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음식‘카놈 찐’은 중국 과자?

2025/12/03 13:33:44

태국음식‘카놈 찐’은 중국 과자? 태국 음식의 세계는 늘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다른 나라의 이름을 빌려왔지만 정작 그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독자적인 메뉴들이다. '아메리칸 프라이드 라이스(American Fried Rice)'나 ‘롯총 싱가포르(Lod Chong Singapore)'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큰 오해를 받는 음식은 단연 '카놈 찐(Khanom Jeen)'이다. 이름만 직역하면 '중국 간식(Chinese Snack)'인 이 요리, 과연 그 정체는 무엇일까? 태국 전역을 아우르는 이 국수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지역별 특색을 찾아본다. 이름은 '중국 간식'인데 중국엔 없다? 태국 소울 푸드 '카놈찐'의 반전 태국 식당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쌀 국수, '카놈찐'. 갓 삶아낸 쫄깃한 면발에 매콤한 커리를 붓고 신선한 야채를 곁들이면, 습하고 더운 태국의 날씨조차 잊게 만든다. 태국인들의 아침 식사이자 점심, 그리고 축제 음식인 카놈찐. 그러나 이 음식의 이름 속 '찐(Jeen)'이 중국을 뜻하는 태국어 단어와 발음이 같아, 많은 이방인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게 중국 음식이라고?" 1. '중국(Jeen)'이 아니라 '숙성(Jeen)'이다 : 언어의 오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놈찐은 중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리법도 중국의 볶음이나 탕 요리와는 거리가 멀다. 음식 인류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의 정설에 따르면, 이 이름의 기원은 태국의 고대 문명 중 하나인 '몬(Mon)족'의 언어에서 찾을 수 있다. 몬족 언어로 '크놈(Khnom)'은 '빵'이나 '밀가루 음식'을, '찐(Jeen)'은 '익히다' 또는 '삶다'를 뜻한다. 또 다른 학설에서는 몬족 말인 '카너옴찐(Khanom Jin)'에서 유래했다고 보는데, 여기서 '카너옴'은 '둥글게 똬리를 틀다', '찐'은 '익히다'라는 의미다. 즉, 카놈찐은 '익혀서 똬리를 튼 쌀국수'라는 조리 과정을 묘사한 몬족 단어가 태국어로 넘어오면서, 발음이 유사한 '카놈(간식)'과 '찐(중국)'으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카놈찐 면은 삶아낸 뒤 한입 크기로 둥글게 말아 채반에 담아내는데, 이는 몬족 언어의 원래 의미와 정확히 일치한다. 2. 천 년을 이어온 발효의 미학 카놈찐이 일반 쌀국수(꾸이띠여우)와 구분되는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발효'에 있다. 일반 쌀국수가 쌀가루 반죽을 바로 뽑아 말린 것이라면, 카놈찐은 쌀을 며칠간 물에 불려 발효시킨 뒤 면을 뽑는다. 이 과정에서 쌀은 유산균 발효를 거치며 특유의 시큼한 향과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을 갖게 된다. 이는 냉장 시설이 없던 고대 동남아시아에서 음식을 오래 보관하고 소화를 돕기 위한 지혜의 산물이었다. 몬족이 세운 드바라바티(Dvaravati) 왕조 시절부터 전해진 이 기술은 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오늘날 태국 식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3. 지역마다 다른 '국물의 색깔' : 태국 미식 지도 카놈찐의 면발이 태국을 하나로 묶는다면, 그 위에 붓는 소스 ‘남야’(Nam Ya)는 태국의 지역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지도와 같다. ✽ 중부(방콕) 생선과 코코넛의 조화 '남야(Nam Ya)' 가장 대중적인 버전이다. 생선 살을 으깨 코코넛 밀크, 끄라차이(생강, Krachai)와 함께 끓여낸다. 부드럽고 고소하면서도 은은한 매운맛이 특징이다. 삶은 달걀과 튀긴 고추를 곁들이는 것이 정석이다. ✽ 남부 강렬한 강황의 맛 '남야 따이(Nam Ya Tai)' 매운맛을 즐기는 남부답게 강렬하다. 강황(Turmeric)을 듬뿍 넣어 국물이 샛노란 색을 띠며, 혀를 찌르는 듯한 매운맛이 코코넛 밀크의 느끼함을 완벽하게 잡아준다. 남부 사람들은 여기에 '싸또(Sator)'라 불리는 냄새 강한 콩이나 절인 채소를 곁들여 먹는다. ✽ 북부 붉은 목면화의 풍미 '남응이우(Nam Ngiao)'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카놈찐은 코코넛 밀크를 쓰지 않는다. 대신 돼지 등갈비와 선지, 토마토를 넣어 푹 끓여낸다. 여기에 '독응이우(Dok Ngio)'라 불리는 붉은 목면화의 말린 꽃술을 넣는데, 이것이 고기 국물에 깊은 감칠맛과 독특한 식감을 더한다. 한국의 육개장이나 선지 해장국을 연상케 하는 맛이다. ✽ 동북부(이싼) 젓갈의 깊은 맛 '카놈찐 쁠라라' 이산 지역에서는 '카오 삔(Khao Poon)'이라고도 부른다. 발효 생선 소스인 '쁠라라'를 베이스로 하여 쿰쿰하면서도 깊은 맛을 낸다. 쏨땀 국물에 카놈찐 면을 비벼 먹는 '땀쑤어’ 역시 이 지역에서 시작된 별미다. 4. 장수와 결속의 상징, 그리고 금기 재미있는 점은 카놈찐이 태국 사회에서 갖는 상징성이다.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면발은 '장수(Longevity)'와 '지속되는 사랑'을 상징한다. 때문에 결혼식이나 집들이, 승려 공양 등 경사스러운 날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면이 길게 이어지듯, 신랑 신부의 사랑도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랍니다." 태국 결혼식 피로연에서 카놈찐을 먹는 하객들의 덕담이다. 반면, 일부 지역의 장례식장에서는 카놈찐을 내지 않는 관습이 있기도 했다. 슬픔이 길게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장례식에서도 간편하게 대접하기 좋아 자주 등장한다.) 또한 카놈찐은 '뷔페의 원조' 격이다. 면과 소스만 주문하면, 식탁 위에 수북이 쌓인 신선한 허브, 숙주, 오이, 절인 야채 등은 무료로 마음껏 가져다 먹을 수 있다. 이는 태국 식문화 특유의 풍요로움과 나눔의 정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취재 후기] 카놈찐 한 그릇에는 몬족의 역사, 태국의 지리적 특성, 그리고 사람들의 믿음이 똬리처럼 얽혀 있다. 이름은 비록 '중국 간식'이라는 오해를 쓰고 있지만, 그 속살은 가장 '태국적인' 정체성을 품고 있는 셈이다. 태국을 여행한다면 화려한 팟타이나 똠얌꿍 뒤에 숨겨진, 이 소박하고도 깊은 하얀 면발의 매력에 빠져보길 권한다. "당신의 '인생 카놈찐'은 어디인가?" 태국 카놈찐 3대 성지 카놈찐은 어디서나 먹을 수 있지만, 그 지역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곳들이 있다. 지금 당장 떠나도 좋을 '카놈찐 로드'의 핵심 거점을 소개한다. 1. '갓 뽑은 생면'의 절대 강자 펫차분 (Phetchabun) 태국 중북부 펫차분 주의 '롬싹(Lom Sak)'과 '롬까오(Lom Kao)' 지역은 태국 내에서 "카놈찐 쎈솟(Sen Sod, 생면)"의 발원지로 통한다. ✽특징 이곳의 가장 큰 무기는 신선함이다. 미리 만들어 둔 면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식당과 달리,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반죽을 끓는 물에 짜내어 면을 삶는다. ✽먹는 법 갓 삶아 따뜻하고 부드러운 면발을 작은 타래로 말아 내오는데, 식감이 떡처럼 쫄깃하면서도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식탁 한가운데에 3~4가지 소스(남야, 남프릭 등)가 담긴 항아리를 통째로 두고, 원하는 만큼 덜어 먹는 뷔페식 스타일이 전통이다. ✽현장 분위기 롬삭 지역 도로변에는 '쎈솟(생면)' 간판을 내건 카놈찐 전문점들이 줄지어 있어, 주말이면 방콕에서 차를 몰고 온 식도락가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2. '극강의 매운맛' 남부의 자존심 : 나컨씨타마랏 (Nakhon Si Thammarat) "나컨씨타마랏의 카놈찐을 먹지 않았다면 남부에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콘씨탐마랏은 남부 카놈찐의 본산이다. ✽특징 이곳의 카놈찐은 '남야 빡 따이(Nam Ya Pak Tai)'라 불리는 남부식 커리가 핵심이다. 강황을 듬뿍 넣어 샛노란 색을 띠며,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맵고 짜릿한 맛이 특징이다. ✽압도적인 야채 나콘씨탐마랏 카놈찐의 백미는 식탁을 가득 채우는 야채 바구니(Pak Nor)다. 오이, 가지, 숙주뿐만 아니라 '룩니앙(냄새가 강한 콩)', 절인 야채, 지역 허브 등 10~20여 종의 곁들임 음식이 무료로 제공된다. 매운 커리와 쌉쌀한 허브의 조화는 중독성이 강하다. 3. '붉은 국물'의 깊은 맛 : 치앙마이 & 치앙라이 (Northern Thailand) 북부의 장미 치앙마이와 치앙라이에서는 뽀얀 코코넛 밀크 대신, 붉고 진한 고기 국물의 ‘남응이우(Nam Ngiao)'가 대세다. ✽특징 앞서 언급한 '독응이우(목면화 꽃술)'와 돼지 등갈비, 선지를 넣고 푹 끓여낸 국물은 한국의 육개장이나 감자탕을 연상시킨다. ✽로컬 팁 현지인들은 여기에 바삭하게 튀긴 돼지 껍질(캡무)을 부셔 넣고, 갓절임(팍깟동)을 곁들여 감칠맛과 식감을 더한다. 쌀쌀한 북부의 아침, 뜨끈한 남응이우 한 그릇은 현지인들의 소울 푸드 그 자체다. [번외] 숨은 강자 : 푸켓 (Phuket) 푸켓 타운 역시 독자적인 카놈찐 문화를 자랑한다. 이곳에서는 아침 식사로 카놈찐을 즐겨 먹는데, 특이하게도 생선 살과 커리를 섞어 찐 ‘허목(Hor Mok)'이나 튀긴 닭고기, 그리고 삶은 계란을 반드시 곁들여 먹는 것이 푸켓 스타일이다. 에디터의 팁: 만약 처음 도전한다면 가장 대중적인 맛인 펫차분의 '생면 카놈찐'을, 매운맛 마니아라면 나컨씨타마랏을, 한국적인 얼큰함을 찾는다면 치앙마이의 '남응이우'를 추천한다. 방콕에서 '인생 카놈찐'을 만날 수 있는 맛집 4곳을 엄선했다. 취향에 따라 골라 갈 수 있도록 정통 노포, 북부식, 남부식, 그리고 미슐랭 맛집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방콕에서 꼭 가봐야 할 '카놈찐' 4대 성지 팟타이와 똠얌꿍에 지친 당신을 위해, 현지인들이 줄 서서 먹는 '진짜 태국의 맛' 카놈찐 맛집을 소개한다. 1. 50년 전통의 '요일별 한정판' 맛집: 쌍우안 씨 (Sanguan Sri) 플런칫(Phloen Chit) 역 근처 빌딩 숲 사이, 시간이 멈춘 듯한 노포가 있다. 1970년에 문을 연 이곳은 요일마다 다른 스페셜 메뉴를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추천 메뉴 화요일: 카놈찐 싸오남 (코코넛 밀크와 파인애플, 생강을 곁들인 상큼한 버전) 목요일: '카놈찐 깽키여우완 느어' (소고기 그린 커리 국수) - 이곳의 시그니처이자 필승 메뉴. 토요일: 카놈찐 깽키여우완 룩친 (어묵 그린 커리 국수) ✽특징 : 미슐랭 가이드 '빕 구르망'에 선정된 곳으로, 점심시간이면 인근 직장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카놈찐 외에도 클래식한 태국 가정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다. ✽위치 : BTS 플런칫 역 도보 5분 (와이어리스 로드) 2. '극강의 매운맛' 남부식 정통 강자 : 쿠어 클링 팍 쏫 (Khua Kling Pak Sod) "방콕에서 가장 정통에 가까운 남부 음식을 낸다"는 평을 받는 곳이다. 땀이 뻘뻘 나는 화끈한 남부식 카놈찐을 원한다면 이곳이 정답이다. ✽추천 메뉴: '카놈찐 남야 뿌' (게살 코코넛 커리 국수). 큼직한 게살 덩어리가 듬뿍 들어간 진한 노란색 커리는 맵지만 숟가락을 놓을 수 없는 중독성을 자랑한다. 신선한 야채 바구니가 함께 제공되어 매운맛을 중화시켜 준다. ✽위치: 통로(Thong Lo) 본점을 비롯해 아리(Ari), 수라웡 등에 지점이 있어 접근성이 좋다. 3. 치앙마이의 소울을 그대로 : 옹 통 카오 소이 (Ong Tong Khao Soi) 미슐랭 빕 구르망에 여러 해 연속 선정된 북부 음식 전문점이다. 이름은 '카오 소이(커리 누들)' 맛집이지만, 이곳의 카놈찐 또한 놓칠 수 없는 별미이다. ✽추천 메뉴: '카놈찐 남 응이우' (북부식 토마토 선지 국수). 돼지 등갈비와 선지, 붉은 목면화 꽃술(독응이우)을 넣고 푹 끓여내어 깊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한국인의 입맛에 가장 잘 맞는 '해장국 스타일'의 카놈찐이다. ✽ 위치: BTS 아리(Ari) 역 근처 (본점) 4. 줄 서서 먹는 '게살 커리'의 전설 : 넝카이 (Nong Khai / Raan Khun Ya) 현지인들 사이에서 입소문만으로 유명해진 로컬 맛집이다. 특히 푸짐한 재료와 진한 국물로 '가성비'와 '맛'을 모두 잡았다. (보통 '카놈찐 남야 뿌'로 유명한 로컬 식당들은 랏프라오나 외곽에 많지만, 시내에서 접근하기 좋은 곳으로 'Krua Khun Ya' 등을 추천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로컬 바이브를 원한다면 랏프라오 왕힌에 위치한 '카놈찐 남야 뿌 쩨틱(Je Tik)' 같은 곳도 좋다. [에디터의 팁] 처음 도전하신다면 호불호 없이 즐길 수 있는 '쌍우안 씨'의 목요일(그린 커리) 방문을 추천. 하지만 진정한 태국의 매운맛을 경험하고 싶다면 주저 없이 '쿠아 클링 팍 솟'으로!

방콕, 그들은 왜 '시장’을 선출할까?

2025/12/03 10:21:55

방콕, 그들은 왜 '시장’을 선출할까? 태국 77개 도 중 유일하게 선거로 뽑히는 방콕 시장, 그 뒤에 숨겨진 역사와 비밀 방콕의 수쿰빗 도로나 시암 광장을 걷다 보면, 선거철마다 거대한 포스터들이 거리를 뒤덮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이 열기가 태국 전역이 아니라 오직 '방콕'에서만 일어난다는 점이다. 치앙마이에도, 푸껫에도 도지사(Governor)는 존재하지만 그들은 투표로 뽑히지 않는다. 왜 오직 방콕 시민들만이 자신들의 리더를 직접 손으로 뽑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태국의 민주주의 역사, 중앙 집권의 딜레마, 그리고 방콕이라는 도시의 독특한 성격 속에 그 모든 이유를 담고 있다. 1. 임명직 vs 선출직: 1/77의 예외 태국에는 77개의 짱왓(Province, 도)이 있다. 그중 76개 도의 도지사는 태국 내무부(Ministry of Interior)에서 파견한 고위 공무원들이다. 쉽게 말해 중앙 정부가 "당신이 가서 저 지역을 관리하시오"라고 임명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역 주민의 눈치보다는 자신을 임명한 중앙 정부의 지시를 더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방콕은 다르다. 방콕 시장은 방콕 광역 행정청(BMA, Bangkok Metropolitan Administration)의 수장으로, 4년마다 시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다. 이는 방콕이 단순한 행정 구역을 넘어 '국가 안의 국가'처럼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큰 상징이다. 2. 1975년, 민주주의의 바람과 함께 시작되다 이 독특한 시스템은 언제 시작됐을까? 시계를 1970년대로 돌려보자. 1973년, 태국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학생 봉기가 일어났다. 군부 독재에 저항해 민주주의를 외치던 이 거대한 물결은 사회 전반에 '분권'과 '자치'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었다. 이 흐름 속에서 1975년, '방콕 광역 행정청법(BMA Act)'이 제정됐다. 당시 정부는 급격한 도시화로 몸살을 앓던 방콕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중앙 정부의 지시만 기다리는 관료보다는 시민들에게 책임을 지는 선출직 리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방콕 시민들은 내무부 장관이 꽂아준 사람이 아닌,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에게 시청 열쇠를 맡기게 된 것이다. 3. 왜 다른 지역은 안 될까? : '갓파더'의 공포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생긴다. "그렇게 좋은 거라면 왜 치앙마이나 촌부리 같은 다른 큰 도시에는 적용하지 않았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방콕의 특수성(인구 밀집도, 경제 규모 등) 때문이지만, 그 이면에는 중앙 정부의 오래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태국 지방에는 이른바 '짜오 포(Jao Pho)'라고 불리는 지역 유지 혹은 '대부(Godfather)'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막강한 자금력과 사병에 가까운 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중앙 정부는 지방 선거를 전면 허용할 경우, 이 지역 토호들이 합법적인 권력(도지사)까지 거머쥐고 중앙 정부에 대항하거나 부패 왕국을 건설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방콕은 시민 의식이 높고 제도가 정착되었으니 괜찮지만, 지방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논리로 중앙의 통제력을 유지해 온 것이다.(대표적인 케이스가 촌부리에서 활약했던 깜난포) 4. 방콕 시장, 정치의 풍향계가 되다 방콕 시장 선거는 단순히 행정가를 뽑는 자리가 아니다. 태국 전체의 민심을 읽는 가장 정확한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잠롱 스리무엉 (Chamlong Srimuang) 1990년대 초, '청렴'을 무기로 당선된 그는 퇴역 장군 출신이지만 금욕적인 생활과 부패 척결 이미지로 방콕 정치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청백리 방콕 시장으로 유명하다. ✽찻찻 싯티판 (Chadchart Sittipunt) 가장 최근인 2022년, 무려 138만 표라는 역대 최다 득표로 당선된 인물이다. 그는 이념 논쟁 대신 "새벽 4시부터 조깅하며 민원을 처리하는" 실용주의와 데이터 기반 행정을 내세웠다. 그의 당선은 방콕 시민들이 더 이상 정치 싸움이 아닌, '내 삶을 바꿔줄 유능한 일꾼'을 원한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낸 사건이었다. 실제로 그는 방콕시 주요 행사에 시간만 허락한다면 어디든 나타난다. 심지어 방콕에서 활동하는 각 국가 단체 행사에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5. 여행자가 느끼는 '선출된 권력'의 맛 방콕을 여행하는 당신에게도 이 시스템은 영향을 미치고 있을 수 있다. ✽노점상과 보도블록 방콕의 고질적인 문제인 보도블록 정비나 노점상 규제는 주지사의 성향에 따라 180도 바뀌게 된다. 어떤 시장은 "거리의 활기"를 중시해 노점을 허용하고, 어떤 시장은 "보행권"을 중시해 싹 밀어버리기도 한다. ✽홍수와의 전쟁 우기만 되면 물에 잠기는 방콕. 선출직 방콕 시장은 다음 선거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배수 터널 공사나 운하 준설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비가 올 때마다 시장이 장화를 신고 현장에 나타나는 쇼맨십을 보이는 것도 유권자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공원과 녹지 최근 방콕에 벤자키티 공원 등 거대 녹지가 늘어나는 것도 '삶의 질'을 중시하는 중산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정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6. 절반의 민주주의? 방콕 시장 선거 제도는 도입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방콕만의 특권으로 남아 있다. 이는 태국의 민주주의가 가진 가능성(시민 참여를 통한 변화)과 한계(여전히 강력한 중앙 집권)를 동시에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다.

“쏨땀” '이싼’ 향토음식에서 '국민 소울푸드'가 되기까지

2025/11/18 14:10:41

“쏨땀” '이싼’ 향토음식에서 '국민 소울푸드'가 되기까지 태국인의 정신을 사로잡은 '마성의 샐러드 쏨땀' 한때 태국 북동부 이산(Isaan) 지방의 투박한 향토 음식으로 여겨졌던 이 파파야 샐러드는 어떻게 태국 전역의 식탁을 점령하고 '태국의 김치'라 불리는 국민 소울푸드가 되었나. 그 화려한 변천사를 찾아본다. "쏨땀(Som Tum)은 단순한 샐러드가 아니다. 그것은 엄청난 짠맛, 신맛, 단맛, 매운맛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경험'이다." 방콕의 한 요리 전문가는 쏨땀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름 자체가 그 본질을 드러낸다. '쏨(Som)'은 '시다'는 뜻이고, '땀(Tum)'은 '찧다'는 동사다. 서양식 샐러드처럼 그릇에 재료를 넣고 버무리는(Toss) 것이 아니라, 절구(Mortar)에 재료를 넣고 찧어(Pound) 맛을 융합시킨다. 이 '제어된 으깨기' 방식이 쏨땀 맛의 핵심이다. 마늘과 쥐똥 고추(프릭 키누)를 먼저 찧어 향을 폭발시키고, 라임즙과 피시 소스, 야자 설탕이 어우러져 반짝이는 드레싱을 만든다. 그 후에 아삭한 녹색 파파야, 긴 줄기 콩, 토마토가 들어가 맛이 스며들되 식감은 살아있는 'Zaap Nua(쎕 누어)'(풍부하고 조화로운 맛)가 완성된다. 1. 기원 : 이싼의 심장, '쏨땀 쁠라라(빨라)' 쏨땀의 고향은 태국 북동부 이싼 지역이다. 그리고 그 원형은 '쏨땀 쁠라라(Som Tum Pla Ra)'다. 이것은 외국인에게 '관문' 격인 '쏨땀 타이'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세련됨보다는 거칠고, 균형보다는 강렬하다. 핵심 재료는 '쁠라라(Pla Ra)', 즉 강렬한 향의 민물 생선 발효 소스다. 여기에 작은 민물 게 절임(Pu)을 통째로 찧어 넣은 '쏨땀 뿌 쁠라라(Som Tum Pu Pla Ra)'는 이싼 스타일의 정수로 꼽힌다. 게 껍데기의 바삭함과 짭조름한 미네랄 노트가 어우러져 이 음식이 태어난 논과 밭을 연상시킨다. 이 강렬한 쿰쿰함과 짠맛. 이것이 바로 이싼의 영혼이었지만, 오랫동안 방콕의 세련된 입맛과는 거리가 있었다. 쏨땀이 이싼 출신 노동자들의 향수 어린 식사, 혹은 특정 지역의 '강한' 음식으로 여겨졌던 이유다. 2. 변신 : 수도를 점령한 '쏨땀 타이' 쏨땀이 이싼의 경계를 넘어 태국 전역, 나아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 데는 결정적인 '변신'이 있었다. 바로 '쏨땀 타이(Som Tum Thai)'의 등극이다. 쏨땀 타이는 쏨땀의 '세계화 버전'이자 '근대화'의 상징이다. 이 버전은 대담한 도전을 감행했다. 쏨땀의 정체성이었던 강렬한 발효 향, 즉 '쁠라라'를 과감히 제거했다. 대신 볶은 땅콩과 말린 새우를 넣어 고소함과 감칠맛을 더했다. 맛은 밝고 깨끗해졌으며, 매운맛, 신맛, 단맛, 짠맛의 균형에 집중했다. 쁠라라의 강한 향에 익숙지 않던 방콕 시민들과 외국인들은 이 '세련된 샐러드'에 열광했다. 이는 쏨땀이 '지방 음식'이라는 인식을 벗고 '태국 요리'의 대표 주자로 발돋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소금에 절인 오리알 노른자를 넣어 크리미한 풍미를 더한 '쏨땀 카이 켐(Som Tum Kai Kem)'이나, 파파야 대신 옥수수를 넣은 '땀 카오 포드(Tum Khao Pod)' 등이 등장하며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3. 진화 : 경계 없는 캔버스 오늘날 쏨땀은 '태국의 김치'라는 별명에 걸맞게 끝없이 진화하고 있다. '땀(Tum)'이라는 '찧는 기법'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기 때문이다. 태국 남부에서는 피시 소스 대신 새우 발효 페이스트인 '까삐(Kapi)'를 사용해 더 복합적인 바다 향을 내는 '쏨땀 까삐'를 즐긴다. '땀 마무앙(녹색 망고 샐러드)', '땀 폴라마이(과일 샐러드)'처럼 파파야가 아닌 다른 재료를 찧어 만드는 방식도 보편화되었다. 최근에는 도시의 고급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퓨전 쏨땀'이 트렌드를 이끈다. 가장 주목받는 것은 '땀 살몬(Tum Salmon)'. 신선한 생 연어 큐브가 쏨땀의 매콤새콤한 드레싱과 만난다. 연어의 기름진 질감이 라임과 고추의 폭발적인 향과 충돌하며 고급스럽고 현대적인 맛을 선사한다. 4. 소울푸드가 되다 한때 거칠고 투박한 이싼의 향토 음식이었던 쏨땀. 이것이 태국인의 소울푸드가 된 과정은 '적응'과 '융합'의 역사다. 쏨땀은 '쁠라라'라는 이산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쏨땀 타이'라는 세련된 얼굴로 수도 방콕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제는 '땀 살몬'처럼 국경을 넘어선 재료까지 끌어안는 '현대의 캔버스'가 되었다. 논밭에서 태어난 강렬한 한 그릇(쏨땀 쁠라라)부터 도시의 세련된 레스토랑의 호화로운 한 접시(땀 살몬)까지, 쏨땀은 태국 사회의 모든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태국인들이 쏨땀에서 단순한 맛 이상의 '조화의 정신'을 발견하는 이유다. [SPECIAL SECTION] ★★★★★ 5분 완성! 나만의 '쏨땀 타이' 만들기 기사를 읽고 참을 수 없이 쏨땀이 당긴다면, 지금 당장 주방으로 향하자. 태국 현지의 'Zaap Nua(쎕 누어)'를 재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가장 대중적이고 접근하기 쉬운 '쏨땀 타이' 레시피를 공개한다. 1. 재료 준비 (1인분 기준) ✽ 핵심 재료 : 채 썬 그린 파파야 (150g, 약 두 줌), 방울토마토 (3-4개, 반으로 자르기), 롱빈 (1줄기, 4-5cm 길이로 자르기) ✽ 향신료 : 통마늘 (1-2쪽), 태국 고추(프릭 키누) (1-3개, 매운맛 조절) ✽ 소스 : 피시 소스 (1.5 큰술), 라임즙 (1.5 큰술), 야자 설탕 (1 큰술, 혹은 황설탕 대체) ✽ 기타 : 볶은 땅콩 (1 큰술), 건새우 (1 작은술) 2. '땀(TUM)'의 기술: 찧고 섞기 가장 중요한 것은 태국식 절구 '크록(Krok)'과 방망이 '싹(Saak)'이다. 없다면 단단한 믹싱 볼과 튼튼한 방망이로 대체할 수 있다. ➊단계 : 향 폭발시키기 (향신료 찧기) 절구에 마늘과 태국 고추를 넣고 쿵쿵 찧어 향을 낸다. 너무 곱게 갈지 않고 거칠게 으깨는 것이 포인트. ➋단계 : 드레싱 만들기 (소스 융합) 1에 야자 설탕을 넣고 찧어 녹인다. 그다음 피시 소스와 라임즙, 건새우를 넣고 가볍게 섞어 소스를 완성한다. ➌단계 : 재료 으깨기 (식감 살리기) 소스에 롱빈과 반으로 자른 방울토마토, 볶은 땅콩 절반을 넣는다. 재료가 으스러지지 않고 멍이 들어 소스가 배어들도록 절굿공이로 3~4회 가볍게 찧어준다. ➍단계 : 버무리기 (쏨땀의 완성) 마지막으로 채 썬 그린 파파야를 넣는다. 이제부터는 찧는 것(Tum)과 섞는 것(Som)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프로의 기술 : 왼손으로는 큰 숟가락을 들고 파파야를 아래에서 위로 뒤집어주고, 오른손으로는 절굿공이로 파파야를 가볍게 쿵쿵 두드려준다. 이 과정을 1분 정도 반복하면 파파야가 소스를 머금으면서도 아삭함을 잃지 않는다. ➎단계 : 완성 및 서빙 그릇에 쏨땀을 옮겨 담고, 남겨둔 볶은 땅콩을 위에 뿌려내면 완성이다. 찰밥(카우니여우)이나 구운 닭고기(까이양)와 곁들이면 완벽한 이싼 스타일 한 끼가 된다. 셰프의 팁 (Chef's Tips) ✽ 황금 밸런스 : 쏨땀의 생명은 '단짠새콤'의 균형이다. 마지막에 꼭 소스 맛을 보고, 부족한 맛(짠맛=피시 소스, 신맛=라임, 단맛=설탕)을 보충한다. ✽ 매운맛 조절 : 태국 고추(프릭 키누) 1개는 신라면 정도, 2~3개는 불닭볶음면 수준이다. 자신 없다면 1개로 시작하자. ✽ 파파야의 신선도 : 그린 파파야는 단단하고 아삭해야 한다. 채 썬 파파야를 얼음물에 5분 정도 담갔다 사용하면 더욱 아삭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침수된 희생, 수도를 위한 방패막이

2025/11/17 11:16:15

침수된 희생, 수도를 위한 방패막이 4개월째 물에 잠긴 아유타야의 절규, “우리는 언제까지 희생해야 하는가” “이제 더 이상 물건을 옮길 데도 없어요. 지붕을 타고 올라가 2층 발코니로 겨우 드나듭니다.” 방반 지역 주민 남 캉(58) 씨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이 배어있다. 그녀는 2011년 대홍수 때보다 지금이 더 끔찍하다고 말한다. 2011년에는 물이 더 넓게 찼지만 빨리 빠졌고, 올해는 홍수가 “더 오래 지속되고, 반복적으로 밀려오며, 매번 수위가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방콕에서 북쪽으로 불과 한 시간 거리인 아유타야. 이곳의 저지대인 방반(Bang Ban)과 쎄나(Sena) 지구는 2017년부터 태국 정부의 홍수 관리 전략에 따라 ‘물 보관 구역(Water-retention zone)’으로 지정됐다. 6개월간의 우기 동안 상류에서 밀려드는 막대한 양의 물을 이곳에 가둬두어, 하류의 경제 중심지인 수도 방콕의 침수를 막는 ‘방패’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희생’은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주민들은 매년 홍수가 심각해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방반 지역의 마을 이장 사왓 산야위리 씨는 “과거에는 홍수 수위가 2미터를 넘지 않았고, 기간도 두어 달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홍수 수위가 몇 미터씩 차올라 2층집까지 잠기고, 이 악몽이 매년 최소 3개월간 지속됩니다. 당국의 물 관리 전략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싸왓 씨 역시 물에 잠긴 집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천장에 거의 닿을 듯한 높은 단상에서 잠을 자고, 집을 나설 때면 창문을 통해 배를 저어 나온다. 8월부터 짜오프라야강과 너이강이 범람하면서, 막대한 양의 물이 방반과 인근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떤 이들은 고지대로 대피했지만, 많은 주민들은 반쯤 잠긴 집에서 임시 단상을 만들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77세의 주민 싸웽 잔피탁 씨는 “수년간 홍수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이 연례행사에 지칠대로 지쳤다”며 “이 문제가 매년 우리를 덮치는데, 당국은 왜 해결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녀의 가족은 홍수로 인해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웃 쎄나 지구의 74세 여성은 집이 두 달 넘게 물에 잠겨 발에 곰팡이 감염까지 생겼다. “거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해 속상합니다. 구호품조차 어떤 집은 더 많이 받고, 어떤 집은 덜 받는 등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아요.” 정부가 제공하는 보상금은 가구당 9,000바트(약 33만 원), 침수된 농지는 라이(1,600㎡)당 1,000바트(최대 1만 바트)에 불과하다. 싸왓 이장은 “홍수로 고립된 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고, 물이 빠진 뒤에는 집을 수리하는 데 시간과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이 정도 보상금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분노로 바뀐 체념, “홍수 게이트를 열어라” 도로 막고 시위 나선 주민들... “전문가들, 근본적인 전략 수정 없이는 방콕도 위험” 수개월간 이어진 고통과 당국의 미흡한 대처에 주민들의 인내는 한계에 달했다. 체념은 분노로 바뀌어 거리로 터져 나왔다. 11월 7일, 쎄나, 방반, 팍하이 지역 주민 300여 명은 아유타야-쎄나 도로를 점거했다. 3개월 넘게 이어진 침수와 계속 상승하는 수위(당시 차오프라야 댐 방류량 초당 2,700톤)에 “더는 못 참겠다”며 정부의 즉각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이들은 쌈코와 차오젯 수문을 열어 물을 다른 곳으로 배수시킬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틀 뒤인 11월 9일, 방반 지역 주민들은 309번 고속도로(아유타야-앙통) 4개 차선을 모두 막아섰다. 이들 지역은 3~4미터 깊이의 물에 4개월째 잠겨 있었다. 시위대의 요구는 하나였다. “방꿍 운하 수문을 즉각 1미터 이상 열어 고인 물을 빼달라.” 이들의 절박한 시위는 일부 성과를 거뒀다. 7일 현장을 찾은 파라돈 총리실 장관은 주민들과 협상 끝에 수문 개방을 지시했고, 9일 왕립관개국(RID)은 10일간의 시범 운영을 전제로 수문 개방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땜질식 처방과 구조적 결함 왕립관개국(RID) 측은 “수도 보호를 위해 물 보관 구역은 필수적”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현재 95% 공정이 진행된 방반-방싸이 배수 운하가 완공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민 싸왓 씨는 “하류 지역의 수용 능력이 확대되지 않으면 물은 어차피 병목 현상에 부딪힐 것”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물 관리 시스템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수코타이 탐마티랏 개방대학의 아르팃 통인 조교수는 “도로가 종종 방조제 역할을 하면서 물의 흐름이 고르게 분산되지 않아, 어떤 곳은 완전히 잠기고 어떤 곳은 마른 상태로 남는 ‘불공평한 침수’가 발생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정부가 주택 피해만 보상할 뿐, 홍수 기간 동안의 소득 손실이나 교육 중단 피해는 외면하고 있다”며 공정한 보상을 촉구했다. 랑싯 대학 기후변화재난센터 소장인 세리 수프라티드 부교수는 “태국의 홍수 관리 전략을 전면 개편하지 않는 한 아유타야의 위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정부가 “나콘사완(차오프라야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도달하기 전, 더 북쪽에 영구적인 물 보관 구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토지 수용과 주민 이주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경고는 현실로, 방콕도 안전하지 않다 아유타야 주민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위협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11월 11일, 짜오프라야 댐은 방류량을 초당 2,900톤까지 늘렸다. 태국 지리정보우주기술개발원(GISTDA)은 댐 방류량 증가로 인해 파툼타니, 논타부리, 그리고 방콕의 일부 지역까지 홍수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공식 홍수 방어벽 외부에 거주하는 강변 지역 사회의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물난리 속에서 아유타야 주민들은 4개월째 지붕 위에, 혹은 탁자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수도 방콕의 안녕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해 온 이들의 삶은 정부의 무관심과 미봉책 속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들의 절박한 외침, “왜 아무도 이 문제를 고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흙탕물 속에 공허하게 가라앉고 있다.

생명의 낱알, 문화의 뿌리 태국 쌀 이야기

2025/11/03 18:11:48

생명의 낱알, 문화의 뿌리 태국 쌀 이야기 태국 요리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향긋한 카레나 매콤한 볶음 요리 옆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재스민 라이스일 것이다. 하지만 태국의 쌀 문화는 단순히 하나의 낱알, 그 이상이다. 전국적으로 12가지가 넘는 고유한 품종이 재배되며, 각각 독특한 향과 식감, 그리고 역사를 지니고 있다. 태국에서 쌀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고귀한 유산이다. 문명을 싹틔운 낱알: 쌀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 쌀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쌀(Oryza sativa)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현재도 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 중 하나다. 오랫동안 학계의 정설은 '중국 양쯔강 유역 기원설'이었다. 약 1만 년 전, 이 지역에서 야생 벼가 인류의 손을 거쳐 재배 벼로 진화(Domestication)하며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벼의 순화 과정과 초기 농경 사회의 증거가 함께 발견되어, 쌀 문명의 유력한 발상지로 널리 인정받아왔다. 하지만 이 정설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는 증거가 한반도에서 발견됐다. 충북 청원 소로리 유적에서 발견된 볍씨는 그 연대가 무려 1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현존하는 쌀 유적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공인된 발견이다. 소로리 볍씨의 등장은 '양쯔강 단일 기원설'을 흔들며, 쌀의 기원이 특정한 곳이 아닌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다기원설'에 힘을 싣고 있다. 다만 학계에서는 이것이 현대 쌀의 직계 조상인지, 혹은 당시 인류가 '재배'한 것인지 '야생 벼'를 채집한 것인지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인류 문명의 여명기와 함께한 쌀은 교역로를 따라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태국 땅에 쌀이 뿌리내린 것도 수천 년 전의 일로, 북동부 반치앙(Ban Chiang) 유적지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의 쌀겨가 발견되기도 했다. 태국에서 쌀은 단순한 식량을 넘어 국가의 근간이었다. 짜오프라야강의 비옥한 삼각주를 기반으로 한 수코타이, 아유타야 왕조는 모두 체계적인 쌀 농업을 통해 번영을 이룩했다. 쌀은 경제의 중심이었고, 왕국의 힘을 상징했다. 쌀 재배 기술의 발달은 태국 고유의 공동체 문화와 계절에 따른 의례를 탄생시킨 문명의 뿌리다. 세계의 식탁을 사로잡은 향기: 재스민 라이스 (Hom Mali) 수많은 쌀 품종 중에서도 태국을 대표하는 쌀은 단연 '홈 말리 105(ข้าวหอมมะลิ 105)', 즉 태국 재스민 라이스다.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열대 식물인 판단(Pandan) 잎과 같은 은은하고 구수한 향이 특징이다. 주로 태국 북동부 지방에서 재배되는 재스민 라이스는 그 향이 매혹적이어서 태국인들은 종종 '해 질 녘 피어나는 꽃의 향기'에 비유한다. 잘 지어진 홈 말리 쌀은 부드러우면서도 살짝 찰기가 돌아, 그린 커리부터 매콤한 바질 볶음(팟 카파오)에 이르기까지 어떤 태국 요리와도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쌀의 '샴페인', 퉁 꿀라 렁하이 재스민 라이스 중에서도 최고의 품질로 숭배받는 것은 '퉁 꿀라 렁하이(ข้าวหอมมะลิทุ่งกุลาร้องไห้) 홈 말리'다. 이는 태국 북동부의 건조하지만 미네랄이 풍부한 특정 평야 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이다. '퉁 꿀라 렁하이'라는 이름 자체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담겨 있다. '울부짖는 꿀라(Kula) 족의 평야'라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과거 이 지역을 지나던 꿀라족 상인들이 끝없이 펼쳐진 건조하고 척박한 땅에 절망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척박한 토양과 극심한 건기가 쌀의 품질을 결정짓는다. 건조한 기후와 염분이 살짝 섞인 토양은 벼에 스트레스를 주어, 벼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향기 분자를 생성하게 만든다. 그 결과, ‘퉁 꿀라 렁하이’ 쌀은 독보적인 백색 광택과 오래 지속되는 강한 향을 지니게 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엄격한 지리적 표시제(GI)의 보호를 받으며, '태국 쌀의 샴페인'이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삶의 의식이자 공동체의 상징 : 찹쌀 (카오 니여우) 과 쌀의 문화 재스민 라이스가 태국의 공식적인 '얼굴'이라면, 태국인의 일상과 영혼에 더 깊숙이 자리한 것은 바로 '찹쌀(카오 니여우, ข้าวเหนียว)'이다. 특히 태국 북부와 북동부(이산) 지역에서 찹쌀은 매일의 삶을 지탱하는 심장과도 같다. 사진 : 북부와 이산의 찹쌀 전통 북부 치앙라이(Chiang Rai)에서 재배되는 '카우 니여우 키여우 구(ข้าวเหนียวเขี้ยวงู)', 즉 '뱀 송곳니 찹쌀'은 낱알이 뱀의 이빨처럼 가늘고 길며 유백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부드러우면서도 질척거리지 않는 식감과 은은한 단맛을 자랑하며, 구운 닭고기(까이 양), 북부식 소시지(싸이 우아)와 환상의 궁합을 이룬다. 망고 철이 되면 '망고 찹쌀밥(카오 니여우 마무앙)'의 주재료로도 사랑받는다. 한편, 북동부 이싼 지역 깔라신(Kalasin) 주의 '카우 니여우 카오웡(ข้าวเหนียวเขาวง)'은 이싼 사람들의 삶 그 자체다. 이곳의 찹쌀은 식어도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을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싼 사람들은 이 찹쌀을 손으로 작게 뭉쳐, 매콤한 파파야 샐러드(쏨땀)나 다진 고기 샐러드(랍)를 찍어 먹는다. 이곳에서 찹쌀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선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함께 모여 '끄라팁(Kratip)'이라 불리는 대나무 밥통에서 찹쌀밥을 나누어 먹는 행위는 공동체 의식과 유대감을 상징하는 일상의 중요한 의식이다. 사진 : 쌀의 여신, 매포솝 (Mae Phosop) 태국인들에게 쌀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영혼 그 자체로 여겨진다. 태국 문화에는 쌀의 여신인 '매포솝(แม่โพสพ)'에 대한 깊은 신앙이 깔려 있다. 농부들은 모내기철부터 수확기까지 벼의 성장 단계마다 '매포솝'에게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의식을 올린다. 벼가 이삭을 밸 시기가 되면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수확 후에는 쌀을 창고에 들이기 전에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밥을 먹을 때 쌀 한 톨이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태국인의 습관은 바로 이 쌀의 여신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국의 쌀은 수천 년의 역사, 각기 다른 땅의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의 땀과 믿음이 응축된 살아있는 유산이다. 세계적인 명성의 홈 말리 라이스부터 이산 지역의 소박한 찹쌀 한 줌에 이르기까지, 모든 낱알에는 태국의 진정한 맛과 정신이 담겨 있다.

러이끄라통, 물의 여신에게 띄우는 기억과 속죄

2025/11/03 13:42:05

러이끄라통, 물의 여신에게 띄우는 기억과 속죄 ◉ 2025년 방콕은‘조용한 축제’기조 … 33개 공원 자정까지 개방 폼 금지 디지털 참여 병행 기원과 신화 러이끄라통(ลอยกระทง)은 태음력 12월 보름, 촛불·향·꽃으로 장식한 작은 배(끄라통)를 물에 띄워 물의 여신 프라 메 콩카(힌두의 강가 여신의 태국식 호칭)에게 감사와 사죄를 바치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지역 신앙과 불교의 등공양 전통이 뒤섞여 형성된 태국식 종교 혼합(syncretism)의 대표 사례로, 물에 띄워 보내는 행위는 원한·번뇌를 흘려보내는 상징적 정화로 해석된다. 일부 지역에서 손톱 머리카락을 잘라 올리는 풍습도 같은 맥락이다. 잘 알려진‘낭 놉파맛(Nang Noppamas)’전승—수코타이 왕의 총희가 연등을 본뜬 연꽃 모양 끄라통을 만들어 임금이 강에 띄웠다는 이야기—은 태국 고전문헌에 실린 후대 문학적 창작으로 보는 학설이 주류다. 축제의 실제 형성은 불교 의례와 물의례가 장기간에 걸쳐 융합된 결과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다. 상징과 풍습 러이끄라통 밤에 사람들은 동전 꽃 촛불을 올린 끄라통을 강·운하·연못에 띄우며 소망을 빈다. 촛불은 부처에 대한 공경, 물에 띄움은 과오와 악운의 해소를 뜻한다. 끄라통은 전통적으로 바나나 줄기·잎으로 만들며, 현대에는 빵·종이 등도 쓰이지만 스티로폼은 환경오염 문제로 각 지방정부가 점차 금지하고 있다. ‘조용한 축제’ 기조와 방콕 지침(요약) 올해 러이끄라통은 10월 24일 서거한 시리킷 왕대비 국상 기조 속에서 열린다. 정부는 국기 조기 30일, 공무원 1년 상복, 일반 국민에게는 90일간 차분한 복장 권고 등을 안내했다. 대형 행사는 금지가 아니라 톤다운을 권장하며, 대표적으로 왓 사켓‘골든마운트 페어’는 오락 공연을 전면 취소하고 종교 의례만 진행한다. 관광 일상은 유지하되 과도한 축제 유흥은 자제한다는 방침이다. 방콕시는 11월 5일(수) 21개 구 33개 공원을 자정까지 연장 개방한다. 스티로폼 끄라통 금지, 폐쇄형 연못 수질 보호를 위한 빵 끄라통 지양, 스카이랜턴·폭죽·주류 판매 금지, 그리고‘한 가족 한 끄라통’을 권장한다. 현장 방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온라인 러이끄라통(greener.bangkok.go.th) 참여도 운영한다. 환경성과와 디지털 전환 2024년 방콕에서는 끄라통 51만 4,590개가 수거됐고, 이 중 98.39%가 자연 소재, 1.61%만 스티로폼으로 집계됐다. 전년 대비 총량은 약 19.6% 감소했다. 방콕시는 오프라인 혼잡 폐기물 부담을 낮추기 위해 디지털·온라인 끄라통을 병행 운영해 참여 경험을 확장하고 있다. 동남아의 ‘물의 축제’들과 비교 러이끄라통은 미안마의 타자웅다잉, 캄보디아의 본 옴뚝(물축제) 등 우기 종식 수자원에 대한 감사를 주제로 한 역내 축제들과도 연결된다. 다만 방콕 등 대도시에서는 하천 연못의 폐기물 수질 문제가 두드러지며, 이에 대한 정책 대응(폼 금지 디지털 참여)이 태국형 지속가능 축제 모델로 자리 잡아 가는 중이다. 메인 개최지 * 빠툼완 : 룸피니 공원 * 짜뚜짝 : 짜뚜짝 공원, 왓치라벤차타스(롯파이) 공원 * 프라나콘 : 산티짜이쁘라깐, 사란롬, 롬마니낫 공원 * 클롱떠이 : 벤짜시리, 벤짜키티 공원 * 방플랏 : 라마 8세 공원 * 랏차테위 : 산티팝 공원 * 방켄 : 라민뜨라 스포츠파크 * 붕컴 : 세리타이, 나와민 피롬 공원 * 돈므앙 : 롬마니 퉁시깐 공원 * 랏프라오 : 붕 남랏프라오 71 공원 * 퉁크루 : 톤부리롬 공원 *타위와타나 : 타위와나롬, 프라녹–붓타몬톤 싸이 4 교차 공원 * 쁘라웻 : 와나탐, 라마 9세 즉위 50주년 공원 * 방콕노이 : 시린다라판, 국왕 80세 탄신 기념 공원 * 클롱삼와 : 와리 피롬, 시리 피롬 공원 * 농쪽 : 농쪽, 랏 피롬 공원 * 랏끄라방 : 수안 프라나콘, 왕비 60세 탄신 공원 * 민부리 : 붕끄라티암, 프라야 피롬 공원 * 방깨 : 방깨 피롬 공원 * 방쿤티엔 : 띠안탈레 팟타나 푸깟사 피롬 공원 ★ 전 공원은 정규 개방시간~자정(24:00) 운영. 안전요원 배치·쓰레기 분리수거 동시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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