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글짓기를 가르치지 말라

2024/07/17 11:34:45

글짓기를 가르치지 말라 저는 요즘 소학(小學)을 공부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번역소학(飜譯小學)을 공부합니다. 소학을 번역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소학을 우리말로 바꾼 것에는 소학언해(小學諺解)도 있는데, 언해보다는 번역이 훨씬 우리말답습니다. 언해는 직역이 많고, 번역은 의역이 많다고나 할까요? 물론 번역이나 언해나 기본적으로는 한문을 공부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입니다. 저도 소학의 한문과 옛글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번역소학은 중종 때인 1518년에 간행된 책입니다. 소학언해보다 먼저 간행되었습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오래지 않아서 초기의 표기가 남아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너무 어렵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읽어보시면 현재의 방언보다도 훨씬 쉽습니다. 표기법만 익숙해지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르는 단어는 나타날 겁니다. 그건 방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볼 때는 제주도 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습니다. 저희 큰어머니들이 하시던 경상도 사투리보다도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세 명이서 같이 공부하고 있는데, 책을 읽고 발표하는 것은 제 몫입니다. 발표를 하면 더 공부가 됩니다. 같이 공부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고 행복입니다. 저는 대학교 다닐 때부터 여러 사람과 다양한 공부 모임을 했습니다. 운 좋게도 대학 1학년 때부터 박사 선생님들과 모임을 하기도 했고, 동기들과 현대문학 모임, 고전문학 공부하는 사람과 한철학 연구 모임도 했습니다. 물론 주로는 언어학 공부 모임이었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4번 정도 공부 모임을 하고 있네요. 대학교 2학년 때는 일주일에 공부 모임만 네 번 있었습니다. 설익은 제 머리에 다양한 자극이 되었음에 감사합니다. 어학도, 문학도, 철학도 모두 좋았습니다. 공부 후에 이어지는 술자리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술 마시려고 모임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니까요. 실제로 술자리에서 이것저것 메모한 것도 많았습니다. 술 마시고 돌아가는 길에 지었던 시답지 않았던 시도 여러 편 있었네요. 소학에는 가언(嘉言)이라는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가언’에 대한 번역소학의 번역이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아름다운 말이면서 본받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요즘 이 부분을 공부하고 있는데 글짓기를 가르치지 말라는 부분이 나와서 흥미로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글쓰기가 중요하지요. 따라서 글쓰기를 가르치지 말라는 말은 충분히 자극적입니다. 왜 글짓기를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을까요? 글짓기를 가르치지 말라는 말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대강의 해석을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제(子弟)의 경박하고 날뛰는 것을 걱정하는 이는 글 읽기를 침착히 하게 하고, 글짓기는 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글쓰기에 맛을 들이면 뜻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뜻의 지향을 몰라서는 반드시 배움을 즐기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글짓기의 전제는 가벼운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글 읽기를 열심히 한 후에 쓰기를 해야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소학의 내용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많이 쓰는 게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소학에서는 좋은 글을 우선 많이 읽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예 외울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을 많이 외우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마음과 몸에 체득(體得)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글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옛사람이 한문을 공부하는 방법, 외국어를 공부하는 방법은 그러했습니다. 좋은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렇게 외웠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자연히 작문도 가능해졌습니다. 지금은 이런 교육 방법을 무식한 것이나 고루한 것으로 취급하기 일쑤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옛 성인의 가르침에서, 소학의 가르침에서 오늘도 저는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좋은 시를 외우고, 좋을 글귀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글쓰기의 수준이 좋아질 겁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만장일치의 세상

2024/06/19 11:23:49

만장일치의 세상 만장일치(滿場一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나는가요? 만장일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모든 사람의 의견이 같음’으로 나옵니다. 답답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가요? 만장일치를 하려면 평생 결론이 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할 겁니다. 요즘 세상에서 만장일치는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키려고 해도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데 말입니다. 여행지를 고를 때도 가족 사이에도 희망이 다릅니다. 종종 여행이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답답하면서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싸우다가 산이 가까운 바다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설악산이 인기가 높아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만장일치의 반대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다수결을 민주주의의 원리라고 하니 만장일치에 거부감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만장일치의 사회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회로 보이니까요. 실제로도 투표에서 득표가 100% 가까이 나오는 사회를 우리는 비난합니다. 일률적, 획일적인 나라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 사회에 자유가 없음은 쉽게 예상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 의미에서 만장일치의 사회를 꿈꿉니다. 만장일치는 어쩌면 사회적인 용어가 아니라 종교적인 용어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의견이 다르겠으나 그 다름의 근원에 있는 같음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만장일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장일치는 내 생각이 옳고 너의 생각이 틀리니 내 생각을 따르라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나쁜 만장일치일 겁니다. 만장일치하면 떠오르는 회의가 있습니다. 바로 신라의 화백회의입니다. 화백은 신라의 회의제도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여섯마을의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하는 겁니다. 화백의 결정 방식은 만장일치였습니다. 만장일치인데 결론은 잘 났을까요? 조금 힘들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만장일치가 원칙이라면 당연히 결론은 잘 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위급한데 계속 결정을 미룰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불교에서 경전의 내용을 확정할 때도 당연히 원칙은 만장일치였습니다. 이 말이 과연 부처님의 말씀인지 정할 때는 들었던 사람 모두가 동의하여야만 경전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모두 다르지만 모두 하나인 모습을 봅니다. 누구나 깨달은 이라면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경전을 정리하면서 더 큰 깨달음으로 하나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장일치는 힘으로 상대를 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를 상대를 이겨 기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내가 조금 양보하고 배려하면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만장일치는 배려의 세계이고, 양보의 세계이며, 평화의 세상인 겁니다. 만장일치가 기쁘게 이루어지는 곳은 늘 웃음꽃이 핍니다. 집안에서 작은 일을 정할 때도 만장일치가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다수결로 한다면 늘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하다가 산이 가까운 바다로 가듯이 말입니다. 사소한 다툼은 모두 다수결에서 발생합니다. 소수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결론은 다수의 결정으로 나니 불만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는 다수결이 아니라 만장일치입니다. 만장일치의 태도를 늘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쪽의 수가 많다고 우리 편이 많다고 다수결이 중요하다는 말에서 저는 날카로움을 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쇄소응대의 비밀

2024/06/05 16:27:33

쇄소응대의 비밀 쇄소응대(灑掃應對)는 전통 교육의 핵심입니다. 물 뿌리고, 쓸고, 응대를 잘하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학에도 여러 번 쇄소응대가 등장합니다. 쇄소응대는 말 그대로 청소 잘하고 사람 접대 잘하라는 말입니다. 주변을 깨끗이 하여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충고이고, 사람에게 진실되게 응대해야 인간관계를 잘할 수 있다는 권고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육에도 주요 내용이 되었을 겁니다. 어릴 적 기억 속에는 쇄소응대의 장면이 남아있습니다. 어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뿌리고, 마당과 집 앞을 쓸었습니다. 아침 풍경이지요. 저는 그때 그 모습이 쇄소응대인 줄은 몰랐습니다. 일찍 일어나서 집 앞에 물을 뿌리면 흙냄새가 확 올라옵니다. 아침 기억의 냄새네요. 물은 조리개로 뿌리기보다는 바가지의 물을 손으로 조금씩 뿌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을 뿌리는 행위가 배려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먼지가 나는 것을 막아서 주변 사람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쇄소의 쇄에서는 청소의 의미뿐 아니라 배려의 의미도 읽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함의 의미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 집 앞을 쓰는 겁니다. 자기 집 앞만 쓰는 것도 아닙니다. 골목을 여기저기 쓸고 다닙니다. 골목 끝까지 물을 뿌려가며 청소를 하고 나면 깨끗한 길 위로 사람들이 출근을 하는 겁니다. 맑은, 깨끗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응대는 접대(接待)와 대접(待接), 대답, 응답 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대접과 접대는 같은 단어인데 전혀 다른 느낌으로 되었습니다. 접대는 왠지 직장에서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위로 보이고, 대접은 신세를 갚는 느낌이 있습니다. 원래의 의미는 손님을 잘 모시는 겁니다. 즉 남을 잘 대하는 것이 응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은 누구나 같아야 할 겁니다. 힘 있는 자, 돈 있는 자와 못 가진 자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면 응대는 실패한 겁니다. 그런 응대를 가르치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응대는 어른에 대한 태도를 담고 있습니다. 공손하게 응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팔짱을 끼거나, 뒷짐을 지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딴청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잘 듣는다는 것은 듣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점점 많아집니다. 상대에 따라서 내 듣는 태도는 달라지기도 합니다. 응대에 실패하고 있는 겁니다. 눈높이에 맞추어 듣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응대입니다. 예전에 스토니부룩의 박성배 교수님께 불교를 배울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선생님이 불교를 잘 모르던 시절에 다른 절에 가서도 대접을 받는 방법을 스님께 물었더니, 가는 절마다 남보다 청소 열심히 하고, 인사 잘하라는 대답이었다고 합니다. 참 쉬운 방법이었습니다. 박성배 선생님은 가는 곳마다 먼저 청소하고, 먼저 인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모두 환영하고 좋아해 주었다고 하네요. 성자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성자가 되기도 쉽습니다. 그게 바로 쇄소응대였습니다. 쇄소응대만 잘하면 성자가 됩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먼저 마음의 인사를 하고, 가는 곳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내가 먼저 하려고 한다면 참다운 사람이 될 겁니다. 나이가 들면서, 힘든 일은 남에게 미루고, 인사는 하기보다 받으려고 합니다. 그것도 사람을 가려가면서 말입니다. 성자는 남의 이야기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나의 하루는

2024/05/22 16:10:24

나의 하루는 어쩌면 나의 하루는 눈을 뜨기 전에 시작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잠을 자느냐에 따라 하루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뒤척임과 두근거림은 잠자리마저 편안케 하지 않습니다. 심장의 두근거림은 원치 않는 꿈자리의 뒤숭숭함 때문입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꿈 이야기에 나는 한동안 지친 모습으로 아침을 맞습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꿈에도 변하지 않는 경지, 오매일여(寤寐一如)를 이야기했을 겁니다. 자나 깨나 같은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숭얼숭얼 거리는 잠자리를 뒤로 한 채 아침을 맞습니다. 도대체 날마다 아침에 눈을 뜨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치 한 발은 깊은 수렁에, 한발은 미지의 어둠 속에 있는 느낌입니다. 어둠은 어둠을 낳을 거라는 불안이 꿈속의 나를 괴롭힙니다. 그저 눈만 뜨면 되는 데 여전히 생각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문득 눈을 뜹니다. 새벽입니다. 해의 기운이 창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어둠이 조금씩 밀려나가고 있습니다. 새벽은 경계입니다. 밤과 아침의 경계입니다. 경계라고 하면 한 가운데가 아닐까 하겠지만, 사실 이 경계는 계속해서 아침으로 가는 경계입니다. 그래서 새벽을 기도의 시간, 깨달음의 시간이라고 하였을 겁니다. 새로운 물을 길어, 내 정수리에 붓는 시간이라는 비유도 적절합니다. 꽃우물에서 길어 올린 맑은 정화수(井華水) 한 잔에 내 마음과 기운이 모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더 간절합니다. 우물의 물이 정화수의 물이 되고, 정화수의 물이 하늘에 오르며 한 방울의 눈물이 되기도 합니다. 새벽을 잘 보내고 싶습니다. 아침을 잘 맞고 싶습니다. 아침은 태양의 시간입니다. 멀리서 붉은 기운이 차오르면, 동시에 검은 기운은 사라집니다. 시차를 두고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닙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시차가 없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서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욕심일 수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오해하는 것은 순서가 있다는 겁니다. 수신을 한 후에 제가가 있고, 제가가 있은 후에야 치국이나 평천하가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수신을 하면 세상은 변합니다. 세상은 나의 수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침은 내가 세상에 나오는 시간이고, 내가 세상에 사는 이유를 생각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이제 생활의 시간입니다. 삶의 시간입니다. 고통의 다른 이름은 즐거움입니다. 물론 즐거움의 다른 이름도 고통입니다. 일을 하는 것이 괴롭기도 하지만, 일을 할 수 없는 것도 고통이 됩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이 비할 데 없는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종종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인 애별리고(愛別離苦)보다 싫은 이를 만나야 하는 고통인 원증회고(怨憎會苦)가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하고, 만나기 싫지만 만나야 합니다. 또 하루가 그렇게 지나갑니다. 날이 저뭅니다. 새벽의 붉은 빛과는 사뭇 다른 저녁입니다. 노을빛은 하루의 열기를 담아서 따뜻합니다. 물질의 온도가 아니라 마음의 온도가 그렇습니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남깁니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리운 사람입니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입니다. 밉고 원망스런 사람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 깊이 가라앉아 있거나 어쩌면 이 순간은 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원증회고의 만남은 끝이 나고, 애별리고의 고통은 그리움이 됩니다. 그리움도 사랑입니다. 그리움도 기쁨입니다. 그 감정을 새삼 느끼며 마음이 편해집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이제 자야겠네요. 편안한 마음과 편안한 호흡으로 오늘을 되돌아봅니다. 힘들었지만, 즐거운 일도 많았습니다. 아팠지만 행복했습니다. 눈이 감겨옵니다. 오늘의 잠자리에서는 꿈마저 잃고 싶네요. 나의 하루를 닫습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지내다 보내다 살다

2024/05/09 13:01:46

지내다 보내다 살다 힘든 일, 어려운 일,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 미치겠는 일, 죽고 싶은 일, 괴로운 일, 견딜 수 없는 일, 어처구니가 없는 일, 화나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인생에서는 지나갔으면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인사말로 ‘잘 지내.’라는 말을 합니다. ‘잘 지냈어요?’가 과거에 대한 인사라면 ‘잘 지내.’는 기원을 담은 말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이 잘 지나가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나가게 하기 바랍니다. 힘든 일이 지나가고 나면 좀 나아질 겁니다. 안도의 한숨이 쉬어질 수도 있고, 몸에 한껏 들어갔던 긴장도 풀리겠지요, 우리는 그런 지나간 시간을 과거(過去)라고 합니다. 지날 과에 갈 거가 합쳐진 말입니다. 인사말에 과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다 좋은 과거가 되기 바랍니다. 아픈 일도, 슬픈 일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기도 하니 말입니다. 한편 우리는 시간을 보낸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보내는 경우도 있고, 즐겁게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휴일 잘 보내세요.’라는 인사말은 들을 때마다 어색합니다. 휴일은 보내고 싶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붙잡아 두고 싶은 심정인 사람도 많겠지요. 월요병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오늘 하루를 잘 보냈다는 사람도 봅니다. 어차피 시간은 가게 마련이니 이왕이면 잘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약간은 의인법 같은 느낌입니다. 세상 사람은 이별하기 마련이듯이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내드려야지요. 이왕이면 기쁘게 보내면 좋겠네요. 기쁘려면 함께한 추억이 많아야 합니다. 우리말에서 지내다, 보내다 말고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는 ‘설을 쇠다’의 쇠다가 있습니다. 이 말은 대단히 특이한 표현입니다. 다른 날에는 사용하지 않고, 설에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명절을 ‘쇠다’라는 말을 하기는 하지만 주로 추석이나 다른 날에는 쓰지 않습니다. 동사가 어떤 목적어와만 함께 쓰인다면 그것은 두 단어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서 ‘신다’는 ‘신’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밟다’도 ‘발’과의 관련성을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쇠다의 경우는 설과 관련이 있는 단어가 아닐까 추론합니다. 설은 나이를 나타내는 살과 같은 어원이고, 해와 관련된 말로 보입니다. 일년이 한 해이고, 한 살, 한 설인 셈입니다. 따라서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을 쇠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원을 찾기가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지내다, 보내다, 쇠다 말고 ‘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인사말에서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 듯합니다. 저는 이 살다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사람이라는 말과 살다라는 말은 같은 어원입니다. 따라서 사람으로 사는 겁니다. 사람답게 사는 겁니다. 그런 것을 ‘삶’이라고 합니다. 인생이지요. 축생(畜生)으로 살아가는 것을 ‘짐승’이라고 하니 사람다움은 삶의 기본조건입니다. 살다라는 말을 조금 자세히 풀어서 쓰면 ‘살아가다’가 됩니다. ‘가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앞이라는 지향점을 봅니다. 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앞을 향해서 가는 겁니다. 긍정적(肯定的)이고 전향적(前向的)인 태도입니다. 그런데 살다에 피동의 표현을 더하면 ‘살아지다’가 되는데, 수동적인 삶입니다. 남에게 이끌려서 사는 삶이니 늘 힘들게 지내고,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삶은 그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저는 우리의 삶을 의미 없이 지나가게 하지 말고, 그저 보내버리지만 말고 뚜벅뚜벅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 인사말에는 ‘사세요’가 많습니다. 행복하게 사세요. 즐겁게 사세요. 멋지게 사세요. 건강하게 살고, 웃으며 살고,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살기 바랍니다. 그게 잘 사는 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참성이라는 말

2024/04/23 14:39:15

참성이라는 말 오늘도 여러 책을 읽으며 진리를 공부하다가 ‘참성(僭聖)’이라는 표현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사전에 없는 말이 참 많다는 생각을 새삼 합니다. 참성의 참(僭)은 어긋난다는 뜻으로 ‘참람(僭濫)하다, 참칭(僭稱)하다’라고 할 때 쓰입니다. 참람하다는 말은 분수에 넘쳐 지나치다는 의미입니다. 참칭이라는 말은 멋대로 분수 넘치게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칭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전의 예에는 왕을 참칭하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착각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성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성인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책에서 참성은 깨달음의 적이고, 깨달은 이의 적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깨달은 이의 세 강적 중에서 가장 나쁜 강적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성인인 척 하는 것이 깨달은 이를 모욕하고,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것보다도 더 나쁜 적인 셈입니다. 척하는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 깨달은 척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척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모르면서 아는 척합니다. 잘난 척, 예쁜 척 등도 있습니다. 갑자기 ‘귀여운 척’이라는 표현이 생각나네요. 척 중에는 위험한 게 많습니다만, 그 중 최악은 깨달은 척, 성인인 척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나쁜 쪽으로 이끌고, 참된 사람을 욕합니다. 참성하는 이와 진짜 성인의 차이는 무얼까요? 일단 대부분의 성인은 스스로를 성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공자도 맹자도 성인이냐는 물음에 손사래를 쳤습니다. 성인이어도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저는 성인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게 진리의 길을 가고, 진리의 편이 되는 이가 성인인 겁니다. 참성하는 이는 정반대의 삶을 삽니다. 참성하는 사람을 설명해 놓은 것을 보고, 저도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성하는 이는 스스로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며, 다른 이를 무시(無視)하고 업신여깁니다. 무시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길에 서 있다면 더 낮은 곳, 더 아픈 곳을 바라보아야 하고, 찾아야 합니다. 저는 업신여긴다는 말은 ‘없이 여기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즉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겁니다. 당연히 저 잘난 맛으로 사는 사람인 겁니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가짜입니다. 참성하는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은 아프고 낮은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화려하고 높은 곳입니다. 권력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돈에 집착합니다. 권력자와 가깝고, 돈 있는 자와 가깝습니다. 무슨 무슨 자리에 연연합니다. 권력자와 가까운 것이 자랑이고, 권력마저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돈 있는 자와 가까운 것이 기쁨이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고 하지만, 들여다보면 직위를 탐내는 것입니다. 명예는 희생에서 오는 겁니다. 희생이 빠진 명예는 그저 자리에 대한 집착일 뿐입니다. 참성이 진리를 방해하는 강적이라는 말이 진리를 공부하고 생각하는 동안 더 다가옵니다. 왜 가장 나쁜 강적으로 표현하였는지 알겠습니다. 참성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서 내가 나아가는 방향을 돌아봅니다. 돈이 좋고, 힘이 좋고, 자리가 좋고, 그런 사람들과 아는 게 기쁜 삶이네요. 그러고 보면 참성은 멀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그런 사람임을 모르고, 그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면 참성의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나 스스로가 진리를 방해하고 있는 사람임을 뼈아프게 느낍니다. 참성이 아닌 척 살고 있었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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