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산으로 가다

2021/12/22 16:20:47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산으로 가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다가 주제에서 벗어난 말을 하거나 방향에 맞지 않는 말을 할 때 이야기가 산으로 갔다는 표현을 합니다. 정답과는 상관없는 방향을 향하는 것이기에 길을 잃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길로 가지 않고 산으로 가면 엉뚱하고 틀린 게 됩니다. 회의가 산으로 가면 답은 커녕 회의 자체가 진행이 안 되는 겁니다. 속담에 있듯이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간 것입니다. 이렇듯 산으로 간다는 말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일을 자의든 타의든 그만둔 사람도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원을 떠돌기도 하지만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년을 하면 본격적으로 산으로 갑니다. 산에 가면 뭐가 있냐고 하지만 아무튼 산으로 갑니다. 산은 내가 갖고 있던 것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을 때 자연스레 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산으로 간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곳에 비해 산은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건강한 곳이 산입니다. 우리는 산에 길을 잃어서도 가고 길을 찾으려고도 갑니다. 종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거나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도 산으로 갑니다. 산에 가서 하늘의 계시를 받는 장면은 익숙한 모습입니다. 험하고 깊은 산에 가면 얻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다시 태어남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산으로 간다는 것이 수행을 의미하기도 하고 신을 만나는 행위가 되기도 합니다. 신라의 화랑이 산천을 다니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그런 이유일 겁니다. 바람 따라 흘러 다녔기에 풍류(風流)라고도 했습니다. 단순히 노는 것이 풍류가 아닙니다. 산을 다니는 겁니다. 산을 오르고 자연을 느끼는 것이 풍류이고 도입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기에 도라고 했을 겁니다. 화랑을 다른 말로는 국선(國仙)이라고 했습니다. 선(仙)은 산을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산을 오래 다니면 신선이 됩니다. 종교의 많은 수행처가 산속에 있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산속에 자리하기도 했겠으나 기독교의 수도원도 그렇고 불교의 많은 절도 깊은 산속에 있습니다. 저는 종종 기도를 드리러 산에 오른 사람들은 산에 오르면서 이미 기도가 이루어졌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산에 오르면서 간절한 마음이 깊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약초를 캐는 사람이 약초를 먹는 사람보다 건강한 건 뜻밖의 진리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에게 제일 좋은 처방은 약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약초 캐는 법을 가르치는 겁니다. 약초와 독초를 구별하며 새로운 지식을 얻고, 약초를 캐기 위해 산을 오르고 땀을 흘립니다. 어느새 머리도 새로워지고, 몸도 새로워지고, 마음도 새로워집니다. 무엇보다도 집착이 옅어지고 자연과 하나가 됩니다. 더 이상 아픈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혼자 산에 오르는 이도 많습니다. 부부나 친구가 함께 산에 오르기도 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열심히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산에 오르는 것은 참 다행한 일입니다. 살면서 길을 잃어 산에 갔는데 산은 또 다른 길이 되었습니다. 산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길을 찾습니다. 산에서 만난 하나하나가 깨달음이 됩니다. 다음 산이 기다려지고, 다음 계절이 기대됩니다. 건강은 덤으로 주어진 행복입니다. 길을 잃고 세상이 싫어서 산을 올랐는데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고 위로하게 됩니다. 산에 오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산에서 만난 사람에게 기쁜 인사와 걱정의 안부를 나눕니다.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을 향하는 것이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나와 함께 지나간 것이 과거(過去)이고, 아직 내 앞에 오고 있는 것이 미래(未來)입니다. 지금 내가 모습을 내보이며 살고 있는 것이 현재(現在)입니다. 저는 산을 걸으며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현재를 느낍니다. 산을 또 걷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덮어놓고

2021/10/14 10:29:41

덮어놓고 싸울 때 보면 덮어놓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화를 내는지 이유도 안 가르쳐주고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도 있지요. 이런 사람은 상대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보통은 소리부터 질러대는데요. 싸울 때 소리를 지르는 것은 하수(下手)의 일입니다. 동물도 센 동물은 큰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저음(低音)은 센 동물의 특징이자 특권이죠. 덮어놓고 소리를 지르는 것 보다 이유를 잘 설명하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덮어놓고>라는 말은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어서 큰 관심이 없었는데, ‘덮어놓고 믿는 사람이 있다’는 말에서 이 표현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덮어놓고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덮어놓고 대들기도 하고, 덮어놓고 울기부터 하는 사람도 있지요. 덮어놓고 칭찬이나 사과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보면 <덮어놓다>는 ‘옳고 그름이나 형편 따위를 헤아리지 아니하다.’라는 뜻으로 나오는데요. ‘무언가를 덮어놓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즉, 가려놓았다는 의미죠. 그래서인지 <무조건>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말인데요. 덮어놓고 화를 내는 것은 상대의 사정은 듣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남의 사정을 덮어버리고 무조건 화를 내고 있는 것이죠. 덮어놓고 울거나 덮어놓고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의 잘못은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은 이 자리를 모면하자는 의도가 있는 것이죠.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미안하다고 말하면 용서가 될 거라는 착각을 하는 겁니다. 말 그대로 착각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모르는데 미안한 마음이 생기기는 어렵겠죠. 운다고 해서 진심 일리도 없구요. 눈물은 생각보다 쉽게 흐르기도 합니다. 미안해서 흘리기도 하지만 억울해서 흐르기도 하죠. 덮어놓고 우는 건 좋은 게 아닙니다. 덮어놓고 칭찬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죠. 어디를 칭찬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하는 칭찬은 아부가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칭찬은 관심에서 비롯됩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람의 말을 잘 믿는 게 순수한 측면도 있지만 위험한 측면도 있습니다. 물론 믿는 게 나쁜 건 아니지요. 사람 간의 믿음은 귀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덮어놓고’에 있습니다. 우리가 덮어놓고 있는 것은 무얼까요? 맹목적인 믿음은 자신을 가둡니다. 아무리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게 되지요. 어쩌면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세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맹신을 키우고 있을지 모릅니다.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나 덮어놓고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의심이 문제가 아니고, 덮어놓는 것이 문제인데요. 우리말 <덮어놓고>는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무언지에 대해서 반성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뭘 덮어놓고 믿는 걸까요? 뭘 덮어놓고 있는 걸까요? 때로는 덮어놓는 게 좋은 의미일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 우리는 덮어놓고 행동을 해야 할까요?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을 도울 때는 덮어놓고 해야 합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절차를 고려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급박한 상황이니까요. 옳고 그름을 따질 겨를도, 내게 닥칠 해로움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냥 뛰어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급박한 상황에서 이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건데요. 세상의 많은 미담(美談)은 <덮어놓고>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일이 따지고서는 이타적이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렇게 계산한 후에 한 행동이라면 진정한 이타주의(利他主義)는 아닐테니까요. ‘덮어놓고’라는 말을 쓸 때마다 한 번쯤은 내가 지금 덮어놓은 것이 무언지, 이렇게 덮어놓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숲을 걷고 나서

2021/09/30 12:09:55

숲을 걷고 나서 숲이 보입니다. 나무가 보입니다. 풀이 보입니다. 눈을 조금 들면 나뭇가지가 보이고 그 끝으로 하늘이 보입니다. 구름이 그런 모습이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숲을 걷고 나서 길이 보입니다. 흙이 보입니다. 바위도 보이고 자갈도 보입니다. 정성껏 쌓아놓은 돌탑도 보이네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에는 돌탑이 참 많습니다. 걸으며 돌탑을 보면 온기가 느껴지고, 저도 돌 하나를 올려놓곤 합니다. 숲을 걷고 나서 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칡꽃이 천지네요. 바람꽃도 마타리도 배웁니다. 모르는 꽃이 많아 반갑습니다. 나무도 배웁니다.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편백나무, 자작나무 등등 숲은 그대로 나무의 집입니다. 그 깊은 초대에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나무가 떨어낸 또는 떨어뜨린 나뭇잎은 길을 덮고, 흙보다 더 흙 같은 모습으로 길을 보여줍니다. 숲길을 걷고 나서 새를 만나고, 곤충을 만납니다. 새는 소리입니다. 모습보다 소리가 먼저 나를 지납니다. 휘파람으로 따라해 봅니다만, 새가 웃겠네요. 어설픈 모방이나 새를 닮으려 애쓰는 것으로 이해해 주겠지요. 곤충은 때로 적응이 안 됩니다. 잠자리나 메뚜기나 방아깨비 등 익숙한 모습도 있지만 낯설거나 여전히 피하고 싶은 곤충도 많습니다. 길을 따라오면서 눈앞을 뱅뱅거리는 ‘눈에놀이’나 길을 막고 선 거미는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숲길을 걸으니 뜻밖에도 사람이 보입니다. 먼저 길을 걸었던 사람을 만납니다. 길은 한 사람의 뒤를 다른 한 사람이 이어갔기에 길이 되었을 겁니다. 쌓아놓은 돌탑도, 나무에 묶인 리본도 길을 보여줍니다. 발자국이 발자국을 덮습니다. 앉아서 곤한 다리를 쉬었을 평평한 바위도 만납니다. 분명 내가 처음이 아니었을 겁니다. 왠지 먼저 길을 걸었던 사람이 고맙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나처럼 걸었을 겁니다.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길을 걸으면서 옆을 봅니다. 함께 걷는 사람이 고맙습니다. 함께 숲길을 걷습니다. 새로운 숲을 만나고 새로운 하루를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내와 걷는 하루는 왜 아내가 반려자이고 동반자인지 알게 합니다. 반려자(伴侶者)라는 말은 짝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반(伴)도 려(侶)도 짝이라는 뜻입니다. 반이라는 글자가 예쁘네요. 나의 반이 되는 사람입니다. 나도 그의 반이 되어야겠지요. 동반자(同伴者)의 반도 같은 글자입니다. 어떤 일을 함께하는 나의 나머지 반이 동반자인 셈입니다. 반은 도반(道伴)이라는 말에도 쓰입니다. 도반은 함께 도를 닦는 벗이라는 의미이지만, 저에게는 함께 길을 걷는 짝이라는 의미로도 보입니다. 함께 걷는 벗이 있음은 고마운 일입니다. 같이 걷는 이가 모두 도반입니다. 도를 닦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우리는 종종 도(道)가 길의 의미라는 점을 잊습니다. 글자의 모양을 보면 산에 사는 사람이 선인(仙人)입니다. 산을 걷고 숲을 걸으면 선인이 됩니다. 도를 깨닫게 됩니다. 도가 엄청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자연에서 배웁니다. 숲에서 배웁니다. 숲길에서 깊이 느낍니다. 오늘도 나를 치유하는 숲길을 걷습니다. 위로와 희망의 숲길을 걷습니다. 걷기가 올곧게 위로입니다. 깨달음의 숲길입니다.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히 스스로를 바라보게 합니다. 한참 숲길을 걷고 나니 숲 밖의 세상도 보입니다. 사람도 보입니다. 숲길을 걸으니 앞이 보입니다. 길은 여러 모습으로 내 앞에 놓여있습니다. 제가 가야할 길이기에 한 걸음을 더 옮깁니다. 앞으로 말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2021/09/03 14:25:13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일본의 신문기사를 보니 일본은 코로나19 전에 비해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두 배 이상 증가하였고 미국은 세 배 이상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약간은 예상을 했으나 제 예상보다도 급격한 증가로 보입니다. 몸도 마음도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면 코로나 시대를 힘겹게 지나고 있는 우리는 어떨까요? 모르긴 몰라도 우울증이 엄청나게 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코로나 때문에 병원에 잘 가지 않아서 통계가 정확히 잡히지 않고 있을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걱정입니다. 영국에서 고독 담당 장관을 신설하였다는 몇 년 전 기사와 고독 담당상을 지명했다는 일본의 기사는 저에게는 고마운 충격이었습니다. 나라가 외로운 사람을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현재 우울증의 통계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자살에 관한 끔찍한 뉴스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청소년 자살률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매우 높다는 조사결과는 우리를 더 우울하게 만듭니다. 저는 우리나라야말로 고독담당 장관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라가 잘 살펴봐 주어야 합니다. 더 심각해지기 전에. 오랜 방역 통제로 무너져 내린 자영업자나 실업으로 내몰린 수많은 사람들, 일자리를 잡지 못한 젊은이들의 우울함이 절망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심화하고 있는 부익부빈익빈의 현상들은 분노와 좌절을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치솟는 집값, 불공정한 사회의 모습은 점점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한없이 가라앉게 만듭니다. 우울을 마음의 감기라고 하지만 마음 감기약을 먹는 사람은 그다지 없습니다. 그런 약이라도 먹을라치면 나약한 인간 취급받기 십상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모든 걸 국가에 의존할 수는 없겠지만 나라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집합금지라는 무서운 말에 마음껏 종교에 의지하지도 못합니다. 교회도 절도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조건 참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겨낼지 도와주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가까운 이에게 위로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아픈 가족을 찾아가지 못하는 죄송함과 서러움의 수많은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한쪽에서 썩어가고 있는데 어찌할까요? 서로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난 후에 고독과 우울은 더 심각한 모습으로 다가올 겁니다. 아시다시피 힘들 때는 힘든 것을 이겨내야 하기에 마음 방역에 신경을 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지나가고 나면 세상은 더 큰 심리적 수렁에 빠지게 될 겁니다. 학교에 가지 못했던 아이들의 문제도 심각해 질 겁니다. 몇 년 간이나 이런 대학 생활을 보낸 학생들은 어떨까요? 취업 절벽의 고통을 온몸으로 맞닥뜨린 졸업생들은 어떨까요? 경제적 고통을 떠안은 엄마, 아빠들은 어떤가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외로움과 고통은 어떻게 치유가 될까요?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건강으로 평균 수명은 한동안 늘어날 겁니다. 하지만 몸은 건강한데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삶이 축복이 아니라 고통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을 개인에게만 맡기지 않아야 합니다. 가족에게만 짐을 지워서도 안 될 겁니다. 국가가 개인의 우울을 위로해 주는 차분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외로움과 우울을 담당하는 부서가 우리나라에도 상징적으로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인복(人福)이 있는 사람

2021/07/22 12:26:19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인복(人福)이 있는 사람 어떤 분을 만났는데 평생을 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말이 인복이 있어서 고마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인복이라. 인복은 사람 복이 있었다는 말로 나를 도와준 사람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인복이 있으면 좋은 겁니다. 저는 인복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행복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인복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사람을 만나서 행복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인복이 있으려면 인덕(人德)이 있어야 할 겁니다. 인복과 인덕은 상호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인복과 인덕은 같은 뜻으로 설명됩니다. 분명히 느낌이 다른 말인데도 같은 말로 설명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인복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겁니다. 인덕이 없는 사람에게 인복이 있을 리 없으니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덕이 있다는 증거도 될 겁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인덕을 베풀면 내게도 인복이 다가옵니다. 인덕은 주로 내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인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저 좋은 답만 들을지도 모릅니다. 인덕이 정말로 있어서 그런 대답을 듣는 것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대답을 하는 사람에게 괴로움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괴롭힌 것이니 나에게 인덕이 있었다고 볼 수 없겠네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인덕이 없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반면에 인복은 내가 다른 사람을 떠올리면 됩니다. 내가 인복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려면 내게 고마웠던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떠오르는가요? 나는 인복이 있는 사람인가요? 인복의 시작은 가족입니다. 내 부모를 다른 부모와 비교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죠. 나를 낳아준 부모가 안 고마운 사람이 있겠냐마는 실제로는 집안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만나지 않는 집안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인복의 시작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복이기 바랍니다. 복은 덕의 다른 말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좋은 벗은 인복의 핵심입니다. 여기에서 오해해서 안 되는 것은 벗은 어릴 때 만난 사람만 벗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평생 우리는 수많은 벗을 만납니다. 그래서 인복은 쌓여가는 겁니다. 인복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더욱 좋은 사람을 만나야 인복이 쌓입니다. 벗은 나이 차이와도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만나서 편한 사람도 인복입니다. 만나면 행복해지는 사람이 인복이기 때문입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만난 사람, 동네에서 만난 사람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인복이 있는 겁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내가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인복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인복이라 생각 못 하며 사는 순간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복이라는 말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괴로운 인간관계가 가득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봐도 인복은커녕 악연으로 보이는 사람이 잔뜩 있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내 가까이 있다는 게 더 괴롭기도 합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를 만나서 괴로운 사람도 있겠지요. 나를 만난 것이 행복인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더 많은 덕을 쌓아야겠습니다. 인덕(人德) 말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밝은 미래를 위해

2021/07/07 14:37:52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밝은 미래를 위해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과거라고 하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래라고 합니다. 불교에 관한 책을 읽다가 하녀였던 푼니카라는 성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푼니카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머니도 아기 때 세상을 떠난 고아였으며 하녀로서 힘든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늘 비참하였기에 분노 가득한 표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죠. 어느 날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성냄의 원인이 과거나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푼니카는 변화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노력에 따라 화의 원인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 후 푼니카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였으며 많은 이의 존경을 받고, 깨달은 이가 됩니다. 현재가 변하면 과거도 변하고 미래도 변합니다. 나의 지금을 바꾸려 노력하면 과거의 어두움은 지금의 나를 만든 거친 씨앗이 됩니다. 물론 다가오는 미래는 나를 밝게 인도합니다. 과거를 순우리말로는 옛날이라고 합니다. 옛날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옛날은 상대적이어서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들도 “내가 옛날에 어렸을 때는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웃깁니다. 지금도 어린데 어릴 때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옛날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더 어렸을 때가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하루라도 전 날이면 옛날인 것도 맞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정확히 쓴 셈입니다. 미래라는 말은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앞날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날을 모른다는 말이 미래를 의미합니다. 우리말에서는 내일이라는 말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내일은 옛말을 살펴보면 ‘올제’ 정도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의 문헌인 계림유사라는 책에서 추정이 가능합니다. 우리말에서 때를 나타내는 말에는 ‘제, 적’이 주로 담깁니다. ‘어릴 적, 어릴 제’가 그렇습니다. 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날을 나타내는 말에는 ‘어제’와 ‘그제’가 있습니다. 지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는 ‘이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내일을 나타내는 말은 앞으로 올 때라는 의미에서 ‘올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한자어로 ‘내일’을 사용합니다. 전에는 ‘명일(明日)’이라는 말도 사용하였습니다. 명일이라는 말을 보면 긍정적인 생각이 보여서 좋습니다. 내일을 밝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내일이 되면 해가 뜬다는 생각에서 명일이라고 했을 겁니다. 새벽이 오고 어둠이 물러가면 해가 뜹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겁니다. 새 날이 내일인 셈입니다. 사실 ‘새’라는 말도 해와 관계가 있습니다. 밝다는 뜻입니다. 밝을 명(明)에도 해 일(日)이 들어 있습니다. 내일은 밝은 날입니다. 밝아야 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날입니다. 저는 저의 옛 제자를 부를 때 ‘밝은 미래’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자의 편지에서 따온 말이었지만, 희망을 담아서 ‘밝은 미래’라고 불렀더니 제자는 스스로의 미래를 밝게 보는 듯했습니다. 부르는 저의 마음도 좋았습니다. 미래는 바뀝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따라서, 현재의 내 모습에 따라서 앞날의 모습은 밝아집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앞으로의 내 상태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여 우울해하고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은 밝습니다. 내일도 밝습니다. 그게 진리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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