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기품에서 서민의 식탁까지, 태국의 여름을 맛보다
태국의 무더운 여름, 특히 4월 쏭끄란 기간이 다가오면 거리 곳곳에서 한 가지 장면이 반복된다. 얼음이 가득 담긴 그릇 위로 피어오르는 은은한 꽃향기, 그리고 그 옆으로 정갈하게 차려지는 알록달록한 반찬들. 바로 태국의 전통 여름 음식 '카오채(Khao Chae)'다. 에어컨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부터 태국의 선조들은 먹는 것으로 더위를 다스리는 탁월한 미식의 지혜를 키워왔다. 왕실의 품격을 고스란히 담은 카오채의 본고장 펫차부리(Phetchaburi)를 중심으로, 태국인들이 여름을 이겨온 음식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카오채 — 몬족의 명절 음식에서 왕실의 여름 별미로
카오채의 뿌리는 태국에 거주하던 몬족(Mon)의 명절 음식에서 시작된다. 몬족 언어로 '얼음물 밥'을 뜻하는 '펑닥(Poeng Dak)'으로 불렸으며, 쏭끄란 기간에 신(테와다)과 조상, 승려에게 먼저 바치고 어른들께 대접한 뒤 온 가족이 나누어 먹는 신성하고 정성스러운 음식이었다.
이 소박한 서민 음식이 화려하고 정교한 왕실 요리, '카오채 차오왕(Khao Chae Chao Wang)'으로 격상된 것은 라마 4세(몽꿋 국왕) 시절의 일이다. 국왕이 펫차부리의 프라나콘키리(카오왕) 궁전으로 행차할 당시, 몬족 혈통의 후궁 '짜오쫌 만다 쏜끌린(Chao Chom Manda Sonklin)'이 이 음식을 손수 만들어 올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녀는 조리법을 펫차부리 궁중 주방에 전수했고, 이후 라마 5세를 비롯한 역대 국왕들이 그 맛을 극찬하면서 펫차부리를 중심으로 태국식 카오채가 확고한 왕실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성과 예절이 담긴 카오채 식문화
카오채는 조리 과정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밥알이 뭉개지거나 물이 탁해지지 않도록 여러 번 정성껏 씻어 밥을 지은 후, 자스민과 일랑일랑(끄라당응아, กระดังงา) 등 향기로운 생화를 띄우고 전통 촛불(티얀옵)로 밤새 훈연한 차가운 물에 밥을 말아낸다. 그 과정에서 물에 배어드는 은은한 꽃향기야말로 카오채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곁들임 반찬(크르앙 키앙)에서도 펫차부리식 카오채만의 색깔이 뚜렷이 드러난다. 일반적인 카오채에 쓰이는 새우 페이스트 완자 '룩까삐'와 달리, 펫차부리에서는 새우 대신 코코넛, 샬롯, 레몬그라스, 핑거루트(크라차이) 등을 볶아 만들어 고소한 풍미를 극대화한다. 여기에 잘 말려 잘게 찢어 달콤 짭짤하게 버무린 가오리 생선 '쁠라완'과 무를 볶은 '차이뽀완' 등 다채로운 반찬이 풍성하게 차려진다.
처음 카오채를 접하는 이라면 식사 예절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반찬을 밥이 담긴 물에 직접 넣거나 섞어 먹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물이 탁해지고 애써 입힌 꽃향기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올바른 방법은 반찬을 한 입 먼저 먹고, 밥을 떠먹은 뒤, 마지막에 향기로운 물을 마시는 것이다. 이 순서 하나에도 왕실 음식의 품격이 살아 있다.
펫차부리의 전설적인 카오채 명가 두 곳
펫차부리 시내에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카오채 전문점들이 밀집해 있다. 그중에서도 현지인과 방문객 모두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는 노포 두 곳을 소개한다.
카오채 매닛 (ข้าวแช่แม่นิด, Khao Chae Mae Nid)
6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으로, 1대 사장이 과거 궁중에 카오채를 올렸던 솜씨가 현재까지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다. 청화백자 그릇과 은도금 황동 숟가락을 사용하는 서빙 방식에서 왕실 음식 특유의 품격이 물씬 풍긴다. 달콤짭짤한 쁠라완과 펫차부리식 룩까삐의 조화가 일품이며, 펫차부리 강변(ริมน้ำเพชร)에 위치해 시원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라차위티 로드(Ratchawithi Rd)를 따라 주지사 관저 앞 다리를 건너기 전 좌회전하여 철교 아래로 진입하면 된다. 인근 강변에 주차 공간이 넉넉해 자가용 방문도 편리하다.
란 빠으언 (ร้านข้าวแช่ป้าเอื้อน, Ran Khao Chae Pa Uean)
64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온 이 식당은 적십자 제8지소 맞은편 골목(Soi Surin Ruechai, Tha Rap)에 자리 잡고 있어, 현지에서는 '적십자 카오채'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각종 방송을 통해 소개될 만큼 옛 방식 그대로의 맛을 고집하며, 늘 긴 대기 줄이 이어지고 반찬만 따로 포장해 가는 손님도 많다. 영업시간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4시경까지이나, 재료가 소진되면 일찍 문을 닫는 경우가 많으므로 점심시간 이전에 방문하는 것을 강력히 권한다.
태국의 여름 식탁 —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별미 5선
카오채가 태국 여름 음식의 대명사라면, 그 주변을 채우는 전통 별미들도 결코 만만치 않다. 현대인들은 에어컨과 얼음 음료로 더위를 피하지만, 사실 '얼음'조차 라마 5세 통치 시기에 도입된 사치품이었다. 냉방 시설이 전무했던 시절, 태국 선조들은 먹는 것으로 체온을 다스리는 기발한 지혜를 완성해 냈다. 오늘날 고급 레스토랑은 물론 로컬 시장 노점에서도 만날 수 있는 태국의 전통 여름 별미 다섯 가지를 소개한다.
쏨춘 (Som Chun) — 얼음 위에서 피어나는 세 가지
전통 여름 디저트 중 오늘날 가장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메뉴다. 린찌(리치), 람부탄, 귤 등 제철 과일을 판단잎과 쏨싸(Som sa, 태국 희귀 감귤류) 향이 은은하게 배어든 시럽에 담가 낸 뒤, 자스민 향을 입힌 잘게 부순 얼음 위에 올린다. 그 위에 얇게 썬 어린 생강, 튀긴 샬롯, 새콤한 그린 망고를 얹어 마무리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한 입에 달콤하고 짭짤하며 새콤한 맛이 차갑게 터지는 감각적인 디저트다.
카놈찐 싸오남 (Kanom Jeen Sao Nam) 상쾌하고 부드러운 하얀 쌀국수
강렬한 커리와 곁들이는 일반 카놈찐과 달리, 싸오남은 밝고 청량한 풍미를 자랑한다. 갓 짜낸 신선한 코코넛 밀크에 다진 파인애플, 얇게 썬 마늘, 어린 생강, 건새우 가루, 생선살 완자(Jang-Lon)를 곁들여 먹는 방식으로,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다소 낯선 조합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맛은 놀라울 만큼 상쾌하다. 통조림이 아닌 신선한 코코넛 밀크를 사용하는 것이 맛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방콕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이 음식은 위의 펫차부리 카오채 전문점 ‘란빠으언’ 바로 옆에서 판매하고 있으니 혹시 이곳을 방문한다면 꼭 맛보기 바란다.
마호 (Ma Hor) 새콤달콤한 과일과 짭짤한 고명의 한 입
'달리는 말(ม้าฮ่อ)'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에피타이저로, 상큼한 과일 위에 짭짤한 고명을 얹어 먹는 한 입 거리 간식이다. 마늘, 고수 뿌리, 후추, 다진 돼지고기나 새우, 구운 땅콩을 달콤짭짤하게 볶아 졸인 고명을 파인애플 조각 위에 올리는 것이 전통 방식이며, 마양프라(Marian plum)나 오렌지와도 훌륭한 궁합을 이룬다. 과일의 산미가 고명의 진한
쁠라행 땡모 (Pla Haeng Tangmo) 수박과 건어물 가루의 만남
이름 그대로 건어물(Pla Haeng, ปลาแห้ง)과 수박(Tangmo)을 조합한 간결하면서도 맛깔스러운 태국식 여름 간식이다. 여기서 '쁠라행'은 특정 어종 한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금에 절여 말린 작은 생선을 가루 내거나 잘게 볶은 것을 통칭하는 말이다. 한국의 멸치볶음과 유사한 개념으로, 태국에서도 작은 바닷물고기나 민물고기를 말려 조리하는 문화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이 건어물 가루를 노릇하고 향긋하게 볶아낸 뒤 마른 고추를 곁들여 매콤하게 만든 후, 한 입 크기로 썬 시원한 수박 위에 솔솔 뿌려 먹는 방식으로, 달고 수분 가득한 수박과 짭짤 매콤한 생선 볶음의 질감 대비가 더위를 단숨에 날려준다.
얌 쏨오 (Yam Som-O)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아주는 포멜로 샐러드
식욕을 돋우는 톡 쏘는 맛이 일품인 샐러드다. 그냥 먹기에는 신맛이 강하거나 퍽퍽할 수 있는 포멜로(쏨오) 과육을 야자당(팜슈거), 라임즙, 피시소스로 균형 잡힌 드레싱에 버무리고, 바삭하게 튀긴 샬롯과 신선한 통새우를 올린다. 전통적으로는 소화를 돕고 알싸한 향을 더해주는 야생 구장잎(차플루, ช้าพลู)을 곁들여 내는 것이 정석으로, 여름철 식사의 산뜻한 마무리로 더없이 훌륭하다.
에디터 노트
과거에는 궁중이나 특정 시기에만 맛볼 수 있었던 귀한 음식들이 최근 태국 전통 미식에 대한 재조명 속에 점차 접근성이 높아지고 있다. 가장 더운 계절,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 메뉴는 물론 동네 로컬 시장의 작은 노점에서도 이 여름 별미들을 만날 수 있다. 올여름만큼은 에어컨에만 의존하기보다, 수백 년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한 그릇에서 태국 여름의 진짜 맛을 경험해보시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