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문해력 어휘 상차림

2025/05/21 11:08:37

문해력 어휘 상차림 요즘은 오전 수업 후에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일이 잦습니다. 밖에 나가는 게 귀찮다는 생각도 들고, 얼른 식사하고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물론 연구실에 돌아와서는 식곤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아무튼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입니다. 새로운 한가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저희 학교 식당의 음식이 꽤 괜찮습니다. 가성비, 즉 가격 대비 질은 매우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밥을 먹는 경우에는 상차림을 보면서 어휘 이야기를 홀로 풀어보기도 합니다. 상 위에 있는 모든 음식은 어휘 공부의 재료가 됩니다. 오늘의 식단은 밥, 불고기, 계란말이, 어묵볶음, 샐러드, 김치, 시금치입니다. 오늘의 어휘 식단이기도 합니다. 우선 불고기를 볼까요? 불고기는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발음의 측면에서 보면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발음이 [물꼬기]인데 불고기는 [불고기]이기 때문입니다. 물과 불의 차이만 있는데 뒷소리가 된소리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게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음운현상에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불고기에서 불은 타오르는 불과는 관련이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오늘 식사에 나온 불고기도 국물이 있는 뚝배기 불고기였습니다. 불에 익혔다는 것은 맞겠지만 불에 직접 구운 요리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에 태운 것과는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한편 불고기의 불을 색깔로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불고기와 비슷한 구조인 불곰이나 불개미의 경우도 된소리로 발음하지 않는데, 의미를 붉은 곰, 붉은 개미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붉은색의 느낌이 나는 단어로는 불여우도 있습니다. 붉은 여우라는 의미입니다. 타는 불과는 관계가 적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불고기도 붉은 고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된소리로 발음하지 않는 것이라는 설명도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어휘이지만 식탁 위의 어휘 재료로는 충분한 듯합니다. 다음으로는 김치와 시금치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김치는 한자어 침채(沈菜)에서 온 것으로 봅니다. 침채의 옛 발음이었던 딤채가 김치로 변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채소의 의미인 ‘채’는 우리말에서 ‘치’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금치가 바로 그 예입니다. 시금치는 뿌리가 붉은 적근채(赤根菜)에서 온 말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채는 ‘치’로 발음됩니다. 배추는 백채(白菜)에서 상추는 생채(生菜)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합니다. 채소의 채가 ‘치’나 ‘추’로 우리말에서는 변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어묵볶음과 샐러드를 보겠습니다. 사실 어묵볶음이라는 말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는 늘 ‘뎀뿌라’라는 말로 불렀습니다. 얇은 ‘오뎅’을 볶은 요리를 뎀뿌라라고 하였고, 도시락 반찬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나중에 뎀뿌라가 일본에서는 튀김의 의미인 것을 알고 무척이나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뎀뿌라는 사실 포르투칼어 ‘tempero’에서 일본에 전해진 말입니다. 일본을 거치고 우리말로 들어오면서 의미가 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뎀뿌라라는 말 자체를 잘 안 사용하는 듯합니다. 샐러드도 우리는 주로 ‘사라다’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샐러드와 사라다는 다릅니다. 사라다는 마요네즈가 있어야 하고, 단맛이 강합니다. 저는 샐러드에 그렇게 다양한 드레싱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드레싱 주문이 어렵습니다. 사라다는 외래어가 일본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모하는지 보여주는 예입니다. 카레도, 돈가스도, 라면도 원래의 모습과는 달라진 말들입니다. 밥상머리에서 여러 생각을 하는 제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음식을 어휘로 생각하고 있으니 배가 고파옵니다. 어휘들을 맛있게 먹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푸짐한 어휘로 배가 부릅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백성을 잘 다스리는 정치

2025/05/07 11:02:36

백성을 잘 다스리는 정치 정치인이 백성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정치를 걱정하는 세상입니다. 정치가 잘 돌아가는 시절에는 누가 왕인지도 몰랐다고 하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온 세상이 시끄러운 정치로 몸서리를 치며 앓고 있습니다. 정치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릇된 정치 속에서 백성 노릇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치(政治)의 정은 한자로 보면 바를 정(正)과 닮아있습니다. 공자께 정치를 물었을 때, 정치는 정(正)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정치는 바르게 하면 되는 겁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정치가, 정치인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사람이어야 정치가 가능합니다. 언어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정치를 우리말로는 다스린다고 합니다. ‘정’도 ‘치’도 모두 다스린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요즘의 학문적 개념으로는 정치에 행정은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행정(行政)의 정도 정치의 정과 같습니다. 어쩌면 행정을 잘하기 위해서 정치를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정당(政黨)의 목적이 정권 획득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행정이 정치의 목적이 됩니다. 바른 행정을 하는 게 정당의 목적이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정당이라는 말도 바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른 목표가 없으면 정당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말에서 정치를 왜 다스린다고 할까에 대해서 늘 궁금했습니다. 다스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다스린다고 하면 왠지 지배하고 통치하고 제압하는 어감이 있습니다. 난세를 다스린다고 하고, 죄를 다스린다고 하니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실제로 사전을 찾아보면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듭니다. 누구를 다스린다는 말이 위압적으로 느껴집니다. 정치가 이렇게 다스리는 것이라면 제가 바라는 정치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스리다의 다른 의미를 찾아보고는 안심이 되었습니다. 다스린다는 말에는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니 원래의 의미가 편안하게 하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표적으로는 쓰린 속을 다스린다고 표현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다독여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을 편안하게 하는 게 다스리는 겁니다. 또한 마음을 다스린다는 표현도 씁니다. 분노나 화가 마음속에서 올라올 때 우리는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람들의 화를 가라앉게 만드는 것이 바로 다스리는 겁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겁니다. 기도를 하기도 하고, 좋은 생각을 하기도 하고, 바쁘게 지내기도 할 겁니다. 모두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불안하고, 힘겨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정치를 왜 다스린다고 했을까요? 왜 나라를 다스린다고 했을까요? 왜 백성을 다스린다고 했을까요? 이제 답은 명확해 보입니다. 지배하고, 통치하고, 억압하는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른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정치가가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하는 집단은 정당이 아닙니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고, 백성의 몸과 마음을 다스려주는 겁니다. 정치가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국민을 더 힘들게 합니다. 행정이 백성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정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겁니다. 힘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하고, 살맛 나게 하는 겁니다. 불안하고, 힘들고, 차별과 분노 가득한 세상에서 참된 정치,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를 그려봅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머리를 가슴으로, 가슴을 온몸으로

2025/04/20 13:32:23

머리를 가슴으로, 가슴을 온몸으로 세상에 알아야 할 게 참 많습니다. 예전에 비해 지식의 폭이 훨씬 넓어지고 있습니다. 알아야 하는 과목도 늘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지식도 끊임없이 솟아 나옵니다. 그럼 우리는 정말로 똑똑해졌을까요? 지식인은 많은데, 지혜로운 이는 적다는 한탄이 여기저기에서 나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지식은 쌓여가는데 지혜는 오히려 옅어집니다. 지식인(知識人)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지식인이라는 말은 칭찬 같기도 하고, 나무라는 말 같기도 합니다. 지식인을 나무랄 때는 지식을 쌓아는 가지만, 지혜로 바뀌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에 지식(知識)이 넘쳐나니 지식인도 넘쳐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혜를 나타내는 한자 지(知)에는 날 일(日)이 더해 있습니다. 지식이 밝아져야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빛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경쟁하고, 서로 잘났다고, 많이 안다고 하며 자신의 성적을 내세우는 세상, 자신을 숫자로 표현하는 세상은 어두운 세상입니다. 당연히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인공지능 앞에서는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인공지능의 속도와 정확성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아예 경쟁조차 되지 않습니다. 지식을 아는 것에 그치면 경영의 목표가 돈이 되고, 법의 목표가 돈이 되고, 의술의 목표가 돈이 됩니다. 모든 걸 돈에 초점을 맞추는 세상이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세상은 지식이 머리에 머물러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일을 머리 아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도 아파야 옳은 해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식을 단순히 암기하는 세상에서, 지식이 감정으로 옮겨가는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정보라고 합니다. 정보(情報)는 사정(事情)을 알린다는 뜻이고, 정보나 사정이나 모두 감정(感情)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情)이 담긴 글자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바로 가슴으로 사는 세상입니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입니다. 무미건조한 정보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파하는 정보입니다. 공감의 세상, 동감의 세상이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아니 온몸으로 퍼져나가서 핏줄이 돌 듯이 모세혈관까지 전해져야 합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가슴으로 옮기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겁니다. 사실 이 지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책상 앞에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멀리서 떨어져서 가슴 아파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뛰어들어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독서와 글쓰기가 내게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읽은 대로, 내가 쓴 대로 행동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글 읽기에서 이런 읽기를 체독(體讀)이라고 합니다. 온몸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며 읽는 것입니다. 주로 경전을 이렇게 읽습니다. 종교의 경전은 그저 읽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이 중요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쓰기에서도 체서(體書)가 필요합니다. 이 말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글을 쓰면서, 책을 읽으면서 지식인인 척하는 스스로가 부끄럽습니다. 그야말로 저는 지혜는커녕 지식인도 못 되었습니다.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삶도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행동하는 삶이 되기 위해 체독의 삶, 체서의 삶, 체학(體學)의 삶을 생각해 보는 오늘입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시절을 노래하다

2025/03/24 16:02:25

시절을 노래하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라는 책을 읽다가 놀란 점이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일본의 시 장르인 ‘하이쿠’에 대한 언급입니다. 저도 일본 ‘바쇼’의 하이쿠를 읽은 적이 있고,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하이쿠의 예도 본 적이 있습니다만,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책 속의 여러 강의 내용이 하이쿠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했고, 시를 소개하면서 하이쿠를 아주 매력적인 장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서양에서 하이쿠의 위력 또는 매력을 2000년대 초반에 미국의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래된 작은 도서관에서 ‘하이쿠’ 창작 모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영어로 하이쿠를 읽고 쓰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무엇이 서양인에게 하이쿠가 매력적으로 다가갔을까요? 하이쿠에 나타나는 선시(禪詩)의 분위기가 작은 깨달음을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우리 시조(時調)와 가사, 고려가요, 향가 등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시는 얼마나 알려져 있을까요? 어떤 매력으로 소개되고 있을까요? 우리가 어릴 때 배웠던 대부분의 시조는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나 교훈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정몽주)’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김상헌)’ 같은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는 노래가 많았습니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정철)’이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황진이)’ 같은 교훈성이 있는 시조가 많았습니다. 시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내용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만 학생들은 시조의 매력에 빠지기 어려웠습니다. 문학 교육이 오히려 문학 향유에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문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높고, 절묘한 가락을 담은 시조를 가르치고 기억하게 한다면 시조를 즐기는 사람도 더 많아질 겁니다. 여러 작가가 노력하고 있지만, 시조는 우리 문학에서 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좋은 시조나 가사, 고려가요, 향가를 문학적으로 깊게 이해하고 감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라 향가가 일본의 만엽집처럼 많이 남아있다면 좋을 텐데요. 현존하지 않는 향가집 삼대목이 발견되기 기대해 봅니다. 남아있는 신라시대의 향가 14수에서 향가의 매력을 다 찾아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저는 ‘삶과 죽음이 여기에 있음에 나는 간다고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는가(제망매가)’에서 누이를 잃은 깊은 슬픔에 동감합니다.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고려가요는 우리의 감정을 더 깊이 드러냅니다. 민요와 이어지는 깊은 연계도 느낍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가시리)’나 ‘살어리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청산별곡)’의 운율과 솔직함을 만납니다. 시조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황진이)’ 등의 묘사에서 낭만을 만납니다. 향가에서 고려가요로, 다시 시조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우리 노래들입니다. 시조의 매력을 잘 살피고,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에게도 알리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고, 우리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넘어서는 공통의 감정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미처 알리지 못한 매력을 찾아내어 세계 속으로 잘 소개해야겠습니다. 좋은 번역이 필요한 이유도 되겠습니다. 시조(時調)의 시는 때라는 뜻입니다. 한 시절을 노래하는 시(詩)가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가짜의 세상

2025/03/13 16:22:13

가짜의 세상 가짜는 말 그대로 거짓입니다. 참 세상이 진짜이니 가짜와 진짜는 반대인 셈입니다. 가짜는 예전에도 많았습니다. 예전의 가짜는 주로 물건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가짜는 명품을 흉내 낸 것이겠죠. 명품은 모습이나 기능보다는 가치를 사는 것입니다. 가짜는 아무리 똑같이 만들어도 가짜입니다. 가치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이 지점이 가치를 볼 때 혼란스러운 지점입니다. 종종은 가짜인데도 진짜처럼 속습니다. 보는 사람도 깜빡 속습니다. 가짜와 진짜의 경계는 무얼까요? 도자기나 그림도 가짜가 많았습니다. 진짜가 훨씬 비쌌기 때문에 가짜를 만들어 수익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따로는 가짜로라도 대리만족을 하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짜인 줄 알면서 가지고, 가짜인 줄 알기에 부러움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가짜들은 심각하지 않은 가짜입니다. 가짜가 엄청난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의 가짜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가짜와 진짜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가짜는 진짜로 믿고, 진짜는 가짜로 믿게 만듭니다. 온통 뒤죽박죽의 세상입니다. 자기는 진짜이고, 남은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짜로 밀어붙입니다. 자신의 신념과 믿음과 종교는 진짜고, 남의 신념과 믿음과 종교는 가짜로 매도합니다. 도대체 타협이나 이해나 배려가 보이지 않습니다. 가짜가 제일 많은 붙는 장면은 뉴스입니다. 양극단을 치닫는 현실에서 가짜 뉴스는 큰 해악(害惡)입니다. 정치적인 가짜 뉴스는 더 이상 현상이 아닙니다. 모두가 진짜라고 믿는 ‘가짜’ 속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짜를 위한 수많은 장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짜를 위한 그럴 듯한 수많은 가짜 증거가 미혹(迷惑)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카더라’, ‘유비통신’ 등의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라고 하더라’가 줄어든 말인 ‘카더라’와 ‘유언비어(流言蜚語)’기 줄어든 유비통신은 가짜 뉴스의 원조인 셈입니다. 가짜를 이야기할 때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가 내 이야기를 가짜로 본다는 점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이 ‘가짜’를 대하는 나의 자세입니다. ‘가짜’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속’과는 다른 것입니다. 민간어원에서 ‘속’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속이다’라고 설명하는데 재미있는 접근입니다. 하긴 거짓이라는 말도 ‘겉짓’으로 볼 수 있습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이 거짓의 시작입니다. 그러고 보면 ‘거짓’과 ‘가짜’는 수없이 내 속에서 솟아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거짓이 내 몸을 거쳐 밖으로 나옵니다. 아닌 척, 안 그런 척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소박한 척, 착한 척, 겸손한 척 하지만 내 마음 속 욕망과는 전혀 다릅니다. 겸손한 척, 부족한 척 하지만 타인을 보는 내 시선은 저만치 위에서 내려 보고 있습니다. 도통 ‘참’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가짜가 주는 가장 큰 해로움은 세상을 믿지 못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서로가 가짜라고 하니 누굴 믿을까요? 자기편만 믿으면 갇힌 세상을 살게 됩니다. 갇혀 있는 사람은 답답해하며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깨부수고 싶어 합니다. 그 근저에는 나만 옳다는 가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짜 세상을 잘 살아가는 방법은 우선 나의 가짜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 양쪽 날개로 세상을 나는 것입니다. 나를 제대로 보면 세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때로는 잠깐 기우뚱하겠죠. 하지만 두 날개로 날면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글/사진 조현용)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누리와 나라와 나

2025/02/25 17:24:30

누리와 나라와 나 우리말에서 ‘누리’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온 누리’라는 말은 온 세상을 의미하지요.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누리이기에 살아간다는 말을 ‘누리다’라고 합니다, 보통 누리다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입니다. 복을 누린다든지, 천수를 누린다든지 할 때 쓰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좋은 의미로 보았습니다. 사는 게 좋은 것이죠. 삶이 고통이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과 만나는 하루 하루는 분명 행복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바로 누리는 삶입니다. 누리가 모양을 바꾸면 나라가 됩니다. 나라가 꼭 국가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나라라는 개념도 불분명하였습니다.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모여 사는 곳이면 나라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하면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라가 곧 누리인 셈입니다. 내 나라라고 생각하는 곳이 넓어지면 누리입니다. 당연히 나라의 경계도 넓었습니다. 이곳이 힘들면 저곳으로 가고, 저곳이 힘들면 이곳으로 찾아옵니다. 떠나는 이를 욕하지 않고, 찾아온 이를 내쫓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그래서 이민과 귀화의 역사입니다. 한민족만 하여도 수많은 이민과 귀화가 있었습니다. 조선족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중국에 가서 중국인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땅이 힘드니 건너가서 살았던 것이죠. 고려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민은 나의 선택이었습니다. 미국에도 수많은 이민이 있습니다. 미국 자체가 이민으로 이루어진 곳이니 한민족은 조금 늦게 이민 간 것뿐입니다. 먼저 이민 온 사람이 늦게 이민 온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가여운 일입니다. 어느 나라의 역사책을 봐도 모두 이민과 귀화의 역사입니다. 사서삼경을 보아도, 불경을 보아도, 기독교 성경을 보아도 모두 이동하며 살아갑니다. 인구가 많아지는 방법은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고, 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는 이 나라가 살기 싫어지는 겁니다. 살고 싶지 않은 나라에 갈 이유가 없고, 나도 살기 빠듯한데 아이를 낳아 키울 이유도 없습니다. 인구 걱정이 된다면 나라를 올바로 세워야 합니다. 백성이 행복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민자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좋지 않으면 안 올 겁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우리나라로 이주해 오는 사람도 급격히 줄 겁니다. 유학생도, 이주노동자도, 결혼이민자도 올 이유가 없겠지요. 한국이 살 만한 나라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나가고 싶은 나라였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죠. 이민은 여기보다 그곳이 나아서 움직이는 겁니다. 재외동포가 많은 게 자랑은 아닌 겁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봐도 한민족이 많습니다. 그게 우리의 과거입니다. 유학생도 많았습니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어느 곳에 가 봐도 한국 유학생이 정말 많았습니다. 인구수 대비 늘 1등이었습니다. 유학생이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 것도 맞지만 꼭 자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한국 젊은 여성이 일본이나 미국 등으로 결혼 이민을 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결혼 이민이 이민의 물꼬이기도 했죠. 나라가 누리가 되고, 누리가 나라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라 안에만 갇혀있을 필요도 없고, 내 나라가 아니라고 배척하거나 차별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비자가 늘고, 국경의 개념이 희미해지면서 오히려 세계는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와 과거를 돌아보면서 부디 내 나라 속에 갇혀 살지 않기 바랍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구별하고, 차별하고, 혐오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런 차별의 나라라도 좋다고 찾아주는 이들에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글로벌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는 노력할 필요도 없는 말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글로벌 세계를 사는 방법입니다. 한편 ‘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죠. 그런데 보통은 ‘나, 민족, 사람’ 등에 해당하는 말은 같은 어원인 경우도 많습니다. 나를 의미하는 말이 사실은 사람이라는 뜻이 되고, 사람이라는 말이 민족명, 국가명인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명을 보면 그 나라에서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사람’도 신라, 사로 등과 어원이 같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저는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옛 우리말에서는 ‘나, 노, 라’ 등이 땅의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라’도 땅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새 땅 또는 동쪽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새’가 동쪽을 의미하고 태양을 의미합니다. 나는 나라에 살고, 누리에 사는 나입니다. 너와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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