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말] 동시다발의 현장에서

2026/04/21 11:14:27

동시다발의 현장에서 어떤 한자어는 해석을 달리할 때마다 다른 느낌과 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최근 며칠간 머릿속에 맴도는 사자성어가 동시다발(同時多發)입니다. 같은 때에 많은 것이 일어나는 것이겠죠.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요즘의 사건은 동시다발입니다.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즐겁습니다. 행복한 동시다발이면 좋겠습니다. 폭발하기 직전의 동시다발은 사양하고 싶네요. 동시에 여러 사건이 일어날 때 우리는 주로 동시다발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때 ‘발’을 일어난다고 해석한 거라 할 수 있습니다. ‘발생(發生)’과 같은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시다발의 현장은 정신이 없습니다. 주로 좋은 일은 동시다발이라는 표현을 안 합니다. 귀찮은 일이나 복잡한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을 때 동시다발적이라는 표현을 하게 됩니다. 하나씩 일의 처리가 안 되는 식은땀 나는 현장입니다. 이상하게 힘든 일은 한꺼번에 일어납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속담도 자연스럽습니다. 기쁜 일이 함께 생기면 우리는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합니다. 비단 위에 꽃을 더한다는 뜻입니다. 꽃 수를 놓는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아무튼 나쁜 일도 기쁜 일도 하나씩 생기면 좋겠습니다. 숨도 돌리고, 기쁨도 누리는 시간을 갖고 싶네요. 동시다발을 달리 해석하면 한 번에 여러 개를 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발을 ‘쏘다’로 해석한 겁니다. 발(發)이라는 한자에 ‘활 궁(弓)’이 들어있으니 쏘다는 표현도 자연스럽습니다. ‘발사(發射)’라는 어휘가 곧바로 떠오릅니다. 동시다발로 쏘는 것은 무섭습니다. 최근의 전쟁은 동시다발의 현장입니다. 한꺼번에 많은 미사일과 드론을 쏘아댑니다. 그 중 하나는 맞겠지 하는 태도로 보입니다. 방어용 미사일도 동시다발입니다. 일대일로 맞힐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기술이겠죠. 실제로는 여러 발로 한 발의 미사일을 떨어뜨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튼 동시다발이 동시다발의 피해를 부르는 것은 답답한 일입니다.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동시다발이 아름다운 현장은 꽃피는 봄입니다. 발(發)이라는 한자는 ‘필 발’이라고도 해석합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이 발입니다. 최근에는 날씨의 변화 때문인지 꽃이 한꺼번에 동시에 핍니다. 예전에는 산수유가 피고, 목련이 피고, 개나리가 피고, 벚꽃이 피고, 진달래가 폈는데 지금은 모두 한꺼번에 피었다가 한꺼번에 집니다. 제가 근무하는 경희대학교는 봄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목련(木蓮)은 맑고 고운 자태로 나무의 연꽃이 됩니다. 벚꽃이 피면, 경희는 그대로 벚꽃 동산입니다. 경희대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됩니다. 꽃이 동시다발이어서 화려함은 극치를 달리지만, 떨어지는 아쉬움은 오히려 큽니다. 물론 꽃 대신 푸르름이 그 자리를 빛 내기는 합니다.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는 표현이 생각납니다. 푸르름이 꽃을 이기기도 합니다. 민요 사철가에도 나오는 표현인데, 봄이 짧게 왔다가 가는 것을 빗대어 신록을 묘사하는 듯합니다. 푸른 날은 봄의 끝자락에서 가을의 끝자락까지 길게 계속됩니다. 우리 삶도 그러하겠지요. 푸른 날이 오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난주까지 한창이던 꽃이 이제 바람과 함께 떨어지고, 그 속으로 새순이 돋습니다. 신록예찬(新綠禮讚)이 절로 나오는 계절입니다. 한 번 더 꽃샘추위가 다녀가면 더 푸르러질 겁니다. 우리의 꽃다운 시절은 가고, 추위도 지나갑니다. 그래도 꽃은 꽃으로 즐기고, 푸르름은 푸르름으로 즐기면 좋겠습니다. 추위라고 나쁠 건 없습니다. 꽃을 시샘하는 추위야말로 더욱 그러하지요. 꽃이 핀다는 뜻이니까 말입니다. 집 안이 아니라 밖으로 한 걸음 더 움직이는 하루이기 바랍니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며, 오늘 하루도 모두 행복하소서.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아름다운 우리말] 떡 해 먹을 세상

2026/03/24 10:22:02

떡 해 먹을 세상 굿에는 떡이 중요하고, 굿이 끝나면 떡을 나눠주고 먹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떡은 제사와 굿이라는 행사에 중요한 음식입니다. 일반적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니었고, 아무 때나 먹는 음식도 아니었습니다. 떡은 굿 등에 제물을 바칠 때 가장 기본적인 제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굿이 끝난 후에는 ‘계면떡’을 나누어 주는 풍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먹는 ‘시루떡’도 가정 신앙에서 성주, 조왕신, 삼신 등에게 바치는 떡이기도 합니다. 떡을 찌는 도구인 ‘시루’는 청동기 시대의 나진 패총에서도 발견이 되었다는 것으로 봐서 떡과 제사의 역사는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루로 보이는 그림이 고구려의 안악 3호 고분벽화에 나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떡의 의례에 관한 기능은 현시대에도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만 개업을 하면 떡을 돌리고, 이사를 하면 떡을 이웃집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떡은 밝은 미래를 상징하고, 화목한 사이를 상징합니다. 떡은 의례적이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따뜻하게 하는 음식입니다. 잔칫집에는 떡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이 모여서 음식 만드는 것을 도와주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떡을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라는 옛이야기에 나오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말은 이런 사정을 보여줍니다. ‘떡 해 먹을 집안’이라는 말은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여 굿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굿을 하면 떡을 먹게 되니 떡 해 먹을 집안이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집안이 엉망이라는 뜻입니다. 집안이 화목하지 않다든지, 굿이라도 해야겠다든지 하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고 떡을 등장시킨 것이 재미있습니다. 자칫 떡에만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떡을 해 먹는 게 좋은 일이라고 오해할 만한 속담입니다. 한편 ‘떡 해 먹을 세상’이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 말도 마찬가지로 화목하지 않은 세상을 나무라는 말입니다. 역시 그래서 굿이라도 해야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굿은 아무래도 큰 굿이겠네요. 나라가 엉망이고, 세상이 엉망이니 작은 굿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굿이 끝난 후에는 전 국민이 나누어 먹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떡은 나누어 먹어야 효험이 더 있습니다. 아이의 생일에도 떡을 해서 돌리는 것은 그래야 아이가 건강해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떡을 해 먹는 민족은 많지만, 우리만큼 떡을 좋아하는 민족은 드뭅니다. 그리고 우리의 떡은 혼자 먹는 떡이 아니고 나누어 먹는 떡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먹고, 기원해야 할 일이 있을 때도 먹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일이 있을 때 떡을 더 많이 해 먹기 바라고, 가능하면 기원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우리 집안이 떡 해 먹을 집안이 아니기 바라고, 이 나라가 떡 해 먹을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떡 이야기를 한참 하고 나니 갑자기 출출해져서 떡이 먹고 싶네요.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아름다운 우리말] 부러우나 부끄러운 마음

2026/03/10 10:46:14

부러우나 부끄러운 마음 가난한 마음에 복이 있다고 안빈낙도와 청렴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새기지만 마음속에서는 늘 부자의 여유가 부럽습니다. 조금 더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 때마다 부끄럽기도 합니다. 이렇게 내 마음에는 부러워서 부끄러운 마음이 천지입니다. 양면성 가득한 마음을 보면서 하루를 정리해 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평화를 사랑한다고 하나 강대국의 힘이 부럽습니다. 군사적 강대국이 아니라 문화적 강대국이 되기를 원한다며 백범 선생의 글을 인용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세계 상위권의 국방력을 자랑하고 우수한 무기 판매에 열을 올립니다. 무기는 방어에만 사용될 수는 없습니다. 평화를 위한 무기라는 말도 미사여구일 뿐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더 첨단 무기를 개발하는 모습에 우리는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핵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를 부러워 하는 우리의 마음은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말로는 늘 평화주의자입니다. 환경을 이야기하면서 일회용품의 편리성에 눈이 갑니다. 기후 위기는 나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칠 때만 위기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그저 불편함일 뿐입니다. 이상기후라고 하지만, 더우면 더 에어컨을 틀고, 추우면 더 불을 땔 뿐입니다. 환경 이야기나 안 했다면 좋았겠지요. 기후 위기를 말하며, 인간의 욕심을 탓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겁니다. 말로는 늘 환경주의자입니다. 성적보다는 행복이 우선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성적 자랑이 노골적입니다. 일등만이 대접받는 사회가 혐오스러우면서도 공부 잘하는 자식을 바라고, 명문대보다는 실력이 중요하다면서 명문대생의 숨은 실력을 믿습니다. 금수저를 욕하면서 금수저이기를 바라고, 재벌을 욕하며 대기업에 들어간 자식 자랑이 한창입니다. 의사, 변호사를 욕망덩어리인 양 이야기하면서 정작은 친척 중에 의사, 변호사가 있어서 든든하게 생각합니다. 사랑이 중요하다면서 혐오를 부추기고, 이타주의를 칭찬하면서 나 위주의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외모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늘 외모에 눈이 갑니다. 그러고는 본능 핑계를 대지요. 예쁘다는 말이, 아름답다는 말이 칭찬이지요. 외모 칭찬과 외모 자랑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외모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은 모순입니다. 나도 좀 잘생겼다면 좋았겠지요. 무소유를 이야기하면서 물건에 대한 집착이 깊어지고, 욕망을 멀리하자고 하나 성욕에, 식욕에, 소유욕에, 명예욕까지 무서우리만치 갖고자 합니다. 집착은 집착을 낳고, 소유는 소유를 낳습니다. 펼쳐보지도 않은 책, 사용한 적 없는 그릇이 눈앞 한가득입니다. 없어지면 다시 구입하지 않을 물건이라면 모두 내 소유욕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없어지면 다시 살 물건은 얼마나 되나요? 나이가 들면 철학과 종교의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책과 수행을 멀리합니다. 아니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철학과는 멀어지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불혹이니, 지천명이니, 이순이니 하는 말은 경전에나 담긴 이야기입니다. 유혹에는 쉽게 넘어가고, 하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고집이 더 세지니 말입니다. 명상과 기도의 시간은 없고 간간이 조는 시간이 있을 뿐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집중력이 떨어지고 눈이 침침해서일 뿐이죠. 철학은 남의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제 표리부동한 마음을 살펴봅니다. ‘부럽다’와 ‘부끄럽다’는 관계없는 단어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상통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정말 부러워해야 하는 일은 부러워하지 않고 회피합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일을 부러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제 나이를 한 살 더 먹습니다. 부러운 일이 많을수록 부끄러운 일도 많아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뼈저리게 느낍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아름다운 우리말] 벌거벗은 꿈

2026/02/10 14:04:28

벌거벗은 꿈 우리말에서 꿈과 관련이 있는 서술어는 ‘꾸다, 가지다, 있다’ 정도일 거다. 이 중에서 ‘꾸다’는 ‘꿈’과 동원어여서 흥미로운 어휘다. 우리말에는 이런 동원어 구성이 많다. 대표적으로는 잠과 자다, 얼음과 얼다 등이 있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분명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즉 ‘자다’의 명사형이 잠인지, 잠이라는 말에서 ‘자다‘ 라는 표현이 나왔는지 분명히 설명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어휘는 불과 붉다, 신과 신다 발과 밟다 처럼 명사에서 용언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어휘의 경우는 반대로 동사에서 명사가 생긴 예로 보이는 것이다. 살다와 삶, 쥐다와 줌 등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꿈은 가지기도 하고 꾸기도 한다. 잘 때 꾸는 꿈인지, 깨어서 꾸는 꿈인지에 따라 의미와 사용이 달라진다. ‘가지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주로 희망을 나타낸다. 반면에 ‘꾸다’는 주로 잘 때의 꿈이지만, 희망을 나타낼 때도 쓸 수 있다. ‘있다’는 주로 희망을 나타낼 때만 쓰인다. ‘꿈이 있다’는 말처럼 말이다. 꿈이라는 말이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공통점 때문이리라. 허황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는 게 꿈이다. 꿈을 꾸는 것은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다. 밤에 잠 속에서 꾸는 꿈은 무의식의 세계다. 꾸려고 해도, 꾸지 않으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꿈은 억지로 안 된다. 어릴 때 나는 떨어지는 꿈이 많았다. 무서웠다. 높은 곳에 아찔하게 서 있다가 발을 헛디딘다. 끝없는 추락은 공포 그 자체다. 이렇게 끝인가 보다 하고 떨다가 보면 식은땀 범벅으로 깨어난다. 꿈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면 키 크는 꿈이라고 위로해 주셨다. 하지만 두려움의 크기에 비해 키는 생각만큼 자라지 않았다. 약간 아쉽다. 더 떨어졌어야 했을까? 아마도 나는 꿈이라는 무의식 속에서도 하루를 사는 게 무서웠나 보다. 떨어지는 꿈을 계속해서 꾼 것은. 사춘기 시절, 청춘의 시대. 그 시절의 가엾은 나를 위로하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떨어지는 꿈 대신 날아오르는 꿈을 꾸었다. 온몸의 힘을 스르르 빼면 나는 공중으로 맘대로 날아오른다. 공중부양 능력이 꿈속에서는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하지 못하는 일이라 으쓱한 마음이 가득했다. 가고 싶은 대로 날아다니면서 가벼워진 나를 즐겼다. 새벽에 꿈에서 깨어나도 마음이 가벼웠다. 그때 나는 열심히 즐겁게 살아 가는 나날이었나 보다. 그때는 헤엄치는 꿈도 많았다. 사실은 수영도 잘 못 하는데 꿈속에서는 물살을 잘 가르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가끔은 다시 그 꿈을 꾸고 싶다. 잘 나가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최근 몇 년간 꾸는 꿈속의 나는 벌거벗은 모습이다. 도대체 시도 때도 없다. 학교에서도, 거리에서도, 중요한 자리에서도 벌거벗은 내 모습이 나타난다. 깜짝 놀라 몸을 가려보지만 뛰는 심장을 어찌할 수 없다. 어찌어찌하여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잠에서 깬다. 그렇게 놀란 가슴으로 멍하니 어두운 천장을 바라본다. 깨어났지만 여전히 부끄럽 내보이고 싶지 않은 거짓된 내 모습이 많아서일까? 나는 내가 숨겨놓은 나를 잘 안다. 부끄럽다. 내가 나를 아는데 누가 누구를 욕하랴. 함부로 남을 평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일까. 내 실수가 두렵다. 실수 그 자체보다 남의 시선이 더 두렵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벌거벗은 채로 꿈속에 나타나는 것은 깊은 부끄러움이다. 나도 이제 좀 편해지고 싶다. 그런데 산을 힘겹게 오르고 돌아온 날, 운동장을 몇 바퀴 뛰고 온 날은 꿈이 다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기억도 없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쉬나 보다. 그런 날은 새벽에 깨지도 않는다. 그렇다. 새벽 꿈이 두렵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좋은 꿈을 위해서라면 좋은 생각과 좋은 인연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시간이 삶과 꿈과 깨달음이 하나가 된다. 삶이 엉망이고 불안 속에 있는데, 좋은 꿈을 꿀 리가 없다. 오늘도 벌거벗은 꿈을 꾸고 새벽에 이 글을 쓴다. 아직 멀었다, 나는.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긍정 속담

2026/01/13 16:19:42

한국어 긍정 속담 19세기 말 한국을 여행하고 자세한 여행기를 남긴 영국인 비숍 여사의 글을 보면 한국인은 매우 유쾌한 민족으로 나옵니다. 한국인에게 한이 많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국인이 신이 많고, 유머가 많음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어쩌면 가장 우울해 보이는 시대 19세기에도 한국인은 외국인의 눈에 즐겁게 비치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말하는 습관을 살펴보면 늘 밝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코미디 방송 중에 ‘웃으면 복이 와요’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웃으면 복이 옵니다. 만나면 즐겁고, 좋은 방송이 모토이기도 합니다. 웃으면 복이 올 거라는 믿음은 오래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웃습니다. 누군가가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해도 화를 내기보다는 웃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지금 웃음이 나와?’라고 물으면 ‘그럼 웃어야지, 울어?’라고 대답을 합니다. 때로는 ‘어이가 없어서 웃는다’는 말도 합니다. 화를 내야 하는 장면인데도 자연스레 웃음이 나온 겁니다. 물론 모든 순간에 웃지는 않겠지요. ‘일소일소 일노일로’는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과 연결이 됩니다. 사람의 가장 큰 소망은 아마도 늙지 않고 건강한 것일 겁니다. 그게 지극한 복이겠지요. 그래서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 내면 한 번 늙는다는 말은 큰 깨달음입니다. 웃으면 젊어집니다. 신체적 나이가 젊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심리적 나이는 젊어집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얼굴 표정이 미소를 따라 갈라집니다. 편해 보인다는 말은 웃는 이에게 드리는 찬사입니다. 화를 내면 그 모습대로 굳어 갑니다. 가만있을 때도 화를 내는 듯하여 다가가기조차 무섭습니다. 당연히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까이에 없으니 즐거울 일도 줄어듭니다. 한국 속담에 ‘때린 놈은 다리 오므리고 자고, 맞은 놈은 두 다리 뻗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속이 편한 속담입니다. 맞은 놈이 낫다니요? 때린 놈은 불안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룹니다. 도둑이나 강도처럼 말입니다. 오히려 피해를 당하는 쪽이 마음은 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실제 상황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피해자의 마음을 다독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억울한데, 가해자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 더 힘이 들 겁니다. 최소한 가해자가 잠이라도 못 자기 바랍니다. ‘부부 싸움 칼로 물 베기’와 같은 속담도 실제로는 희망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부부 싸움은 화해가 쉬운 게 아닙니다. 어쩌면 싸운 후 곧바로 또 봐야 하기에 화가 더 쌓일 수도 있습니다. 이혼이 쉬워진 것도 아마 부부 싸움의 해결이 어려워서일 겁니다. 부부 싸움으로 물을 베는 것이 아니라, 몸을 베고 마음에 상처를 깊게 남기기도 합니다. 같이 살기 어렵겠지요. 부부 싸움의 화해는 쉽지 않습니다. 그때 던지는 말이 칼로 물 베기입니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서로 마음에 담아두면 부부는 헤어지는 게 정답처럼 됩니다. 그러나 빨리 화해하고, 미안하다고 먼저 툭 이야기하고 나면 부부는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이 때 칼로 물 베기가 실현이 되는 겁니다. 한국 속담에 나타나는 긍정적 마음은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불행한 일이 없어서 긍정적인 게 아닙니다.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위로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 어서 화해해야 더 큰 화를 막을 수 있다는 지혜가 모여서 속담이 된 겁니다. 지금은 이런 속담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더 힘이 듭니다. 앞으로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절망과 계속 이렇게 싸우느니 이쯤에서 그만 갈라서자는 생각이 희망 없는 삶으로 귀결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아름다운 우리말] 더하기와 빼기의 삶

2025/12/15 16:02:23

더하기와 빼기의 삶 요즘은 노자(老子)를 읽고 있습니다. 전에 혜거 스님의 도덕경 강의를 들었는데, 지금은 왕필의 노자 주를 읽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책이지만, 가슴으로 느끼면서 읽습니다. 좋은 구절이 많고. 깨달음을 주는 글귀가 많습니다만, 다 기억은 하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 몸과 마음 어딘가에 걸려서 오랫동안 자연스레 머물기 바랍니다. 인위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노자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몸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도 왠지 맞지 않는 듯합니다. 자연스러운 공부와 자연스러운 깨달음의 어색한 모순도 보입니다. 노자에서 제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구절은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이라는 말입니다. 배움을 위해서라면 매일 더해야 하는 것이지만, 도를 위해서라면 날마다 덜어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배움도, 학문도 생각해 보면 집착입니다. 배워서 드날리는 명예도 욕망입니다. 늘 그 점을 잊고 삽니다. 조금 더 안다고 잘난 척하는 삶입니다. 도(道)라는 말은 ‘깨달을 각(覺)’으로 바꾸어도 좋을 듯합니다. 하나씩 떨어뜨리며 사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마저도 집착이라는 선사(禪師)들의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사는 것은 더하고 빼는 일의 반복입니다. 계속 더하거나 계속 뺄 수 있다면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가 가면 무언가 더해져 있고, 무언가 사라졌습니다. 저는 종종 내가 오늘 더한 것과 뺀 것을 생각해 봅니다. 어떤 것은 더해서 자랑스러웠고, 어떤 것은 더해서 부끄럽습니다. 어떤 것은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어떤 것은 없어져서 아쉽습니다. 는 여기에서 제 욕망을 봅니다. 무엇을 위한 배움이고, 무엇을 위한 깨달음일까요? 자랑스러움, 부끄러움, 다행, 아쉬움이 모두 욕망 속에서 피어나고 있습니다. 살면서 때로는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쳐서 괴롭습니다.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경우에도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집착은 제게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습니다.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네요. 아니 온몸에 힘이 들어갑니다. 눈을 부라리고, 식은땀이 납니다. 그리고 심장이 뜁니다. 이른바 편도체 활성화입니다. 스트레스의 원인이죠. 평생 살면서 편도체 활성화는 내게 괴로움으로 남았습니다. 먼 옛날 조상 때부터 내 몸속에 익숙해진 괴로움일 겁니다. 배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죠. 다만 배우는 목적이 문제일 겁니다. 더하기 위해서 배우면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성공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면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서 가려고 하면 숨이 차겠죠. 배우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늘 고민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숨이 찰 수밖에 없습니다. 더하여도 숨이 차오르지 않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노자를 읽는 것도 배움이기는 하나 덜어내는 배움이 아닐까요?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까요? 아니 무엇을 더하려고 하고. 무엇을 빼려고 할까요? 저는 오늘 머릿속에서 몇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습니다. 더해지고, 굳어집니다. 어서 빼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빼내려는 생각은 오히려 그 생각을 곤고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덜어내기 어려운 상가 되고 마는 겁니다. 생각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 저는 글을 씁니다. 가능하면 긍정적이고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사람으로, 좋은 생각으로 살려고 하면 어느새 잡생각이 빠져나갑니다. 덜어지는 삶입니다. 위각일손(爲覺日損)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더하기와 빼기 이야기였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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