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두 종류의 사람

2021/04/03 14:18:22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두 종류의 사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말은 사람을 구별할 때 유용한 잣대가 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숫자가 주어지면 그 수에 맞추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틀에 짜인 생각이라는 점에서는 답답해 보이기도 하나 생각을 정리하여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데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좋은 방법이니 필요할 때는 취해야겠지요. 연설문이나 논설문, 설명문에서도 이런 방법이 자주 쓰입니다. 주로 예를 들 때는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정반합(正反合)의 구조라고나 할까요? 왠지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느낌이 납니다. 분석 대상을 둘로 나누면 명확히 갈라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둘이 나눔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죠. 대표적으로 음양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음양의 조화라는 말을 보면 음과 양은 서로 다투는 게 아니라 함께 하여야 더 아름다운 일로 보입니다. 다름을 ‘다툼’으로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음양의 대표는 여자와 남자입니다. 남녀라고도 하죠. 밤과 낮도 음양을 상징합니다.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기준이 불명확하기도 합니다. 어른과 아이도 그런 예로 보입니다. 밤과 낮도 그럴 수 있겠습니다. 때로는 세상이 나누어지지 않음을 깨닫는 것도 분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말은 제가 일본어 공부를 할 때 나온 읽기 지문입니다. 외국어 공부는 언어뿐 아니라 삶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를 지문에서 만나게 되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외국어 공부의 좋은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좋은 지문이 필요하겠네요.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은 내용에 대해서도 늘 고민을 해야 합니다. 예전에 언어를 배우던 교재는 주로 고전이었습니다. 한자를 배우고 라틴어를 배웠는데 세상을 만나고 다시 태어나게 되었던 겁니다. 제가 읽은 일본어 지문에서는 여러 가지 사람의 분류가 나와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분류도 많았고, 정말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먹어도 살 안 찌는 사람과 먹기만 하면 살이 찌는 사람의 분류는 맞아 맞아 하며 웃음이 났습니다. 제가 참석하는 일본어 시간에는 지문을 읽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기에 저도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눈다면 어떤 예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눈다면 어떤 예들이 있을까요? 처음에는 재미있는 예들이 떠오르다가 문득 전에 썼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그 내용은 행복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에 관한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해 지고 싶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행복이 소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말은 지금 세상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가요?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닌가요?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렵지만 생각을 바꾸어야 행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두 종류의 사람은 세상에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자신이 행복한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이 세상이 좋은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은 모두 행복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 좋은 세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내 눈과 머리를 감싸고 있는 한 겹이 세상을 달리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겹을 걷어내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모든 종교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다르려고 하는 경지일 겁니다. 얼핏 불행처럼 보이는 수많은 일도 사실은 행복이 모습을 바꾸고 있는 한 부분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행복이 늘 즐거운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행복에는 아픔도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프지만 행복합니다. 세상에는 행복에 관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만 모두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프게 깨닫습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우리에게 ‘자식(子息)’이란?

2021/03/04 18:27:02

우리에게 ‘자식(子息)’이란? 부처께서 아들을 낳았을 때 이름을 ‘라후라’라고 지었다.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가끔은 겸손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어리석게 보이는 이름을 쓰기도 하지만 보통은 아이에 대한 희망을 담으려고 한다. 예쁘고, 착하고, 씩씩하고,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들여다보면 나에 대한 기대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아들 ‘라후라’는 장애물이라는 의미였다. 걸림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출가하기 전이었던 부처님에게 자식은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집착이 생겼다는 한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라후라’가 태어났기에 출가도 쉬워질 수 있었다. 왕위에 대한 부담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에 보면 ‘라후라’ 역시 부처님의 제자로서 깨달음의 삶을 걷게 된다. 아마 부처님도 나중에는 아이의 이름을 ‘라후라’라고 지었던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라후라’를 부를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지었을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자식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쁨이 되기도 하고, 고통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내 깨달음의 근원이 된다. 자식이라는 단어를 보면서도 우리는 생각에 잠길 수 있다. 자식(子息)이라는 말의 한자를 살펴보면 ‘식(息)’은 숨을 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들은 부모에게서 받은 숨을 쉬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의 연원을 찾아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할지 모르나 우선 보기에는 자식은 숨을 쉬고 있는 아이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태어나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 나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도 되는 듯하다. 자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쁨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식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 그래서 자식은 우리에게 아픔이 되기도 한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자식은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가장 나다운 존재이기도 하다. 유전자 검사를 해 보면 금방 부모 자식 사이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고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도 부모와 자식이 친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닮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식은 많은 점에서 나와 달라 보이지만 실은 모든 측면에서 나와 통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내 자식이 애틋한 것은 내가 이미 그 길을 걸어 왔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잘 나면 잘 난 대로, 못 나면 못 난 대로 고통이 있다. 그 고통스러움을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자식이 안타까운 것이다. 나와 같이 키우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 다그치며 아이를 키우지만 아이는 어느새 예전의 내 방황을 닮고 있다. 그래서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픈 일이기도 하다. 서양의 성자라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보면서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을 더 해 보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은 시절 온갖 타락 속에 빠져 있자 어머니는 걱정 속에서 주교님을 찾아가 아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달라고 울며 매달린다. 그 때 주교께서 어머니께 해 주신 이야기는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이었다. 그 후 시간은 좀 더 지났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성자가 되어 돌아온다. 책을 덮은 뒤에도 ‘눈물의 자식’이라는 표현이 한참 동안 가슴에 남아 있었다. 엇나가는 자식을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눈물로 기도를 해 보았을까? 답답해하고 화를 낼 뿐 눈물은 빠져 있지 않았나 싶다. 자식이 방황할 때, 타락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지쳐 쓰러져 있을 때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눈물로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화를 내며 못마땅하다고 이야기한다. 자식을 위한 눈물은 어디에 갔는가? 자식을 제 길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은 부모의 눈물이다.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 자식을 바로 세운다. 우리말에는 자식과 관련된 여러 속담이 있다. ‘무자식이 상팔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등의 말은 모두 자식 키우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정답을 이야기한다. 부모는 자식을 어떠한 조건 없이 사랑하는 존재이다. 내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사랑한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칼바람을 지나며

2021/02/17 12:52:58

비유는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표현입니다. 비유를 들으면 금방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게 비유의 위력입니다. 바람을 비유하는 말 중에서 ‘칼바람’은 너무 강력해서 놀랍니다. 바람을 칼이라고 한 겁니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내 살을 베어 버리거나 찢을 것 같은 두려움도 생깁니다. ‘살을 에는 추위’라는 말에도 비슷한 감각이 느껴집니다. ‘에다’는 칼 따위로 도려내듯이 벤다는 의미입니다. 칼바람과 에는 추위는 한 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추위입니다. 그래서 칼바람은 두려움의 비유가 되기도 합니다. 겨울에는 좀 추워야 한다고 하지만 이는 따듯한 곳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일 겁니다. 한 데에서 추위를 견디며 일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매서운 추위는 그야말로 무섭고 두려울 것입니다. 가족 중에 누구라도 추위를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겨울 추위가 야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지나갑니다. 쌩하고 지나가는 바람에서 우리는 칼을 봅니다. 마치 얼음장이 날카롭게 깨어져 바람결을 따라 날아드는 모습입니다. 바람은 원래 소리가 무서운 법인데, 소리가 모습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바람이 상처가 되기 때문일 겁니다. 날카로운 소리에서 날이 선 칼을 봅니다. 그래도 겨울바람이 일 년 내내 계속 되지 않음은 희망입니다. 바람을 맞고 선 소나무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몸을 기울이고, 그러면서도 세상을 향합니다. 오랜 시간을 견디며 자라납니다. 소나무가 겨울의 상징이 된 것은 겨울바람의 추위에도 푸르게 서있는 모습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소나무를 보면서 인고(忍苦)의 세월을 떠올립니다. 고통을 말없이 이겨낸 대견함에 보고만 있어도 감동이 옵니다. 소나무의 껍질을 보면서 저는 다시 칼바람을 떠올렸습니다. 칼바람에 상처 입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다 터 버린 손등이나 살갗의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갈라진 모습이 고통의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갈 듯이 갈라진 모습에서 우리는 때로 아름다움을 봅니다. 참 묘한 일입니다. 지식과 감정의 차이를 느낍니다. 안쓰러움이 감동이 되는 일도 많습니다. 참 어려웠을 겁니다. 힘든 세월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이겨냄이 고맙습니다. 얼마 전 가까운 분에게서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나무의 사진과 글을 받았습니다. 여기저기 잘리고 꺾인 모습이었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겨낸 멋이 있었습니다. 글을 보내신 분은 비워냄을 이야기했습니다. 겨울나무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간에 스스로를 맡긴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운 시간도 즐거운 시간도 지금이라서 의미가 있습니다. 인고의 시간은 지나고 나면 멋이 되는데, 지내는 동안은 칼바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 바람을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겨울은 참으로 잔인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고통 속에서 칼바람을 맞은 이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칼바람을 지난 이의 가슴이 말없이 서 있는 소나무처럼 쓸쓸하지만 따듯합니다. 칼바람이 불수록 서로의 따듯함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기 바랍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옵니다. 세상의 이치가 참 놀랍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겨울에는 좀 추워야 한다고 했을 겁니다. 물론 봄에도 꽃샘추위가 있을 겁니다. 또 다른 어려움도 오겠죠. 그러나 겨울바람과는 다른 봄바람이 불 것이고, 하나 둘씩 꽃이 피어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칼바람을 이겨낸 서로가 더 고맙겠죠. 아, 갑자기 매화, 동백이 보고 싶고, 개나리, 진달래가 보고 싶네요. 어서 칼바람을 지나가게 하고, 꽃 피는 봄이 오면 따뜻한 햇살 가득 맞고 싶네요.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코끝을 꿈꾸다

2021/02/05 12:39:04

우리 몸은 각각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모두 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서 코는 특이한 점이 많은 곳입니다. 코는 자기가 중심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선 코는 나를 가리키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일본 등의 나라에서는 나를 가리킬 때 코를 가리킵니다. 코가 나의 대표인 셈입니다. 한자에서 나를 나타내는 스스로 자(自)가 원래는 코[鼻]를 나타내는 글자였다는 점도 코가 나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입니다. ‘내 코가 석 자’라는 속담에서도 코가 내 상황을 의미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콧대가 높다’와 같은 표현에서는 자신감, 자만심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역시 나와 관계가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는 붉게 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날씨가 추우면 코부터 빨개집니다. 술을 많이 마셔도 코가 빨개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술주정뱅이를 그릴 때 코를 빨갛게 그리기도 합니다. 또한 코를 자꾸 만지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는 긴장하거나 뭔가 숨기고 있을 때 코를 만지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코는 거짓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코를 만지는 것이 거짓말을 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자꾸 코를 만지는 습관이 있다면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면 다른 곳이 아니라 코가 길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코는 우리의 감정을 보여줍니다. 눈물이 참을 수 없는 감정의 쏟아짐이라면 코는 감정을 누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코끝이 찡해지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주로는 감동적인 장면에서 코끝이 찡해 옵니다. 감동이라는 말이 감정이 움직이는 것이니 감동이 코끝으로 몰려 온 느낌입니다. 왠지 모르지만 눈물의 전 단계 느낌도 있습니다. 코끝이 찡해지면 나도 모르게 코에 힘을 주고 인상을 쓰게 됩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내 감정을 보여줍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코끝에 더 힘을 주게 됩니다. 콧등이 시려오고, 입술도 더 다물게 됩니다. 내 속에 담긴 감정의 흐름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합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엉뚱하게 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코끝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건 바로 저의 엉뚱한 상상에서 출발합니다. 며칠 전에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코끝이 찡한 장면이 나왔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말로 위로가 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말이 올해의 유행어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코끝’입니다. 엉뚱합니다만 저는 코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서 ‘코로나 끝’이 동시에 생각이 났습니다. 올해는 ‘코끝’의 세상이기 바랍니다. 코끝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코로나가 완전히 사라지기 희망합니다. 작년의 유행어에는 고통이 쌓여 있었는데 올해의 유행어에는 희망이 가득하기 바랍니다. 즐거운 유행어를 꿈꾸어 봅니다. 그런 유행어를 우리가 만들어 사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지금 코로나로 너무나 힘들기는 하지만 코로나가 끝나고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고 계획해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보면 코로나가 안 끝나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기는 어렵지만 그래서 더욱 자주 전화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오히려 새로 시작하는 일도 많습니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 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도 고통이 됩니다.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고통에 마음이 아려옵니다. 힘들지만 버텨내고 모두 건강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꼭 다시 일어나기 바랍니다. 다시 밝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힘든 일보다 기쁜 일이 더욱 많기 바랍니다. 코끝!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몸소와 손수

2021/01/21 13:12:05

몸소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손수라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몸소는 직접 제 몸으로라는 뜻입니다. ‘친히’와 비슷하게 쓰입니다. 물론 친히에서 ‘친(親)’은 한자입니다. ‘손수’라는 말도 몸소와 비슷하게 쓰입니다. 굳이 설명을 달리하자면 손수는 직접 제 손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 사용에서는 손이나 몸이나 거의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손도 몸이고 몸도 손인 셈입니다. 그런데 손수는 ‘손’과 ‘수’의 복합어처럼 보입니다. 특히 손 수(手)라는 한자가 있어서 우리말 손과 한자어 수가 합쳐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몸소와 손수는 사실 같은 구성입니다. 손수의 옛말은 ‘손소’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라는 한자에 끌려서 손수로 발음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원을 혼동하기 쉬운 우리말 어휘입니다. 어려워서 공부에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보통 몸소나 손수, 친히라는 말을 들으면 나이 드신 분이나 지위가 높은 분이 생각납니다. 직접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직접 하는 모범적이거나 존경스러운 모습을 떠올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이나 아랫사람이 몸소, 손수, 친히 어떤 일을 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하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몸소는 대접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그것을 물리치고 하는 행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데 직접 하니까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몸소 어떤 일을 하면서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일은 원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거나 내가 해도 되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 다른 사람이 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점점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손도 멈춰있습니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습니다. 밖에서도 집에서도 동작이 느려집니다. 누군가의 양보나 배려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몸소의 반대말은 의존이고 게으름입니다. 살면서 몸소 하는 일이 줄어든 것을 출세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관점이란 게 보통 그렇습니다. 가방도 자기가 들지 않고, 운전도 자기가 하지 않습니다. 물도 직접 떠 마시지 않습니다. 커피도 안 타죠. 청소는 어떨까요? 자기가 머무르는 공간이지만 청소는 해 본 지 오래입니다. 도대체 직접 하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전문가는 전문 분야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소 자기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왜일까요? 몸소가 더 빛을 발하는 장면은 굳이 본인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할 때입니다. 길거리를 청소하고,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힘들어 하는 사람을 돕는 모습은 몸소나 손수가 세상을 향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이죠. 누구나 몸소 먼저 나서서 하려고 하고, 서로를 도우려 한다면 세상은 밝아질 겁니다.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몸소의 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도 세상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고, 더 사랑하여야 할 겁니다. 그게 참다운 몸소의 미학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미국에 계신 선생님께 코로나 19에 어떻게 지내시냐고 안부 글을 올렸더니 몸소가 가득한 답이 왔습니다. ‘작은 일도 몸소 하며 자질구레한 일들에 훌쩍훌쩍 날이 갑니다. 울기도 몸소, 그립기도 몸소, 괜찮기도 몸소, 동지가 다가오며 해가 짧아지니 자주 밤길도 몸소 걸으며 다 좋은 세상이 참 기쁘고 고맙습니다.’ 몸소가 한가득이어서 더 기뻤습니다. 선생님이 건강하시다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몸소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저도 몸소 하는 일을 늘려야겠습니다. :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세상이 ‘죽어라 죽어라’ 할지라도…

2021/01/07 14:12:08

‘설상가상(雪上加霜)’을 순우리말로 바꾸면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합니다. 눈 위에 서리가 내린 모습, 괴로움이 연이어 닥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견디기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일 겁니다. 이럴 때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는 ‘죽어라 죽어라 한다’도 있습니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단어인 ‘죽다’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쓴 표현으로, 나는 살고 싶은데 주변 상황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연재해는 나를 늘 위태롭게 합니다. 살아있는 게 얼마나 운이 좋은 것인가를 느끼는 순간도 많습니다. 갑자기 태풍이 불기도 하고, 큰비가 내리기도 합니다. 내가 지나는 길에 언제든지 산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지나친 걱정이 나를 해치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입니다. 우리나라에 지진이 적은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지진이 일상이라면 어떨까요. 늘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전염병은 현대사회에서 좀 덜한 위험이 됐지만 예전에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제일 무서워한 게 호환과 마마였습니다. 호환은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는 것이니 호랑이만 조심하면 별로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마마’는 다릅니다. 한 번 천연두나 홍역이 돌면 누구도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내게 닥치지 않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입니다. 예전에는 왕비를 비롯한 왕족들도 ‘마마’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 ‘마마’가 원래 왕이나 왕비 등 왕족을 부르는 호칭인데 마마에 마마가 세상을 떠나는 일마저 생긴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가족이 아프거나 다치거나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가족의 일이지만 그대로 내 일이기도 합니다. 애타는 마음에 가슴을 치고, 가슴을 쥐어뜯습니다. 그야말로 죽어라 하는 듯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것도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내 배 곯는 것은 참을 수 있을지 모르나 자식이 배고파하고 늙으신 부모님이 굶주리는 것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아픔입니다.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합니다. 벌이가 늘어가기는커녕 빚이 늡니다. 도대체 하루하루를 버텨낼 재간이 없습니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 중에 경제적 원인이 제일 크다고 하니 그 고통이 감히 짐작됩니다. 사람에게 받은 배신은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등 뒤에 칼을 꽂는다는 표현에서 고통을 마주하게 됩니다. 배신은 주로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등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니까요. 사랑이 배신이 됩니다. 믿음이 배신이 됩니다. 그래서 더 아픕니다. 죽어라 하고 노력했는데 끝내 이뤄지지 않았을 때 절망은 죽음에 가까이 갑니다. 살 의지가 생기지 않습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배신으로 다가옵니다.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자리에서 끝내 멀어집니다. 그냥 낭떠러지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죽어라 죽어라 한다고 해서 따를 수는 없습니다. 듣지 말아야 할 명령입니다. 아니 환청입니다. ‘살아라 살아라’ 하는 소리를 잘못 듣고 있는 겁니다. 힘이 드니까 힘을 내야 합니다. 힘이 들어가는 일에 힘없이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나를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 같지만 나는 살아야겠다, 살리라 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알고 보면 힘들지만 살아내는 게 행운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불운이 계속됐다면 이제부터는 행운이 올 차례입니다. 작은 운부터 찾아가며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경제가 파탄 나고,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게 됐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합니다. 살아내야 합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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