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시암의 살아있는 보물
태국 내각은 왜‘고양이’를 국가 정체성으로 택했나
지난 2025년 11월 18일, 태국 내각이 태국 토종 고양이 5종(수팔락, 코랏, 위치엔맛, 꼰자, 카오마니)을 국가 정체성(National Identity)을 상징하는 동물로 공식 지정했다. 이는 코끼리(국가 동물), 투어(Siamese Fighting Fish, 국가 수생동물), 나가(신화적 동물)에 이은 네 번째 지정이다. 이어지는 2026년 1월 11일, 아유타야의 ‘고대 태국 고양이 축제’는 전 세계 애묘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단순히 귀여운 반려동물을 넘어, 태국 정부가 이들을 ‘문화유산’으로 격상시킨 배경에는 수백 년을 이어온 역사적 기록과 서구권과는 전혀 다른 태국만의 독특한 생물학적 미학이 자리하고 있다.
◆ 라마키안이 아닌‘탐라 매우’ 고양이는 전쟁 영웅이 아닌 생활 속의‘길흉’
흔히 태국 문화를 논할 때 대서사시 ‘라마키안’을 떠올리지만, 태국 고양이의 역사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전쟁터가 아닌 민가의 안방을 들여다봐야 한다. 라마키안 속 동물 군단은 원숭이와 곰일 뿐, 고양이는 주요 장수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아유타야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고양이 경전,‘탐라 매우(Tamra Maew)’가 그 중심에 있다.
국립도서관과 박물관에 보관된 이 고문서들은 고양이를 단순한 동물이 아닌,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영물로 묘사한다. 기록된 23종의 고양이 중 ‘길조(Auspicious)’로 분류된 17종은 부와 권력, 명예를 상징한다.
이번에 국가 상징으로 지정된‘위치엔맛(Wichien Maat, 샴고양이)’은 왕족의 부를 상징하며,‘수팔락(Supalak)’은 고위 관직에 오르는 출세운을,‘꼰자(Konja)’는 사자 같은 걸음걸이로 적을 물리치는 용맹함을 의미한다. 반면, 흉조로 분류된 6종은 흥미롭게도 인간 사회의 도덕적 잣대가 투영되어 있다. 새끼를 잡아먹거나(피사), 음식을 훔치는(툿폰 펫) 고양이는 집안을 망하게 한다고 믿었다. 즉, 태국인들에게 고양이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욕망과 도덕을 투영하는 매개체였던 셈이다.
◆ ‘꺾인 꼬리’의 미학 서양에선 기형, 태국에선 ‘행운의 갈고리’
태국 거리를 걷다 보면 꼬리가 뭉툭하거나 ‘L자’로 꺾인 고양이들을 흔히 마주친다. 한국이나 서구권 사람들이 이를 보고 “학대를 당했거나 사고를 당한 불쌍한 고양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과학적으로 이는 ‘창시자 효과(Founder Effect)’와 HES7 유전자 변이에 기인한다. 1868년 찰스 다윈이 “시암과 말레이 제도의 고양이들은 꼬리가 꺾여 있다”고 기록했을 만큼, 이는 동남아시아 고양이들의 고유한 유전적 특징이다. 서양의 육종가들은 이를 ‘결함(Fault)’으로 규정해 인위적으로 곧은 꼬리의 고양이만 남겼지만, 태국인들의 시각은 정반대였다.
태국 전설에 따르면, 공주가 목욕을 할 때 잃어버리지 않게 자신의 반지를 고양이 꼬리에 끼워두었고, 고양이가 그 반지를 지키기 위해 꼬리 끝을 구부려 힘을 주다 굳어버렸다고 한다. 현대 태국 상인들은 이 굽은 꼬리를 “재물을 꽉 움켜쥐고 절대 놓지 않는 갈고리”로 해석한다. 서양의 미적 기준으로는 ‘기형’일지 모르나, 태국의 문화적 맥락에서는 ‘충성심’과 ‘행운’의 상징으로 진화한 것이다.
◆ 아시아를 잇는‘유전적 캣 벨트(Cat Belt)’
이러한 유전적 특징은 태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태국을 중심으로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남부(광동)에 이르는 거대한 ‘해상 무역로’와 고양이들의 유전적 분포도는 정확히 일치한다.
일본의 행운 고양이 ‘마네키네코’의 모델이 된 짧은 꼬리 고양이(재패니즈 밥테일) 역시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을 거쳐 넘어간 유전자의 후손이다. 덥고 습한 동남아 기후에서 굳이 긴 꼬리가 필요 없었던 자연적 선택과, 이를 길조로 여긴 인간의 문화적 선택이 맞물려 ‘아시아 숏테일’이라는 독자적인 생태계를 형성한 것이다.
◆ 맺음말 : 아유타야의 유산을 대하는 자세
태국 정부의 이번 ‘국가 정체성’ 지정은 단순히 멸종 위기 종을 보호하겠다는 행정적 조치를 넘어선다. 이는 서구 중심의 품종 기준(Standard)에 맞서, 꼬리가 휘고 털 색이 달라도 그 자체로 완벽했던 ‘태국다움’을 지키겠다는 문화적 주권 선언이다.
아유타야의 유적지나 방콕의 골목에서 꼬리가 휜 고양이를 마주친다면, 동정의 눈빛보다는 경이로움을 느껴보길 권한다. 그들은 수백 년 전, 왕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 꼬리에 힘을 주었던 ‘탐라 매우’ 속 수호자들의 당당한 후예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