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벗이 있어서

2024/09/10 17:00:45

벗이 있어서 기쁘다와 즐겁다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이용하는 논어의 구절이 있습니다. ‘학이시습 불역열호,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學而時習 不亦說好 有朋 自遠訪來 不亦樂好)’라는 표현입니다. 배우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고, 멀리서 찾아준 벗을 만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라는 겁니다. 즉 개인의 감정이 기쁨이라면, 함께 하는 감정은 즐거움입니다. 기쁨이라면 혼자서도 느낄 수 있겠지만 즐거움이라면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말에는 느낌이 좋은 말이 있습니다. 한자보다 순우리말로 했을 때 감정이 살아나는 말도 있습니다. 그중에 제 마음을 울리는 표현은 ‘벗’입니다. 친구라는 말은 왠지 딱딱하고, 동무라는 말은 왠지 어색합니다. 친구(親舊)의 의미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는 의미여서일까요? 벗이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느낌입니다. 한 번 만나도 벗일 수 있습니다. 서로 통하고, 응원하고, 위로하는 사이라면 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구라는 말과 동무라는 말은 변질되어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는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볼 때도 사용합니다. ‘아니 이 친구가!’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친구를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동무는 더 심각합니다. 말동무나 길동무나 어깨동무의 느낌은 좋은데, 동무에 이념을 얹으면 심각한 표현이 됩니다. 아무나 동무라고 해서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동무라는 말을 잃었습니다. 몇 달 전 큰아이와 아내가 작은 디저트 카페를 열었습니다. 음악을 하는 아들이 음식에도 취미가 있어서 차린 가게입니다. 카페를 하면서 가족 모두는 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선 장사가 참 쉬운 게 아니라는 걸 배웁니다. 더우면 더워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날이 좋으면 날이 좋아서 장사가 어렵습니다. 점점 나아지기 바랍니다. 단골이 늘기 바랍니다. 한번 온 사람은 남이지만 두 번 오면 단골입니다. 또 오고 싶은 곳이면 좋겠습니다. 먹어본 디저트에 행복을 느끼고, 가게에서 가볍게 나눈 인사가 하루 종일 기쁨으로 남기 바랍니다. 가게를 하면서 많은 분의 도움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아니 여전히 받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응원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외진 곳에 있는 가게에 굳이 찾아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손님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손님은 우연히 들른 분이 아니라 제가 보고 싶어서 온 분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생각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해외에서 인연을 맺었던 한국어 선생님과 제자들이 오랜만에 귀국하여 저를 찾아줍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는데 저를 찾아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연구실로 오는 것보다 카페로 오는 게 더 편한 분도 많은 듯합니다. 다섯 명 정도밖에 앉을 수 없는 좁은 공간이지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기쁘게 사진을 찍습니다. 저를 만난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분을 보면서 저도 행복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간다는 것, 그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한 일입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행복한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행복한 겁니다. 이것은 쌍방향 모두 그렇습니다. 문득 보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찾아가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다시 또 찾고 싶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 따뜻해져야겠습니다. 더 넓어져야겠습니다. 아, 벗이 참 좋네요. 나이도, 시간도, 공간도 초월합니다. 그리운 벗이 더욱 그립네요. 그립다 말을 하니 더 그립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우산과 양산

2024/08/26 12:14:03

우산과 양산 저 앞에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과 그 뒤를 따라 양산을 쓰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두 사람의 성별은 구별이 될까요? 아마도 우리는 앞에 가는 사람의 성별은 알 수 없지만, 뒤에 가는 사람은 여성일 것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치마를 입은 사람, 스커트를 입은 사람은 어떤가요? 갓을 쓴 사람, 바지를 입은 사람, 하이힐을 신은 사람 등등 복장은 사람의 성별을 구별합니다. 복장은 성별뿐 아니라 사람의 직업이나 지위, 성향도 구별합니다. 청바지가 자유를 상징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선글라스가 상징하는 게 있고, 완장이 상징하는 게 있습니다. 노란 리본이나 빨간 열매를 가슴에 달고 있는 것도 모두 상징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몸에 무엇을 두르고, 입고, 쓰면서 나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입을 수 없고, 원하는 대로 입기도 어렵습니다. 모든 게 상징이고, 때로는 그 상징이 나를 나타내는 질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의 성별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산을 남녀 모두 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산을 쓰고 있는 사람은 구별하기가 쉽죠. 이는 마치 갓을 쓴 사람은 남자일 거라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양산을 쓰면 우리는 일단 여성일 것이라 판단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대부분 맞습니다. 실제로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양산을 쓰고 있는 사람은 여성이 대부분입니다. 양산이 중요한 패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우산도 원래는 여성이 주로 썼다는 점입니다. 문화에 대한 예전의 기록을 보면 남성이 우산을 쓰는 것은 여성스러운 행동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영향 때문에 군인이 우산을 쓰는 게 금기처럼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산도 예전에는 여성적 상징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뀝니다. 어느 순간부터 검은 우산을 든 영국신사가 등장하고 더 이상 우산은 여성의 상징이 아니게 됩니다. 성별을 상징하는 물건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 문화에 따라 변화합니다. 로마의 장군이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충격적입니다. 스커트를 입고 행진하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모습은 여전히 어색합니다. 성별을 상징하는 물건은 고정적인 상징이 아니라는 점은 우리에게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유연해야 합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생각이 늘 맞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가 왜, 여자가 왜?’라는 질문은 시대착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양산으로 돌아가면, 사실 이제는 양산이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양산을 쓰고 다니는 남성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올해 무더위 속에서 양산 쓴 많은 남자를 보았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햇볕이 강하면 양산을 쓰면 그만인데 우리는 지나치게 고정관념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산이 그러했듯이 양산도 남자의 손에 자연스레 잡힐 날이 오리라 봅니다. 이번 여름 우리는 사상 최고의 더위를 지나고 있습니다. 한여름의 열기가 어마어마합니다. 햇볕이 검은 머리를 태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합니다. 양산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저는 머뭇거립니다. 올해 양산의 유혹을 강하게 느꼈지만, 고정관념의 벽은 넘지 못했습니다. 아직 여름은 남았지만 작은 결심을 해 봅니다. 내년에는 꼭 양산을 쓰겠다는 결심. 올해 참 더웠습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케이 스포츠와 우리의 삶

2024/08/13 12:18:34

케이 스포츠와 우리의 삶 스포츠는 경쟁이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타인과의 경쟁은 물론 자신과의 경쟁이 하루하루 닥치는 세계입니다. 아마도 스포츠에 경쟁이 중요한 것은 처음 시작할 때 주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연습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스포츠 경기에 무기가 많이 사용되거나 싸움과 관련된 종목이 많은 것은 이를 반증합니다. 펜싱, 창던지기, 투포환, 양궁, 사격 등 무기가 활용되는 종목과 레슬링, 권투 등의 종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스포츠 경기장은 전쟁터인 셈입니다. 하지만 스포츠는 수련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싸움과 수련의 경계가 모호한 측면도 있지만 유도, 태권도와 같은 종목은 모두 수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라의 화랑이나 소림사의 스님이 무술을 연마하는 것은 자기 연마와 수련입니다. 조금 더 극한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고, 그 극한 육체의 상태를 이겨내어 정신적 완성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이겨내는 과정이기에 극기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스포츠를 보면서 상대와의 경쟁, 그리고 자신을 이겨내는 노력, 동료와의 조화를 봅니다. 물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을 것이고, 희열과 쾌감이 있을 겁니다. 극한 상태를 경험하였기에 다른 힘든 상황도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스포츠에서 지나치게 타인과의 경쟁, 목표 도달만 중시하면 승패, 좌절과 시련으로 우리는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스포츠를 좁게 보는 겁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케이 스포츠라는 말을 합니다. 한국인이 특히 잘하는 운동이 있기에 케이 스포츠라는 말이 나왔을 겁니다. 대표적으로 양궁을 들 수 있겠네요. 주몽의 후예라는 말을 하는데,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활을 참 잘 쏩니다. 주몽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주몽이 많습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말을 타면서 뒤로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구려인이 보면 지금처럼 서서 쏘는 활은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 타며 활쏘기 같은 새로운 종목의 추가도 권하고 싶습니다. 태권도도 케이 스포츠의 대표겠지요. 우리나라에서 시작한 운동이 올림픽의 종목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세계에 한국을 알린 건 케이팝보다 태권도가 먼저이니 스포츠 한류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태권도가 정말 좋은 점은 태권도에서 메달을 따는 나라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스포츠 약소국이라는 나라가 메달을 따고 있어서 요르단의 첫 금메달,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가봉 등의 첫 메달도 태권도라고 합니다. 태권도를 열심히 세계 속에 알린 사범께 경의를 표합니다.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국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깊을 겁니다. 한편 한국의 스포츠는 새롭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한국 스포츠는 결과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금메달이 아니면 패배자인 듯한 모습에서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그 시작을 한국이 보여줍니다. 결과도 중요하나 과정을 중요시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한 스스로를 칭찬합니다.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승자를 축하하는 모습은 케이 스포츠가 남과의 경쟁뿐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열심히 자기 한계에 도전하고, 즐겁게 결과를 받아들이는 문화이기 바랍니다. 변화의 바람도 일고 있습니다. 관중도 열심히 한 양팀에 응원을 보냅니다. 협회나 지도자의 강압적인 태도를 비판합니다. 결과 위주의 사고를 질타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어 가는데, 한국 스포츠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바랍니다. 원래 스포츠는 경쟁뿐 아니라 자기 수련 과정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스로 위로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스포츠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루고 협동심을 기르는 것이 스포츠입니다. 힘든 과정을 지나면서 더 큰 시련에 회복탄력성을 갖는 것이 바로 스포츠라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글짓기를 가르치지 말라

2024/07/17 11:34:45

글짓기를 가르치지 말라 저는 요즘 소학(小學)을 공부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번역소학(飜譯小學)을 공부합니다. 소학을 번역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소학을 우리말로 바꾼 것에는 소학언해(小學諺解)도 있는데, 언해보다는 번역이 훨씬 우리말답습니다. 언해는 직역이 많고, 번역은 의역이 많다고나 할까요? 물론 번역이나 언해나 기본적으로는 한문을 공부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입니다. 저도 소학의 한문과 옛글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번역소학은 중종 때인 1518년에 간행된 책입니다. 소학언해보다 먼저 간행되었습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오래지 않아서 초기의 표기가 남아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너무 어렵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읽어보시면 현재의 방언보다도 훨씬 쉽습니다. 표기법만 익숙해지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르는 단어는 나타날 겁니다. 그건 방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볼 때는 제주도 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습니다. 저희 큰어머니들이 하시던 경상도 사투리보다도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세 명이서 같이 공부하고 있는데, 책을 읽고 발표하는 것은 제 몫입니다. 발표를 하면 더 공부가 됩니다. 같이 공부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고 행복입니다. 저는 대학교 다닐 때부터 여러 사람과 다양한 공부 모임을 했습니다. 운 좋게도 대학 1학년 때부터 박사 선생님들과 모임을 하기도 했고, 동기들과 현대문학 모임, 고전문학 공부하는 사람과 한철학 연구 모임도 했습니다. 물론 주로는 언어학 공부 모임이었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4번 정도 공부 모임을 하고 있네요. 대학교 2학년 때는 일주일에 공부 모임만 네 번 있었습니다. 설익은 제 머리에 다양한 자극이 되었음에 감사합니다. 어학도, 문학도, 철학도 모두 좋았습니다. 공부 후에 이어지는 술자리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술 마시려고 모임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니까요. 실제로 술자리에서 이것저것 메모한 것도 많았습니다. 술 마시고 돌아가는 길에 지었던 시답지 않았던 시도 여러 편 있었네요. 소학에는 가언(嘉言)이라는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가언’에 대한 번역소학의 번역이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아름다운 말이면서 본받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요즘 이 부분을 공부하고 있는데 글짓기를 가르치지 말라는 부분이 나와서 흥미로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글쓰기가 중요하지요. 따라서 글쓰기를 가르치지 말라는 말은 충분히 자극적입니다. 왜 글짓기를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을까요? 글짓기를 가르치지 말라는 말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대강의 해석을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제(子弟)의 경박하고 날뛰는 것을 걱정하는 이는 글 읽기를 침착히 하게 하고, 글짓기는 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글쓰기에 맛을 들이면 뜻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뜻의 지향을 몰라서는 반드시 배움을 즐기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글짓기의 전제는 가벼운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글 읽기를 열심히 한 후에 쓰기를 해야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소학의 내용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많이 쓰는 게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소학에서는 좋은 글을 우선 많이 읽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예 외울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을 많이 외우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마음과 몸에 체득(體得)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글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옛사람이 한문을 공부하는 방법, 외국어를 공부하는 방법은 그러했습니다. 좋은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렇게 외웠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자연히 작문도 가능해졌습니다. 지금은 이런 교육 방법을 무식한 것이나 고루한 것으로 취급하기 일쑤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옛 성인의 가르침에서, 소학의 가르침에서 오늘도 저는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좋은 시를 외우고, 좋을 글귀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글쓰기의 수준이 좋아질 겁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만장일치의 세상

2024/06/19 11:23:49

만장일치의 세상 만장일치(滿場一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나는가요? 만장일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모든 사람의 의견이 같음’으로 나옵니다. 답답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가요? 만장일치를 하려면 평생 결론이 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할 겁니다. 요즘 세상에서 만장일치는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키려고 해도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데 말입니다. 여행지를 고를 때도 가족 사이에도 희망이 다릅니다. 종종 여행이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답답하면서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싸우다가 산이 가까운 바다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설악산이 인기가 높아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만장일치의 반대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다수결을 민주주의의 원리라고 하니 만장일치에 거부감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만장일치의 사회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회로 보이니까요. 실제로도 투표에서 득표가 100% 가까이 나오는 사회를 우리는 비난합니다. 일률적, 획일적인 나라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 사회에 자유가 없음은 쉽게 예상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 의미에서 만장일치의 사회를 꿈꿉니다. 만장일치는 어쩌면 사회적인 용어가 아니라 종교적인 용어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의견이 다르겠으나 그 다름의 근원에 있는 같음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만장일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장일치는 내 생각이 옳고 너의 생각이 틀리니 내 생각을 따르라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나쁜 만장일치일 겁니다. 만장일치하면 떠오르는 회의가 있습니다. 바로 신라의 화백회의입니다. 화백은 신라의 회의제도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여섯마을의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하는 겁니다. 화백의 결정 방식은 만장일치였습니다. 만장일치인데 결론은 잘 났을까요? 조금 힘들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만장일치가 원칙이라면 당연히 결론은 잘 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위급한데 계속 결정을 미룰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불교에서 경전의 내용을 확정할 때도 당연히 원칙은 만장일치였습니다. 이 말이 과연 부처님의 말씀인지 정할 때는 들었던 사람 모두가 동의하여야만 경전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모두 다르지만 모두 하나인 모습을 봅니다. 누구나 깨달은 이라면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경전을 정리하면서 더 큰 깨달음으로 하나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장일치는 힘으로 상대를 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를 상대를 이겨 기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내가 조금 양보하고 배려하면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만장일치는 배려의 세계이고, 양보의 세계이며, 평화의 세상인 겁니다. 만장일치가 기쁘게 이루어지는 곳은 늘 웃음꽃이 핍니다. 집안에서 작은 일을 정할 때도 만장일치가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다수결로 한다면 늘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하다가 산이 가까운 바다로 가듯이 말입니다. 사소한 다툼은 모두 다수결에서 발생합니다. 소수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결론은 다수의 결정으로 나니 불만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는 다수결이 아니라 만장일치입니다. 만장일치의 태도를 늘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쪽의 수가 많다고 우리 편이 많다고 다수결이 중요하다는 말에서 저는 날카로움을 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쇄소응대의 비밀

2024/06/05 16:27:33

쇄소응대의 비밀 쇄소응대(灑掃應對)는 전통 교육의 핵심입니다. 물 뿌리고, 쓸고, 응대를 잘하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학에도 여러 번 쇄소응대가 등장합니다. 쇄소응대는 말 그대로 청소 잘하고 사람 접대 잘하라는 말입니다. 주변을 깨끗이 하여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충고이고, 사람에게 진실되게 응대해야 인간관계를 잘할 수 있다는 권고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육에도 주요 내용이 되었을 겁니다. 어릴 적 기억 속에는 쇄소응대의 장면이 남아있습니다. 어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뿌리고, 마당과 집 앞을 쓸었습니다. 아침 풍경이지요. 저는 그때 그 모습이 쇄소응대인 줄은 몰랐습니다. 일찍 일어나서 집 앞에 물을 뿌리면 흙냄새가 확 올라옵니다. 아침 기억의 냄새네요. 물은 조리개로 뿌리기보다는 바가지의 물을 손으로 조금씩 뿌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을 뿌리는 행위가 배려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먼지가 나는 것을 막아서 주변 사람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쇄소의 쇄에서는 청소의 의미뿐 아니라 배려의 의미도 읽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함의 의미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 집 앞을 쓰는 겁니다. 자기 집 앞만 쓰는 것도 아닙니다. 골목을 여기저기 쓸고 다닙니다. 골목 끝까지 물을 뿌려가며 청소를 하고 나면 깨끗한 길 위로 사람들이 출근을 하는 겁니다. 맑은, 깨끗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응대는 접대(接待)와 대접(待接), 대답, 응답 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대접과 접대는 같은 단어인데 전혀 다른 느낌으로 되었습니다. 접대는 왠지 직장에서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위로 보이고, 대접은 신세를 갚는 느낌이 있습니다. 원래의 의미는 손님을 잘 모시는 겁니다. 즉 남을 잘 대하는 것이 응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은 누구나 같아야 할 겁니다. 힘 있는 자, 돈 있는 자와 못 가진 자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면 응대는 실패한 겁니다. 그런 응대를 가르치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응대는 어른에 대한 태도를 담고 있습니다. 공손하게 응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팔짱을 끼거나, 뒷짐을 지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딴청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잘 듣는다는 것은 듣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점점 많아집니다. 상대에 따라서 내 듣는 태도는 달라지기도 합니다. 응대에 실패하고 있는 겁니다. 눈높이에 맞추어 듣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응대입니다. 예전에 스토니부룩의 박성배 교수님께 불교를 배울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선생님이 불교를 잘 모르던 시절에 다른 절에 가서도 대접을 받는 방법을 스님께 물었더니, 가는 절마다 남보다 청소 열심히 하고, 인사 잘하라는 대답이었다고 합니다. 참 쉬운 방법이었습니다. 박성배 선생님은 가는 곳마다 먼저 청소하고, 먼저 인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모두 환영하고 좋아해 주었다고 하네요. 성자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성자가 되기도 쉽습니다. 그게 바로 쇄소응대였습니다. 쇄소응대만 잘하면 성자가 됩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먼저 마음의 인사를 하고, 가는 곳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내가 먼저 하려고 한다면 참다운 사람이 될 겁니다. 나이가 들면서, 힘든 일은 남에게 미루고, 인사는 하기보다 받으려고 합니다. 그것도 사람을 가려가면서 말입니다. 성자는 남의 이야기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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