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선선했다고, 벌써 겨울이라고?

2026/11/02 11:48:58

아침에 선선했다고, 벌써 겨울이라고? 카디건을 꺼내기 전 알아두면 좋은 태국 겨울의 세 가지 조건 방콕에서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아채려면 제법 예민한 감각이 필요하다. 단풍이 물드는 것도 아니고, 길가에 첫눈이 내려앉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문을 열었을 때 얼굴에 닿는 공기가 어제보다 조금 덜 뜨겁다. 그 정도면 일단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늘 아침, 좀 선선하지 않았어?” 해마다 10월이면 교민들 사이에서 오가는 반가운 인사다. 누군가는 벌써 겨울이 왔다고 하고, 누군가는 며칠 더 두고 보자고 한다. 장롱 속 카디건을 떠올렸다가 한낮의 햇볕을 보고 생각을 접는 일도 이맘때의 익숙한 풍경이다. 한국에서라면 ‘이게 무슨 겨울이냐’고 할 날씨지만, 연중 더위와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다르다. 아침 산책길에 땀이 조금 덜 나고, 뜨거운 커피를 마셔도 부담스럽지 않은 날. 방콕의 겨울은 그렇게 작은 차이로 먼저 찾아온다. 다만 우리의 기분과 기상청의 판단은 별개다. 태국 기상청(TMD)은 아침 한때 선선해졌다는 이유만으로 겨울의 시작을 선언하지 않는다. 기온과 바람, 비의 변화가 함께 나타나는지를 살핀다. 겨울도 나름의 입장 조건이 있는 셈이다. 첫째, 온도계가 움직여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최저기온이다. 태국 상부 지역의 최저기온이 대체로 23도 미만으로 내려가 선선한 날씨가 넓게 나타나야 한다. 여기서 ‘상부 지역’은 북부만을 뜻하지 않는다. 북동부와 중부, 동부 등을 포함하며, 남부와 구분하는 기상 용어다. 태국 전역이 한꺼번에 23도 아래로 떨어져야 한다거나, 방콕의 온도계 하나로 겨울을 결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23도라는 숫자를 보면 한국 독자는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반소매 차림으로 다니기 좋은 날씨가 이곳에서는 기다리던 계절의 신호다. 겨울이라는 말에 담긴 기대부터 다르다. 방콕 생활이 길어지면 그 차이를 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았을 아침바람에도 “오늘은 제법 차네”라는 말이 나온다. 몸이 이 도시의 온도에 적응한 것이다. 둘째, 바람이 방향을 바꿔야 한다 기온이 잠시 떨어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계절을 움직이는 바람도 바뀌어야 한다. 우기에는 습기를 실어 나르는 남서몬순의 영향이 크다. 겨울로 넘어갈 때는 북동풍이나 동풍이 자리 잡는다. 기상청은 지상에서 느끼는 바람뿐 아니라 상공의 풍향 변화도 살핀다. 실제 겨울 진입 공고에는 낮은 상공의 북동풍·동풍과 더 높은 상공의 서풍 전환이 함께 제시된다. 쉽게 말하면 아침에 시원한 바람이 한 번 불었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태국을 덮고 있는 공기의 흐름 자체가 계절에 맞게 달라졌는지를 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에어컨을 조금 줄여도 되겠네”라는 생활의 변화지만, 기상청에는 하늘 위 바람의 방향까지 확인해야 하는 문제다. 셋째, 비가 물러나야 한다 마지막 조건은 비다. 태국 상부 지역에서 강우량과 비가 내리는 범위가 지속적으로 줄어야 한다. 하루 맑았다고 우기가 끝난 것도, 오후에 소나기가 한 번 내렸다고 겨울이 취소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흐름이다. 방콕에 사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이 조건이 가장 실감 난다. 외출 전 하늘을 올려다보는 횟수가 줄고, 약속 시간을 잡으며 폭우와 교통체증을 함께 걱정하는 날도 조금씩 줄어드는 계절. 기온 몇 도의 차이보다 비가 잦아드는 변화가 더 반가울 수 있다. 단, 남부는 사정이 다르다. 북부와 방콕에서 선선한 계절을 이야기할 때도 남부, 특히 태국만 쪽 동해안에는 비가 많이 내릴 수 있다. ‘태국에 겨울이 왔다’는 소식을 ‘이제 전국 어디든 비 걱정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달력보다 느긋하게 오는 계절 태국의 겨울은 통상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2월 중순까지로 설명된다. 하지만 이는 평균적인 계절 구분이다. 달력이 10월 중순을 넘겼다고 날씨가 약속이라도 한 듯 바뀌지는 않는다. 중부 하부와 동부는 북부·북동부보다 비가 늦게 그치고, 선선한 날씨도 뒤늦게 찾아오는 편이다. 2026년 역시 아침 공기가 달라졌다는 느낌만으로 공식적인 겨울 진입을 단정할 수는 없다. 올해의 정확한 시작일은 기상청의 해당 연도 공식 발표로 확인할 일이다. 물론 산책하기 좋은 아침을 즐기는 데까지 기상청의 허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을 열었을 때 바람이 반갑다면 조금 더 걸으면 된다. 늘 실내로 들어가던 카페에서 모처럼 바깥자리에 앉아도 좋다. 다만 카디건을 꺼냈다고 우산까지 넣어둘 필요는 없다. 방콕의 계절은 그렇게 칼같이 바뀌지 않으니까. 내일 아침에도 누군가 물을 것이다. “이제 겨울 온 건가?” 공식 답변은 기상청에 맡기자. 우리는 우선, 모처럼 선선한 그 아침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글 | 김종민 편집국장

물은 빠져도 숙제는 남는다

2026/10/17 17:28:53

물은 빠져도 숙제는 남는다 방콕 수해가 드러낸 경보의 빈틈 주민에게 필요했던 것은 ‘준비할 시간’ 폭우 이후 수위가 높아진 방콕 시내 운하를 표현한 AI 생성 이미지. 물이 빠지면 길이 다시 드러나고 차도 움직인다. 그렇다고 생활이 바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젖은 가재도구를 내다 버리고 집을 치우는 일, 닫았던 가게 문을 다시 여는 일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지난 9월 말 방콕을 덮친 폭우는 배수시설의 한계와 함께 좀 더 기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주민들은 위험을 제때 전달받았을까. 받았다면, 움직일 시간은 있었을까. 방까피의 한 주민이 정부에 바란 것도 거창한 약속이 아니었다. 더 일찍, 더 분명하게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카오솟 잉글리시의 프라빗 로자나프룩 기자는 10월 1일자 기고에서 침수 지역을 찾았을 때의 장면을 전했다. 주민 수십 명이 허리 높이의 물을 헤치고 식료품과 생필품을 사러 다니던 곳에서, 정부에 바라는 점을 묻자 돌아온 답이 더 명확한 사전 경고였다고 한다. 이틀 동안 300mm, 70만 명 로이터는 9월 26일 방콕에 48시간 동안 약 300mm의 비가 내렸다고 보도했다. 도로가 잠기고 운하 주변 피해가 커지자 방콕시는 재난 피해 지역을 선포했고, 군은 대피시설과 급식 지원에 나섰다. 시도 학교를 임시 대피 공간으로 열었다. AP통신이 9월 28일 전한 홍수통제센터 집계(타위다 까몬웻 방콕 부시장 설명)로는 피해가 약 32만9,000가구, 70만 명이었다. 당시 주요 운하 네 곳은 수위가 높아 주변 물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그 시점의 방콕 집계여서 전국 피해나 최종 수치와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 물이 차오르면 장 볼 길이 끊기고 출근도 어려워진다. 영세 상인은 매출과 재고를 한꺼번에 잃을 수 있다. 같은 깊이의 물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불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장 생계가 걸린 일이다. 경보는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아무 경고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사실과 다르다. 태국 기상청의 9월 24일 오전 예보에는 방콕과 수도권을 포함한 여러 지역의 강한 비와 매우 강한 비, 누적 강우에 따른 돌발 홍수 위험이 적혀 있었다. 저지대와 물길 주변에 주의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다만 이런 광역 예보와 동네 주민이 필요로 하는 침수 안내는 별개다. 주민이 알고 싶은 것은 우리 집 앞 도로가 언제부터 위험해지는지, 차를 어디로 옮겨야 하는지, 거동이 불편한 가족과 움직이려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다. 반대로 일부 주민의 증언만으로 모든 지역의 경보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사후 점검이다. 어느 기관이 몇 시에 어느 지역에 무엇을 안내했는지, 그 정보가 주민에게 언제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실제 침수 시각과 맞춰 보면 주민에게 준비할 시간이 얼마나 주어졌는지 드러난다. 경보를 몇 번 냈는지로 성과를 따질 일이 아니다. 주민이 내용을 이해하고 가족과 재산을 지킬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가 기준이어야 한다. 침수된 방콕 골목에서 주민들이 허리 높이의 물을 헤치며 이동하는 상황을 표현한 AI 생성 이미지. 공장과 놀이공원까지 번진 피해 피해는 방콕 밖에서도 이어졌다. 태국 산업단지공사(IEAT)는 9월 30일 발표에서 아마타시티 촌부리 산업단지가 9월 25일부터 이어진 비와 외부 유입수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일부 구역은 도로 수위가 약 70cm까지 올라 통행과 일부 사업장에 지장이 있었고, 공사는 배수 능력 확대와 제방 보강 등의 조치를 설명했다. 단지 전체가 멈췄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공장이 직접 잠기지 않아도 직원 출퇴근이나 원자재·제품 운송이 막히면 가동은 흔들린다. 한국 기업이라면 담장 안의 방수 대책과 함께 주변 도로, 직원 거주지, 물류 동선까지 살펴야 한다. 방콕 시민들에게 추억의 장소인 시암 어메이징 파크(옛 시암파크)도 피해가 컸다. 더 네이션은 10월 4일 공원이 9월 26일부터 운영을 멈췄다고 보도했다. 창업주 차이왓 르앙아몬럿은 초기 피해액을 최소 5억 바트로 추산했고, 보수 비용과 휴업 중 직원 지원에 큰돈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사업주 측 추산일 뿐 확정된 손해액은 아니다. 놀이기구 수리비가 전부도 아니다. 문을 닫은 동안의 매출 공백과 직원들의 생계까지 복구에 들어간다. 폭우 이후 운영을 멈춘 시암 어메이징 파크 방콕의 물이 빠진 뒤에도 지역마다 물 사정은 다르다. Thai PBS는 10월 4일 국가수자원청 설명을 인용해,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 때문에 아유타야의 짜오프라야강과 너이강 주변 수위가 약 10cm 더 오를 수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의 예측이지 지금의 수위 전망은 아니다. 그래도 한쪽이 물을 빼는 동안 다른 쪽은 상류의 물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경보 문구를 전국에 똑같이 되풀이할 게 아니라 지역과 시간대에 맞춰 달라져야 하는 이유다. 과제는 비교적 분명하다. 기상 예보를 동네별 위험 정보로 바꾸고, 거기에 주민이 취할 행동을 붙여야 한다. 이동이 필요한 곳이라면 시점과 경로, 대피 장소도 함께 알려야 한다. 스마트폰 알림을 받기 어려운 주민이나 태국어가 서툰 외국인에게도 정보가 닿는지 살펴야 한다. 교민사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집과 사업장이 속한 구청, 건물 관리사무소, 산업단지 운영기관의 공지를 어떤 경로로 받을지 정해 두고, 직원·가족과 이동 계획을 미리 이야기해 두는 것이다. 작은 준비지만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개인의 대비가 공공기관의 책임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복구 예산과 지원 대책은 곧 나올 것이다. 그 돈이 꼭 필요한 만큼, 다음 비가 오기 전에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어느 동네의 경보가 늦었는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지원이 왜 닿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고쳐야 한다. 방카피 주민의 요구는 소박했지만, 그것을 제대로 지키는 일은 결코 작은 숙제가 아니다. 글 | 김종민 편집국장

엇갈린 궤적, 맞닿은 인연 태국의 ‘최초’를 통해 본 한국의 근현대사

2026/10/07 10:05:00

엇갈린 궤적, 맞닿은 인연 태국의 ‘최초’를 통해 본 한국의 근현대사 태국에 살다 보면 이 나라가 얼마나 일찍부터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이룩했는지 새삼 놀라게 될 때가 있다. 최초의 공항, 최초의 은행, 최초의 TV 방송국 등 태국이 세워온 역사적 마일스톤들을 살펴보면, 비식민지 국가로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며 평화롭게 인프라를 구축해 나간 선진성이 돋보인다. 그렇다면 태국이 이러한 ‘최초’의 기록들을 써 내려가던 정확히 그 시점, 우리의 조국 한국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두 나라의 엇갈린 근현대사 궤적을 나란히 비춰보는 것은, 이국땅에 사는 우리 교민들에게 우리가 걸어온 길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흥미롭고 가슴 벅찬 작업이다. 1900년대 초, 평화로운 근대화와 국권 상실의 비극 1906년, 태국은 외국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순수 자국 자본으로 시암상업은행(SCB)을 설립하며 경제 근대화의 굳건한 기틀을 다졌다. 반면 같은 해 한국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며 국가의 외교권과 주권을 서서히 빼앗기던 비극적인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이러한 극명한 대비는 1914년에도 이어진다. 태국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속 운영 공항 중 하나로 꼽히는 돈므앙 공항을 개항하며 일찌감치 글로벌 시대의 하늘길을 열었다. 반면 1914년의 한국은 무단통치가 극에 달했던 일제강점기였다.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과 행정구역 통폐합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며 식민지 수탈 체제가 철저히 굳어지던 암흑기였다. 1950년대, F1 트랙의 왕자와 포연 속의 전우 가장 극적이면서도 숙연해지는 해는 바로 1950년이다. 이 해에 태국의 비라 왕자는 유럽 모터스포츠의 최고 무대인 포뮬러 원(F1)에 태국인 최초로 참가했다. 왕실 인사가 세계 최고급 스포츠 무대를 누비며 문화적 여유와 선진성을 보여주던 바로 그 평화로운 해, 한국에서는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했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태국의 왕자가 F1 트랙을 달리던 그 시기에, 태국 정부는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한국에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한 태국군, 이른바 ‘리틀 타이거(พยัคฆ์น้อย)’의 젊은 용사 6,326명은 이름조차 생소했던 나라 한국의 전장으로 달려와 피를 흘렸다. 양국의 공식 수교(1958년)가 맺어지기도 한참 전, 두 나라는 이미 피로 맺어진 혈맹이 된 것이다. 이후 1954년, 태국 영화 ‘산티-비나’가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하며 문화 예술의 꽃을 피울 때, 한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온 국민이 생존을 향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55년, 태국이 채널 4 방쿤프롬을 개국하며 대중 미디어의 화려한 막을 올렸을 때, 한국은 미군이 버린 드럼통을 펴서 최초의 국산 자동차인 ‘시발(始發) 자동차’를 만들어내며 한강의 기적을 향한 무거운 첫걸음을 떼고 있었다. 1960~70년대, 미스 유니버스와 눈물의 금메달 1960년대로 접어들며 두 나라는 각자의 방식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1965년, 아파사라 홍사쿨라가 태국인 최초로 미스 유니버스 왕관을 쓰며 국가적 자부심을 고취했다. 같은 해 한국은 경제 발전을 위한 종잣돈을 마련하고자 격렬한 반대 시위 속에서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고, 국가의 명운을 걸고 베트남 전쟁 파병을 시작하는 험난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시간이 흘러 1976년, 무척이나 흥미로운 평행 이론이 두 나라의 스포츠 역사에 새겨진다. 이 해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파야오 푼타랏이 복싱 동메달을 따내며 태국 역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조국에 안겼다. 그리고 바로 같은 대회에서, 한국의 양정모는 레슬링 종목에 출전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온 국민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완전히 다른 출발선과 시대적 배경을 가졌지만, 1976년 몬트리올에서 두 나라는 나란히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과 희망을 선사하며 도약했다. 역사가 주는 묵직한 감동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태국은 제국주의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근대화의 이정표들을 세워왔다. 반면 한국은 식민 지배와 참혹한 전쟁이라는 벼랑 끝에서 피와 땀으로 압축 성장을 이뤄냈다. 출발점도, 지나온 풍경도 무척이나 달랐지만, 가장 어두웠던 시절 아무런 대가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아준 숭고한 인연이 있었기에 오늘날 태국과 한국은 훌륭한 동반자로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태국의 낡은 건물이나 오랜 기록들을 마주할 때, 그 시간 속에 담긴 우리의 역사도 함께 겹쳐본다면 이곳에서의 삶이 한층 더 깊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글 : 김종민 편집국장

태국, 잘사는 나라 되려면 2048년까지 기다려야 하나

2026/09/21 12:39:09

태국, 잘사는 나라 되려면 2048년까지 기다려야 하나 세계은행 "개혁하면 2037년도 가능"… 앞서가는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뒤쫓아오는 베트남 태국이 '고소득 국가'가 되려면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걸릴까. 세계은행은 지금처럼 성장한다면 2048년쯤 가능하다고 봤다. 하지만 개혁을 통해 성장 속도를 더 끌어올리면 2037년으로 앞당길 수 있다고도 했다. 그 차이가 무려 11년이다. 이 숫자는 태국에게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태국이 고소득 국가가 되는 시점이 늦어지는 동안, 주변 나라들은 가만히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는 반도체와 디지털 산업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고, 인도네시아는 큰 경제 규모를 앞세워 계속 성장하고 있다. 베트남도 제조업과 수출을 늘리며 태국을 바짝 뒤쫓고 있다. 지난 9월 3일 방콕에서 열린 비즈니스 서밋에서 세계은행은 'Building Thailand's Future Today'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 같은 추세로는 태국이 2048년이 되어야 고소득 국가에 들어설 수 있다. 만약 앞으로 10년 동안 국민 1인당 실질 소득 증가율을 매년 평균 5.4%까지 끌어올린다면 2037년에도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는 개혁이 실제로 이뤄졌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까지 태국을 중간 수준의 소득 국가로 키워온 방식이, 앞으로도 계속 통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뜻이다. 그동안 잘해온 것과, 그 방식이 지금도 여전히 통하는지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변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주변국과 비교할 때는 먼저 무엇을 기준으로 비교하는지 정확히 봐야 한다. 인도네시아는 이미 경제 규모(나라 전체가 벌어들이는 돈의 총합, GDP)에서 태국을 크게 앞서 있다. 세계은행의 2025년 자료를 보면 인도네시아의 GDP는 약 1조4,500억 달러, 태국은 약 5,770억 달러다. 그러니 "인도네시아에 추월당할 수 있다"는 말은 시점부터 틀렸다. 이미 벌어진 격차를 인정하고 봐야 한다. 말레이시아는 국민 한 사람당 버는 돈(1인당 GDP)에서 앞서 있다. 같은 해 말레이시아는 약 1만3,125달러, 태국은 약 8,057달러였다. 여기에 반도체 산업과 데이터센터 투자까지 더해지고 있다. 태국이 말레이시아와 경쟁하려면 단순히 생산 비용만 낮출 게 아니라, 기술 인력 수준과 산업 생태계까지 함께 끌어올려야 한다. 태국이 정말 신경 써야 할 나라는 베트남이다. 2025년 기준 베트남의 GDP는 약 5,147억 달러로 아직 태국보다 적다. 1인당 GDP도 약 5,066달러로 태국에 못 미친다. 그러니 베트남이 벌써 태국보다 잘사는 나라가 됐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장 속도는 확연히 다르다. 같은 해 베트남 경제는 8.0% 성장한 반면, 태국은 2.4% 성장에 그쳤다. 세계은행은 올해 베트남의 성장률을 6.8%로 예상하면서, 수출과 투자, 국내 소비, 행정 개혁을 그 원동력으로 꼽았다. 물론 베트남에도 숙제는 있다. 외부 경제 상황에 흔들릴 위험도 있고, 생산성을 더 높여야 하며, 외국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성과를 자국 기업 성장으로 얼마나 이어가느냐도 과제다. 그래도 제조업과 수출을 중심으로 빠르게 몸집을 키우는 베트남의 속도는 태국이 경계할 만하다. 진짜 문제는 '순위가 밀리는 것' 이런 흐름을 보면 태국이 겪고 있는 위기는 '역전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밀리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태국 경제가 성장을 하더라도, 경쟁국들이 더 빠르게 생산성을 높이고 새로운 산업을 키운다면 이 지역에서 태국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단순히 "플러스 성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베트남 경제가 정확히 언제 태국을 앞지를지 콕 집어 말할 필요는 없다. 달러로 계산한 GDP는 환율에 따라서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앞으로 기업들이 새 공장이나 연구소, 지역 거점을 어디에 세울지 결정하는 방향이다. 이런 선택에서 태국이 계속 밀린다면, 나중에 성장률을 끌어올리려 해도 그만큼 더 힘들어질 수 있다. 태국 안에도 쌓여 있는 문제들 세계은행은 올해 태국 경제를 진단하면서 몇 가지 구조적인 문제를 짚었다. 산업 기반이 낡았고, 수출과 관광 경쟁력이 약해졌으며, 가계 빚은 많고, 정부가 쓸 수 있는 재정 여력은 줄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일시적으로 소비를 늘리는 정책만으로는 풀기 어렵다. 가계가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소비를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 기업이 낡은 설비와 기존 인력으로만 버텨야 한다면, 더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옮겨가는 것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도 재정 여유가 넉넉하지 않으니, 당장의 경기 부양과 장기적인 투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처지다. 개혁을 미루면 미룰수록, 다음 선택은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세계은행이 제안한 네 가지 방향 세계은행은 이번 보고서에서 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미래 산업을 키우는 것, 기업들이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도록 돕는 것, 미래 인재에 투자하는 것, 그리고 미래형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유망한 산업으로는 첨단 제조업, 지속 가능한 웰니스 관광, 디지털 서비스, 농식품, 창조 산업을 꼽았다. 지금까지 방콕과 일부 대기업에만 몰려 있던 성장의 혜택을, 더 많은 기업과 노동자, 그리고 지방으로까지 넓히겠다는 방향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기업'과 '도시'다. 유망 산업을 정해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소기업이 기술과 자금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지방 도시에서도 기업이 필요한 인력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규제를 개선하고 교통·에너지 같은 기반 시설에 투자하는 것도, 실제로 이런 변화로 이어질 때에야 의미가 있다. 태국에서 사업하는 분들이라면 태국에서 사업을 하거나 투자를 고민하는 분들이라면, 판단 기준을 좀 더 구체적으로 가져갈 필요가 있다. 나라 전체의 성장률을 그대로 내 사업의 매출 전망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고객들의 실제 구매력, 인건비 대비 생산성, 숙련된 인력을 구할 수 있는지, 물류와 에너지 비용, 인허가가 얼마나 예측 가능한지를 업종별·지역별로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또한 태국이 고소득 국가가 된다고 해서 모든 기업의 수익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임금과 비용이 먼저 오르고 생산성 개선은 더디다면, 오히려 기업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 반대로 산업 전환과 제도 개선이 실제로 진행되는 분야라면, 평균 성장률만 봐서는 보이지 않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남은 11년, 그리고 다음 세대의 기회 태국이 모든 면에서 주변국에 밀릴 거라고 단정하는 건 지나친 걱정이다. 하지만 앞서가는 나라들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베트남의 추격까지 허용할 수 있다는 걱정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태국이 지금 가진 산업 기반을 앞으로도 지키고 키워갈 수 있을지는, 결국 지금 이 시점의 투자와 정책 실행에 달려 있다. 2037년과 2048년 사이의 11년을 태국만의 사정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 사이에 경쟁국의 산업도, 기업도, 인력도 계속 달라지기 때문이다. 태국이 개혁을 미루면서 잃는 것은 '고소득 국가'라는 이름을 얻을 시간만이 아니다. 다음 세대의 일자리와 투자 기회도 함께 걸려 있다. 글 | 김종민 교민잡지 편집국장

항공모함이 돌아온 항구, 파타야가 기억하는 오래된 질문

2026/09/21 12:08:02

항공모함이 돌아온 항구, 파타야가 기억하는 오래된 질문 9월 초 어느 아침, 램차방항에 커다란 배 한 척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교민 사회에도 잔잔히 퍼졌다. 니미츠급 핵추진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였다. 뉴스로만 보면 그저 '미 항모 파타야 기항'이라는 짧은 한 줄이지만, 파타야에서 오래 산 사람이라면 이 소식을 마냥 무심히 넘기기 어렵다. 이 도시의 시작이, 어쩌면 그날 바다에서 내린 또 다른 젊은 군인들의 이야기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9개월 만에 육지를 밟은 사람들 배에는 5천 명 가까운 수병과 해병대원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샌디에이고를 떠나 태평양을 건너고, 중동으로 넘어가 오랜 작전을 치르는 동안 이들은 거의 아홉 달을 바다 위에서만 지냈다. 정확한 날짜를 두고는 매체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하지만~어떤 곳은 배치 전체 기간을 286일로, 어떤 곳은 마지막 기항 이후 264일이나 265일로 센다~어느 쪽이든 육지 냄새를 맡지 못한 채 보낸 시간이 거의 1년에 가까웠다는 사실만은 다르지 않다. 그 긴 항해 동안 배 안의 생활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끊기고 생활용품을 아껴 써야 했다는 이야기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함장은 식량이 완전히 떨어진 것은 아니라며 다소 과장된 보도라고 해명했다고 하는데, 진실이 정확히 어느 지점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랜 시간 좁은 배 안에 갇혀 지낸 청년들의 고단함만큼은 짐작이 간다. 파타야가 맞이한 첫 풍경은 뜻밖에 소박했다 버스가 파타야에 도착하자 도시는 익숙한 방식으로 반응했다. 하드록 호텔 앞에는 환영 인파가 나왔고, 워킹 스트리트 입구 전광판에는 반기는 문구가 걸렸다. 양복점은 하룻밤새 옷을 맞춰주겠다고 나섰고, 식당들은 군인 신분증 할인을 내걸었다. 파타야 시장은 군인 한 사람이 하루 100~150달러씩만 써도 도시 전체로는 300만 달러 가까운 돈이 풀릴 거라는 계산도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카메라에 잡힌 첫 장면들은 그런 기대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몇몇 젊은 군인들은 네일숍에 들러 발 관리를 받았고, 쇼핑몰에서 새 양말과 옷가지를 샀다. 아내에게 줄 작은 인형을 고르는 사람도, 그저 익숙한 햄버거 한 개를 주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홉 달 만에 육지에 발을 디딘 이들이 가장 먼저 찾은 건 화려한 유흥이 아니라, 씻고 먹고 걷고 필요한 걸 사는 아주 평범한 하루였던 셈이다. 그중에는 이런 사연도 있었다. 뉴저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한 어머니가 호텔 앞에서 딸을 기다렸다는 이야기다. 링컨호 승조원이라는 스물다섯 살 딸은 전쟁이 시작된 뒤 한동안 연락이 끊겼었다고 한다. 몇 달 만에 다시 마주한 얼굴이 어떤 의미였을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물론 새벽녘 워킹 스트리트 근처에서 술에 취한 수병 둘이 몸싸움을 벌인 일도 있었다고 하니, 이 방문을 무조건 훈훈한 미담으로만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한 장면이 5천 명 전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닐 터이다. 트럭 4~5대로 시작된 도시, 1959년 사실 이 풍경은 파타야에서 처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지금은 도시 곳곳에 콘도와 쇼핑몰이 들어섰지만, 파타야가 관광도시로 첫걸음을 뗀 순간을 파타야시는 1959년 6월 29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해, 나컨랏차시마(코랏) 기지에 있던 미군들이 대형 트럭 네댓 대에 나눠 타고 파타야 해변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해변 남쪽 프라야 쑨톤이라는 사람의 별장과 주택을 빌려 일주일씩 교대로 머물렀다.(지금의 워킹스트리트 안쪽 끝) 조용하고 깨끗한 바닷가라는 소문은 금세 주둔군 사이에 퍼졌고, 작은 어촌 마을에는 그전까지 본 적 없던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이 커지면서 인근 우타파오 비행장과 사따힙 항구도 함께 성장했고, 작전을 마친 군인들은 가까운 파타야를 'R&R', 즉 휴식과 회복의 장소로 삼았다. 외국 군인들이 쓰는 달러는 마을의 풍경을 빠르게 바꿔놓았다. 주민들은 방을 세놓고 음식을 팔기 시작했고, 외지 자본이 들어와 방갈로와 식당, 술집이 하나둘 문을 열었다. 1964년에는 112개 객실을 갖춘 니파 로지가 들어섰는데, 이곳이 파타야 최초의 국제 수준 대형 호텔로 꼽힌다. 이어 1970년 하얏트, 1971년 오션뷰 호텔이 뒤를 이었다. 어업과 소금밭에 기대던 조용한 해안 마을이 국제 관광도시의 뼈대를 갖추기까지, 채 15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군이 떠난 뒤에도 도시는 멈추지 않았다 1975년 베트남전이 끝나고 미군이 철수했을 때, 파타야는 다시 예전의 어촌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미 도로와 숙박시설, 외국어에 능숙한 서비스 인력, 밤 문화 산업까지 하나의 도시 경제로 자리 잡은 뒤였다. 미군이 남긴 빈자리는 유럽의 패키지 관광객과 장기 체류자들이 채웠고, 뒤이어 러시아, 중국, 인도 등 여러 나라 관광객이 거리의 풍경을 계속 바꿔놓았다. 도시가 감당하기 벅찰 만큼 빠르게 커지자, 태국 정부는 1978년 11월 29일 파타야를 특별지방행정 도시로 새롭게 출범시켰다. 어촌 마을이 한 세대 만에 보기 드문 국제 관광도시가 된 순간이었다. 물론 그 성장의 이면이 온통 밝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계획보다 건물이 먼저 들어섰고, 인구보다 오·폐수가 빠르게 늘었으며, 해안 침식과 교통 혼잡이 뒤따랐다. 전쟁 시기에 형성된 밤 문화 산업은 민간 관광의 시대에도 계속 몸집을 키웠고, 그 과정에서 성 산업과 범죄, 착취 문제가 도시 이미지에 겹치면서 '죄악의 도시'라는 낙인이 따라붙기도 했다. 이 도시가 성장해온 시간을 미군이 만든 성공담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달러가 호텔과 상점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그 급격한 전환의 사회적 비용은 오랫동안 지역 공동체와 여성들,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나눠 짊어져 온 것이기도 하다. 팬데믹이 드러낸 것, 그리고 지금의 파타야 2020년, 코로나19는 파타야가 외국인 관광에 얼마나 깊이 기대고 있었는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국경이 닫히자 워킹 스트리트의 불이 꺼졌고, 호텔과 식당, 여행업체는 한꺼번에 손님을 잃었다. 그 시기를 직접 겪은 교민이라면 그 텅 빈 거리를 아직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부터 도시 안팎에서는 관광객 숫자보다 산업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요즘 파타야가 내세우는 '네오 파타야', 이른바 스마트 관광도시 구상도 그 위기의식 위에서 나온 것이다. 가족 단위 휴양과 해양 스포츠, 국제회의·전시, 의료와 웰니스 관광을 키우고 낡은 기반시설을 손보겠다는 방향이다. 파타야와 좀티엔 해변에서는 모래를 보충해 침식된 해안을 넓히는 공사가 이어지고 있는데, 아직 일부 구간은 진행 중이고 오수와 수질 문제도 완전히 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 고쳐진 도시'라기보다는, 여전히 공사 중인 도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시야를 조금 넓혀보면 파타야의 자리도 달라지고 있다. 북쪽에는 태국 최대 상업항인 램차방이, 남쪽에는 우타파오 공항과 동부항공도시가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태국 정부가 추진하는 동부경제회랑(EEC) 안에서 파타야는 더 이상 관광지 하나가 아니라, 산업과 물류 거점을 뒷받침하는 생활권 도시로 다시 자리매김하고 있다. 렘차방항은 3단계 확장을 통해 연간 컨테이너 처리량을 1,100만 TEU에서 1,800만 TEU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우타파오 공항 개발도 단계적으로 진행 중이다. 다만 돈므앙·수완나품·우타파오를 잇는 3개 공항 고속철도 사업은 계약과 자금 문제로 오래 지연되어 왔고, 올해 상반기까지도 계약 수정을 둘러싼 논의가 이어졌다고 한다. 거창한 청사진이 다 완성된 현실은 아니라는 뜻이니, 파타야의 앞날은 이미 정해진 결론이라기보다 앞으로의 행정과 투자, 환경 관리가 만들어갈 진행형의 이야기에 가깝다. 67년을 사이에 둔, 같은 질문 1959년 트럭을 타고 온 병사들과 2026년 항공모함에서 내린 청년들은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오랜 임무를 마치고 마른 땅에서 며칠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고 싶었다는 점에서는 이상하게도 닮아 있다. 두 세대를 사이에 두고, 파타야는 비슷한 질문을 다시 받아 든 셈이다. 전쟁과 긴 항해에 지친 사람에게 도시는 어떤 쉼을 내어주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쉼을 팔며 살아온 도시는, 그 대가로 무엇을 치러왔는가. 젊은 군인들이 받은 페디큐어와 새로 산 양말, 아내에게 줄 작은 인형 하나는 '파타야에 온 미군'이라는 익숙한 상상에 작은 균열을 낸다. 그렇다고 이 장면들을 그저 훈훈한 미담으로만 남길 일도 아니다. 그들이 돌아가야 할 전쟁터에는 또 다른 삶과 상처가 있고, 파타야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도 착취와 불균형의 그늘이 함께 있었다. 그래서 이번 항모의 기항은 단순한 입항 소식으로만 흘려보내기에는 조금 아쉬운 사건이다. 녹슨 뱃전 너머로, 전쟁과 휴식, 달러와 생계, 관광과 도시계획이 겹겹이 얽혀 흘러온 파타야 67년의 시간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어촌이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워킹 스트리트의 화려한 불빛만 아는 사람도, 결국 같은 도시의 서로 다른 얼굴을 보고 있는 셈이다. 파타야는 미군이 만든 도시라 부르기에는 그 위에 너무 많은 사람의 삶이 쌓였고, '죄악의 도시'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여러 얼굴을 가진 곳이다. 항공모함은 며칠 뒤 다시 바다로 떠났다. 남은 것은 전광판의 환영 문구가 아니라, 이 오래된 항구 도시를 이제는 조금 더 여러 겹으로 바라볼 수 있겠느냐는, 우리 각자에게 남겨진 물음일 것이다.

“밥 먹으며 노래하면 늙은 배우자를 만난다?”

2026/09/06 12:00:05

“밥 먹으며 노래하면 늙은 배우자를 만난다?” 태국 부모의 잔소리 속에 숨은 생활 미신, 한국과 닮고 또 다른 이야기 “무지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손가락이 오그라든다.” “밥을 먹으며 노래하면 나이 많은 배우자를 만난다.” 태국 사람들과 오래 지내다 보면 이런 말을 한두 번은 듣게 된다. 처음에는 태국만의 별난 미신처럼 들리지만, 조금 더 듣다 보면 이상하리만큼 익숙하다. 밤에 빗자루질하면 복이 나가고, 밥그릇을 두드리면 팔자가 가난해진다는 한국의 옛 잔소리와 꼭 닮았다. 물론 미신은 과학이 아니다. 같은 태국 안에서도 지역과 집안, 세대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어제까지 “절대 하면 안 된다”던 일이 옆집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이 흥미로운 까닭은, 사람들이 무엇을 두려워했고 아이들에게 어떤 행동을 가르치려 했는지가 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지개를 가리키면 정말 손가락이 잘릴까 태국의 대표적인 어린이 금기 가운데 하나가 “무지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말라”는 말이다. 태국어로는 흔히 ‘치 룽 래오 니우 꿋(ชี้รุ้งแล้วนิ้วกุด)’, 곧 무지개를 가리키면 손가락이 뭉툭해지거나 잘려 나간다는 식으로 전해진다. 지역과 집안마다 손가락이 썩는다거나 굽는다는 변형도 있다. 이것은 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 아시아 지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무지개 금기’가 발견된다. 무지개를 하늘과 다른 세계를 잇는 신비한 존재로 보고, 검지로 가리키는 행동을 무례하거나 공격적인 몸짓으로 여긴 결과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니 이를 단순히 태국인의 자연 숭배 한 가지로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다. 서로 멀리 떨어진 문화권에서도 닮은 금기가 생겨난, 꽤 보편적인 민속 현상에 가깝다. 밥을 먹으며 노래하면 ‘늙은 남편’을 만난다는 말도 표현을 조금 고칠 필요가 있다. 실제로는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고정된 속담이라기보다 ‘나이 많은 연인이나 배우자를 만난다’, 또는 ‘잔소리 많은 배우자를 얻는다’는 여러 버전으로 돌아다닌다. 핵심은 결혼 예언이라기보다 밥상에서 음식물을 흘리거나 식사 분위기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훈육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밥상머리에서 장난치지 말라”는 말과 결이 비슷하다. 밤에는 복도 귀신도 바쁘다 태국에서는 밤에 집을 쓸면 그날 들어온 재물과 행운까지 밖으로 쓸어낸다고 한다. 식사 도중 숟가락이나 포크로 접시와 그릇을 두드리면 떠도는 영혼을 불러 밥을 나눠 먹게 된다는 말도 있다. 한국에도 밤에 비질하면 복이 나가고,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나 귀신이 나타나며, 밥그릇을 숟가락으로 두드리면 거지가 된다는 말이 있었다. 결과는 조금씩 달라도 금지하는 행동은 놀랄 만큼 닮았다. 여기에는 생활상의 이유를 짐작해 볼 여지가 있다. 전기가 없던 시절 밤에 비질을 하면 작은 물건이나 곡식까지 버릴 수 있었고, 그릇을 두드리거나 휘파람을 부는 행동은 식사 예절과 이웃의 잠을 해치기 쉬웠다. 다만 모든 미신을 ‘선조의 과학적인 지혜’로 포장할 필요는 없다. 이런 설명 가운데 상당수는 후대의 합리적인 해석일 뿐, 미신의 실제 기원을 증명하는 역사 자료는 드물다. 어떤 금기는 예절에서, 어떤 금기는 영혼관과 길흉 관념에서 생겼을 것이다. 수요일에 문 닫은 미용실의 사연 태국의 오래된 이발소 가운데 수요일에 쉬는 곳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수요일에는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는 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수요일인지를 두고는 설명이 여럿이다. 수요일을 성장과 번성의 날로 여겨 자르는 일을 피했다는 설이 있고, 옛 왕실과 고위층이 수요일에 머리를 손질해 이발사들이 궁으로 불려 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느 한쪽이 확정된 정설은 아니다. 현대식 헤어살롱 중에는 수요일에도 영업하는 곳이 많고, 전통 이발소도 모두 쉬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태국 미용실은 수요일에 문을 닫는다”고 단정하면 틀린 말이 된다. 오랜 금기의 흔적이 일부 업소의 휴무 관행으로 남아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한국의 손톱 미신은 요일보다 밤에 집중돼 있다. 밤에 깎아 버린 손톱을 쥐가 먹으면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옛이야기다. 어두운 곳에서 칼이나 가위로 손톱을 다듬다 다치는 일을 막으려 했다는 설명이 흔하지만, 손톱과 머리카락을 사람의 생명력이나 분신으로 보는 오래된 관념도 함께 살펴야 한다. ‘찡쪽’이 문 앞에서 여행을 붙잡을 때 외출하려는 순간 벽에 붙어 있던 작은 도마뱀이 “찍찍” 울면 태국인은 잠깐 멈칫한다. 집도마뱀 ‘찡쪽(จิ้งจก)’이 길을 나서지 말라고 경고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울음이 들린 방향과 횟수에 따라 길흉을 다르게 풀이하는 경우도 있어 무조건 흉조라고만 하기는 어렵지만, 출발 직전의 울음을 경고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는 태국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도마뱀 울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는 주변 나라에서도 발견되지만 뜻은 같지 않다. 필리핀 일부 전승에서는 집도마뱀의 울음을 손님이나 소식이 올 징조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동남아 사람들이 도마뱀을 모두 ‘조상의 영혼’이나 ‘집의 수호신’으로 여긴다는 설명은 근거가 부족하다. 같은 동물을 보고도 한쪽은 여행을 미루고 다른 쪽은 손님을 기다린다는 차이가 오히려 민속의 재미다. 꿈속의 뱀은 분위기가 달라진다. 태국에서는 뱀이 몸을 감거나 휘감는 꿈을 꾸면 인연을 만날 징조라고 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벌이 집에 들어와 둥지를 틀면 재물과 번영이 찾아온다는 믿음도 전한다. 다만 실제 벌집을 발견했다면 길흉보다 안전이 먼저다. 직접 건드리지 말고 전문가에게 확인을 맡겨야 한다. 비를 막는 레몬그라스, 새 차가 밟는 라임 야외 결혼식이나 사원 행사 날 먹구름이 몰려오면 태국에서 종종 등장하는 것이 레몬그라스다. ‘빡 따크라이 라이 폰(ปักตะไคร้ไล่ฝน)’, 레몬그라스를 거꾸로 땅에 꽂아 비가 다른 곳으로 가기를 비는 풍습이다. 흔히 순결한 미혼 여성이 꽂아야 효험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이것도 전국 공통의 단일 규칙은 아니다. 지역에 따라 집안의 막내딸, 아직 월경을 시작하지 않은 소녀, 오랫동안 남편 없이 지낸 여성 등이 등장한다. 풍습의 기원 역시 확실하지 않다. 농경사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물을 평소와 반대로 꽂아 자연의 흐름을 뒤집는 상징 행위였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여성의 순결을 효험의 조건으로 삼았던 옛 성 관념도 함께 읽힌다. 미신은 믿음의 대상보다 문화의 자료다 미신을 놓고 참과 거짓만 따지면 답은 싱겁다. 무지개를 가리킨다고 손가락이 잘리지 않고, 노래하며 밥을 먹었다고 배우자의 나이가 정해지지 않는다. 찡쪽의 울음도 미래 예언이 아니라 동물의 의사소통이다. 그러나 그 말을 누가 누구에게, 어떤 순간에 했는지를 살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밤을 조심하라는 경고에는 어둠에 대한 두려움과 생활의 질서가 함께 있고, 밥상 금기에는 예절 교육이, 날을 골라 머리를 자르는 습관에는 태국인의 요일 관념이 남아 있다. 비를 멈추게 해 달라는 레몬그라스에는 날씨 앞에서 속수무책이던 농경사회의 간절함도 배어 있다. 한국의 할머니와 태국의 야이가 같은 부엌에 앉았다면 의외로 대화가 잘 통했을지도 모른다. “밤에 쓸지 마라”, “밥그릇 두드리지 마라”, “나갈 때 조심해라.” 귀신과 액운을 앞세웠지만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비슷했다. 조심하고, 예의를 지키고, 무사히 돌아오라는 것. 태국의 미신을 안다는 것은 운세를 믿는 일이 아니라, 태국인의 오래된 마음과 생활 언어를 알아듣는 일이다. 글 | 김종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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