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구도심에서 만나는...태국 현대미술의 아버지, 씬 피라씨

작성자 : 관리자 날짜 : 2026/09/18 16:04


방콕 구도심에서 만나는...태국 현대미술의 아버지, 씬 피라씨

피렌체 출신 조각가가 남긴 작품과 제자들… 기념박물관·조각 원형 전시관, 9월 20일까지 특별 개방

방콕에 오래 살면서도 왕궁 주변에는 한국에서 손님이 찾아와야 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왓 프라깨우를 둘러보고 강변에서 식사한 뒤 돌아오는 익숙한 코스다. 그런데 그 길 가까이에, 우리가 아는 태국의 모습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공간이 있다.

씬라빠껀 대학교 인근 태국 미술국 구역에 자리한 ‘씬 피라씨 국립기념박물관’이다. 태국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 출신 조각가의 삶과 작업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피렌체의 조각가, 태국에서 미술을 가르치다
한국에서 홍익대학교를 이야기하면 미술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듯, 태국에서는 씬라빠껀 대학교가 그런 자리를 차지한다. 이 대학의 출발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씰빠 피라씨다.

대학 이름과 인물 이름은 구분해둘 필요가 있다. ‘씬라빠껀(Silpakorn)’은 대학의 이름이며, ‘씬 피라씨(Silpa Bhirasri ศิลป์ พีระศรี)’는 그 설립과 초기 미술교육을 이끈 인물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코라도 페로치(Corrado Feroci). 1892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조각을 공부하고 가르쳤던 그는 1923년, 라마 6세 재위기에 태국으로 건너왔다. 서양 조각 기법을 전하고 정부의 조각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당시 맡은 일이었다. 훗날 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씬 피라씨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가 남긴 중요한 유산은 교육이었다. 조각을 제작하는 일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교육 활동은 1933년 설립된 미술학교의 토대가 됐다. 학교는 1943년 10월 12일 씬라빠껀 대학교로 승격됐으며, 그는 대학 최초의 학부인 회화·조각학부의 초대 학장을 맡았다. 오늘날의 회화·조각·판화학부로 이어지는 출발점이다.

태국은 그가 오기 전부터 오랜 회화와 조각 전통을 지닌 나라였다. 따라서 그의 공로는 태국에 미술을 처음 소개했다는 데 있지 않다. 근대적인 미술교육 체계를 세우고, 다음 세대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갈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 있다. ‘태국 현대미술의 아버지’라는 표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겠다.

 
 

기념비보다 가까이서 만나는 한 사람의 일상
박물관에서는 작품과 함께 그가 사용했던 물건들을 만날 수 있다. 현지 전시 소개에 따르면 책상과 의자, 타자기, 음반 재생기, 조각 도구와 개인 소지품 등이 당시 작업 환경을 떠올릴 수 있도록 전시돼 있다. 미술을 연구하며 참고했던 책들도 관람 대상이다.

거대한 기념물 앞에서는 작가보다 기념물의 주인공을 먼저 보게 된다. 반면 책상과 작업 도구 앞에서는 그것을 만들던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자료를 찾아봤을까. 하나의 얼굴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여러 번 손을 댔을까. 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도 어렵지 않게 품어볼 수 있는 질문들이다.

전시에는 그의 제자들과 주요 태국 작가들의 회화·조각·판화도 포함된다. 그러니 이곳을 씰빠 피라씨 개인의 작품만 모아놓은 공간으로 생각하면 전시의 절반을 놓치게 된다. 한 사람이 가르친 내용이 다른 작가들의 손에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함께 보는 것이 이 박물관의 관람 포인트다.


거리의 동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함께 개방된 ‘조각 원형 전시관(Hall of Sculpture ·หอประติมากรรมต้นแบบ)’도 눈여겨볼 만하다. 원문의 ‘조각의 전당’보다 이곳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이름이다. 국가 기념물과 왕실 동상, 불상 등의 제작에 쓰인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현지 보도에서 소개한 전시물에는 풋타몬톤 주불의 원형을 비롯해 나라이 국왕과 라마 5세·7세·8세 동상의 원형 등이 포함돼 있다. 전시관 건물 자체도 과거 미술국의 조각·주조 작업장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완성된 동상을 거리에서 볼 때는 크기와 상징성이 먼저 들어온다. 원형 앞에서는 시선이 조금 달라진다. 얼굴의 표정과 옷주름, 손의 위치, 몸의 균형 같은 세부를 살피게 된다. 광장이나 공원에서 멀리 올려다봤던 조각을 제작 과정 쪽에서 다시 보는 셈이다.

다만 전시된 원형을 모두 씰빠 피라씨가 직접 제작했거나 다른 장인들과 공동 작업한 작품으로 묶어 설명해서는 곤란하다. 작품마다 작가와 제작 시기가 다를 수 있으므로 전시 설명을 구분해 읽는 편이 좋다. 이곳의 관심 범위 역시 한 작가를 넘어 태국의 공공 조각과 미술국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아이와 함께라면, 작품 하나를 오래 보는 것도 좋다
이번 특별 개방은 랏따나꼬신 일대의 역사·문화 공간을 연결하는 ‘락 나카라 막카 행 랏따나꼬신’ 행사와 연계돼 있다. 참여 장소를 찾아 도장을 모으고, 정해진 조건을 충족하면 기념품으로 교환하는 활동도 마련됐다. 대학 캠퍼스 안의 전시실만 돌면 끝나는 행사로 이해하기보다는 구도심의 여러 문화 공간을 잇는 프로그램으로 생각하면 된다.

스탬프를 모으는 일은 아이들과 걷는 데 작은 재미가 될 수 있다. 참여 장소와 교환 조건은 현장 안내를 먼저 확인하자.

그렇다고 도장을 채우는 데만 하루를 쓸 필요는 없다. 아이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얼굴이나 자세를 하나 골라보라고 해도 좋겠다. 왜 그 작품이 눈에 들어왔는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낯설게 느껴졌던 조각 앞에서도 제법 오래 머물 수 있다. 미술관 나들이에 꼭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전 관람 뒤 강변에서 쉬어가는 반나절
이번 방문은 오전에 박물관부터 들르는 일정이 무난하다. 관람객 증가로 입장 인원이 제한되고 있어 대기 시간을 예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국은 8월 29일부터 기념박물관 입장 인원을 한 번에 20명 이내로 조정했다. 대기자가 많을 때는 관람 시간도 회당 20분 이내로 제한한다. 현장에서 이름을 적고 순서를 받는 방식이다. 관람을 충분히 즐기려면 마감 직전에 도착하는 일정은 피하는 편이 낫다.

박물관과 조각 원형 전시관을 둘러본 뒤에는 타 마하랏 쪽 강변으로 이동해 점심을 먹고 쉬어가면 좋겠다. 아이와 함께라면 이 정도로 반나절 일정을 마쳐도 충분하다. 걷는 구간을 고려해 편한 신발과 마실 물, 양산이나 작은 우산을 챙기자.

오후까지 문화 나들이를 이어가고 싶은 독자라면 주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별도 일정으로 더할 수 있다. 다만 이번 두 공간의 무료 개방을 주변 모든 시설의 무료입장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다른 시설은 방문할 날짜의 운영 여부와 입장 조건을 따로 확인해야 한다.

방콕에서 살아온 시간이 길어도 모르는 장소는 남아 있다. 늘 지나던 왕궁 주변에서조차 그렇다. 이번에는 사원의 규모나 건축의 화려함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오늘의 태국 미술을 가르치고 만들어온 사람을 만나보면 어떨까.

전시를 보고 나온 뒤 거리의 동상 하나가 전과 다르게 보인다면, 그날 나들이는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주요 전시작
✽나콘랏차시마의 영웅, 타오 수라나리(Thao Suranari) 동상 모델 : 1934년 씬 피라씨가 직접 조각한 이 작품은 태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여성 영웅 중 한 명의 모습을 담고 있다.
✽풋타몬톤(Phutthamonthon)의 주불 모델 : 태국 불교의 중심지 중 하나인 풋타몬톤에 세워진 거대한 '프라 시 삭까야 톳사폰얀(Phra Si Sakkaya Thotsaphonlayan)' 불상의 원형 모델을 확인할 수 있다.
✽태국의 역대 국왕 동상 모델 : 나라이 대왕, 쭐라롱꼰 대왕(라마 5세), 프라차티뽁 대왕(라마 7세), 아난따 마히돈 국왕(라마 8세) 등 씰라파껀과 미술국 소속 장인들이 함께 작업한 정교한 조각 모델들이 전시되어 있다.

[추천 동선: 토요일 혹은 일요일 오전 10시 출발]

➊ 오전 10:00 씬라빠껀 국립 기념 박물관 & 조각의 전당 관람
✽가장 먼저 목적지인 씰라파껀 박물관에 도착해 씰라파껀의 작업실과 애장품을 둘러본다.
✽'조각의 전당'에서 거대한 조각상의 원형 모델들을 감상하며 스탬프 투어를 시작한다.

➋ 오후 12:00 타 마하랏(Tha Maharaj) 인근에서 점심 식사
✽대학 캠퍼스를 빠져나와 도보 거리에 있는 짜오프라야 강변의 '타 마하랏' 몰로 이동한다. 에어컨이 나오는 식당이나 강변 카페에서 땀을 식히며 점심을 먹는다.

➌오후 1:30 국립 미술관 (The National Gallery) 또는 방콕 국립 박물관 (National Museum Bangkok) 방문
✽오후에는 씬라빠껀 대학교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국립 미술관'을 추천한다. 씬라빠껀의 제자들을 비롯한 태국 현대 미술가들의 굵직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오전에 본 씬 피라씨의 유산이 어떻게 후대로 이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만약 태국의 고대 역사와 유물에 더 관심이 많다면 방콕 국립 박물관으로 향하자.

관람 안내
✽장소 : 씬 피라씨 국립기념박물관 및 조각 원형 전시관, 방콕 프라나콘구 나프라탓 도로의 태국 미술국 구역
✽운영 시간 : 수요일~일요일 오전 9시~오후 4시, 월·화요일 휴관
✽입장료 : 이번 특별 개방 대상 두 공간 무료
✽기념박물관 입장 : 회당 최대 20명. 대기자가 많으면 회당 관람 시간 20분 이내, 현장 접수
✽스탬프 활동 : 참여 장소와 기념품 교환 조건은 현장 안내 확인

준비물 : 야외 이동이 포함되므로 편안한 운동화, 양산이나 모자, 그리고 마실 물을 챙길 것. 정확한 사실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 전시인 만큼, 관람 전 씬 피라씨라는 인물에 대해 아이들에게 짧게 설명해주면 교육 효과가 배가된다.

글/사진 : 김종민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