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누리와 나라와 나

2025/02/25 17:24:30

누리와 나라와 나 우리말에서 ‘누리’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온 누리’라는 말은 온 세상을 의미하지요.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누리이기에 살아간다는 말을 ‘누리다’라고 합니다, 보통 누리다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입니다. 복을 누린다든지, 천수를 누린다든지 할 때 쓰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좋은 의미로 보았습니다. 사는 게 좋은 것이죠. 삶이 고통이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과 만나는 하루 하루는 분명 행복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바로 누리는 삶입니다. 누리가 모양을 바꾸면 나라가 됩니다. 나라가 꼭 국가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나라라는 개념도 불분명하였습니다.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모여 사는 곳이면 나라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하면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라가 곧 누리인 셈입니다. 내 나라라고 생각하는 곳이 넓어지면 누리입니다. 당연히 나라의 경계도 넓었습니다. 이곳이 힘들면 저곳으로 가고, 저곳이 힘들면 이곳으로 찾아옵니다. 떠나는 이를 욕하지 않고, 찾아온 이를 내쫓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그래서 이민과 귀화의 역사입니다. 한민족만 하여도 수많은 이민과 귀화가 있었습니다. 조선족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중국에 가서 중국인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땅이 힘드니 건너가서 살았던 것이죠. 고려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민은 나의 선택이었습니다. 미국에도 수많은 이민이 있습니다. 미국 자체가 이민으로 이루어진 곳이니 한민족은 조금 늦게 이민 간 것뿐입니다. 먼저 이민 온 사람이 늦게 이민 온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가여운 일입니다. 어느 나라의 역사책을 봐도 모두 이민과 귀화의 역사입니다. 사서삼경을 보아도, 불경을 보아도, 기독교 성경을 보아도 모두 이동하며 살아갑니다. 인구가 많아지는 방법은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고, 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는 이 나라가 살기 싫어지는 겁니다. 살고 싶지 않은 나라에 갈 이유가 없고, 나도 살기 빠듯한데 아이를 낳아 키울 이유도 없습니다. 인구 걱정이 된다면 나라를 올바로 세워야 합니다. 백성이 행복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민자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좋지 않으면 안 올 겁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우리나라로 이주해 오는 사람도 급격히 줄 겁니다. 유학생도, 이주노동자도, 결혼이민자도 올 이유가 없겠지요. 한국이 살 만한 나라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나가고 싶은 나라였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죠. 이민은 여기보다 그곳이 나아서 움직이는 겁니다. 재외동포가 많은 게 자랑은 아닌 겁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봐도 한민족이 많습니다. 그게 우리의 과거입니다. 유학생도 많았습니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어느 곳에 가 봐도 한국 유학생이 정말 많았습니다. 인구수 대비 늘 1등이었습니다. 유학생이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 것도 맞지만 꼭 자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한국 젊은 여성이 일본이나 미국 등으로 결혼 이민을 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결혼 이민이 이민의 물꼬이기도 했죠. 나라가 누리가 되고, 누리가 나라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라 안에만 갇혀있을 필요도 없고, 내 나라가 아니라고 배척하거나 차별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비자가 늘고, 국경의 개념이 희미해지면서 오히려 세계는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와 과거를 돌아보면서 부디 내 나라 속에 갇혀 살지 않기 바랍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구별하고, 차별하고, 혐오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런 차별의 나라라도 좋다고 찾아주는 이들에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글로벌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는 노력할 필요도 없는 말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글로벌 세계를 사는 방법입니다. 한편 ‘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죠. 그런데 보통은 ‘나, 민족, 사람’ 등에 해당하는 말은 같은 어원인 경우도 많습니다. 나를 의미하는 말이 사실은 사람이라는 뜻이 되고, 사람이라는 말이 민족명, 국가명인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명을 보면 그 나라에서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사람’도 신라, 사로 등과 어원이 같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저는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옛 우리말에서는 ‘나, 노, 라’ 등이 땅의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라’도 땅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새 땅 또는 동쪽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새’가 동쪽을 의미하고 태양을 의미합니다. 나는 나라에 살고, 누리에 사는 나입니다. 너와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내가 꿈꾸는 나라

2025/02/13 12:28:57

내가 꿈꾸는 나라 내가 꿈꾸는 나라는 너무 단순해서 꿈까지 꿀 필요가 있을까 하는 나라입니다. 우선 어른이 존경받고 아이가 사랑받는 나라입니다. 존경할 어른이 없다고 말하지만, 존경하는 젊은이도 적습니다. 아이들이 엉망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아이를 더 사랑해주는 어른도 적습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꿈꿉니다. 이게 무슨 꿈이냐고 하겠지만,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는 세상에서 남녀의 사랑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꼭 결혼해야 하고, 꼭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결혼과 아이가 부담스럽다면 그건 잘못된 세상입니다. 아이들은 집 밖에서 뛰놀기를 꺼리고, 부모는 아이들을 밖에 내놓기 두렵습니다. 이제 그만 놀고 들어오라고 어둑한 밤길을 찾아다니는 부모는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바랍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세상을 원합니다. 하기 싫은 것을 미래라는 이름으로 준비하게 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교육이 폭력이 되고, 교훈이 억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확천금을 노릴 수밖에 만들어진 현실이 한탄스럽습니다. 젊은이는 열심히 살아도 집을 살 수 없고, 노인은 집에 묶인 돈 때문에 허덕이며 삽니다. 흐르지 않는 경제에 경기는 더 나빠지고,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니라 일하고 싶은 자리가 없는 게 답답합니다. 빈부의 격차는 실제보다 심리적으로 확대되고, 높은 곳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합니다. 증오는 다시 혐오를 낳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이를 혐오합니다. 특정한 국가를 혐오하고, 특정한 인종을 차별하며, 사람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장의 방식도 폭력적입니다. 말이 통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말로 해도 그냥 말이 아닙니다. 온갖 더러운 말과 분노의 말이 한가득입니다. 이해는 남의 이야기입니다. 용서와 관용은 없습니다. 배려와 양보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것을 미워하면서 세상이 온통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부자연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정치는 바르지 않습니다. 경제는 가진 자의 경제입니다. 종교는 평화에서 멀어집니다. 학문은 실용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세대가 갈라지고, 남녀가 나뉩니다. 아름다운 가치를 이야기하면 이상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상은 환상 취급을 받습니다. 환상은 미친 짓으로 규정됩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렇습니다. 꿈꾸는 것조차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다시 어른을 존경하고, 존중하기 바랍니다. 다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어른들은 그 아이를 아껴주기 바랍니다. 종교와 철학이 귀한 대접을 받아야 세상이 바뀝니다. 종교와 철학에 욕심이 없어야 그 대접을 받습니다. 실용에 가치를 더한 세상이 되기 바랍니다. 달라서 더 특별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극단의 세상을 걷어내야 합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서로 존중하고, 조화로운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꿈입니까? 꿈이어야 합니까? 원래 그래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 태초의 가치를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큰 꿈은 나부터 꾸어야 합니다. 내 꿈을 다른 이가 대신 꾸어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뀝니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귀한 책을 읽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기 바랍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나라에 대하여

2025/01/30 17:30:49

나라에 대하여 나라가 지금은 국경으로 명확히 나누어지지만, 예전에는 나라끼리 분명히 구별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넘어가기도 하고 넘어오기도 하는 곳이지요. 옆에 있는 나라가 좋다고 하면 건너가서 살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쓰는 어휘가 ‘귀화(歸化)’입니다. 귀화의 귀는 돌아간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 귀화는 임금의 덕에 감화를 받아 그 나라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나라가 덕이 많으면 당연히 백성이 늘어납니다. 물론 반대로 나라가 엉망이면 백성이 줄어들지요. 우리가 모여 사는 곳을 마을이라고 하고 나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이 나라인 셈입니다. 내가 모이면 집안이 되고, 집안들이 모이면 나라가 됩니다. 나라는 그에 머무르지 않고, 나라가 모여서 세상과 천하가 됩니다. 이때 쓰는 말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죠. 수신이 곧 제가고 제가가 곧 치국이며, 치국이 곧 평천하입니다. 평천하, 치국, 제가의 시작은 모두 나입니다. 내가 올바로 서야 모든 게 달라집니다. 내가 귀한 줄 알고, 가족이 귀한 줄 알고, 나라가 귀한 줄 알면, 세상이 귀한 줄 압니다. 내가 귀한 줄 아는 사람은 남이 귀한 줄 알고, 내 집안이 귀한 줄 아는 이는 집 밖도 귀한 줄 압니다. 내가 사는 나라를 귀히 여기는 자는 다른 나라도 귀히 여깁니다. 그러면 천하가 모두 귀한 세상이 됩니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서로를 귀히 여기고, 아끼는 세상이죠. 그런데 나만 귀한 줄 알면 나도 귀하지 않습니다. 바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가 되는 순간입니다. 내 집안만 귀한 줄 아니까 혈연(血緣), 학연(學緣), 지연(地緣)이 내 눈과 귀를 가로막습니다. 내 나라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이 국가 간 분쟁을 만들고, 싸움을 일으키고 혐오를 낳습니다. 그러니 세상은 온통 아수라장입니다. 지금의 우리 세상이 이렇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을까요? 사람으로서 도리를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며 사람답게 살려고 했더니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이 우리를 좋아해 주고 우리도 세상을 좋아합니다. 우리 문화가 세계 속에서 큰 관심을 받고, 인기가 높아집니다. 우리말을 배우려는 사람이 늘고, 한국어의 재미에 푹 빠져있습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일로 치유가 되었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고마움을 잊고 나를 드러냅니다. 내가 뛰어나고 남이 못난 줄 압니다. 우리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무시하고 차별하고 혐오합니다. 외국인을 무시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혐오합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 사이에 가득한데 나라가 잘 될 리 없습니다. 그렇게 악하게 변해갑니다. 그러면 이야기의 결말이 보입니다. 우리 앞에도 많은 나라가 그렇게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경제와 민주주의와 문화를 함께 이룬 나라라고 스스로 자랑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빈부의 극심한 대립이 경제 성장이라면 그런 경제가 자랑할 만한 건가요? 문화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때를 묻히는 것투성이라면 선한 영향력일까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배려 없는 주장만 어지러이 춤을 춥니다. 독선이 민주가 아닌데 내 이야기만 하고 남의 이야기는 무시합니다. 모두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 문화 이야기이고, 우리나라의 모습입니다. 극단으로 달려가면 나뉘고 쪼개질 수밖에 없지요. 중도(中道)는 가운데가 아니라, 양극단이 아닌 자리입니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에 분노와 우울감이 앞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걱정입니다. 하지만 나라 걱정하는 이가 많으니 좋아지겠죠. 그렇겠죠.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새로운 말과 문화번역

2025/01/15 11:51:50

새로운 말과 문화번역 언어는 생명체와 같아서 늘 새로 태어나고 변화하고, 노쇠해지며, 사라지기도 합니다. 오래된 말은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어렵고, 새로운 말은 아직 배우지 않아서 어렵습니다. 번역에서 새말과 옛말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특히 새말은 계속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새로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세대 차이의 영향도 있습니다. 청소년이 새로 쓰는 말을 장년이나 노년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문명의 문제도 있습니다. 게임과 관련된 수많은 어휘나 표현을 게임에 관심 없는 사람이 알기는 어렵습니다. 경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새로운 경제 용어를 알기도 어렵겠죠. 기기에 관심이 없는 기계치들이 새로운 기계에 쓰이는 말을 알기 힘듭니다. 종종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말 중에도 모르는 말이 많습니다. 새로운 말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새말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새말 중에는 유행어도 있습니다. 물론 유행어가 모두 새말은 아닙니다. 유행어는 그 시기에 많이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사회와 문화를 반영합니다. 따라서 사회의 모습이나 문화를 모른다면 유행어의 이해는 더 어려워집니다. 과거에 유행어를 많이 생산해 내는 사람은 주로 연예인이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유행시킨 말이 세상을 돌아다녔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텔레비전보다 다양한 유튜브 등을 통해서도 유행어가 만들어지고 퍼집니다. 이러한 말들 중에는 새로 만들어지 말도 많습니다. 새로 만든 말이 재미있어서 유행어가 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유행어는 말 그대로 유행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전 속으로 채 들어오기도 전에 사라지고 마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유행어가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가 사라지기도 하여 더 어려운 단어나 표현이 됩니다. 유행어가 새로운 말로 굳어져서 사전 속으로 들어오면 신어가 됩니다. 신어는 보통 사회화의 과정을 거친 말입니다. 일시적인 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유행어나 신어는 한국의 콘텐츠에도 널리 쓰입니다. 한국 예능을 번역할 때 신어나 유행어를 모르면 번역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자막에 쓰이는 말 중에도 유행어나 신어가 많습니다. 어쩌면 콘텐츠를 향유하는 층이 가장 좋아할 만한 자극적인 표현이 유행어 속에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능을 번역하고자 한다면 더욱 신어와 유행어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한 케이팝이나 케이 드라마에도 수많은 새말이 등장합니다. 한국 드라마와 한국 노래의 느낌을 잘 알기 위해서도 새말과 유행어를 잘 이해해야 할 겁니다. 주의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유행어는 아무래도 말초적인 성격이 있고, 감정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채 걸러지지 않고 세상에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행어에 욕설과 같은 비속어가 많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또한 유행어나 신어에 차별어가 있기도 합니다.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인종, 성적 취향을 비웃는 표현을 담기도 합니다. 자칫하면 유행어가 혐오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유행어와 신어를 공부하되, 걸러내어야 할 차별어와 비속어는 잘 이해하여야 할 겁니다. 한국어를 공부했는데, 나쁜 표현을 잔뜩 알게 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물론 문화번역에 나쁜 말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해는 하되 표현은 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번역을 통해 스스로가 성장하기 바랍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K-스포츠와 우리의 삶

2024/12/02 16:05:53

K-스포츠와 우리의 삶 스포츠는 경쟁이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타인과의 경쟁은 물론 자신과의 경쟁이 하루하루 닥치는 세계입니다. 아마도 스포츠에 경쟁이 중요한 것은 처음 시작할 때 주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연습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스포츠 경기에 무기가 많이 사용되거나 싸움과 관련된 종목이 많은 것은 이를 반증합니다. 펜싱, 창던지기, 투포환, 양궁, 사격 등 무기가 활용되는 종목과 레슬링, 권투 등의 종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스포츠 경기장은 전쟁터인 셈입니다. 하지만 스포츠는 수련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싸움과 수련의 경계가 모호한 측면도 있지만 유도, 태권도와 같은 종목은 모두 수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라의 화랑이나 소림사의 스님이 무술을 연마하는 것은 자기 연마와 수련입니다. 조금 더 극한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고, 그 극한 육체의 상태를 이겨내어 정신적 완성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이겨내는 과정이기에 극기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스포츠를 보면서 상대와의 경쟁, 그리고 자신을 이겨내는 노력, 동료와의 조화를 봅니다. 물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을 것이고, 희열과 쾌감이 있을 겁니다. 극한 상태를 경험하였기에 다른 힘든 상황도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스포츠에서 지나치게 타인과의 경쟁, 목표 도달만 중시하면 승패, 좌절과 시련으로 우리는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스포츠를 좁게 보는 겁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케이 스포츠라는 말을 합니다. 한국인이 특히 잘하는 운동이 있기에 케이 스포츠라는 말이 나왔을 겁니다. 대표적으로 양궁을 들 수 있겠네요. 주몽의 후예라는 말을 하는데,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활을 참 잘 쏩니다. 주몽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주몽이 많습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말을 타면서 뒤로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구려인이 보면 지금처럼 서서 쏘는 활은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 타며 활쏘기 같은 새로운 종목의 추가도 권하고 싶습니다. 태권도도 케이 스포츠의 대표겠지요. 우리나라에서 시작한 운동이 올림픽의 종목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세계에 한국을 알린 건 케이팝보다 태권도가 먼저이니 스포츠 한류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태권도가 정말 좋은 점은 태권도에서 메달을 따는 나라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스포츠 약소국이라는 나라가 메달을 따고 있어서 요르단의 첫 금메달,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가봉 등의 첫 메달도 태권도라고 합니다. 태권도를 열심히 세계 속에 알린 사범께 경의를 표합니다.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국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깊을 겁니다. 한편 한국의 스포츠는 새롭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한국 스포츠는 결과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금메달이 아니면 패배자인 듯한 모습에서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그 시작을 한국이 보여줍니다. 결과도 중요하나 과정을 중요시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한 스스로를 칭찬합니다.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승자를 축하하는 모습은 케이 스포츠가 남과의 경쟁뿐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열심히 자기 한계에 도전하고, 즐겁게 결과를 받아들이는 문화이기 바랍니다. 변화의 바람도 일고 있습니다. 관중도 열심히 한 양팀에 응원을 보냅니다. 협회나 지도자의 강압적인 태도를 비판합니다. 결과 위주의 사고를 질타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어 가는데, 한국 스포츠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바랍니다. 원래 스포츠는 경쟁뿐 아니라 자기 수련 과정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스로 위로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스포츠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루고 협동심을 기르는 것이 스포츠입니다. 힘든 과정을 지나면서 더 큰 시련에 회복탄력성을 갖는 것이 바로 스포츠라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무시, 무시하다

2024/11/19 10:49:10

무시, 무시하다 무시(無視)한다는 말은 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상대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상태를 깔본다고 합니다. 내려다본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물론 무시는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니 강도가 훨씬 셉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무시를 1. 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 2. 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김이라고 설명합니다. 무시가 안 보는 것이 원래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내려 보는 느낌의 어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시하다는 말을 한국말로 하면 못 본 척이 아닐까 합니다. 봐도 못 본 척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나를 본 것이 분명한데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면 기분이 상합니다. 인사(人事)는 사람의 일이라는 뜻인데, 인사를 안 했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안 한 것이고, 나를 사람 취급 안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저 사람은 무시해도 좋다는 말을 들으면 참을 수가 없을 겁니다.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자면 투명 인간 취급한 겁니다. 무시하다에 해당하는 우리말인 ‘업신여기다’는 방언에 ‘업시여기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없이 여기다’로 볼 수 있습니다. 무시하다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본 척도 안 하고, 들은 척도 안 하고, 아는 척도 안 하는 것은 모두 무시하는 겁니다. 서로 무시하는 것은 안 좋은 겁니다. 그런데 무시해도 좋은 게 있습니다.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을 무시하면 좋을까요? 우선 상대가 숨기고 싶은 것이라면 못 본 척해주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라도 봤다면 아예 잊으면 더 좋을 겁니다. 굳이 아는 척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내가 본 것을 상대가 알아차린다면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여도 좋습니다. 모르는 척하는 것도 배려입니다. 저는 무시의 상반되는 상황, 즉 ‘보다’를 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다’에 해당하는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깔보다와 내려다보다도 있습니다만, 반대로 올려보다나 치켜 뜨다도 있습니다. 반항의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노려보다, 째려보다는 말도 씁니다. 눈으로 보는 게 우리의 감정을 싣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보는 것 중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살펴보다’와 ‘돌보다’입니다. 살피는 것도 보는 것이기에 살펴보는 것은 같은 의미의 단어가 겹쳐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조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살피는 것과 두리번거리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두리번거리는 것은 무엇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살펴보는 것은 혹시 불편한 점이 있는지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보다는 돌아보다가 줄어든 말로 보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말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돌본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찾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을 돌아보거나 건물을 돌아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살피는 것입니다. 따라서 돌본다는 말에서는 세밀한 관심이 느껴집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그런 느낌의 표현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보아야 제대로 돌보는 겁니다. 저는 무시하지 않는 세상을 꿈꿉니다. 무시하지 말고 서로 바라보는 삶이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보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화가 나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살피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돌보는 삶이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집니다. 내 눈길의 온도를 생각해 봅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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