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서점의 진화, 혹은 본 모습

2020/12/28 14:32:44

동네 서점이 하나둘씩 문을 닫으면서 인문학의 위기, 독서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고, 팔리는 책도 아이들의 참고서나 처세에 관한 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온라인 서점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서 서점에 가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또한 스마트폰을 비롯해서 재미난 매체들이 생기면서 서점의 쇠퇴를 부채질한 측면도 있습니다. 작은 서점들뿐 아니라 대형 서점도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미래학자들의 예상이 맞는구나 하며 우울해 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최근에는 새로 문을 여는 서점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헌책방도 오히려 새로 생겨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비밀은 서점의 변신, 진화에 있습니다. 이제 서점은 더 이상 책만을 파는 공간이 아닙니다. 대형 서점에 가면 한쪽에 차나 음식을 파는 경우가 있었고, 가끔 저자와의 대화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작은 동네서점으로 들어왔습니다. 책을 사기만 하는 서점이 아니라 문화 공간, 생활공간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서점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읽습니다. 도서관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겁니다. 책에 관해서 토론도 하고 작가도 만납니다. 좋아하는 작가를 직접 만나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예전에도 있기는 했지만 서점을 중심으로 독서 모임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서점에 잘 어울리는 일입니다. 책을 사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읽으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이 독서의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책방은 책을 팔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좋은 책을 권하고, 읽은 책의 느낌을 나누는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러한 모습이 원래 서점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서점에서 차를 파는 곳도 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시는 분 중에는 차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직접 담은 전통차를 내놓기도 하고, 바리스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커피를 내 놓기도 합니다. 집에 온 손님에게 차를 내 놓듯이 말입니다. 향 깊은 커피를 마시면서 좋은 사람과 좋은 음악도 듣는 서점의 모습은 행복 자체입니다. 북 카페의 반대개념이라고 할까요? 카페에 책을 장식한 것이 아니라 서점에서 여유 있게 차를 마시는 거죠. 서점에서는 때로 작은 음악회도 열립니다. 좋아하는 음악가를 가까운 곳에서 만나는 일은 설레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물론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도 행복한 기쁨이지요. 작은 공연장이 수없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몇 십 명이 모인 자리이지만 노래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정성이 가득합니다. 연주자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노래하는 이의 숨소리도 놓칠 수 없습니다. 청중의 표정은 음악가에게 새로운 힘으로 다가옵니다. 때론 서점에서 무언가를 배우기도 합니다. 책과 관련된 인문학은 물론이요, 악기도 배우고 미술도 배웁니다. 도자기나 글씨 쓰기를 배우기도 하고, 뜨개를 배우기도 합니다. 책이 있는 곳이니 인문학의 향기가 있는 것은 당연할 수 있겠습니다. 말로만 듣던 고전을 이야기하고, 역사를 읽고, 경전을 읽습니다. 선조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책 속에서, 강연 속에서 살아납니다. 무엇을 배우는 일만큼 사람을 살아있게 만드는 일은 없는 듯합니다. 가능하다면 끊임없이 궁금해 하고,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학이시습(學而時習)’이 바로 배우고 직접 해 보는 삶을 의미합니다. 기쁜 일이지요. 이제 우리의 서점은 따뜻하고 살아있습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괜찮다, 일없다

2020/12/10 13:18:33

사소한 실수부터 깊은 절망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는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울(憂鬱)은 이미 감정이 아니라 병이 되었습니다. 절망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병이 되기도 합니다. 현대인에게 어떤 질병보다 힘들고 답답한 것이 우울입니다. 한자만 봐도 걱정[憂]이 빽빽하게[鬱] 들어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 필요할 때입니다. 이때 들려주는 괜찮다는 말, 일없다는 말은 힘든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남한 말과 북한 말의 차이를 말할 때 ‘괜찮다’와 ‘일없다’를 예로 들기도 합니다. 남한이나 북한에서만 쓰는 말이 아닌데도 왠지 남북의 언어 차이 같은 느낌도 드는 표현입니다. 두 표현이 같은 뜻은 아니어서 사용에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안심을 시키는 장면에서 쓰일 때가 많아서인지 왠지 친근한 느낌입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가에 따라 느낌도 무척 달라집니다. 둘 다 거절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긴 거절에도 예의가 필요하고 안심이 필요합니다. 저는 괜찮다는 말을 떠올리면 토닥이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울먹이고 있는 아이에게 괜찮다는 말만큼 큰 위로가 없습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일없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등의 표현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괜찮다’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라집니다. 괜찮다는 말은 괜히 하지 않는다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따라서 ‘괜히’의 어원을 찾는 게 실마리가 됩니다. 괜히는 ‘공연히’가 줄어든 말입니다. 괜히 하지 않는다는 말은 공연히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즘 ‘공연히’라는 말의 사용이 점점 줄어들어서인지 ‘괜히’와 ‘공연히’의 연관성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합니다. 괜찮다는 말은 공연히 하지 않아도 된다, 까닭 없이, 일부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괜찮다의 어원을 관계하다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만 관계하다가 괜히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하는 게 어렵습니다. 의미상 비슷하다고 해서 어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관계하지 않는다고 해석을 하는 경우에는 괜찮다의 의미를 나와는 상관없다는 뜻으로 생각해 버리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위로의 뜻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괜히를 공연히의 의미로 해석하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공연히 하지 않는 게 왜 위로의 의미가 될까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걱정을 만납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 것을 참기 어렵습니다. 자꾸 눈물이 나고 감정이 복받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괜히 더 슬프고 힘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옆에 와서 가만히 와서 공연히 그 생각에 빠져 있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일없다’에서 일은 의미가 중립적입니다. 특별히 나쁘거나 좋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말에서는 ‘무슨 일 있어요? 별일 아니야.’와 같은 표현에서는 문제 상황을 의미하게 됩니다. 좋은 일도 많을 텐데 괜히 일이라고 하면 덜컥 겁이 납니다. 큰일은 주로 좋은 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큰일 났어요.’와 같은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하죠. 무슨 일이 있을까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럴 때 들려주는 말이 ‘일없다’입니다. 일이 없다는 말은 걱정할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괜찮다는 말과 일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세상을 살면서 큰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에게 닥쳐오는 일이 별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해도 괜히 절망하지 말고 힘을 내세요. 더 좋아질 겁니다. 위로의 말이 지치고 힘든 우리의 어깨를 토닥여 줍니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 일없어. 힘 내.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면 상대가 걱정할까봐 “나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순간입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사랑을 말하다

2020/11/26 11:37:55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노래 가사 속에도 무수히 들어 있고, 정의도 많은 이들에 의해 내려졌으나 사랑은 빈 마음의 공간처럼 때에 따라, 곳에 따라, 내 마음에 따라 달리 뜻이 새겨집니다. 사랑의 종류를 나열하면서 육체적, 정신적 사랑을 나누기도 하나 사랑은 근본적으로 그리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움이 먼저고, 몸은 따라오는 것이죠. 그렇다고 마음 사랑만 중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민요에도 사랑이야기는 정말 많습니다. 창부(倡夫)타령에 보면 ‘사랑 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 게 무엇이더냐, 보일 듯이 아니 보이고, 잡힐 듯하다 놓쳤으니. 나 혼자서 고민하는 게 그것이 사랑의 근본이냐.’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사랑은 안타깝고, 그리운 것이고, 혼자서 앓는 마음입니다. 안 만나고 있을 때는 보고 싶고, 만나고 있을 때는 헤어질까 두려워하는 왠지 바보스러운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아프지만 아름답고, 슬프지만 기쁘기도 한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어원은 좀 복잡합니다. 우리말의 어원을 설명할 때 한자가 끼면 길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사랑이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어원을 한자어 사량(思量)에서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은 옛말에서 생각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한자어 사량의 뜻이 깊이 생각한다는 의미여서 서로 통한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말을 잇는 명확한 증거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발음이나 모양이 ‘사람’과 닮아있음은 금방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이 사람임을 떠올리면 사랑의 어원을 사람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역시 명확한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살다, 삶, 사람, 사랑’을 같은 어원으로 보고 설명하려는 학자도 많습니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데 사랑이 필요하니 이러한 설명을 하려는 것이죠. 정답의 여부와 관계없이 아름다운 해석입니다. 저는 사랑의 어원을 이야기할 때 한 쪽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은 피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없다는 말도 맞겠습니다. 다만 사랑이라는 말이 원래 ‘생각하다’라는 의미였음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이 점을 잘 기억했으면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생각하는 것의 의미도 여러 가지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보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사랑하는 사람도 많은 겁니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으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많다는 의미입니다.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위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우리 생각은 안 해요?’라는 말에서는 우리를 위하지 않느냐는 말, 배려하지 않느냐는 말이 됩니다. 누구 생각을 하고 산다는 말은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말,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생각하는 겁니다. 사랑은 그래서 기도이기도 합니다. 두 손을 모으면 그대로 눈앞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루하루가 힘들다는 느낌이 드는 세상입니다. 살기가 힘들수록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웃고, 우는 사람이 참 고맙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내 생각으로 웃을 수 있기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기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나부터 웃어야겠네요. 내가 슬픈데 그가 기쁘기는 어려울 겁니다. 내가 건강하고 밝아야 할 이유가 사랑에도 있습니다. 사랑은 따뜻한 그리움이고 함께 하는 행복입니다. ‘창문을 닫아도 스며드는 달빛, 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이라는 노랫말이 창부타령에 나옵니다. 사랑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 바랍니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고, 가만히 안아주고, 사랑의 이야기를 건네면서.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죄를 짓다, 복을 짓다

2020/11/11 17:37:14

<죄와 벌>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죄’라고 하면 금방 떠오르는 연관어는 ‘벌’인 듯하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을 범죄라고 한다. 죄는 ‘저지르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저지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는 의미다. 범하다나 저지르다는 모두 매우 부정적인 느낌이 강한 단어이다. 한편 죄를 짓는다는 말도 하는데 ‘짓다’에는 가치중립적인 느낌이 있다. 짓다는 만든다는 의미인데 없는 것을 만들기도 하고, 있는 것을 더 좋게 만들기도 한다. 짓다가 들어가는 말을 보면 미소를 짓고, 웃음을 짓고, 눈물을 짓고 한숨을 짓는다.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행위의 느낌이 난다. 짓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것은 집과 밥과 옷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에 짓는다는 표현을 썼다. 그 중에서도 집은 짓는 것에 대명사이다. 집의 어원도 짓다와 관련이 된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지붕은 집과 어원이 관련되는 어휘이다. 여담이지만 예전에는 ‘블럭’ 장난감을 ‘집짓기’라고 했다. 집짓기 장난감으로 집만 짓는 것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짓는 것의 기본은 집이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짓는 것 중에서 제일 안 좋은 것은 아마도 죄를 짓는 게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나는 죄를 짓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아픔이 느껴진다. 죄를 범하는 것이나 저지르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 든다. 죄를 지었다는 말이나 죄를 짓는 느낌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라. 심각한 죄뿐 아니라 밝혀지지 않은 작은 잘못까지도 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즉 법적인 문제만 죄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죄에는 벌이 따른다. 그래서 우리말 표현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라는 표현도 생겼다.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이런 표현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벌을 받는 방법도 다양하다. 주리를 틀고 육시를 하는 무시무시한 방법도 있겠지만 죄를 씻는 데는 다른 방법도 있다. 한국어에는 이럴 때 쓸 수 있는 표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을 짓다’이다. 물론 복을 짓는 행위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살아가는 일이 모두 복을 짓는 일이어야 하고, 그래야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죄를 지었다면, 죄를 짓는 느낌이 든다면 더 열심히 복을 지어야 한다. 보통 우리는 복은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열심히 빌면 복이 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많이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복을 받는 것뿐 아니라 짓는 것으로도 보았다. 적극적으로 복을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복을 짓는 것은 나를 위하는 일들이 기본적으로는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약한 이에게, 가여운 이에게, 가난한 이에게 잘해야 한다. 그게 복을 짓는 일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많은 죄를 짓고 산다. 나는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았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죄가 된다. 세상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다. 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도 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내 행복을 바라볼 때 죄스런 느낌이 든다. 이럴 때일수록 복을 지어야 한다. 나도 모르는 내 죄를 위해서도 그렇고,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위해서도 그렇다. 죄가 많을수록 더 많은 복을 지어야 한다. 죄를 짓는 것에 반대는 벌을 받는 게 아니라 복을 짓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복을 많이 지어야겠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가을가을하다

2020/10/28 14:05:24

‘가을가을하다’라는 말은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가을하다’라는 말은 사전에 있는데 ‘벼나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다.’라는 뜻입니다. 가을이 추수를 하는 계절이니 알맞게 만든 말로 보입니다. 느낌이 참 좋은 말입니다. 내친김에 봄, 여름, 겨울도 찾아보았습니다. 뒤에 하다가 붙어서 단어를 이루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가을이라고 하면 추수가 생각나는 데 비해서 다른 계절은 금방 떠오르는 느낌이 없어서였을까요? 우리말에서 여름이라는 단어는 원래 농사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옛말에 ‘녀름’이라는 말이 여름(夏)의 뜻이었는데, ‘녀름 짓다’는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여름을 잘 만드는 것이 농사이고 가을을 하는 것이 추수라는 생각이 드니 계절의 느낌이 더 잘 다가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봄은 씨를 뿌리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고, 겨울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봄과 겨울에도 그에 맞는 단어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말에도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이미 녀름 짓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말은 태어나서 사라지기도 합니다. 어떤 말은 잘 사용하지 않기도 하고, 잘못 쓰이기도 합니다. 늙기도 하고, 병이 들기도 한다는 의미겠죠. 어떤 사람은 잘 쓰이지 않는 말을 찾아 써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잘못 쓰는 말에 대해 개탄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그게 말의 숙명이요, 생애이기도 합니다. 한편 말이 새로 생겨나는 것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말을 함부로 만들어 낸다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말에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잘못된 표현이나 새로운 표현이 사고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말은 늘 새로 생겨납니다.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막을 수 없다면 이왕이면 좋은 표현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 봅니다. 우리말에서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만들어진 단어를 첩어(疊語)라고 합니다. 첩어는 기본적으로 반복을 의미하기에 여러 개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대표적으로 ‘집집마다’와 같은 표현이 있을 겁니다. 다음으로는 반복적인 행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의태어가 대표적인데 엉금엉금, 살금살금, 아장아장 등은 모두 반복적인 느낌을 보여줍니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떼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우리말에는 첩어가 무척이나 발달하였습니다. 리듬감을 살리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이 반복되면 강조의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보다는 여러 번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 느낌을 더 잘 나타낸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야들야들’의 느낌은 어떤가요? 특히 부사의 경우에는 반복을 하면 강조가 됩니다. ‘더욱’과 ‘더 더욱’의 느낌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반복을 하면 느낌이 더 선명해집니다. 최근에 새로 생기는 말에 이런 첩어가 많아서 재미있습니다. 말장난처럼 보이는데, 사람들이 즐거워합니다. 하긴 장난은 즐거운 것이죠. 이왕이면 장난 때문에 다치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장난도 때로 상처가 되니 즐거운 말장난을 기대해 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표현도 사전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가을가을하다’라는 말도 사전에는 없는 말이지만 쓰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가을의 느낌이 물씬 날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가을이 두 번 쓰이니 가을 느낌이 무르익습니다. 노란 은행잎, 붉은 단풍, 가을 색을 담은 벚나무 이파리가 가을빛을 담고 있습니다. 푸르고 맑은 하늘빛도 떠오르네요. ‘하늘하늘’이라는 단어는 하늘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도 왠지 하늘의 느낌이 나서 좋습니다. 요즘 날씨가 그렇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여러 가지로 힘든 봄, 여름을 지나고 이 계절도 무척이나 힘겹게 지내고 있습니다만, 가을을 느껴 보시고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요즘 날씨가 참 가을가을하네요. :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어울리는 사람의 어울림

2020/10/04 12:49:44

‘어울리다’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하나는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같이 지낸다는 뜻이다. 참 절묘한 조합이다. 그러고 보면 어울리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 어울린다는 말은 나와 똑같다는 뜻이 아니다. 나랑 모든 게 같으면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나와는 다르지만 나를 밀어내지 않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나와 어울리는 사람이다. 어울리는 것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나에게 어울리는 장식품이 있고, 나에게 어울리는 옷이 있다. 반지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목걸이나 귀고리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화장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맨 얼굴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있다. 치마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바지가 어울리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어울린다는 말은 종종 나답다는 의미가 된다. 내게 어울리게 꾸며야 한다. 내게 어울리지 않으면 그저 붕 떠있는 장식일 뿐이다. 유행을 숨 가쁘게 따라가다 보면 나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나에게는 뭐가 어울리는가? 내게 어울리는 말도 있고 행동도 있다. 어떤 사람은 말을 잘하니 말을 해야 하고, 어떤 이는 생각이 깊으니 사색에 잠겨야 한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은 노래를 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 남이 잘 하는 것을 나도 잘 해야 하는 것이 아닌데, 괜히 주눅이 들고 자책을 한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찾아야 한다. 공부를 잘 하고, 시험문제를 잘 푸는 게 능력이어서는 안 된다. 공부는 방편이다. 평생 동안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그것만큼 큰 행복이 없다. 일이 좋아야 한다. 일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서로 다른 사람일수록, 서로 다른 문화일수록 어울리는 점이 많다. 한국인 끼리보다는 다른 나라 사람과 만나면 재밌는 점이 많다. 다르니까 느낄 수 있는 재미다. 외국어는 생존을 위해서도 배우지만 재미를 위해서도 배운다. 내가 그 사람의 말을 하면 그 사람은 반가워한다. 내가 다른 말 속에 담긴 문화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내 그릇도 커지고 더 많은 문화를 담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 어울리려면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 소 닭 보듯이 해서는 어울릴 수 없다. ‘어울리다’라는 말을 친구 사이에 가장 많이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나는 것과 어울리는 것은 다르다. 어울림에는 기본적으로 즐거움이 있다. 보통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어울린다. 같이 음악을 듣고, 춤을 춘다. 같이 음식을 먹고, 술도 마신다. 그런데 자칫하면 이런 것이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다. 자기 음악만이 좋다고 하거나, 자기의 춤이 더 낫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만남은 다툼이 된다. ‘다투다’라는 말은 경쟁에서 왔다. ‘일 이등을 다툰다.’는 말을 생각해 보라. 그 정도면 충분한데도 자꾸 1등을 하려 한다. 당연히 서로 돕는 일은 없다. 음식도 잘 못 먹으면 안 되고, 술도 잘못 마시면 안 된다. 비싼 음식이 좋은 게 아니고 비싼 술이 좋은 게 아니다. 자꾸 좋은 음식 타령을 한다. 술과 음식은 좋은 사람과 먹어야 더 맛있다. 술마다 어울리는 안주가 있고, 음식마다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 있다. 먹는 거야말로 어울림이 생명이다. 지난주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한, 유럽 세종학당 워크숍이 있었다. 나는 특별강연자로 참가하게 되었다. 한국어 교육의 열기,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워크숍이 끝난 후 한국과 유럽의 문화 교류 축제가 있었다. 모든 순서가 감동적이었지만 특히 우리의 악기인 가야금, 대금, 해금과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만들어낸 어울림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연주가 끝난 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서로의 느낌이 잘 어울리는 연주였다. 진정한 어울림은 따뜻하다. 행복하다. (*본 칼럼 내용은 지난 2016년에 개재되었던 내용임을 밝힙니다 : 편집자주) :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