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말이 정치다

2025/07/02 12:10:03

말이 정치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정치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무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뺏고 빼앗기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 정치의 시작이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정치는 문화와 비슷합니다. 문화는 자연상태를 벗어나는 것이고, 동물의 생활과는 다른 것입니다. 한자로 보자면 글이 되는 것, 말로 하는 것입니다. 폭력과 상처는 정치도, 문화도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현재의 정치는 말로 하는 정치가 아닙니다. 말로 하더라도 윽박지르고 모욕을 주는 정치입니다.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닙니다. 우리말에는 여기에 걸맞은 여러 표현이 있습니다. 말이 말 같지 않다든지, 말 같은 소리를 하라든지 하는 말이 여기에 속합니다. 아예 말이 아니라든지, 말이라고 해도 다 같은 말이 아니라는 표현을 합니다. 말은 다 말이 아닙니다. 정치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정치의 말은 설득에 방점이 찍힙니다. 당연히 설득을 위한 근거의 마련이 매우 중요합니다. 거짓과 가짜는 정치와 거리가 멉니다. 거짓임이 드러나면 그 정치는 끝입니다. 거짓말하는 정치인은 생각만 해도 공포스럽습니다. 우리는 말을 믿고 그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근거를 마련했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가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당연히 정치에서는 수사학이 중요합니다. 사실 수사학은 정치뿐 아니라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입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고, 즐겁게 합니다. 서로 칭찬하고, 상처가 되지 않게 나무라는 일도 모두 수사학에서 시작합니다. 수사학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문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거짓 꾸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수사학을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수사학은 배우는 것보다는 많은 활용이 더 필요할 겁니다. 배우더라도 사용해 보지 않으면 나의 수사가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수사학의 기본에는 인문학이 있습니다.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만큼 수사학에 도움이 되는 게 없을 겁니다. 고전을 읽고,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은 헛된 말이 아닙니다. 설득의 말하기, 글쓰기를 풍요롭게 하려면 좋은 인용이 필요합니다. 좋은 인용은 바로 인문학에서 나옵니다. 물론 치열한 고민과 경험에서도 인용은 나올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인간이라면 정치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정치를 하지 않으면 동물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화가 난다고 폭력으로 의회를 장악하고, 수가 많다고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고, 모욕을 서슴지 않고, 차별을 드러내고 하는 태도는 정치가 아닙니다. 욕이나 마찬가지인 말을 하거나 아예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치인이 아닙니다. 정치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연설이 사라진 정치가 아쉽습니다. 설득의 연설이 많아지기 바랍니다. 진정한 정치인이 정치를 하는 한국을 꿈꿉니다. 꿈이라고 쓰고 나니 왠지 허망하네요. 정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이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이상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상한 생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일 겁니다. 이해가 됩니다. 저 스스로도 의심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정치는 분열의 현장에 필요한 것이고, 정치는 다툼과 폭력의 현장에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정치는 평화의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공자께 정치를 물었을 때, 정치는 정(正)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늘 머릿속에 있습니다. 아니 가슴 속에 있습니다. 거짓으로 술수를 고민하는 정치가 아니라 바른 생각을 바르게 펼칠 수 있는 세상이기 바랍니다. 인간은 정치를 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동물이 아닙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나잇값을 하자

2025/06/18 12:43:10

나잇값을 하자 우리나라 사람은 나이를 먹습니다. 언어표현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번역소학을 봐도 나이는 먹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랜 표현이죠. 대부분의 언어에서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특이한 일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은 나이가 내 몸속에 들어온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나이에 따라 몸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갑자기 저의 배 둘레를 살펴보게 되네요. 나이를 먹으면 여러 가지 몸과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서 성찰의 시간을 줍니다. 일단 많이 듣는 말대로 어린아이처럼 되기도 합니다. 단순히 말해서 참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특히 소변은 큰 문제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소변 생각만 해도 조건 반사로 화장실을 찾게 됩니다. 이때 주변에 화장실이 없으면 그야말로 낭패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주변 화장실의 위치를 파악하는 버릇을 가져야 합니다. 어릴 때 참지 못하고 옷에 실례를 하던 씁쓸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나이를 먹으면 아이처럼 눈물도 많아집니다. 특히 누가 울면 나도 따라 웁니다.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들도 따라 울던 풍경이 생각납니다. 아이들에게 우는 이유를 물어보면 ‘다른 아이가 우니까요.’라는 귀여운 대답을 하더군요. 나이 먹어서도 그렇게 대답한다면 더 이상 귀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타인의 슬픔에 내 몸이 공감한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남이 울면 나도 울어야 합니다. 남이 슬픈데 나만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슬픈 드라마가 점점 곤욕이네요. 우는 장면이 나오면 자동입니다. 한편 신체 기능의 약화는 세월 탓이려니 하면서도 서글프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 가까운 게 안 보이고 먼 게 잘 보입니다. 조금 전의 일은 기억이 안 나고 옛일은 또렷합니다. 눈앞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멀리 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빨리 변하는 현실 속의 역할보다는 오랜 지혜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모습은 정말 그러한가요? 신체는 그렇게 변했는데, 마음은 여전히 눈앞에 일에 집착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점점 실수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지 미안한 사람이 늘어갑니다. 글을 쓰면서 지난번에 기억나지 않았던 이름을 떠올리려고 하니 아직도 망각 속이네요. 답답한 일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안 좋아 보이는 일도 있습니다. 남의 목소리는 잘 안 들리는 반면에 내 목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안 좋은 일이죠. 여기에 대한 해석도 있습니다. 내 말만 하고 남의 말을 안 듣는 겁니다. 나이 들어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일은 내가 옳다는 생각과 고집이죠. 집착이 늘어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좋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점점 남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적게, 작게 들어야 합니다. 순하게 들어야 하는 겁니다. 귀가 순해져야 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논어에서는 이순(耳順)이라고 했습니다. 60세를 의미하는 나이죠. 만약 나이를 먹었는데 목소리가 커지고 고집이 세어진다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이 먹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 내가 문제인 겁니다. 자꾸 남에 대한 욕이 나온다면 내 집착이 늘었다고 판단하면 됩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 나를 말려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 사람 말은 꼭 들어야 합니다. 지금 내 모습이 좋다면 죽은 다음의 내 모습도 좋을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이 천국이어야 죽어서도 천국입니다. 주변 사람과 못 지내고, 자녀와 못 지내고, 화가 많고, 욕심이 늘어난다면 지옥에서 사는 겁니다. 지금 내 모습이 다른 이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일 겁니다. 나이 먹을수록 더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으면 나잇값을 하게 됩니다. 나잇값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올라가는 나의 가치입니다. 나이를 먹었는데 값이 떨어졌다면 나는 잘못 산 겁니다. 우리 모두 나잇값을 하고 살기 바랍니다. 저부터 나잇값을 해야겠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곱고 맑은 제 모습이기 바랍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K-콘텐츠와 문화번역’

2025/06/04 16:06:56

한국어, 단순한 언어를 넘어선 문화의 열쇠 조현용 교수의 ‘K-콘텐츠와 문화번역’ 출간 현재 교민잡지에 ‘아름다운 한글’ 을 연재하고 있는 조현용 경희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는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문화를 이해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조 교수가 최근 펴낸 신간 『K-콘텐츠와 문화번역』(도서출판 하우) 는 한국어 학습자와 교사 모두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단순한 언어 번역 기술을 넘어, 언어와 문화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되짚으며 ‘문화번역’이라는 새로운 교육적 개념을 제시한다. 조 교수는 책에서 “문화번역은 단순히 단어와 문장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고 상호 존중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우리’라는 단어는 영어의 ‘we’로 단순 치환할 수 없는 깊은 공동체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문화적 뉘앙스가 사라질 수 있다. 그는 이런 언어적 맥락을 설명하며, K-팝, 한국 민요, 역사 같은 구체적인 예시들을 통해 독자들이 한국어를 문화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끈다. 특히 K-콘텐츠가 세계로 뻗어가면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직역 vs 의역 논쟁, 문화적 오해에서 비롯된 번역 실수, 그리고 서구 중심의 번역 관행에 대한 비판도 책에 담겼다. 조 교수는 “반제국주의나 탈식민주의 같은 정치적 담론을 깊이 다루지는 않았지만, 상호문화주의에 공감하며 쓴 책”이라고 밝혔다. 조 교수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부를 마치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어학과 및 교육대학원에서 한국어 전공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수요언어문화교육 연구모임을 이끌며 언어와 사고, 어휘, 문화의 관계를 주제로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언어로 본 한국인의 문화유전자』 (세종도서 선정), 『한국어 문화교육 강의』 (일본어 번역 출간), 『한국어, 문화를 말하다』 (중국어 번역 출간) 등이 있으며, 이번 신간은 한국어 학습자뿐 아니라 교민 사회와 한류 팬들, 그리고 한국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귀중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한국어가 단순히 단어와 문법을 배우는 학문이 아닌, 문화를 이해하는 창(窓)이라는 조현용 교수의 메시지는 태국 내 한류 팬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 그리고 교민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언어는 문화다’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이번 책은, 우리에게 문화적 감수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문해력 어휘 상차림

2025/05/21 11:08:37

문해력 어휘 상차림 요즘은 오전 수업 후에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일이 잦습니다. 밖에 나가는 게 귀찮다는 생각도 들고, 얼른 식사하고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물론 연구실에 돌아와서는 식곤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아무튼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입니다. 새로운 한가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저희 학교 식당의 음식이 꽤 괜찮습니다. 가성비, 즉 가격 대비 질은 매우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밥을 먹는 경우에는 상차림을 보면서 어휘 이야기를 홀로 풀어보기도 합니다. 상 위에 있는 모든 음식은 어휘 공부의 재료가 됩니다. 오늘의 식단은 밥, 불고기, 계란말이, 어묵볶음, 샐러드, 김치, 시금치입니다. 오늘의 어휘 식단이기도 합니다. 우선 불고기를 볼까요? 불고기는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발음의 측면에서 보면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발음이 [물꼬기]인데 불고기는 [불고기]이기 때문입니다. 물과 불의 차이만 있는데 뒷소리가 된소리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게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음운현상에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불고기에서 불은 타오르는 불과는 관련이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오늘 식사에 나온 불고기도 국물이 있는 뚝배기 불고기였습니다. 불에 익혔다는 것은 맞겠지만 불에 직접 구운 요리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에 태운 것과는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한편 불고기의 불을 색깔로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불고기와 비슷한 구조인 불곰이나 불개미의 경우도 된소리로 발음하지 않는데, 의미를 붉은 곰, 붉은 개미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붉은색의 느낌이 나는 단어로는 불여우도 있습니다. 붉은 여우라는 의미입니다. 타는 불과는 관계가 적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불고기도 붉은 고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된소리로 발음하지 않는 것이라는 설명도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어휘이지만 식탁 위의 어휘 재료로는 충분한 듯합니다. 다음으로는 김치와 시금치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김치는 한자어 침채(沈菜)에서 온 것으로 봅니다. 침채의 옛 발음이었던 딤채가 김치로 변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채소의 의미인 ‘채’는 우리말에서 ‘치’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금치가 바로 그 예입니다. 시금치는 뿌리가 붉은 적근채(赤根菜)에서 온 말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채는 ‘치’로 발음됩니다. 배추는 백채(白菜)에서 상추는 생채(生菜)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합니다. 채소의 채가 ‘치’나 ‘추’로 우리말에서는 변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어묵볶음과 샐러드를 보겠습니다. 사실 어묵볶음이라는 말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는 늘 ‘뎀뿌라’라는 말로 불렀습니다. 얇은 ‘오뎅’을 볶은 요리를 뎀뿌라라고 하였고, 도시락 반찬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나중에 뎀뿌라가 일본에서는 튀김의 의미인 것을 알고 무척이나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뎀뿌라는 사실 포르투칼어 ‘tempero’에서 일본에 전해진 말입니다. 일본을 거치고 우리말로 들어오면서 의미가 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뎀뿌라라는 말 자체를 잘 안 사용하는 듯합니다. 샐러드도 우리는 주로 ‘사라다’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샐러드와 사라다는 다릅니다. 사라다는 마요네즈가 있어야 하고, 단맛이 강합니다. 저는 샐러드에 그렇게 다양한 드레싱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드레싱 주문이 어렵습니다. 사라다는 외래어가 일본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모하는지 보여주는 예입니다. 카레도, 돈가스도, 라면도 원래의 모습과는 달라진 말들입니다. 밥상머리에서 여러 생각을 하는 제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음식을 어휘로 생각하고 있으니 배가 고파옵니다. 어휘들을 맛있게 먹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푸짐한 어휘로 배가 부릅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백성을 잘 다스리는 정치

2025/05/07 11:02:36

백성을 잘 다스리는 정치 정치인이 백성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정치를 걱정하는 세상입니다. 정치가 잘 돌아가는 시절에는 누가 왕인지도 몰랐다고 하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온 세상이 시끄러운 정치로 몸서리를 치며 앓고 있습니다. 정치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릇된 정치 속에서 백성 노릇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치(政治)의 정은 한자로 보면 바를 정(正)과 닮아있습니다. 공자께 정치를 물었을 때, 정치는 정(正)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정치는 바르게 하면 되는 겁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정치가, 정치인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사람이어야 정치가 가능합니다. 언어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정치를 우리말로는 다스린다고 합니다. ‘정’도 ‘치’도 모두 다스린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요즘의 학문적 개념으로는 정치에 행정은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행정(行政)의 정도 정치의 정과 같습니다. 어쩌면 행정을 잘하기 위해서 정치를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정당(政黨)의 목적이 정권 획득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행정이 정치의 목적이 됩니다. 바른 행정을 하는 게 정당의 목적이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정당이라는 말도 바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른 목표가 없으면 정당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말에서 정치를 왜 다스린다고 할까에 대해서 늘 궁금했습니다. 다스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다스린다고 하면 왠지 지배하고 통치하고 제압하는 어감이 있습니다. 난세를 다스린다고 하고, 죄를 다스린다고 하니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실제로 사전을 찾아보면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듭니다. 누구를 다스린다는 말이 위압적으로 느껴집니다. 정치가 이렇게 다스리는 것이라면 제가 바라는 정치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스리다의 다른 의미를 찾아보고는 안심이 되었습니다. 다스린다는 말에는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니 원래의 의미가 편안하게 하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표적으로는 쓰린 속을 다스린다고 표현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다독여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을 편안하게 하는 게 다스리는 겁니다. 또한 마음을 다스린다는 표현도 씁니다. 분노나 화가 마음속에서 올라올 때 우리는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람들의 화를 가라앉게 만드는 것이 바로 다스리는 겁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겁니다. 기도를 하기도 하고, 좋은 생각을 하기도 하고, 바쁘게 지내기도 할 겁니다. 모두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불안하고, 힘겨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정치를 왜 다스린다고 했을까요? 왜 나라를 다스린다고 했을까요? 왜 백성을 다스린다고 했을까요? 이제 답은 명확해 보입니다. 지배하고, 통치하고, 억압하는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른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정치가가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하는 집단은 정당이 아닙니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고, 백성의 몸과 마음을 다스려주는 겁니다. 정치가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국민을 더 힘들게 합니다. 행정이 백성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정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겁니다. 힘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하고, 살맛 나게 하는 겁니다. 불안하고, 힘들고, 차별과 분노 가득한 세상에서 참된 정치,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를 그려봅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머리를 가슴으로, 가슴을 온몸으로

2025/04/20 13:32:23

머리를 가슴으로, 가슴을 온몸으로 세상에 알아야 할 게 참 많습니다. 예전에 비해 지식의 폭이 훨씬 넓어지고 있습니다. 알아야 하는 과목도 늘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지식도 끊임없이 솟아 나옵니다. 그럼 우리는 정말로 똑똑해졌을까요? 지식인은 많은데, 지혜로운 이는 적다는 한탄이 여기저기에서 나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지식은 쌓여가는데 지혜는 오히려 옅어집니다. 지식인(知識人)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지식인이라는 말은 칭찬 같기도 하고, 나무라는 말 같기도 합니다. 지식인을 나무랄 때는 지식을 쌓아는 가지만, 지혜로 바뀌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에 지식(知識)이 넘쳐나니 지식인도 넘쳐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혜를 나타내는 한자 지(知)에는 날 일(日)이 더해 있습니다. 지식이 밝아져야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빛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경쟁하고, 서로 잘났다고, 많이 안다고 하며 자신의 성적을 내세우는 세상, 자신을 숫자로 표현하는 세상은 어두운 세상입니다. 당연히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인공지능 앞에서는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인공지능의 속도와 정확성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아예 경쟁조차 되지 않습니다. 지식을 아는 것에 그치면 경영의 목표가 돈이 되고, 법의 목표가 돈이 되고, 의술의 목표가 돈이 됩니다. 모든 걸 돈에 초점을 맞추는 세상이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세상은 지식이 머리에 머물러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일을 머리 아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도 아파야 옳은 해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식을 단순히 암기하는 세상에서, 지식이 감정으로 옮겨가는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정보라고 합니다. 정보(情報)는 사정(事情)을 알린다는 뜻이고, 정보나 사정이나 모두 감정(感情)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情)이 담긴 글자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바로 가슴으로 사는 세상입니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입니다. 무미건조한 정보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파하는 정보입니다. 공감의 세상, 동감의 세상이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아니 온몸으로 퍼져나가서 핏줄이 돌 듯이 모세혈관까지 전해져야 합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가슴으로 옮기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겁니다. 사실 이 지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책상 앞에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멀리서 떨어져서 가슴 아파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뛰어들어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독서와 글쓰기가 내게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읽은 대로, 내가 쓴 대로 행동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글 읽기에서 이런 읽기를 체독(體讀)이라고 합니다. 온몸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며 읽는 것입니다. 주로 경전을 이렇게 읽습니다. 종교의 경전은 그저 읽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이 중요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쓰기에서도 체서(體書)가 필요합니다. 이 말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글을 쓰면서, 책을 읽으면서 지식인인 척하는 스스로가 부끄럽습니다. 그야말로 저는 지혜는커녕 지식인도 못 되었습니다.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삶도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행동하는 삶이 되기 위해 체독의 삶, 체서의 삶, 체학(體學)의 삶을 생각해 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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