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몸소와 손수

2021/01/21 13:12:05

몸소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손수라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몸소는 직접 제 몸으로라는 뜻입니다. ‘친히’와 비슷하게 쓰입니다. 물론 친히에서 ‘친(親)’은 한자입니다. ‘손수’라는 말도 몸소와 비슷하게 쓰입니다. 굳이 설명을 달리하자면 손수는 직접 제 손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 사용에서는 손이나 몸이나 거의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손도 몸이고 몸도 손인 셈입니다. 그런데 손수는 ‘손’과 ‘수’의 복합어처럼 보입니다. 특히 손 수(手)라는 한자가 있어서 우리말 손과 한자어 수가 합쳐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몸소와 손수는 사실 같은 구성입니다. 손수의 옛말은 ‘손소’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라는 한자에 끌려서 손수로 발음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원을 혼동하기 쉬운 우리말 어휘입니다. 어려워서 공부에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보통 몸소나 손수, 친히라는 말을 들으면 나이 드신 분이나 지위가 높은 분이 생각납니다. 직접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직접 하는 모범적이거나 존경스러운 모습을 떠올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이나 아랫사람이 몸소, 손수, 친히 어떤 일을 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하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몸소는 대접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그것을 물리치고 하는 행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데 직접 하니까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몸소 어떤 일을 하면서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일은 원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거나 내가 해도 되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 다른 사람이 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점점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손도 멈춰있습니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습니다. 밖에서도 집에서도 동작이 느려집니다. 누군가의 양보나 배려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몸소의 반대말은 의존이고 게으름입니다. 살면서 몸소 하는 일이 줄어든 것을 출세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관점이란 게 보통 그렇습니다. 가방도 자기가 들지 않고, 운전도 자기가 하지 않습니다. 물도 직접 떠 마시지 않습니다. 커피도 안 타죠. 청소는 어떨까요? 자기가 머무르는 공간이지만 청소는 해 본 지 오래입니다. 도대체 직접 하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전문가는 전문 분야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소 자기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왜일까요? 몸소가 더 빛을 발하는 장면은 굳이 본인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할 때입니다. 길거리를 청소하고,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힘들어 하는 사람을 돕는 모습은 몸소나 손수가 세상을 향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이죠. 누구나 몸소 먼저 나서서 하려고 하고, 서로를 도우려 한다면 세상은 밝아질 겁니다.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몸소의 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도 세상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고, 더 사랑하여야 할 겁니다. 그게 참다운 몸소의 미학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미국에 계신 선생님께 코로나 19에 어떻게 지내시냐고 안부 글을 올렸더니 몸소가 가득한 답이 왔습니다. ‘작은 일도 몸소 하며 자질구레한 일들에 훌쩍훌쩍 날이 갑니다. 울기도 몸소, 그립기도 몸소, 괜찮기도 몸소, 동지가 다가오며 해가 짧아지니 자주 밤길도 몸소 걸으며 다 좋은 세상이 참 기쁘고 고맙습니다.’ 몸소가 한가득이어서 더 기뻤습니다. 선생님이 건강하시다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몸소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저도 몸소 하는 일을 늘려야겠습니다. :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세상이 ‘죽어라 죽어라’ 할지라도…

2021/01/07 14:12:08

‘설상가상(雪上加霜)’을 순우리말로 바꾸면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합니다. 눈 위에 서리가 내린 모습, 괴로움이 연이어 닥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견디기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일 겁니다. 이럴 때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는 ‘죽어라 죽어라 한다’도 있습니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단어인 ‘죽다’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쓴 표현으로, 나는 살고 싶은데 주변 상황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연재해는 나를 늘 위태롭게 합니다. 살아있는 게 얼마나 운이 좋은 것인가를 느끼는 순간도 많습니다. 갑자기 태풍이 불기도 하고, 큰비가 내리기도 합니다. 내가 지나는 길에 언제든지 산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지나친 걱정이 나를 해치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입니다. 우리나라에 지진이 적은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지진이 일상이라면 어떨까요. 늘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전염병은 현대사회에서 좀 덜한 위험이 됐지만 예전에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제일 무서워한 게 호환과 마마였습니다. 호환은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는 것이니 호랑이만 조심하면 별로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마마’는 다릅니다. 한 번 천연두나 홍역이 돌면 누구도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내게 닥치지 않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입니다. 예전에는 왕비를 비롯한 왕족들도 ‘마마’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 ‘마마’가 원래 왕이나 왕비 등 왕족을 부르는 호칭인데 마마에 마마가 세상을 떠나는 일마저 생긴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가족이 아프거나 다치거나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가족의 일이지만 그대로 내 일이기도 합니다. 애타는 마음에 가슴을 치고, 가슴을 쥐어뜯습니다. 그야말로 죽어라 하는 듯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것도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내 배 곯는 것은 참을 수 있을지 모르나 자식이 배고파하고 늙으신 부모님이 굶주리는 것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아픔입니다.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합니다. 벌이가 늘어가기는커녕 빚이 늡니다. 도대체 하루하루를 버텨낼 재간이 없습니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 중에 경제적 원인이 제일 크다고 하니 그 고통이 감히 짐작됩니다. 사람에게 받은 배신은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등 뒤에 칼을 꽂는다는 표현에서 고통을 마주하게 됩니다. 배신은 주로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등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니까요. 사랑이 배신이 됩니다. 믿음이 배신이 됩니다. 그래서 더 아픕니다. 죽어라 하고 노력했는데 끝내 이뤄지지 않았을 때 절망은 죽음에 가까이 갑니다. 살 의지가 생기지 않습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배신으로 다가옵니다.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자리에서 끝내 멀어집니다. 그냥 낭떠러지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죽어라 죽어라 한다고 해서 따를 수는 없습니다. 듣지 말아야 할 명령입니다. 아니 환청입니다. ‘살아라 살아라’ 하는 소리를 잘못 듣고 있는 겁니다. 힘이 드니까 힘을 내야 합니다. 힘이 들어가는 일에 힘없이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나를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 같지만 나는 살아야겠다, 살리라 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알고 보면 힘들지만 살아내는 게 행운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불운이 계속됐다면 이제부터는 행운이 올 차례입니다. 작은 운부터 찾아가며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경제가 파탄 나고,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게 됐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합니다. 살아내야 합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서점의 진화, 혹은 본 모습

2020/12/28 14:32:44

동네 서점이 하나둘씩 문을 닫으면서 인문학의 위기, 독서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고, 팔리는 책도 아이들의 참고서나 처세에 관한 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온라인 서점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서 서점에 가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또한 스마트폰을 비롯해서 재미난 매체들이 생기면서 서점의 쇠퇴를 부채질한 측면도 있습니다. 작은 서점들뿐 아니라 대형 서점도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미래학자들의 예상이 맞는구나 하며 우울해 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최근에는 새로 문을 여는 서점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헌책방도 오히려 새로 생겨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비밀은 서점의 변신, 진화에 있습니다. 이제 서점은 더 이상 책만을 파는 공간이 아닙니다. 대형 서점에 가면 한쪽에 차나 음식을 파는 경우가 있었고, 가끔 저자와의 대화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작은 동네서점으로 들어왔습니다. 책을 사기만 하는 서점이 아니라 문화 공간, 생활공간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서점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읽습니다. 도서관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겁니다. 책에 관해서 토론도 하고 작가도 만납니다. 좋아하는 작가를 직접 만나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예전에도 있기는 했지만 서점을 중심으로 독서 모임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서점에 잘 어울리는 일입니다. 책을 사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읽으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이 독서의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책방은 책을 팔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좋은 책을 권하고, 읽은 책의 느낌을 나누는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러한 모습이 원래 서점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서점에서 차를 파는 곳도 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시는 분 중에는 차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직접 담은 전통차를 내놓기도 하고, 바리스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커피를 내 놓기도 합니다. 집에 온 손님에게 차를 내 놓듯이 말입니다. 향 깊은 커피를 마시면서 좋은 사람과 좋은 음악도 듣는 서점의 모습은 행복 자체입니다. 북 카페의 반대개념이라고 할까요? 카페에 책을 장식한 것이 아니라 서점에서 여유 있게 차를 마시는 거죠. 서점에서는 때로 작은 음악회도 열립니다. 좋아하는 음악가를 가까운 곳에서 만나는 일은 설레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물론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도 행복한 기쁨이지요. 작은 공연장이 수없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몇 십 명이 모인 자리이지만 노래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정성이 가득합니다. 연주자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노래하는 이의 숨소리도 놓칠 수 없습니다. 청중의 표정은 음악가에게 새로운 힘으로 다가옵니다. 때론 서점에서 무언가를 배우기도 합니다. 책과 관련된 인문학은 물론이요, 악기도 배우고 미술도 배웁니다. 도자기나 글씨 쓰기를 배우기도 하고, 뜨개를 배우기도 합니다. 책이 있는 곳이니 인문학의 향기가 있는 것은 당연할 수 있겠습니다. 말로만 듣던 고전을 이야기하고, 역사를 읽고, 경전을 읽습니다. 선조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책 속에서, 강연 속에서 살아납니다. 무엇을 배우는 일만큼 사람을 살아있게 만드는 일은 없는 듯합니다. 가능하다면 끊임없이 궁금해 하고,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학이시습(學而時習)’이 바로 배우고 직접 해 보는 삶을 의미합니다. 기쁜 일이지요. 이제 우리의 서점은 따뜻하고 살아있습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괜찮다, 일없다

2020/12/10 13:18:33

사소한 실수부터 깊은 절망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는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울(憂鬱)은 이미 감정이 아니라 병이 되었습니다. 절망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병이 되기도 합니다. 현대인에게 어떤 질병보다 힘들고 답답한 것이 우울입니다. 한자만 봐도 걱정[憂]이 빽빽하게[鬱] 들어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 필요할 때입니다. 이때 들려주는 괜찮다는 말, 일없다는 말은 힘든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남한 말과 북한 말의 차이를 말할 때 ‘괜찮다’와 ‘일없다’를 예로 들기도 합니다. 남한이나 북한에서만 쓰는 말이 아닌데도 왠지 남북의 언어 차이 같은 느낌도 드는 표현입니다. 두 표현이 같은 뜻은 아니어서 사용에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안심을 시키는 장면에서 쓰일 때가 많아서인지 왠지 친근한 느낌입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가에 따라 느낌도 무척 달라집니다. 둘 다 거절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긴 거절에도 예의가 필요하고 안심이 필요합니다. 저는 괜찮다는 말을 떠올리면 토닥이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울먹이고 있는 아이에게 괜찮다는 말만큼 큰 위로가 없습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일없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등의 표현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괜찮다’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라집니다. 괜찮다는 말은 괜히 하지 않는다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따라서 ‘괜히’의 어원을 찾는 게 실마리가 됩니다. 괜히는 ‘공연히’가 줄어든 말입니다. 괜히 하지 않는다는 말은 공연히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즘 ‘공연히’라는 말의 사용이 점점 줄어들어서인지 ‘괜히’와 ‘공연히’의 연관성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합니다. 괜찮다는 말은 공연히 하지 않아도 된다, 까닭 없이, 일부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괜찮다의 어원을 관계하다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만 관계하다가 괜히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하는 게 어렵습니다. 의미상 비슷하다고 해서 어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관계하지 않는다고 해석을 하는 경우에는 괜찮다의 의미를 나와는 상관없다는 뜻으로 생각해 버리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위로의 뜻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괜히를 공연히의 의미로 해석하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공연히 하지 않는 게 왜 위로의 의미가 될까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걱정을 만납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 것을 참기 어렵습니다. 자꾸 눈물이 나고 감정이 복받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괜히 더 슬프고 힘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옆에 와서 가만히 와서 공연히 그 생각에 빠져 있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일없다’에서 일은 의미가 중립적입니다. 특별히 나쁘거나 좋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말에서는 ‘무슨 일 있어요? 별일 아니야.’와 같은 표현에서는 문제 상황을 의미하게 됩니다. 좋은 일도 많을 텐데 괜히 일이라고 하면 덜컥 겁이 납니다. 큰일은 주로 좋은 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큰일 났어요.’와 같은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하죠. 무슨 일이 있을까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럴 때 들려주는 말이 ‘일없다’입니다. 일이 없다는 말은 걱정할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괜찮다는 말과 일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세상을 살면서 큰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에게 닥쳐오는 일이 별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해도 괜히 절망하지 말고 힘을 내세요. 더 좋아질 겁니다. 위로의 말이 지치고 힘든 우리의 어깨를 토닥여 줍니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 일없어. 힘 내.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면 상대가 걱정할까봐 “나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순간입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사랑을 말하다

2020/11/26 11:37:55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노래 가사 속에도 무수히 들어 있고, 정의도 많은 이들에 의해 내려졌으나 사랑은 빈 마음의 공간처럼 때에 따라, 곳에 따라, 내 마음에 따라 달리 뜻이 새겨집니다. 사랑의 종류를 나열하면서 육체적, 정신적 사랑을 나누기도 하나 사랑은 근본적으로 그리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움이 먼저고, 몸은 따라오는 것이죠. 그렇다고 마음 사랑만 중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민요에도 사랑이야기는 정말 많습니다. 창부(倡夫)타령에 보면 ‘사랑 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 게 무엇이더냐, 보일 듯이 아니 보이고, 잡힐 듯하다 놓쳤으니. 나 혼자서 고민하는 게 그것이 사랑의 근본이냐.’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사랑은 안타깝고, 그리운 것이고, 혼자서 앓는 마음입니다. 안 만나고 있을 때는 보고 싶고, 만나고 있을 때는 헤어질까 두려워하는 왠지 바보스러운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아프지만 아름답고, 슬프지만 기쁘기도 한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어원은 좀 복잡합니다. 우리말의 어원을 설명할 때 한자가 끼면 길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사랑이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어원을 한자어 사량(思量)에서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은 옛말에서 생각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한자어 사량의 뜻이 깊이 생각한다는 의미여서 서로 통한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말을 잇는 명확한 증거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발음이나 모양이 ‘사람’과 닮아있음은 금방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이 사람임을 떠올리면 사랑의 어원을 사람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역시 명확한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살다, 삶, 사람, 사랑’을 같은 어원으로 보고 설명하려는 학자도 많습니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데 사랑이 필요하니 이러한 설명을 하려는 것이죠. 정답의 여부와 관계없이 아름다운 해석입니다. 저는 사랑의 어원을 이야기할 때 한 쪽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은 피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없다는 말도 맞겠습니다. 다만 사랑이라는 말이 원래 ‘생각하다’라는 의미였음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이 점을 잘 기억했으면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생각하는 것의 의미도 여러 가지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보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사랑하는 사람도 많은 겁니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으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많다는 의미입니다.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위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우리 생각은 안 해요?’라는 말에서는 우리를 위하지 않느냐는 말, 배려하지 않느냐는 말이 됩니다. 누구 생각을 하고 산다는 말은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말,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생각하는 겁니다. 사랑은 그래서 기도이기도 합니다. 두 손을 모으면 그대로 눈앞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루하루가 힘들다는 느낌이 드는 세상입니다. 살기가 힘들수록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웃고, 우는 사람이 참 고맙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내 생각으로 웃을 수 있기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기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나부터 웃어야겠네요. 내가 슬픈데 그가 기쁘기는 어려울 겁니다. 내가 건강하고 밝아야 할 이유가 사랑에도 있습니다. 사랑은 따뜻한 그리움이고 함께 하는 행복입니다. ‘창문을 닫아도 스며드는 달빛, 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이라는 노랫말이 창부타령에 나옵니다. 사랑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 바랍니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고, 가만히 안아주고, 사랑의 이야기를 건네면서.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죄를 짓다, 복을 짓다

2020/11/11 17:37:14

<죄와 벌>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죄’라고 하면 금방 떠오르는 연관어는 ‘벌’인 듯하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을 범죄라고 한다. 죄는 ‘저지르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저지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는 의미다. 범하다나 저지르다는 모두 매우 부정적인 느낌이 강한 단어이다. 한편 죄를 짓는다는 말도 하는데 ‘짓다’에는 가치중립적인 느낌이 있다. 짓다는 만든다는 의미인데 없는 것을 만들기도 하고, 있는 것을 더 좋게 만들기도 한다. 짓다가 들어가는 말을 보면 미소를 짓고, 웃음을 짓고, 눈물을 짓고 한숨을 짓는다.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행위의 느낌이 난다. 짓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것은 집과 밥과 옷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에 짓는다는 표현을 썼다. 그 중에서도 집은 짓는 것에 대명사이다. 집의 어원도 짓다와 관련이 된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지붕은 집과 어원이 관련되는 어휘이다. 여담이지만 예전에는 ‘블럭’ 장난감을 ‘집짓기’라고 했다. 집짓기 장난감으로 집만 짓는 것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짓는 것의 기본은 집이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짓는 것 중에서 제일 안 좋은 것은 아마도 죄를 짓는 게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나는 죄를 짓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아픔이 느껴진다. 죄를 범하는 것이나 저지르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 든다. 죄를 지었다는 말이나 죄를 짓는 느낌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라. 심각한 죄뿐 아니라 밝혀지지 않은 작은 잘못까지도 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즉 법적인 문제만 죄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죄에는 벌이 따른다. 그래서 우리말 표현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라는 표현도 생겼다.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이런 표현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벌을 받는 방법도 다양하다. 주리를 틀고 육시를 하는 무시무시한 방법도 있겠지만 죄를 씻는 데는 다른 방법도 있다. 한국어에는 이럴 때 쓸 수 있는 표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을 짓다’이다. 물론 복을 짓는 행위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살아가는 일이 모두 복을 짓는 일이어야 하고, 그래야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죄를 지었다면, 죄를 짓는 느낌이 든다면 더 열심히 복을 지어야 한다. 보통 우리는 복은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열심히 빌면 복이 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많이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복을 받는 것뿐 아니라 짓는 것으로도 보았다. 적극적으로 복을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복을 짓는 것은 나를 위하는 일들이 기본적으로는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약한 이에게, 가여운 이에게, 가난한 이에게 잘해야 한다. 그게 복을 짓는 일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많은 죄를 짓고 산다. 나는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았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죄가 된다. 세상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다. 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도 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내 행복을 바라볼 때 죄스런 느낌이 든다. 이럴 때일수록 복을 지어야 한다. 나도 모르는 내 죄를 위해서도 그렇고,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위해서도 그렇다. 죄가 많을수록 더 많은 복을 지어야 한다. 죄를 짓는 것에 반대는 벌을 받는 게 아니라 복을 짓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복을 많이 지어야겠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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