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힘을 빼다

2020/08/05 10:11:57

‘힘’이라는 말은 정의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힘이 세다, 힘이 들다, 힘을 내다, 힘을 주다, 힘이 빠지다 등 함께 쓰이는 표현도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힘은 참 중요한 어휘입니다.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이루고 싶은 일도 있고, 말 한마디에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살기가 힘들다는 말을 들으면 안쓰럽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힘이 들어가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 힘이 빠져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몸에 힘을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이 들어가야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힘이 생겨나야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밥도 먹습니다. ‘밥심’이라는 말은 ‘밥힘’이라는 뜻입니다. 먹어야 힘을 내고,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주먹을 쥐는 것도 다른 말로 하면 몸에 힘을 주는 것입니다. 가슴에 힘을 주고, 어깨에 힘을 줍니다. 힘을 주는 게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목에 힘을 주고 다닌다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거만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힘은 필요할 때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늘 힘을 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뜻밖에도 살아가면서 힘을 빼야 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생활의 현장에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힘을 빼라는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힘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상하지요. 힘을 빼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언제 힘을 빼라는 소리를 듣게 되나요? 언제 힘을 주고, 언제 힘을 빼야 할까요? 저는 미용실에서 머리 감을 때 목에 힘을 빼라는 이야기를 들은 게 생각이 납니다. 미용사가 머리를 감아줄 때 목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제대로 감기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편하게 누워서 힘을 빼라는 말을 듣지만 막상 목에 힘을 빼는 게 쉽지 않습니다. 목에 힘을 주고 사는 버릇은 되어 있는데 목에 힘을 빼는 버릇은 없었나 봅니다. 몇 번의 시도 끝에야 겨우 목에 힘을 빼게 됩니다. 주사를 맞을 때도 힘을 빼라고 하지만 오히려 긴장해서 힘을 더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힘을 빼라는 말이 우리를 긴장시키는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운동을 배울 때도 힘을 빼라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특히 수영을 배울 때 제일 자주 들은 소리가 힘을 빼라는 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힘을 주면 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야기를 들어도 처음에는 힘을 뺄 수도 없습니다. 힘을 빼면 더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물론 힘을 빼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겁니다. 힘을 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에 새삼 놀랍니다. 우리는 보통 때 힘을 주고 있지 않고 있음을 새삼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힘을 빼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힘을 주는 겁니다. 힘을 주지 않고 힘을 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무엇을 배우거나 세상을 살아갈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힘껏 살지 않고서 힘을 뺄 수는 없습니다. 힘이 드는 것은 힘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어야 힘을 뺄 수가 있습니다. 집착을 없애려면 집착이 있었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요즘 저는 장구를 배우고 있습니다. 장구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은 일단 세게 치라고 합니다. 세게 칠 줄 알아야 나중에 힘을 빼고 칠 수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세게 쳐서 제대로 소리를 낸 후 점차 힘을 빼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장구와 함께 민요도 배우고 있는데, 민요도 마찬가지입니다. 큰소리로 부를 수 있어야 낮고 깊은 소리도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목청을 틔우고 나서야 세밀한 소리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겁니다. 세상을 사는 것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힘든 삶일수록 더 스스로에게 힘을 주었으면 합니다. 특히 어깨에 힘을 주었으면 합니다.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은 자신감을 의미합니다. 목에 힘을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힘이 들더라도 앞을 향해 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자신감을 갖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나서 서서히 힘을 빼는 겁니다. 힘을 빼고 옆을 봐야 합니다. 힘을 빼고 나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일 겁니다. 늘 힘만 주고 살고 있다면, 반대로 늘 힘이 빠져 살고 있다면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 힘을 주고 빼면 힘만 들어갑니다. 그야말로 힘든 겁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조현용입니다

2020/07/22 13:40:04

자기를 남에게 소개할 때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인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은 특별한 고민 없이 자기 이름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조현용입니다.’라고 하거나 ‘제 이름은 조현용입니다.’라고 소개하면 됩니다. 나보다 어른에게 소개를 할 때는 성을 빼고 이름만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전화를 걸 때 ‘선생님, 현용입니다.’라고 표현하는 게 예의를 갖춘 표현입니다. 자기를 남에게 소개할 때 고민이 되는 장면은 지위가 붙어 있는 경우일 겁니다. 자신이 높은 사람이면 이름 뒤에 지위를 붙여서 소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아무개 국장입니다.’라든가 ‘저는 무슨 회사에 아무개 사장입니다.’라고 소개하는 모습입니다. 어떤가요? 자연스러운 느낌인가요? 좀 어색하지는 않은가요? 이런 장면은 수도 없이 나타납니다. 학생들 앞에서 자신을 아무개 교수라고 소개하거나, 아무개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는 예도 자주 보입니다. 대학에서는 자신을 아무개 학장이나 아무개 처장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교수끼리 서로 소개하는 자리에서도 자신을 무슨 과의 아무개 교수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무척 어색하게 들리는데, 사람들은 하도 들어서인지 덤덤하거나 오히려 이러한 표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은 전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틀렸다는 것을 알고도 그렇게 소개한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겠죠. 단순하게 설명을 하자면 지위는 그 사람을 높여서 부를 때 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보통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소개를 해 줄 때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강연을 해 주실 분은 아무개 학장님이십니다.’와 같은 표현을 쓰는 거죠. 마찬가지로 아무개 교수, 아무개 사장, 아무개 실장 등의 표현도 당연히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올 때 존경의 표현이 됩니다. 자신이 자신을 존경하는 모양새가 되면 어색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소개할 때는 이름 뒤에 지위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럼 자신의 지위를 꼭 표시해야 할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경우에는 ‘무슨 대학에 학장으로 있는 아무개입니다.’라고 표현을 하거나 ‘무슨 회사의 대표 아무개입니다.’라고 표현하면 됩니다. 이름을 소개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면 그냥 ‘무슨 부서의 무슨 과장입니다.’라고 표현하면 됩니다. 저와 같은 경우라면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 원장입니다.’,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 원장으로 있는 조현용입니다.’, ‘국제교육원 원장 조현용입니다.’와 같은 표현이 가능하겠지요. 물론 제가 원장인 것을 알지 않아도 되는 사람 앞에서는 굳이 원장이라는 표현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냥 ‘경희대학교 교수 조현용입니다.’라고 표현하면 충분합니다. 한편 우리말에서는 직업명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하는 일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농부라는 말보다는 농사를 짓는다는 말을 선호하죠. 그런 의미에서 교수라는 말보다는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좋겠습니다. 제가 저를 소개할 때 제일 많이 쓰는 표현은 ‘경희대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조현용입니다.’ 또는 ‘한국어 어휘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는 조현용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소개라는 생각입니다. 자기소개도 문화이고 예의입니다. 어떻게 소개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보여주기도 하고, 수준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언젠가는 이런 소개 방식도 달라질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는 태도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소개가 세상을 만나는 첫 방법이니까요.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쌍기역 이야기

2020/07/08 14:26:13

쌍기역은 이름에서도 논란이 있습니다. 기역을 겹쳐 놓은 것이기에 ‘쌍’이라는 말을 붙였겠지만 쌍(雙)은 한자어입니다. 굳이 우리말 자음의 이름을 만드는데 한자를 쓰는 게 좋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북한에서는 ‘된기역’이라는 말을 씁니다. 된소리로 나니까 된기역인 셈입니다. 이름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남북의 지혜를 모아야 할 겁니다. 쌍기역은 기업 등에서 특강의 재료로도 많이 쓰입니다. 쌍기역으로 시작하는 어휘가 성공에 필요한 조건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끼, 깡, 꾼, 꾀, 끈, 꿈, 꼴’ 등의 어휘를 제시하고, 그에 맞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쌍기역이라는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 무리를 한 느낌도 듭니다만, 그 덕분에 쌍기역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쉽게 기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앞에 제시한 7개의 어휘가 성공의 조건으로 여겨지나요? <성공한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과 같은 책에서 영향을 받아서인지 7을 강조합니다만, 숫자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7가지 성공의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어휘를 담은 느낌도 있습니다. 저에게도 성공을 위한 쌍기역을 고르라면 우선 ‘꿈’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꿈꾸지 않으면 내 것이 되기 어렵습니다. 힘들수록 꿈을 꾸어야 합니다. ‘끼’는 타고 난 것처럼 말하지만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숫기가 없던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활발하게 일하는 것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끼는 원래 기운의 의미입니다. ‘기(氣)’를 강하게 발음한 것입니다. 없는 끼를 굳이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바꾸고 싶다면 조금 더 한 발짝 더 앞으로 움직여 보기 바랍니다. 기를 모으면 끼가 됩니다. ‘꾀’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꾀를 부리는 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지만 꾀가 있는 것은 좋은 겁니다. 꾀를 부리는 것은 다른 이를 힘들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기 일을 미루는 것이니까요. 반면에 꾀를 내는 것은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하는 일입니다. 좋은 생각이 나에게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은 꾀입니다. 그러고 보니 꾀 중에서는 안 좋은 것도 많네요. 대표적으로 ‘꾀병’을 들 수 있습니다. ‘잔꾀’도 자기를 망가뜨리는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면 자신을 해치는 일입니다. 그 밖에도 용기를 내라는 ‘깡’, 좋은 모습을 만들라는 ‘꼴’, 좋은 사람을 널리 만나라는 ‘끈’ 등은 잘 정리해 보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종종은 이렇게 숫자로 정해진 어휘의 틀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쌍기역이 아니라 기역도 니은도 다 가능할 겁니다. 같은 자음으로 시작하는 어휘를 골라보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의와 의미를 부여해 보세요. 한편 쌍기역 발음은 ‘꽉’ 막혀있는 느낌입니다. 꽉 막혔다가 터지는 음인데, 이 발음이 없는 언어가 많습니다. 일본인이 제일 어려워하는 발음 중 하나가 바로 된소리입니다. 서양언어에서도 된소리의 발음은 쉽지 않습니다. 혀끝에 힘을 주어 막는 음이기에 강조의 느낌이 있습니다. ‘꼭’이라는 단어나 앞에서 언급한 ‘꽉’의 느낌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손을 꼭 쥐고, 꽉 잡은 느낌입니다. ‘깎아내고, 꺾고, 끌어낸’ 느낌이 있습니다. ‘끝’이라는 말의 느낌은 어떤가요? 쌍기역, 된소리 기역은 막힌 느낌도 있지만, 막힌 것을 뚫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래야 끼도 생기고, 꾀도 나오고, 꿈도 생기지 않을까요? 끝이 마지막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끝까지 꿈을 깨뜨리지 말고, 꼭 이루기 바랍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되풀이의 미학

2020/06/23 20:55:31

‘되’가 접두사로 쓰일 때는 다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원적으로는 ‘돌다’와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다시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되감다’라든가, ‘되돌아가다’ 등에서 다시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되-’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나 공간을 떠올려 봅니다. 언제 어디로 다시 가고 싶은가요? 돌아가는 것이 한번이 아니고 계속 반복이 되면 우리는 ‘되풀이’라고 합니다. ‘되풀다’는 다시 푼다는 의미입니다. 묶인 것을 다시 푼다는 의미로 사전에도 설명이 나옵니다. 무엇을 다시 푼다는 의미일까요? 저는 되풀이의 힌트를 어릴 적 기억에서 찾았습니다. 기억이랄까, 추억이랄까 아련하면서 애틋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되풀이라는 단어와 다시 푸는 장면을 보면 말입니다. 제 기억 속에 다시 푸는 장면은 털실로 짠 옷을 푸는 엄마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재활용이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진정한 재활용은 털실로 짠 옷을 풀어서 새로 옷을 짜는 일이었을 겁니다. 때로는 언니의 옷을 풀어 동생의 옷을 짜기도 합니다. 전과는 다른 모양으로 짜기도 하고, 새로운 실을 섞어 전혀 다른 색으로 조화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스웨터가 목도리가 되기도 하고, 장갑이 되기도 합니다. 털실의 온기는 좀 식었을지 모르지만, 사랑의 온기는 가시지 않습니다. 겨울밤 일을 마친 엄마는 자연스레 일감을 갖고 앉으시고 늦은 시간까지 일은 되풀이됩니다.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담장을 넘고, 엄마도 덩달아 크게 웃으십니다. 어쩌면 다시 풀어놓은 실은 우리 식구의 웃음소리와 함께 짜서 더 따뜻했을 겁니다. 살림에 여유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되풀이한 것이겠지만, 사람마다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추억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아내가 뜨개질을 하는 모습을 보면 제 추억도 되풀이 됩니다. 시간은 세월이 되어 지나가고, 어떤 물건을 가지고 되풀이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물건이 아니어도 되풀이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되풀이하고 싶은 게 무언가요? 반복해도 지겹지 않고, 오히려 그리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되풀이했을 때 도리어 기분이 좋아지는 건 무언가요?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의외로 많을 겁니다. 제일 많이 나올 만한 답은 노래가 아닐까 합니다. 예전에 듣던 노래는 되풀이해도 지겹지가 않습니다. 가사도 다 기억나고, 때로는 그 노래를 듣던 카페도 기억이 납니다. 함께 듣던 사람이 떠오르기도 하죠. 음악은 되풀이해서 들을수록 추억이 되살아납니다. 다시 보고 싶은 그림이나 사진, 그리고 풍경도 있을 겁니다. 가족과 함께 찍은 영상은 가끔씩 다시 보면 그리움이 됩니다. 다시 가고 싶은 곳, 그 때 보았던 풍경은 영상보다 더 짙게 마음에 남습니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나 드라마는 있는가요? 여러 번 본 영화가 있는가요? 배우를 좋아하면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는 언어 공부 때문에 여러 번 본 영화가 있는데 오랜만에 보면 언어를 배우던 시절의 추억도 함께 떠오릅니다. ‘러브 스토리’가 저에게는 되풀이해서 보는 영화입니다. 대사가 아주 훌륭한 영화입니다. 수없이 반복하여 보고 들었고, 그 때는 대사를 많이 외우기도 했는데 이제는 아련한 추억입니다. 가끔 해외에 나갈 때 비행기 영화 목록에 러브스토리가 있으면 무조건 봅니다. 다시 보고 싶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예능 프로그램도 우울할 때, 적적할 때 기운 나게 하는 되풀이입니다. 다시 보고 싶은 책도 좋습니다. 여러 번 본 책은 어떤 게 있나요? 저는 제게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의 강의를 옮겨놓은 책을 좋아합니다. 여러 번 읽고 또 읽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쓴 책이라면 언제나 되풀이해서 읽어도 기쁩니다. 여러 번 되풀이하면 안 보이던 곳이 보이고,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보고 싶은, 아니 언제나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털실을 풀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되풀이가 늘 그립고 고맙습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2020/06/15 17:28:39

이미 많은 사람이 언급하고 있지만 세상을 휩쓴 전염병이나 전쟁 등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전염병은 문화를 바꾸기도 하고, 사람의 이동을 촉진하기도 합니다. 놀라운 의학의 발전을 이루기도 하겠죠. 어떤 결과는 힘든 시간이 가져다준 축복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결과는 우리들 마음에 씁쓸함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놓았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바꾼 혁명도 우리를 급격히 바꾸어 놓습니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은 인류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고방식이나 세계관이 변했음도 물론입니다. 수렵 채취의 시대에서 농업 목축의 시대로 바뀌었을 때 놀라움은 상상 이상이었을 겁니다. 긴 시간을 지나며 천천히 이루어진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던 농경사회가 산업혁명을 맞이했을 때는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일이었을 겁니다. 수천 년간 그다지 변하지 않았던 문화가 짧은 시간에 변화합니다. 기차와 자동차, 비행기를 본 농경사회 사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비행기를 처음 봤을 때 놀라움과 두려움은 어땠을까요? 비행기를 처음 본 게 폭탄을 투하하는 모습이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폭탄 실은 공포의 비행체는 말할 수 없는 악몽입니다. 혁명도 놀라움과 두려움, 씁쓸함의 결과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구분할 때 문자를 주요한 기준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전환은 많은 사고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문자의 사용도 혁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자 문화로 바뀌는 시기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시기와 겹치는 측면이 있습니다.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별이 이루어지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자의 사용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의외로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문자는 분별의 문화와도 관련이 됩니다. 더 작게 나누는 느낌이고, 서로 믿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한자를 만들었다고 하는 창힐도 문자가 생기면 서로 믿지 못할 것이라 걱정합니다. 이집트 문자를 만들 때도 인간의 문자로 인해 게을러질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문자는 확실한 증거로 작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온갖 사기의 원인이 됩니다. 법이 자세하면 할수록 빠져나가는 사람도 늘어납니다. 법률에 안 나오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 되는 겁니다. 문자사회로 바뀌는 과정이 성인들에게는 큰 고민이었습니다. 문자만이 원인은 아니지만 구별하고 나누려는 태도는 역으로 성인을 낳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스승으로 모시는 주요한 성인은 이 시기에 주로 나타납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 부처나 예수가 모두 이 때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분들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더 깊이 고민하며 살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문자 사회마저 넘어서 영상이나 정보가 순식간에 세상을 감싸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보화 사회는 우리에게 기쁨과 두려움을 동시에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전환기를 사는 우리에게 스승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은 비대면(非對面)의 세상으로 급격히 바뀔 거라고 예측합니다. 맞습니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바뀌었듯이, 수렵 채취 사회에서 농경 목축의 사회로 바뀌었듯이 이는 우리가 지키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일 겁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대전환의 시기에 인류의 지성과 영성에 한 단계 도약이 있었음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소크라테스나 예수, 공자나 부처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인류의 스승이 들려준 답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은 고전(古典)을 읽어야 할 시간이기도 합니다. 고전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 사랑과 자비가 중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악인이고 죄인이라 할지라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함께 하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세상은 비대면 사회로 바뀌어 갈 겁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만나서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깊이 생각하는 우리여야 합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관전평을 하다

2020/05/26 12:48:12

세상이 점점 거칠어진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정(情)이 메말라 간다는 말도 자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도 줄어들고 만나더라도 형식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친척도 잘 모릅니다. 사돈의 팔촌은 커녕 가까운 친척도 잘 모릅니다. 5촌이면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는 적어졌는데 친척마저 멀어졌으니 피붙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더 거칠게 메말라가고 있는 걸까요? 말도 삭막해지고 있습니다. 거칩니다. 우리는 삶이 전쟁이라는 말도 자주합니다. 일하는 직장이 전쟁터가 된 지 오래입니다. 다른 회사와의 전쟁일 뿐 아니라 같은 직장의 동료와도 전쟁입니다. 먼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막상 올라가고 나면 현기증이 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나를 흔드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터는 때로 전우가 적이 되기도 하는 살벌한 전쟁터입니다. 모두 알다시피 학교도 전쟁터입니다. 친구들과의 경쟁은 어제 오늘일이 아닙니다만,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전부터 있었던 일이겠지만, 따돌림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왕따가 이제 새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말도 자주 씁니다. 총소리가 없으니 덜 무서워야 할 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총성이 없기에 지금이 전쟁인 줄도 모르고 생활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늘 전쟁 상태라는 것과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전쟁보다 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총알이 되고 우리의 입은 서로를 향한 총구가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오히려 진짜 전쟁이 덜 두렵습니다. 물론 실제로 전쟁을 겪게 된다면 무섭겠지만, 그 전까지는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전쟁을 느 끼지 못하고, 두려워하지 않아서일까요? 우리는 이렇듯 쉽게 표현마다 전쟁을 입에 올립니다. 마치 난리라는 말이 추임새처럼 입에 붙어있듯이 말입니다. ‘난리 났어, 왜 난리야, 난리도 아니야.’처럼 말입니다. 전쟁이 난리입니다. ‘관전평(觀戰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전평은 주로 스포츠 경기에 대한 평가에 쓰는 말입니다. ‘관전(觀戰)’이라는 말이 전쟁을 본다는 의미이니 스포츠 경기를 전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스포츠는 경쟁이 일어나는 현장이어서인지, 주로 싸움이나 전쟁에 비유합니다. 서로를 때리고 부수는 일부터 시작해서 폭격을 하기도 합니다. 상대를 초토화시키기도 하고 전멸시키기기도 합니다. 스포츠에서는 이렇게 무서운 용어를 전부 모아놓고 관전평을 합니다. 그런데 무섭지는 않습니다. 그저 멀찌감치 서서 평가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남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전쟁을 보며 평가한다는 말 자체가 이상한 말이네요. 저는 종종 제가 세상을 관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합니다. 요즘 더욱 그렇습니다. 전염병으로 세상이 뒤숭숭한데 타인의 아픔을 내 감정으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구경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각 나라의 환자 숫자를 경쟁하듯이 바라봅니다. 다른 나라보다 우리나라의 환자 수가 적으면 안심을 합니다. 다른 나라의 시스템을 평가하고 비난합니다. 때로는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잘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힐난을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픈 사람, 차별받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세상을 떠난 사람의 가족과 친구는 왜 눈에 덜 띄었을까요? 왜 나는 구경을 하고 있는 걸까요? 아침마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세계의 환자 수, 사망자 수를 보면서 왜 별다른 느낌이 없을까요? 스포츠 경기를 보듯이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앞섰다는 내용에 무덤덤하게 지나가게 될까요? 사람을 보지 않은 채 뉴스를 보고, 전쟁을 그저 바라보고 있는 스스로를 반성합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