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타야의 ‘황금빛 전설’

작성자 : 관리자 날짜 : 2026/01/12 10:41

아유타야의 ‘황금빛 전설’ 비극을 달콤함으로 승화시킨 여인, 타오 통 킵 마

역사의 수레바퀴는 때로 잔혹하게 굴러가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문화는 영원히 남는다. 태국 식문화의 정점이라 불리는 궁중 디저트의 화려한 금빛 뒤에는, 17세기 아유타야 왕조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관통한 한 여인의 대서사가 숨 쉬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방콕의 거리와 고급 레스토랑에서 마주하는 ‘황금빛 디저트’들은 단순한 설탕 덩어리가 아니다. 그것은 망국의 한과 개인의 비극, 그리고 동서양의 문명이 충돌하고 융합하며 만들어낸 ‘달콤한 생존기’다. 태국 디저트의 어머니, 타오 통 킵 마(Thao Thong Kip Ma). 본명 마리아 귀오마르 데 피냐(Maria Guyomar de Pinha)의 삶을 따라 아유타야의 부엌으로 들어가본다.

코스모폴리탄 아유타야의 '파워 커플', 그리고 몰락

시계바늘을 1664년으로 돌린다. 당시 아유타야는 '동방의 베니스'라 불리며 전 세계 상인들이 모여드는 국제도시였다. 마리아는 포르투갈, 일본, 벵골의 피가 섞인 혼혈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당시 일본 막부의 기독교 탄압을 피해 태국으로 건너온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것은 그리스 출신의 야심가, 콘스탄틴 폴콘(Constantine Phaulkon)과의 결혼이었다. 폴콘은 아유타야 나라이 왕(King Narai)의 총애를 받으며 무역과 외교를 주무르는 최고위 관직(Phra Khlang) 프라 끌렝에 올랐고, 마리아 역시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다. 서양의 식기구와 동양의 식재료가 넘쳐나던 그녀의 저택은 당대 최고의 핫플레이스였다.

그러나 1688년, 나라이 왕이 위독해지자 '프라 페트라차'가 일으킨 혁명은 그녀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남편 폴콘은 대역죄로 처형당했고, 마리아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채 왕궁의 노비로 전락했다고 알려져 있다. 화려했던 귀부인이 하루아침에 감옥 같은 주방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달걀 노른자의 연금술, 주방을 제패하다

절망의 끝에서 그녀를 구원한 것은 '요리'였다. 포르투갈 혈통인 그녀는 당시 태국 궁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낯설게 활용되던 식재료인 '달걀'과 '정제 설탕'을 다루는 데 능통했다고 전해진다. 일부 전승에서는 당시 달걀을 디저트로 쓰는 문화가 지금처럼 보편적이지 않았다고도 이야기한다.

마리아는 포르투갈 수녀원에서 전해 내려오던 제과 기술을 아유타야의 풍부한 코코넛 밀크와 접목시켰다. 그녀의 손끝에서 노른자는 황금빛 실타래가 되었고, 설탕물은 보석 같은 윤기를 입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디저트의 황금색은 태국 왕실에서 '상서로움'과 '권위'를 상징하는 색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결국 그녀는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왕실 주방의 디저트 담당자로 자리매김했고, '타오 통 킵 마(Thao Thong Kip Ma)'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는 태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드라마틱한 신분 상승이자, 미식 혁명의 순간으로 회자된다.

[Focus] 불멸의 유산 : '골든 트리오(Golden Trio)'

타오 통 킵 마가 남긴 유산 중 가장 압권은 '3대 황금 디저트'다. 지금도 태국의 결혼식이나 중요한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이 디저트들은 단순한 간식이 아닌, 축복의 메시지다.

1. 통 입 (Thong Yip) - 부를 움켜쥐다
'집다(Yip)'라는 이름처럼, 노른자를 끓는 시럽에 익혀 꽃잎 모양으로 주름 잡아 만든다. 5개 혹은 6개의 꽃잎 모양은 부와 명예를 손에 쥐고 놓지 말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2. 통 욧 (Thong Yod) - 끝없는 황금비
물방울 모양의 이 디저트는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금덩이를 상징한다. 끊임없이 재물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어 사업가들이 특히 사랑하는 메뉴다.

3. 퍼(f)이 통 (Foi Thong) - 장수의 실타래
포르투갈의 '피우스 드 오부스(Fios de Ovos)'가 원형이다. 좁은 구멍을 통해 노른자를 끓는 시럽에 실처럼 길게 뽑아낸다. 끊어지지 않는 긴 실은 부부의 백년해로와 장수를 의미한다. 태국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에게 이 긴 실을 먹여주는 풍습은 여기서 유래했다.

[Insight] 퓨전의 미학 : 현지화된 걸작들

마리아의 천재성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창조적 변용'에 있었다. 유럽의 재료가 없는 열대지방에서 그녀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했다.

✽룩 춥 (Luk Chup)의 탄생 비화
유럽의 마지팬(Marzipan)은 아몬드 가루가 필수였다. 아몬드를 구할 수 없었던 마리아는 태국의 녹두(Mung bean)를 으깨어 반죽을 만들었다. 여기에 천연 색소를 입혀 미니어처 과일 모양으로 빚어낸 것이 바로 룩 춥이다. 겉은 화려한 젤리지만 속은 담백한 녹두소가 들어있는 이 반전 매력은 태국인들의 입맛을 완벽히 사로잡았다.

✽카놈 머 껭 (Khanom Mo Kaeng) : 양파와 푸딩의 만남
서양의 커스터드 푸딩에 태국식 터치를 가미했다. 우유 대신 진한 코코넛 밀크를 쓰고, 팜슈가로 깊은 단맛을 냈다. 결정적인 한 방은 토핑이다. 얇게 썰어 튀긴 샬롯(적양파)을 올려 단맛의 느끼함을 잡고 고소한 풍미를 극대화했다. '디저트에 양파튀김'이라는 파격은 그녀였기에 가능했던 시도였다.

✽카놈 핑 (Khanom Phing)과 티안 옵 (Tian Op)
타피오카 전분으로 만든 이 쿠키는 입안에서 가루처럼 녹아내린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향'이다. 마리아는 태국 고유의 향초인 '티안 옵'을 태워 그 연기를 디저트에 입히는 훈연 기법을 사용했다. 서양의 쿠키 제조법에 동양의 향 문화를 입힌, 완벽한 문화적 융합이다.

[Epilogue] 300년을 이어온 달콤한 위로

타오 통 킵 마, 마리아 귀오마르 데 피냐. 그녀는 남편을 잃은 슬픔과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솥을 저으며 삶을 지탱했다. 그녀가 만든 황금빛 과자들은 왕족에게는 권위였겠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자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방콕의 왓 쩨뚜폰(왓 포) 사원 근처나 아유타야의 시장 골목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녀의 레시피를 만난다. 360년 전, 한 여인이 눈물과 설탕으로 빚어낸 이 작은 조각들은 이제 태국을 찾는 전 세계인들에게 가장 달콤한 위로를 건네고 있다.

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혹은 태국 식당을 찾는다면 메뉴판 구석의 디저트를 눈여겨보라. 그 샛노란 황금빛 속에는 제국을 넘어선 한 인간의 위대한 승리가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