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참성이라는 말

2024/04/23 14:39:15

참성이라는 말 오늘도 여러 책을 읽으며 진리를 공부하다가 ‘참성(僭聖)’이라는 표현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사전에 없는 말이 참 많다는 생각을 새삼 합니다. 참성의 참(僭)은 어긋난다는 뜻으로 ‘참람(僭濫)하다, 참칭(僭稱)하다’라고 할 때 쓰입니다. 참람하다는 말은 분수에 넘쳐 지나치다는 의미입니다. 참칭이라는 말은 멋대로 분수 넘치게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칭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전의 예에는 왕을 참칭하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착각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성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성인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책에서 참성은 깨달음의 적이고, 깨달은 이의 적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깨달은 이의 세 강적 중에서 가장 나쁜 강적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성인인 척 하는 것이 깨달은 이를 모욕하고,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것보다도 더 나쁜 적인 셈입니다. 척하는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 깨달은 척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척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모르면서 아는 척합니다. 잘난 척, 예쁜 척 등도 있습니다. 갑자기 ‘귀여운 척’이라는 표현이 생각나네요. 척 중에는 위험한 게 많습니다만, 그 중 최악은 깨달은 척, 성인인 척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나쁜 쪽으로 이끌고, 참된 사람을 욕합니다. 참성하는 이와 진짜 성인의 차이는 무얼까요? 일단 대부분의 성인은 스스로를 성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공자도 맹자도 성인이냐는 물음에 손사래를 쳤습니다. 성인이어도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저는 성인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게 진리의 길을 가고, 진리의 편이 되는 이가 성인인 겁니다. 참성하는 이는 정반대의 삶을 삽니다. 참성하는 사람을 설명해 놓은 것을 보고, 저도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성하는 이는 스스로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며, 다른 이를 무시(無視)하고 업신여깁니다. 무시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길에 서 있다면 더 낮은 곳, 더 아픈 곳을 바라보아야 하고, 찾아야 합니다. 저는 업신여긴다는 말은 ‘없이 여기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즉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겁니다. 당연히 저 잘난 맛으로 사는 사람인 겁니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가짜입니다. 참성하는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은 아프고 낮은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화려하고 높은 곳입니다. 권력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돈에 집착합니다. 권력자와 가깝고, 돈 있는 자와 가깝습니다. 무슨 무슨 자리에 연연합니다. 권력자와 가까운 것이 자랑이고, 권력마저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돈 있는 자와 가까운 것이 기쁨이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고 하지만, 들여다보면 직위를 탐내는 것입니다. 명예는 희생에서 오는 겁니다. 희생이 빠진 명예는 그저 자리에 대한 집착일 뿐입니다. 참성이 진리를 방해하는 강적이라는 말이 진리를 공부하고 생각하는 동안 더 다가옵니다. 왜 가장 나쁜 강적으로 표현하였는지 알겠습니다. 참성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서 내가 나아가는 방향을 돌아봅니다. 돈이 좋고, 힘이 좋고, 자리가 좋고, 그런 사람들과 아는 게 기쁜 삶이네요. 그러고 보면 참성은 멀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그런 사람임을 모르고, 그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면 참성의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나 스스로가 진리를 방해하고 있는 사람임을 뼈아프게 느낍니다. 참성이 아닌 척 살고 있었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일손 부족과 학생 부족의 해결책

2024/02/13 11:17:09

일손 부족과 학생 부족의 해결책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출생률의 저하에서 비롯된 일손 부족과 학생 부족은 수많은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해결책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일손의 경우는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밖에 해결책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대학의 학생 부족은 외국인 유학생의 유치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모두 답답한 일입니다. 제가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제안입니다. 제안이 해결책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전문가가 함께 연구를 깊게 하여야 할 것으로 봅니다. 저는 예전에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의 자문위원과 한국어교육기관 대표자협의회 회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주로 유학생의 유치와 이탈에 관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손 부족 문제와 대학의 학생 부족 문제를 한꺼번에 풀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즉, 이 두 가지 문제를 연계하는 발상을 제안합니다. 예를 들어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하여 지방대학이나 전문대학을 살리고, 이렇게 유치한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대학에 어학연수를 오고, 학부에 들어간 학생이 이탈하는 이유는 대부분 취업 문제입니다. 돈을 벌어서 한국에 올 때 들었던 돈도 갚아야 하고, 본국의 가족에게 돈도 보내주어야 하는데, 아르바이트가 불법이거나 졸업 후 한국 내의 취업이 어렵다면 불법적인 방법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 뉴스의 인터뷰를 봐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외국인 학생이 졸업 후 돌아가는 것에 대한 학생과 고용자의 걱정이 많습니다. 저는 외국인 학생이 한국어 연수 단계부터 체계적으로 취업을 지원해 주는 것이 이탈을 방지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의 전공과 연계되는 취업이면 더 좋을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서 일본어를 공부할 때, 저와 같이 일본어를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은 대부분 요양 보호를 전공하려고 온 학생이었습니다. 일본어를 우선 배운 후에 요양 보호 관련 전문학교에 다니고, 요양원에서 실습하고, 취업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학생이 요양원이나 국가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식의 선순환적인 연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방법은 한국어를 세계 속에 제대로 보급하는 방법도 됩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어를 못해서 생기는 문제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귀국 후에도 한국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바탕도 마련될 것입니다. 한국어가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는 생각보다 큽니다.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한국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한국어 능력 부족이 차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대학의 전공교육과 연계하면 전문대학이나 학생 충원에 어려움을 겪는 일반대학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한 전공을 더 많이 만들고, 때로는 복수전공을 하게 하여, 귀국 후 하고 싶은 일에 관한 전공도 공부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농촌에 일손이 부족하면 대학에 농업 관련 학과가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물론 단순한 일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이 경우는 복수전공을 추천할 수도 있습니다. 전공과 연계하여 취업하게 되면 전문성의 부족에 따른 위험성을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졸업 후에 명확히 취업이 보장되고, 학기 중에는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아르바이트가 보장되고, 방학 등을 활용해서 수입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불법 취업이나 체류는 감소할 것입니다. 오히려 안정적으로 지역사회에 활력을 주게 될 겁니다. 지역 경제 발전에도 충분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도 중요한 이점입니다. 한국어 교육기관, 대학, 일손 부족의 사회, 지역 경제 등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순환적 외국인 유치가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 역시 외국인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를 상호문화적으로 발전하는 시민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무엇을 배우고 있나

2024/01/19 11:34:07

무엇을 배우고 있나 202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2024년입니다. 갑진년이라는 말도 한참 동안 들릴 겁니다. 용띠라는 말도 들리겠죠. 한동안은 올해와 작년이 헷갈릴 겁니다. 연도도 헷갈리고 나이도 헷갈릴 겁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옵니다. 저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지난해를 돌아보았습니다. 즐겁게 공부하고, 배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學者)라는 말은 참 좋습니다. 학자는 늘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저는 교수(敎授)라는 말보다는 학자라는 말이 좋습니다. 늘 배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작년을 돌아보니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만, 매주 공부하는 모임은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매주 수요일에는 수요언어문화교육 연구모임을 온라인으로 몇 년째 하고 있습니다. 7개국(미얀마, 태국, 베트남, 중국, 일본, 미국, 한국)에서 참여하는 수요 모임은 이제 연구의 모습이 자리잡히는 듯합니다. 올해 수요 모임 선생들은 20편의 논문을 등재학술지에 게재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우리의 생각을 세상에 나누는 것은 기쁨입니다. 또한 두 권의 저서와 두 권의 번역서도 출간하였습니다. 저서는 청소년 우수도서와 세종도서에 각각 선정되었습니다. 앞으로 수요 모임에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언어교육과 치유’의 문제, ‘상호문화교육과 시민교육’의 문제, ‘북한의 조선어교육’ 문제에 대한 연구가 더 깊어질 겁니다. 저는 우리 모임이 언어교육의 미래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I 시대에 언어교육은 치유여야 합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기쁘고, 마음에 힐링이 되기 바랍니다. 또한 문화교육은 서로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성장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시민교육이라고 하였습니다. 북한의 조선어교육은 장막 속에 가려진 느낌입니다. 하지만 서로의 모습을 더 잘 알고 소통해야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북한에서 하는 외국인을 위한 조선어교육을 연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더 공부가 재미있기 바라고, 더 즐거운 성과가 있기 바랍니다. 저는 월요일에는 옛글 읽기 모임을, 금요일에는 한문공부를 하였습니다. 월요일에 읽은 부처님의 이야기인 ‘월인석보’와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 ‘예수셩교젼서’는 옛말뿐 아니라 불교와 기독교 공부도 되었습니다. 금요일에 박재양 선생님과 둘이서 공부하는 한문공부에서는‘갑골문’, ‘천자문’, ‘맹자’를 일본책으로 공부했습니다. 한자의 기원과 한문 공부, 고전 공부를 통해서 사람을 배웁니다. 사실 언어 공부는 사람 공부이고 그대로 인간학입니다. 일본어와 한문 공부가 깊어지기 바라고, 저도 깊고 넓어지기 바랍니다. 배울수록 그릇이 커지고 남을 더 받아들이게 됩니다. 매주 일요일 오후에 세 시간 동안 고경자 선생님께 배우는 국악은 ‘국악치유 연구’와 이어집니다. 아내와 둘이 배우고 있는데,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민요, 사물놀이, 춤을 배우면서 한국문화와 치유를 느낍니다. 월 1회 요양원에 국악치유 공연을 갑니다. 공연은 하는 사람, 보는 사람, 듣는 사람이 모두 치유되는 시간입니다. ‘판굿, 아리랑, 회심곡, 사랑가’ 등과 치유에 대한 논문을 고경자 선생님과 썼습니다. 저는 논문도 치유의 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류시화 선생의 글이 있습니다. ‘오늘은 뭘 배웠나?’라는 질문이 담긴 글입니다. 스스로에게도 묻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배우고 깨달았는지. 날마다 배울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배우는 것이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함께 배우면 더 좋고, 이왕이면 배운 것을 나누면 더 좋겠습니다. 2024년도 기쁘게 배우고,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즐겁게 나누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배우고 계신가요? 오늘은 무엇을 배웠나요? 즐겁게 배우는 한 해가 되기 바랍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반말은 무척 어렵다

2023/12/31 16:53:50

반말은 무척 어렵다 한국어는 높임법이 발달한 언어입니다. 그중에서도 상대높임법, 즉 청자높임법이 발달하였습니다. 상대높임법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높임의 등급을 달리하는 겁니다. 상대높임법이 발달한 언어는 한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자바어 정도만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한국인이 아니라면, 한국어가 모어가 아니라면 상대높임법은 어렵습니다. 그중에서도 뜻밖에도 반말이 높임 표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한국어에서는 주로 종결어미에 의해서 상대 높임이 실현됩니다. 상대 높임의 등급은 학교문법에서는 일반적으로 격식체 4단계, 비격식체 2단계로 나눕니다. 이 중에서 격식체의 ‘하게체’와 ‘하오체’의 사용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게체의 경우는 장인과 장모의 말투나 나이 든 교수의 말투에 조금 남아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찾아보기가 어려우며, 하오체의 경우는 문서에 ‘하시오’라고 남아있거나 사극에서만 들을 수 있는 말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재외동포나 외국인의 경우에는 주로 격식체 2단계 즉 ‘합쇼체’와 ‘해라체’, 비격식체 2단계 즉 ‘해요체’와 ‘해체’만을 학습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주높임 단계인 ‘하십시오체’와 두루높임 단계인 ‘해요체’는 높임으로 볼 수 있고, 아주낮춤인 ‘해라체’와 두루낮춤인 ‘해체’는 낮춤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낮춤을 반말이라고 합니다. 반말은 반말 말하는 짧은 투의 말이라는 기원도 있습니다. 또한 아주 낮추지 않고, 반만 낮추는 일종의 높임이라는 기원도 있습니다. 보통 하게체나 하오체가 주로 이런 의미의 반말에 속합니다. 듣는 이를 낮추지 않으려고 쓰는 말투라는 의미입니다. 사위나 나이가 찬 제자에게 쓰는 말투입니다.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 학습자에게 높임법의 사용에 대해서 질문하면 높임 표현에 대해서 아주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높임법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겁니다. 그런데 반말 사용에 대하여 질문하면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적다는 대답이 많습니다. 이는 재외동포 아이들과는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외동포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가정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경우 반말이 자유롭습니다. 특히 해요체는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하지만 집 밖을 나가는 순간 반말은 아주 어려운 말이 됩니다. 한국어 사용의 실수는 주로 반말 사용에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한국어를 가르칠 때 높임 표현보다는 어쩌면 낮추는 표현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말의 상대높임법은 단순히 나이와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나이뿐 아니라 지위와도 관련이 되고, 친분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나이는 아래지만 나보다 지위가 높은 경우에 반말은 어렵습니다. 직장에서 괴로운 상황에 부닥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나보다 어리더라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반말하면 큰일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질풍노도의 중고등학생은 조심해야 합니다. 한국어에서 높임과 낮춤의 복잡함은 한국어 학습자에게 반말 사용이 매우 어려운 부분이라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외국인의 경우는 이러한 반말의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용을 꺼립니다. 실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어린 상대나 심지어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낮춤의 사용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나타납니다. 따라서 한국인, 외국인, 재외동포의 반말 사용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한편 반말이 꼭 나쁜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듭니다. 저는 종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게 불편합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경우에는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로 평상시에 반말하던 사람이 갑자기 존댓말을 하기 시작하면 화가 났다는 의미가 됩니다. 부모가 아이를 혼낼 때, 부부가 화가 났을 때 갑자기 존댓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적절한 존댓말과 반말이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관계가 일률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나의 사전이 없다

2023/12/19 12:40:14

나의 사전이 없다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나폴레옹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사전을 찾아보면 ‘불가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순진하게 사전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말이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사전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종이사전이 집에 없는 사람이 많고, 자기 사전이 없는 사람은 아마 대부분일 겁니다. 특히 사전이 있다고 해도 외국어 사전일 가능성이 많고, 국어사전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어사전이 있다고 해도 보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요. 인터넷으로 손쉽게 어휘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 사전을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릴 때 저는 사전을 좋아했습니다. 사전에 있는 낱말의 설명이 재미있었고, 사전을 빨리 찾는 게 신이 났습니다. 사전 빨리 찾기 게임도 만들었습니다. 동생들과 집에서 서로 어휘를 부르면 몇 번에 어휘를 찾는가 하는 게임이었습니다. 사전 찾기 순서를 잘 알아야 하고, 어떤 어휘가 어디쯤 있는지 알아야 이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저는 그때 사전을 펼쳐서 한 번에 어휘를 찾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만큼 사전을 많이 봤다는 의미일 겁니다. 지금은 그때만큼 실력이 안 될 것 같습니다. 20대에 미국에서 1년 정도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빌딩을 청소하는 일이었는데 힘은 들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청소가 힘들지 않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것은 그때의 경험 덕분일 겁니다. 사무실을 청소하면서 놀란 것은 책상 위에 사전이 놓인 곳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영어가 어휘도 많고, 비슷한 말이 많아서 사전을 찾는 것이 우리보다는 더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전을 가까이 두고 늘 보면서 편지를 쓰고, 문서를 만드는 모습은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요즘 저와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은 사전이 많습니다. 대략 500권 정도 된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 500권은 넘어 보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도 제가 가지고 있는 사전을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국어사전이 여러 종류 있습니다. 갈래사전이나 분류사전도 있고, 방언사전과 어원 사전, 고어 사전, 이두 사전도 여러 종류 있습니다. 문법 사전도 있고, 동의어 사전, 반의어 사전, 속담 사전, 고사성어 사전 등도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외국어 사전도 있습니다. 영어, 일어, 한자 사전이 여러 종류 있습니다. 좀 특이한 사전도 눈에 띕니다. 전에 샀던 드라비다어 사전, 아이누어 사전, 산스크리트어 사전, 라틴어 사전, 만주어 사전, 몽골어 사전 등이 보입니다. 시어 사전, 한국문화 상징 사전, 민족 생활어 사전, 야생 문화 사전, 언어학 사전, 응용언어학 사전, 국어학사전, 한국어교육학 사전, 영어교육 사전도 공부할 때 가까이해야 하는 사전들입니다. 교육학 사전도 여러 권짜리가 눈에 뜨입니다. 북한에서 나온 사전이나 중국 조선족 출판사에서 나온 사전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종종은 한국어 관련 사전을 북한이 더 자세하게 만든 경우도 있습니다. 의성어, 의태어 사전은 공부에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사전도 세밀한 종류에 따라 사전이 많습니다. 유어(類語) 사전과 연어 사전이 몇 권씩 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조선어 사전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단어 설명이 어떤 것은 논문 수준입니다. 이 밖에도 영어 어원사전, 일본어 어원사전 등도 여러 권씩 있네요. 저도 사전이 백 권은 넘겠네요. 최근 치매라는 단어를 공부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인 문세영 선생의 조선어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치매라는 단어가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말인데 우리가 아무 스스럼 없이 사용하기에 예전 사전으로 원 의미를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문세영 선생의 조선어 사전에는 치매를 한 단어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멍청이’. 우리 할아버지는 치매라는 말이 얼마나 나쁜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치매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전을 보는 게 즐겁기 바랍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나의 이름은

2023/11/07 15:55:20

나의 이름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내 이름을 쓸 일은 많이 있는데 부르는 일은 극히 적어짐을 느낍니다. 내가 이런저런 문서에 내 이름을 남겨야 하는 일은 많지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적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내 이름이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나라 여성의 경우는 더 심하고, 특히 주부인 경우는 자신의 이름을 들을 일이 더더욱 없어집니다. 누구 엄마라는 호칭이나 사모님 등으로 바뀌는 겁니다. 이는 사실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 아빠나 직책이 그대로 호칭이 되곤 합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으로는 부모, 형제, 친구가 있습니다. 나이가 먹으면 형제들도 서로 이름을 부르는 일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시면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사라진다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물론 자식이 성인이 되고 나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부모도 많습니다. 역시 결혼 후에는 ‘애비, 애미’로 호칭이 변하기도 합니다. 이름은 우리말에서 복잡한 특성을 갖습니다. 다른 언어에 비해서도 매우 특징적입니다. 이름은 사실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름에 온갖 좋은 뜻을 담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저희 삼형제만 해도 이름에 용(龍), 성(星), 왕(王)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주 거창합니다. 막내는 누군가의 실수로 왕이 비슷한 글자인 옥(玉)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름짓기도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우리 삼형제의 이름을 보면 용이 나타나고, 별이 보이며, 왕이 됩니다. 거창한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이름에 참 진(眞)이 쓰이고, 착할 선(善)이 쓰입니다. 덕(德)이나 인(仁) 등도 단골로 쓰입니다. 물론 성별에 따라 혁(赫)이나 철(鐵) 등이 쓰이기도 하고, 숙(淑)이나 희(希)가 쓰이기도 합니다. 성 차별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부모님이 바라는 바가 아들과 딸에 따라 달랐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성과 관계없이 부르기 좋고 발음이 예쁜 이름도 많이 쓰입니다. 물론 그 속에서도 여전히 성의 차이는 느껴집니다. 저의 경우도 이제는 제 이름을 쓸 일은 많으나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부모님조차 제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가끔가다 제 이름 전체를 부르는 사람을 만나면 깜짝 놀랍니다. 어색함을 느낍니다. 학생이 제게 ‘조현용 교수님’이라고 부르면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사실 선생님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은 누군가에게 지칭하는 것은 가능하나 직접 부르는 것은 불가합니다. 때로는 이름이 불리지 않아서 섭섭하고,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들도 점점 이름을 안 부릅니다. 이름이 살아지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최근 기독교 ‘성경 인명 지명 사전’을 보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경의 이름에는 그 나름의 뜻이 있습니다. 어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노아는 위로, 다윗은 사랑함,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 요한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안나는 은혜, 한나는 자비라는 의미라고 나와 있네요. 저에게는 무척이나 놀라운 이름도 있었습니다. 르우엘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이고, 아히야는 여호와의 동생이라는 설명입니다. 놀랐습니다. 오늘 글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람의 이름은 그 뜻을 좇아가며 읽고 부르면 느낌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종종 이름은 결실이 되기도 합니다. 희망을 갖고 부르는 이름은 주문처럼 뜻을 이루어 주기도 합니다. 나의 이름을 다시 새겨 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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