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 공화국' 태국 그 껍질 속에 숨겨진 맛의 비밀
방콕의 아침은 닭 우는 소리가 아니라, 기름에 계란이 튀겨지는 '치익' 소리로 시작된다. 태국 미식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팟타이나 똠얌꿍을 꼽는다. 하지만 진짜 태국통(通)들은 안다. 태국 미식의 숨은 주역이자, 거리 위 가장 위대한 조연은 바로 '달걀(카이 까이)'이라는 사실.
교민잡지 726호에서는 태국 관광청이 소개한 6가지 '에그-셀런트(Egg-cellent)'한 길거리 음식들을 나침반 삼아, 그 속에 숨겨진 태국의 역사와 문화를 껍질 까듯 낱낱이 파헤쳐 본다.
◆ 사위가 처가에 가면 달걀을 튀겨준다?
본격적인 메뉴 탐구에 앞서 태국인들의 유별난 달걀 사랑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태국에서 달걀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다. 국민 1인당 연간 달걀 소비량이 300개에 육박할 정도니, 한국(약 268개)보다 '달걀 친화적'인 나라다.
재미있는 건 태국의 달걀 요리에 얽힌 살벌하고도 유머러스한 전설이다. 태국 요리 중 '카이 룩 크이(Khai Look Keuy)'라는 것이 있다. 직역하면 '사위의 달걀'이다. 겉을 바삭하게 튀긴 삶은 달걀에 새콤달콤한 타마린드 소스를 얹은 요리다.
전설에 따르면, 딸을 구박하는 사위에게 장모가 경고의 의미로 이 요리를 내놓았다고 한다. "자네, 내 딸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다음번엔 접시 위의 달걀이 자네의 '그것'이 될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메시지였다는 설. 물론 지금은 태국 가정식의 대표 주자로 사랑받지만, 태국 식문화에 흐르는 해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마법을 부린 길거리의 달걀들
태국 거리를 걷다 보면 평범한 삶은 달걀처럼 보이는데 꼬치에 꽂혀 있는 녀석을 마주친다. 바로 '카이 삥 쏭 크르엉(Khai Ping Song Krueng)'이다.
이건 단순한 삶은 달걀이 아니다. 일종의 '마술'이다. 노점상들은 날달걀 껍질에 작은 구멍을 뚫어 내용물을 빼낸 뒤, 피쉬소스(남쁠라), 마늘, 후추로 간을 하고 다시 껍질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리고 찌고 굽는다. 껍질은 그저 그릇일 뿐, 안은 훈제 향 가득한 커스터드처럼 변해있다. 한국의 찜질방 맥반석 달걀을 기대하고 한 입 베어 물었다간, 짭조름하고 탱글한 식감에 뒤통수를 맞게 된다.
겨울철 태국 북동부(이싼) 지역의 소울 푸드인 '카오 찌(Khao Jee)'도 흥미롭다. 찹쌀밥을 뭉쳐 계란물을 입혀 구운 것인데, 한국의 '누룽지'와 '계란밥'을 합쳐 놓은 듯한 맛이다. 이싼 지역의 서늘한 아침, 숯불 앞에서 호호 불며 먹는 카오 찌는 그야말로 '탄수화물+단백질'의 완벽한 결합이다.
◆ 도쿄에는 없는 '카놈 도쿄'의 아이러니
태국 길거리 간식 중 가장 미스터리한 이름, '카놈 도쿄(Khanom Tokyo)'. 얇은 팬케이크에 소시지나 커스터드 크림을 넣어 돌돌 만 간식이다. 정작 일본 도쿄에는 이 빵이 없다.
팩트 체크를 해보면, 이 간식은 1960년대 후반 방콕에 일본 다이마루 백화점이 들어오면서 탄생했다. 일본의 '도라야키'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어 '도쿄'라는 이름만 붙은 순수 태국 창작물이다. 학교 앞 하교 시간, 태국 아이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이 바로 이 ‘카놈 도쿄’ 리어카 앞이다. 달콤함(커스터드)과 짭짤함(소시지, 다진 돼지고기)의 조화, 단짠의 원조격이다.
이와 유사하게 '카놈 크록' 팬을 이용한 메추리알 요리 '카이 크록(Kai Krok)'이나, 숯불 오븐에 구워 겉바속촉을 자랑하는 스펀지케이크 '카놈 카이(Khanom Khai)' 역시 태국 길거리 미식의 내공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 포르투갈 여인이 남긴 달콤한 유산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디저트 속의 달걀이다. '부어 로이 카이 완(Bua Loy Kai Wan)'. 따뜻한 코코넛 밀크에 찹쌀 경단과 '수란'을 띄운 디저트다. 디저트에 반숙 달걀이라니, 한국인에게는 낯설 수 있다. 하지만 고소한 코코넛 밀크와 녹진한 노른자가 만나면 의외의 크리미한 폭발력을 가진다.
여기서 역사적 팩트 하나. 태국의 달걀 디저트 역사는 17세기 아유타야 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포르투갈계 혼혈 여인 '마리 기마르(타오 통 킵 마)'가 달걀 노른자를 활용한 서구식 디저트 기술을 전파했다. 태국의 전통 디저트 중 '통(Thong, 금)' 자가 들어가는 노란색 디저트들은 대부분 이때 탄생했다. 비린내를 잡고 풍미를 올리는 기술, 그 역사가 수백 년이다.
◆ 달걀을 보면 태국이 보인다
태국의 달걀 요리는 단순한 식재료의 변주가 아니다. 그 속에는 이산 지역의 추위, 1960년대의 일본 문화 유입, 17세기 아유타야의 국제 교류 역사가 모두 녹아 있다.
다음번에 태국 여행을 간다면 화려한 랍스터나 게 요리도 좋지만, 10바트(약 400원) 남짓한 길거리 달걀(카이 까이) 요리에 주목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