계적 거장 ‘보첼리’와 함께 하는 공연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특히 제 가슴을 뛰게 한 것은 한국어로 시작되는 가사였습니다. <또 넘어져도 나 다시 일어나>라는 가사는 월드컵을 준비한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이고, 이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그 가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제 이야기이기도 하죠. 아직 넘어져서 울고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이 노래의 가사가 별이 되기 바랍니다. 다시 일어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기쁘게 한 걸음을 내딛기 바랍니다. 또 넘어져도 우리 다시 일어나 어둠 속을 걸어가기 바랍니다. 그곳에 수많은 우리가 있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아름다운 우리말] 그대는 혼자가 아닙니다

2026/06/04 11:47:29

그대는 혼자가 아닙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했습니다. 영어는 성적의 핵심이고, 경쟁력의 주요한 도구입니다. 참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영어 공부가 재미있었다면 행복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 공부는 좋은 겁니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낯선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고전이나 명작을 만날 수도 있고, 나의 삶을 바꿔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늘 행복한 언어 공부를 꿈꿉니다. 그런데 그토록 오랫동안 배운 영어의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 ‘미스터 스미스, 미시스 윌슨’ 정도의 이름이 기억나고, ‘아임 파인 땡큐 앤유’가 자동으로 떠오르는 정도입니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지만, 무엇을 소통할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용 없는 문법 공부,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공부는 헛공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언어교육은 헛공부입니다. 우리는 긴 시간, 많은 노력을 투자하여 헛일을 한 셈입니다. 어떤 내용이 기억에 남아있습니까? 그래도 다행스럽게 제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영어로 된 글이 있습니다. 물론 영어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그 내용이 기억 속에 있습니다. 영어로 남아있다면 더 좋겠지만, 기억하라고 배우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예전에 언어교육은 좋은 글을 소리내서 읽는 것이었습니다.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언어교육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이 읽는 소리를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러고는 그 내용을 전부 외웁니다. 여러 번 읽었기에 따로 외우려 하지 않아도 외워집니다. 그게 언어교육입니다. 제 기억 속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겁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거운 돌을 너의 모든 능력을 사용해서 움직여보라고 합니다. 아이는 힘도 써보고, 도구도 이용해 보지만 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이가 들기에는 무리가 있는 돌이었나 봅니다. 아이는 포기하고 아버지께 내 모든 힘을 썼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너는 너의 능력을 다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모든 힘을 다 썼다고 항변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도 너의 능력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영어의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능력에는 나만의 능력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부모님도 있고, 형제와 자매도 있습니다. 친구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이웃도 있습니다. 나는 나 혼자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능력입니다. 언제든지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곁에 있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복에도 노력이 필요합니다. 손을 내미는 노력 말입니다. 또한 나 역시 그의 능력이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변의 사람이 힘들어하면 도와주어야 합니다. 내게 도움을 청할 때 기쁘게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내 작은 도움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도와주려고 합니다. 내 능력이 그의 능력에 일부가 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도움은 주고받는 겁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서로의 능력을 키웁니다. 우리의 능력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 중에 ‘You are not alone.’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가 좋은 노래는 언어 공부에 큰 힘이 됩니다. 저는 이 노래를 오늘의 글에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대는 혼자가 아닙니다. 든든하지 않습니까? 나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좌절을 이기고, 외로움을 이기고,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쁨을 느끼고, 함께 즐거워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대도 혼자가 아닙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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