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한강이 온다

2024/10/22 18:00:06

한강이 온다 노벨문학상 작품을 원서로 읽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없습니다. 특히 영어가 아닌 작가의 언어로 읽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 선생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노벨상 작품을 한국어 원서로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매일 울며 썼다는 한강 선생의 말이 가슴 아팠습니다. 제가 읽기에도 어려운 글이었지만 외국인들도 한국어로 한강 작가의 글을 읽기 바랍니다. 시로 쓴 산문의 느낌이어서 감성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광주 5.18 이야기와 제주 4.3 이야기가 비극이어서 오히려 공감대가 외국 독자에게도 크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주와 제주의 비극은 시대가 지남에도 해결되지 않고 때로는 도로 뿌옇게 되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비극은 엄청난 고통이지만, 그 고통이 문학과 예술로 다시 태어나는 느낌입니다. 슬픈 아이러니입니다. 구한말의 동학혁명, 일제강점기, 분단과 한국전쟁, 군사독재, 산업화와 민주화는 다채로운 고통과 성장입니다. 미스터 선샤인이나 파친코라는 드라마, 토지나 태백산맥과 같은 소설은 모두 시대에 빚을 졌고, 한 시대를 빛냈습니다. 허나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쓰는 작가조차 눈물 흘리고 마는 애끊는 고통이 작품을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친일과 반일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고, 극심한 빈부의 격차에 따른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을 넘는 예술이 많이 나오기 바랍니다. 밝은 예술의 힘이 세상 속으로 전달되기 바랍니다. 한강 선생의 작품을 한국어 원서로 읽는 것도 좋지만 좋은 번역으로 만나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한국 문학 번역도 한류와 함께 점점 넓고 깊어 집니다. 우수한 영어, 일어 번역 외에도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기도 바랍니다. 제가 듣기로는 현재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는 영어 번역을 재번역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즉 한국어를 전혀 못해도 번역이 가능한 상태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국어 전공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게 될 겁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한국어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물론 한류나 한국 경제 발전에 힘입은 바 큽니다. 국내 대학에도 한국어학을 전공하는 훌륭한 외국인 제자가 많습니다. 박사도 많습니다. 좋은 번역의 기회가 있기 바랍니다. 미얀마어 번역, 태국어 번역, 라오스어 번역, 베트남어 번역도 더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유럽이나 아프리카어로도 번역이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좋은 번역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한국어를 번역하는 데는 초기에 큰 지원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계기로 긴 안목의 지원을 부탁합니다. 노벨문학상 작품을 한국어 원서로 읽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습니다만, 한국어가 세계 속의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국어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재외동포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글학교가 더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국가의 노력이 있기는 하나 새로운 한글학교를 세우고,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더 많은 도움을 주기 바랍니다. 또한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우는 세종학당에 대한 관심과 지원도 더 커지기 바랍니다. 한국어 전문가, 한국어 번역가 양성에도 더 큰 관심 기대합니다. 노벨문학상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좋은 동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한강 선생의 수상을 계기로 한국어의 바람도 커지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한강 선생께 고마운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한강 선생이 이제는 덜 아파하고 밝은 글도 쓰기 기원합니다. 앞으로의 작품이 더 기대된다고 하는데, 저 역시 기대하며 긍정적 작품의 한강이 오기 바랍니다. 새로운 한강이 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학문행과 색독과 체서의 세상

2024/10/08 12:17:08

학문행과 색독과 체서의 세상 학문행(學問行), 색독(色讀), 체서(體書)라고 글자를 쓰고 보니 전부 다 빨간 줄이 나옵니다. 모두 사전에는 없는 말이라는 뜻이겠죠. 사전에 없는 말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이 중에서 학문행과 체서는 제가 만든 말이니 사전에 없는 것은 당연할 겁니다. 색독이라는 표현은 불교책에서 본 단어입니다. 기술 관련 단어는 사전에 무척 많은데, 종교의 어휘는 매우 부족한 느낌을 받습니다. 학문행은 보시다시피 학문이라는 말에 행을 붙였습니다. 학문(學問)을 글을 배우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의 한자어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는 학문은 배우고 묻는다는 뜻입니다. 배우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학문이 아닙니다. 늘 물어야 학문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 물을 수도 있고, 스스로에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몰라서 물을 수도 있고, 토론하기 위해서 물을 수도 있습니다. 궁금함이나 호기심, 답답함은 모두 학문의 감정입니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물음이 많아집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동전 양면과 같습니다. 아는 게 많아지면 모르는 것도 많아집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저는 학문이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우고 묻는 것은 실천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실천은 개인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두 실천은 서로 통합니다. 개인적 실천이 사회적인 경우도 있고, 사회적인 실천이 개인적 실천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배운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배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학문에서 수많은 거짓을 봅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저는 학문행이라고 부릅니다. 배우고 묻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행해야 합니다. 학문행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 바랍니다. 언어교육을 보면 언어를 배우고,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을 도구로 사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도구라는 말은 사용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당연히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길 찾고, 물건 사고, 자기 소개하는 등 언어가 사람 간의 소통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소통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에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을 겁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언어 소통의 가장 큰 가치입니다. 읽기 교육의 방법과 목적은 무엇일까요? 눈으로 읽고, 소리내어 읽고, 마음으로 읽는 방법은 불교에서는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바로 색독입니다. 색독은 깨달음의 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읽은 바를 실제로 몸으로 행동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독(體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읽은 책이 많을수록 행동할 게 많아집니다. 실천해야 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많이 읽고, 단순히 골방에 앉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쓰기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베껴 쓰기, 요약하기, 일상 쓰기, 설명하기, 주장하는 글쓰기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도 역시 몸으로 글쓰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온몸으로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이 쓴 글대로 행동하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러려면 글에 거짓이 없어야 할 겁니다. 오랜 시간의 고민과 번민과 반성과 환희가 포함되어야 할 겁니다. 그래야 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글쓰기를 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기와 듣기도 마찬가지겠지요.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고, 사용하는 것은 도구의 기능을 넘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입니다. 언어교육의 관점을 바꿔야 하겠습니다. 체어(體語)와 체문(體問)도 새로운 주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온몸으로 말하고, 온몸으로 듣는 겁니다. 실천하는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의 세상입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세상에 바보가 참 많습니다. 저렇게 바보가 많으니 세상에 갈등과 분노와 화와 멸시와 차별이 가득하겠지요. 주변을 따뜻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저 바보로 보일 겁니다. 저는 오늘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바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보들의 세상입니다. 바보는 남을 바보로 여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바보가 남을 바보로 여긴다

2024/09/25 16:11:44

바보가 남을 바보로 여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갈등과 분노가 한가득입니다. 갈등과 분노의 원인은 주로 나는 옳은데,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상대는 바보이거나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갈등을 일으키고, 그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분노가 됩니다. 사람들은 늘 얼굴이 벌겋고, 화가 나 있습니다. 위험한 사회입니다. 언제든지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인 겁니다. 불안불안합니다. 바보는 어떤 사람이 바보일까요? 바보라는 말의 어원은 ‘밥보’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밥보는 밥을 많이 먹는 사람입니다. 먹보랑 비슷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먹보에는 바보의 느낌은 없습니다. 그저 많이 먹으니 욕심꾸러기라는 생각은 들 겁니다. 바보는 욕심보다는 어리석음과 연결이 됩니다. 왜일까요? 무엇이 밥을 많이 먹는 것을 어리석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바보가 어리석은 것은 많이 먹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바보가 어리석은 것은 남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니 어리석은 겁니다. 남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으니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의 배가 불러도 계속 먹으면 어리석습니다. 특히 주변에 배고픈 사람이 있다면 그 어리석은 정도는 심해집니다. 내 배가 부른데도 다른 이는 살피지 않고 계속 꾸역꾸역 입안으로 음식을 넣습니다. 그게 바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는 바보가 넘쳐납니다. 내 배를 부르게 하는데 신경이 가 있어서, 주변의 배고픔을 모르는 체한다면 바보입니다. 옆집의 누가 배고픈지, 이웃의 누가 힘들어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바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많은 나라는 달리 말하면 배부른 바보가 많은 나라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나라는 못된 바보가 많은 나라입니다. 불행한 사람이 많은 나라는 만족하는 바보가 많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보는 자기가 바보인 줄은 모릅니다. 자기는 문제가 없고 상대가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쉽게 남을 바보라고 욕합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바보라고 합니다.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욕을 합니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바보 취급합니다. 세상에 바보가 너무 많다고 혀를 찹니다. 자신은 바보가 아니라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바보는 세상에 바보가 많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바보로 여기고, 아이는 어른을 바보로 여깁니다. 노인은 젊은이를 바보 취급하고, 청년은 노인을 바보라 여깁니다. 선생은 학생을 바보로 여기고, 학생은 선생을 바보로 여깁니다. 남자는 여자를 바보로 여기고, 여자는 남자를 바보로 여깁니다. 진보는 보수를 바보로 여기고, 보수는 진보를 바보 취급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바보 취급하니 바보는 점점 늘어납니다. 온 세상이 바보 천지입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세상에 바보가 참 많습니다. 저렇게 바보가 많으니 세상에 갈등과 분노와 화와 멸시와 차별이 가득하겠지요. 주변을 따뜻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저 바보로 보일 겁니다. 저는 오늘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바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보들의 세상입니다. 바보는 남을 바보로 여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벗이 있어서

2024/09/10 17:00:45

벗이 있어서 기쁘다와 즐겁다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이용하는 논어의 구절이 있습니다. ‘학이시습 불역열호,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學而時習 不亦說好 有朋 自遠訪來 不亦樂好)’라는 표현입니다. 배우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고, 멀리서 찾아준 벗을 만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라는 겁니다. 즉 개인의 감정이 기쁨이라면, 함께 하는 감정은 즐거움입니다. 기쁨이라면 혼자서도 느낄 수 있겠지만 즐거움이라면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말에는 느낌이 좋은 말이 있습니다. 한자보다 순우리말로 했을 때 감정이 살아나는 말도 있습니다. 그중에 제 마음을 울리는 표현은 ‘벗’입니다. 친구라는 말은 왠지 딱딱하고, 동무라는 말은 왠지 어색합니다. 친구(親舊)의 의미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는 의미여서일까요? 벗이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느낌입니다. 한 번 만나도 벗일 수 있습니다. 서로 통하고, 응원하고, 위로하는 사이라면 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구라는 말과 동무라는 말은 변질되어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는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볼 때도 사용합니다. ‘아니 이 친구가!’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친구를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동무는 더 심각합니다. 말동무나 길동무나 어깨동무의 느낌은 좋은데, 동무에 이념을 얹으면 심각한 표현이 됩니다. 아무나 동무라고 해서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동무라는 말을 잃었습니다. 몇 달 전 큰아이와 아내가 작은 디저트 카페를 열었습니다. 음악을 하는 아들이 음식에도 취미가 있어서 차린 가게입니다. 카페를 하면서 가족 모두는 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선 장사가 참 쉬운 게 아니라는 걸 배웁니다. 더우면 더워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날이 좋으면 날이 좋아서 장사가 어렵습니다. 점점 나아지기 바랍니다. 단골이 늘기 바랍니다. 한번 온 사람은 남이지만 두 번 오면 단골입니다. 또 오고 싶은 곳이면 좋겠습니다. 먹어본 디저트에 행복을 느끼고, 가게에서 가볍게 나눈 인사가 하루 종일 기쁨으로 남기 바랍니다. 가게를 하면서 많은 분의 도움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아니 여전히 받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응원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외진 곳에 있는 가게에 굳이 찾아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손님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손님은 우연히 들른 분이 아니라 제가 보고 싶어서 온 분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생각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해외에서 인연을 맺었던 한국어 선생님과 제자들이 오랜만에 귀국하여 저를 찾아줍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는데 저를 찾아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연구실로 오는 것보다 카페로 오는 게 더 편한 분도 많은 듯합니다. 다섯 명 정도밖에 앉을 수 없는 좁은 공간이지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기쁘게 사진을 찍습니다. 저를 만난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분을 보면서 저도 행복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간다는 것, 그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한 일입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행복한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행복한 겁니다. 이것은 쌍방향 모두 그렇습니다. 문득 보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찾아가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다시 또 찾고 싶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 따뜻해져야겠습니다. 더 넓어져야겠습니다. 아, 벗이 참 좋네요. 나이도, 시간도, 공간도 초월합니다. 그리운 벗이 더욱 그립네요. 그립다 말을 하니 더 그립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우산과 양산

2024/08/26 12:14:03

우산과 양산 저 앞에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과 그 뒤를 따라 양산을 쓰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두 사람의 성별은 구별이 될까요? 아마도 우리는 앞에 가는 사람의 성별은 알 수 없지만, 뒤에 가는 사람은 여성일 것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치마를 입은 사람, 스커트를 입은 사람은 어떤가요? 갓을 쓴 사람, 바지를 입은 사람, 하이힐을 신은 사람 등등 복장은 사람의 성별을 구별합니다. 복장은 성별뿐 아니라 사람의 직업이나 지위, 성향도 구별합니다. 청바지가 자유를 상징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선글라스가 상징하는 게 있고, 완장이 상징하는 게 있습니다. 노란 리본이나 빨간 열매를 가슴에 달고 있는 것도 모두 상징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몸에 무엇을 두르고, 입고, 쓰면서 나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입을 수 없고, 원하는 대로 입기도 어렵습니다. 모든 게 상징이고, 때로는 그 상징이 나를 나타내는 질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의 성별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산을 남녀 모두 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산을 쓰고 있는 사람은 구별하기가 쉽죠. 이는 마치 갓을 쓴 사람은 남자일 거라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양산을 쓰면 우리는 일단 여성일 것이라 판단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대부분 맞습니다. 실제로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양산을 쓰고 있는 사람은 여성이 대부분입니다. 양산이 중요한 패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우산도 원래는 여성이 주로 썼다는 점입니다. 문화에 대한 예전의 기록을 보면 남성이 우산을 쓰는 것은 여성스러운 행동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영향 때문에 군인이 우산을 쓰는 게 금기처럼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산도 예전에는 여성적 상징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뀝니다. 어느 순간부터 검은 우산을 든 영국신사가 등장하고 더 이상 우산은 여성의 상징이 아니게 됩니다. 성별을 상징하는 물건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 문화에 따라 변화합니다. 로마의 장군이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충격적입니다. 스커트를 입고 행진하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모습은 여전히 어색합니다. 성별을 상징하는 물건은 고정적인 상징이 아니라는 점은 우리에게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유연해야 합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생각이 늘 맞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가 왜, 여자가 왜?’라는 질문은 시대착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양산으로 돌아가면, 사실 이제는 양산이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양산을 쓰고 다니는 남성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올해 무더위 속에서 양산 쓴 많은 남자를 보았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햇볕이 강하면 양산을 쓰면 그만인데 우리는 지나치게 고정관념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산이 그러했듯이 양산도 남자의 손에 자연스레 잡힐 날이 오리라 봅니다. 이번 여름 우리는 사상 최고의 더위를 지나고 있습니다. 한여름의 열기가 어마어마합니다. 햇볕이 검은 머리를 태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합니다. 양산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저는 머뭇거립니다. 올해 양산의 유혹을 강하게 느꼈지만, 고정관념의 벽은 넘지 못했습니다. 아직 여름은 남았지만 작은 결심을 해 봅니다. 내년에는 꼭 양산을 쓰겠다는 결심. 올해 참 더웠습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케이 스포츠와 우리의 삶

2024/08/13 12:18:34

케이 스포츠와 우리의 삶 스포츠는 경쟁이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타인과의 경쟁은 물론 자신과의 경쟁이 하루하루 닥치는 세계입니다. 아마도 스포츠에 경쟁이 중요한 것은 처음 시작할 때 주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연습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스포츠 경기에 무기가 많이 사용되거나 싸움과 관련된 종목이 많은 것은 이를 반증합니다. 펜싱, 창던지기, 투포환, 양궁, 사격 등 무기가 활용되는 종목과 레슬링, 권투 등의 종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스포츠 경기장은 전쟁터인 셈입니다. 하지만 스포츠는 수련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싸움과 수련의 경계가 모호한 측면도 있지만 유도, 태권도와 같은 종목은 모두 수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라의 화랑이나 소림사의 스님이 무술을 연마하는 것은 자기 연마와 수련입니다. 조금 더 극한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고, 그 극한 육체의 상태를 이겨내어 정신적 완성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이겨내는 과정이기에 극기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스포츠를 보면서 상대와의 경쟁, 그리고 자신을 이겨내는 노력, 동료와의 조화를 봅니다. 물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을 것이고, 희열과 쾌감이 있을 겁니다. 극한 상태를 경험하였기에 다른 힘든 상황도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스포츠에서 지나치게 타인과의 경쟁, 목표 도달만 중시하면 승패, 좌절과 시련으로 우리는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스포츠를 좁게 보는 겁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케이 스포츠라는 말을 합니다. 한국인이 특히 잘하는 운동이 있기에 케이 스포츠라는 말이 나왔을 겁니다. 대표적으로 양궁을 들 수 있겠네요. 주몽의 후예라는 말을 하는데,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활을 참 잘 쏩니다. 주몽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주몽이 많습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말을 타면서 뒤로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구려인이 보면 지금처럼 서서 쏘는 활은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 타며 활쏘기 같은 새로운 종목의 추가도 권하고 싶습니다. 태권도도 케이 스포츠의 대표겠지요. 우리나라에서 시작한 운동이 올림픽의 종목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세계에 한국을 알린 건 케이팝보다 태권도가 먼저이니 스포츠 한류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태권도가 정말 좋은 점은 태권도에서 메달을 따는 나라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스포츠 약소국이라는 나라가 메달을 따고 있어서 요르단의 첫 금메달,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가봉 등의 첫 메달도 태권도라고 합니다. 태권도를 열심히 세계 속에 알린 사범께 경의를 표합니다.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국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깊을 겁니다. 한편 한국의 스포츠는 새롭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한국 스포츠는 결과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금메달이 아니면 패배자인 듯한 모습에서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그 시작을 한국이 보여줍니다. 결과도 중요하나 과정을 중요시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한 스스로를 칭찬합니다.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승자를 축하하는 모습은 케이 스포츠가 남과의 경쟁뿐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열심히 자기 한계에 도전하고, 즐겁게 결과를 받아들이는 문화이기 바랍니다. 변화의 바람도 일고 있습니다. 관중도 열심히 한 양팀에 응원을 보냅니다. 협회나 지도자의 강압적인 태도를 비판합니다. 결과 위주의 사고를 질타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어 가는데, 한국 스포츠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바랍니다. 원래 스포츠는 경쟁뿐 아니라 자기 수련 과정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스로 위로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스포츠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루고 협동심을 기르는 것이 스포츠입니다. 힘든 과정을 지나면서 더 큰 시련에 회복탄력성을 갖는 것이 바로 스포츠라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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