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인복(人福)이 있는 사람

2021/07/22 12:26:19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인복(人福)이 있는 사람 어떤 분을 만났는데 평생을 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말이 인복이 있어서 고마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인복이라. 인복은 사람 복이 있었다는 말로 나를 도와준 사람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인복이 있으면 좋은 겁니다. 저는 인복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행복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인복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사람을 만나서 행복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인복이 있으려면 인덕(人德)이 있어야 할 겁니다. 인복과 인덕은 상호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인복과 인덕은 같은 뜻으로 설명됩니다. 분명히 느낌이 다른 말인데도 같은 말로 설명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인복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겁니다. 인덕이 없는 사람에게 인복이 있을 리 없으니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덕이 있다는 증거도 될 겁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인덕을 베풀면 내게도 인복이 다가옵니다. 인덕은 주로 내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인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저 좋은 답만 들을지도 모릅니다. 인덕이 정말로 있어서 그런 대답을 듣는 것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대답을 하는 사람에게 괴로움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괴롭힌 것이니 나에게 인덕이 있었다고 볼 수 없겠네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인덕이 없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반면에 인복은 내가 다른 사람을 떠올리면 됩니다. 내가 인복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려면 내게 고마웠던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떠오르는가요? 나는 인복이 있는 사람인가요? 인복의 시작은 가족입니다. 내 부모를 다른 부모와 비교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죠. 나를 낳아준 부모가 안 고마운 사람이 있겠냐마는 실제로는 집안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만나지 않는 집안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인복의 시작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복이기 바랍니다. 복은 덕의 다른 말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좋은 벗은 인복의 핵심입니다. 여기에서 오해해서 안 되는 것은 벗은 어릴 때 만난 사람만 벗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평생 우리는 수많은 벗을 만납니다. 그래서 인복은 쌓여가는 겁니다. 인복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더욱 좋은 사람을 만나야 인복이 쌓입니다. 벗은 나이 차이와도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만나서 편한 사람도 인복입니다. 만나면 행복해지는 사람이 인복이기 때문입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만난 사람, 동네에서 만난 사람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인복이 있는 겁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내가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인복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인복이라 생각 못 하며 사는 순간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복이라는 말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괴로운 인간관계가 가득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봐도 인복은커녕 악연으로 보이는 사람이 잔뜩 있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내 가까이 있다는 게 더 괴롭기도 합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를 만나서 괴로운 사람도 있겠지요. 나를 만난 것이 행복인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더 많은 덕을 쌓아야겠습니다. 인덕(人德) 말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밝은 미래를 위해

2021/07/07 14:37:52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밝은 미래를 위해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과거라고 하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래라고 합니다. 불교에 관한 책을 읽다가 하녀였던 푼니카라는 성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푼니카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머니도 아기 때 세상을 떠난 고아였으며 하녀로서 힘든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늘 비참하였기에 분노 가득한 표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죠. 어느 날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성냄의 원인이 과거나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푼니카는 변화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노력에 따라 화의 원인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 후 푼니카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였으며 많은 이의 존경을 받고, 깨달은 이가 됩니다. 현재가 변하면 과거도 변하고 미래도 변합니다. 나의 지금을 바꾸려 노력하면 과거의 어두움은 지금의 나를 만든 거친 씨앗이 됩니다. 물론 다가오는 미래는 나를 밝게 인도합니다. 과거를 순우리말로는 옛날이라고 합니다. 옛날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옛날은 상대적이어서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들도 “내가 옛날에 어렸을 때는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웃깁니다. 지금도 어린데 어릴 때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옛날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더 어렸을 때가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하루라도 전 날이면 옛날인 것도 맞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정확히 쓴 셈입니다. 미래라는 말은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앞날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날을 모른다는 말이 미래를 의미합니다. 우리말에서는 내일이라는 말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내일은 옛말을 살펴보면 ‘올제’ 정도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의 문헌인 계림유사라는 책에서 추정이 가능합니다. 우리말에서 때를 나타내는 말에는 ‘제, 적’이 주로 담깁니다. ‘어릴 적, 어릴 제’가 그렇습니다. 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날을 나타내는 말에는 ‘어제’와 ‘그제’가 있습니다. 지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는 ‘이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내일을 나타내는 말은 앞으로 올 때라는 의미에서 ‘올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한자어로 ‘내일’을 사용합니다. 전에는 ‘명일(明日)’이라는 말도 사용하였습니다. 명일이라는 말을 보면 긍정적인 생각이 보여서 좋습니다. 내일을 밝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내일이 되면 해가 뜬다는 생각에서 명일이라고 했을 겁니다. 새벽이 오고 어둠이 물러가면 해가 뜹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겁니다. 새 날이 내일인 셈입니다. 사실 ‘새’라는 말도 해와 관계가 있습니다. 밝다는 뜻입니다. 밝을 명(明)에도 해 일(日)이 들어 있습니다. 내일은 밝은 날입니다. 밝아야 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날입니다. 저는 저의 옛 제자를 부를 때 ‘밝은 미래’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자의 편지에서 따온 말이었지만, 희망을 담아서 ‘밝은 미래’라고 불렀더니 제자는 스스로의 미래를 밝게 보는 듯했습니다. 부르는 저의 마음도 좋았습니다. 미래는 바뀝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따라서, 현재의 내 모습에 따라서 앞날의 모습은 밝아집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앞으로의 내 상태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여 우울해하고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은 밝습니다. 내일도 밝습니다. 그게 진리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몸살이 나다

2021/06/09 11:46:34

몸살이 나다 갑자기 몸살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궁금해졌습니다. 몸에 살이 붙어서 생긴 말이니 살의 의미만 알면 될 것 같았습니다. 전부터 저는 몸살은 몸에 살을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살을 맞는다는 말은 주로 무속 등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살을 맞아서 죽기도 하니 무서운 말이 아닐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몸살의 어원에 대해서 공부해 보면서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서 좀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몸에 살을 맞는다는 의미에서 몸살의 뜻을 우선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살을 맞는다고 할 때 살은 사전에서는 한자로 나옵니다. 살(煞)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죽인다는 뜻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흉신(凶神)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흉신은 흉물스러운 좋지 않는 귀신입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보면 살을 맞다와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찾아보았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관련된 관용어도 여러 가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이 끼다’나 ‘살이 붙다’라는 말은 사람이나 물건 따위를 해치는 불길한 기운이 들러붙는다는 의미입니다. ‘살이 뻗치다’나 ‘살이 서다’, ‘살이 오르다’라고도 표현합니다. ‘살이 가다’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도 공교롭게 해를 입다.’라는 뜻입니다. ‘살이 세다’는 말은 운수가 나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표준국어사전에서는 예로 ‘결혼한 남자마다 단명을 하니 참으로 살이 센 여자다.’를 들고 있을 정도로 무서운 말이기도 합니다. 사전에서 의미를 찾아보니 살을 맞았다는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몸살은 가볍게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심하게 앓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몸살을 앓았다고 표현할 때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죽을 만큼 아픈 경우도 있습니다. 몸살의 살이 살을 맞다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몸살, 감기 정도로 가볍게 치부할 수는 없는 증세라는 의미입니다. 코로나 사태의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의 끝은 백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직 완벽해 보이지는 않지만 백신말고는 다른 해결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에 따라, 지역에 따라, 연령에 따라 백신 접종의 속도도 차이가 납니다. 아무튼 모두 일상의 소중함으로 돌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저는 아직 접종 대상이 아니어서 좀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만,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맞아야겠다는 생각에 주변 병원에 잔여백신 예약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곧바로 연락이 와서 아내와 함께 백신을 맞게 되었습니다. 접종의 절차는 간단했습니다. 접종 후에 이상 증세가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 미리 준비한 약을 먹었습니다. 저는 접종 부위만 며칠 간 뻐근하였는데, 아내는 그야말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고열과 두통, 근육통으로 입맛까지 잃을 정도였습니다. 아내도 이틀 정도 고생을 하고 나니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몸에 잡균이 없으면 백신의 후유증이 심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의학적 정확성은 모르겠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제 친구 중 한 명은 백신을 맞고 아무 후유증이 없었다고 의사 선생님께 이야기했더니 후유증은 주로 젊은 사람에게 생긴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동안 우리가 알고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균이 몸속에 들어와 쌓여 있죠. 독감 주사를 자주 맞은 사람, 예방 주사를 많이 맞은 사람은 어쩌면 어떤 균이 들어와도 이겨낼지 모릅니다. 어릴 때 땅에 떨어진 것 같이 아무거나 먹고 힘들게 살았을수록 균에 저항력도 강할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몸이 안 좋은 사람이 오히려 백신에는 적응이 잘 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쪽이 좋은지 모르겠네요. 예방 주사는 사실 좀 아파야 정상이 아닐까 합니다. 예방이라는 게 아예 생기지 않는 게 아니라 약하게 경험하고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신을 맞고 몸살을 앓은 사람은 공통적으로 몸에 균이 들어왔음을 확실히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기도 합니다. 백신의 효과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오히려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제대로 맞은 것인지에 대해서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참 묘한 세상입니다. 백신 하나에도 이렇게 세상사가 다 담겨있습니다. 바이러스를 세상의 어려움이라고 생각해 보면 세상의 어려움을 겪어온 사람들의 아프지만 강인함을 알 수도 있습니다. 몸살을 앓고 나면, 고열에 오한을 겪고 나면 그만큼 자라납니다. 내 몸속에 있던 나약함도 치유할 겁니다. 몸살은 나를 죽이는 게 아니라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어머니

2021/05/14 10:53:29

어머니 우리나라만큼 어머니가 많은 나라가 있을까요? 우리는 자기의 어머니 말고도 어머니가 참 많습니다. 친척 중에도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할머니(한어머니가 변한 말)가 있습니다. 모든 언어에 이렇게 어머니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영어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에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일본어에서도 어머니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다른 언어도 다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외국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어머니를 제외하고 ‘어머니’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도 어머니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에서 친구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오면 외국 학생들은 무척 당황해 합니다. 같은 어머니의 자식이었는지 해석에 혼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부모와 상담을 하는 장면도 언어적으로는 복잡한 장면입니다. 학생의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외국인들의 혼동이 짐작이 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자주 가는 식당의 주인에게도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쯤 되면 ‘어머니’의 범위는 점점 미궁으로 빠지게 됩니다. 왜 이렇게 우리에게는 어머니가 많을까요? 아마 그 해답은 반대로 ‘우리 어머니’라는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외아들이어도 ‘우리 엄마’라고 부르는 것에서 이미 ‘어머니’는 나만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어머니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서일까요? 아닐 겁니다.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면, 친구의 어머니는 나를 자식처럼 여기게 됩니다. 물론 나도 어머님처럼 생각해야 하겠죠. 식당의 아주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면 마치 자기 자식에게 해 주듯이 음식을 차려주게 될 겁니다. 정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면 세상은 따뜻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나 철학에서 공통되는 원리는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생각하고, 남의 기쁨이 나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이 부처라는 생각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도, 사람과 하늘이 하나라는 생각도 모두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태도에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어휘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 엄마’고, ‘우리 집’이고, ‘우리 마을’이고, ‘우리나라’가 됩니다. ‘우리’라는 말은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별이 중요하지 않으면 모두 ‘우리 아들, 딸’이 되고, 모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자식’처럼 생각한다면, 지금처럼 메말라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르신들을 ‘부모님’처럼 생각한다면 노인 소외는 없어지겠죠. 물론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한 분이십니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죠. 하지만 우리 어머니도 내가 모든 어른들을 어머니처럼 생각하겠다는데 서운해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칭찬하시고 그리 살라고 어깨를 토닥이실 겁니다. 그게 우리나라에 어머니가 많은 이유입니다. 우리 민족이 넓은 의미에서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것도 다 이런 호칭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최선(最善)을 다한다는 말은?

2021/04/16 12:55:58

최선(最善)을 다한다는 말은? ‘이게 최선입니까?’라는 말이 드라마에 나오면서 유행한 적이 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칭찬하고 좋아한다. 얼마 전에 나는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인생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글을 보고 잠깐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그저 열심히 바쁘게 사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열심히 사는 것을 훌륭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아우렐리우스도 공적(公的)인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아름다운 일로 이야기하고 있다. 최선(最善)의 반대말은 최악(最惡)이다. 최선이라는 말은 가장 선한 것, 즉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가장 나쁜 것의 반대말이다. 우리는 최선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선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그저 열심히 한다는 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단순히 열심히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있는 힘껏 노력한다는 의미로만 보기에는 무언가 부족함이 있다. 최악을 다한다는 말은 없지만 이 표현을 생각해 보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가 떠오른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가장 선한 것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의미가 된다. 나쁜 일은 아예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일이다. 최선이라는 단어 속에 이미 선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사회적 이익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위한 일은 최선일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어릴 때 사회 시험이나 윤리 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우리는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할 때 단순히 모여서 사는 동물이라는 정도로 정의를 마무리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도 그 이상의 설명은 잘 없었던 듯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에서 큰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나보다는 사회를 위해서,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말이다. 단순히 모여 사는 것이 아름다운 가치일 수 없다. 내가 이 사회를 위해서 무언가 기여할 때 나도 사회적 동물이 된다. 최선은 내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자신이 최선을 다한다고 말하는 것들을 살펴보라. 그 일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 가치는 우선 목적이 선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공부를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우리는 연습을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하지만 왜 공부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선한 목적이 있는가? 단순히 다른 사람을 누르고 나 혼자만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라면 최선은 아니다. 무엇을 연습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최선이라는 가치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동안 최선이라는 말 속에 감추어진 내 모습을 돌아본다. 쉽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만 그게 나를 위한 것인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었다. 열심히 했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안하였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최선이라는 말 앞에서 핑계가 되었을까? 나는 최선을 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픈 상처를 주었을까? 최선이라는 가치 속에 담겨있는 착한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해 본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두 종류의 사람

2021/04/03 14:18:22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두 종류의 사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말은 사람을 구별할 때 유용한 잣대가 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숫자가 주어지면 그 수에 맞추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틀에 짜인 생각이라는 점에서는 답답해 보이기도 하나 생각을 정리하여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데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좋은 방법이니 필요할 때는 취해야겠지요. 연설문이나 논설문, 설명문에서도 이런 방법이 자주 쓰입니다. 주로 예를 들 때는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정반합(正反合)의 구조라고나 할까요? 왠지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느낌이 납니다. 분석 대상을 둘로 나누면 명확히 갈라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둘이 나눔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죠. 대표적으로 음양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음양의 조화라는 말을 보면 음과 양은 서로 다투는 게 아니라 함께 하여야 더 아름다운 일로 보입니다. 다름을 ‘다툼’으로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음양의 대표는 여자와 남자입니다. 남녀라고도 하죠. 밤과 낮도 음양을 상징합니다.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기준이 불명확하기도 합니다. 어른과 아이도 그런 예로 보입니다. 밤과 낮도 그럴 수 있겠습니다. 때로는 세상이 나누어지지 않음을 깨닫는 것도 분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말은 제가 일본어 공부를 할 때 나온 읽기 지문입니다. 외국어 공부는 언어뿐 아니라 삶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를 지문에서 만나게 되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외국어 공부의 좋은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좋은 지문이 필요하겠네요.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은 내용에 대해서도 늘 고민을 해야 합니다. 예전에 언어를 배우던 교재는 주로 고전이었습니다. 한자를 배우고 라틴어를 배웠는데 세상을 만나고 다시 태어나게 되었던 겁니다. 제가 읽은 일본어 지문에서는 여러 가지 사람의 분류가 나와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분류도 많았고, 정말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먹어도 살 안 찌는 사람과 먹기만 하면 살이 찌는 사람의 분류는 맞아 맞아 하며 웃음이 났습니다. 제가 참석하는 일본어 시간에는 지문을 읽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기에 저도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눈다면 어떤 예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눈다면 어떤 예들이 있을까요? 처음에는 재미있는 예들이 떠오르다가 문득 전에 썼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그 내용은 행복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에 관한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해 지고 싶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행복이 소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말은 지금 세상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가요?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닌가요?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렵지만 생각을 바꾸어야 행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두 종류의 사람은 세상에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자신이 행복한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이 세상이 좋은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은 모두 행복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 좋은 세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내 눈과 머리를 감싸고 있는 한 겹이 세상을 달리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겹을 걷어내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모든 종교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다르려고 하는 경지일 겁니다. 얼핏 불행처럼 보이는 수많은 일도 사실은 행복이 모습을 바꾸고 있는 한 부분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행복이 늘 즐거운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행복에는 아픔도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프지만 행복합니다. 세상에는 행복에 관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만 모두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프게 깨닫습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