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머리를 가슴으로, 가슴을 온몸으로

2025/04/20 13:32:23

머리를 가슴으로, 가슴을 온몸으로 세상에 알아야 할 게 참 많습니다. 예전에 비해 지식의 폭이 훨씬 넓어지고 있습니다. 알아야 하는 과목도 늘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지식도 끊임없이 솟아 나옵니다. 그럼 우리는 정말로 똑똑해졌을까요? 지식인은 많은데, 지혜로운 이는 적다는 한탄이 여기저기에서 나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지식은 쌓여가는데 지혜는 오히려 옅어집니다. 지식인(知識人)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지식인이라는 말은 칭찬 같기도 하고, 나무라는 말 같기도 합니다. 지식인을 나무랄 때는 지식을 쌓아는 가지만, 지혜로 바뀌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에 지식(知識)이 넘쳐나니 지식인도 넘쳐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혜를 나타내는 한자 지(知)에는 날 일(日)이 더해 있습니다. 지식이 밝아져야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빛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경쟁하고, 서로 잘났다고, 많이 안다고 하며 자신의 성적을 내세우는 세상, 자신을 숫자로 표현하는 세상은 어두운 세상입니다. 당연히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인공지능 앞에서는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인공지능의 속도와 정확성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아예 경쟁조차 되지 않습니다. 지식을 아는 것에 그치면 경영의 목표가 돈이 되고, 법의 목표가 돈이 되고, 의술의 목표가 돈이 됩니다. 모든 걸 돈에 초점을 맞추는 세상이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세상은 지식이 머리에 머물러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일을 머리 아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도 아파야 옳은 해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식을 단순히 암기하는 세상에서, 지식이 감정으로 옮겨가는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정보라고 합니다. 정보(情報)는 사정(事情)을 알린다는 뜻이고, 정보나 사정이나 모두 감정(感情)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情)이 담긴 글자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바로 가슴으로 사는 세상입니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입니다. 무미건조한 정보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파하는 정보입니다. 공감의 세상, 동감의 세상이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아니 온몸으로 퍼져나가서 핏줄이 돌 듯이 모세혈관까지 전해져야 합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가슴으로 옮기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겁니다. 사실 이 지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책상 앞에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멀리서 떨어져서 가슴 아파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뛰어들어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독서와 글쓰기가 내게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읽은 대로, 내가 쓴 대로 행동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글 읽기에서 이런 읽기를 체독(體讀)이라고 합니다. 온몸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며 읽는 것입니다. 주로 경전을 이렇게 읽습니다. 종교의 경전은 그저 읽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이 중요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쓰기에서도 체서(體書)가 필요합니다. 이 말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글을 쓰면서, 책을 읽으면서 지식인인 척하는 스스로가 부끄럽습니다. 그야말로 저는 지혜는커녕 지식인도 못 되었습니다.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삶도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행동하는 삶이 되기 위해 체독의 삶, 체서의 삶, 체학(體學)의 삶을 생각해 보는 오늘입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시절을 노래하다

2025/03/24 16:02:25

시절을 노래하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라는 책을 읽다가 놀란 점이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일본의 시 장르인 ‘하이쿠’에 대한 언급입니다. 저도 일본 ‘바쇼’의 하이쿠를 읽은 적이 있고,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하이쿠의 예도 본 적이 있습니다만,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책 속의 여러 강의 내용이 하이쿠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했고, 시를 소개하면서 하이쿠를 아주 매력적인 장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서양에서 하이쿠의 위력 또는 매력을 2000년대 초반에 미국의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래된 작은 도서관에서 ‘하이쿠’ 창작 모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영어로 하이쿠를 읽고 쓰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무엇이 서양인에게 하이쿠가 매력적으로 다가갔을까요? 하이쿠에 나타나는 선시(禪詩)의 분위기가 작은 깨달음을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우리 시조(時調)와 가사, 고려가요, 향가 등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시는 얼마나 알려져 있을까요? 어떤 매력으로 소개되고 있을까요? 우리가 어릴 때 배웠던 대부분의 시조는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나 교훈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정몽주)’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김상헌)’ 같은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는 노래가 많았습니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정철)’이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황진이)’ 같은 교훈성이 있는 시조가 많았습니다. 시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내용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만 학생들은 시조의 매력에 빠지기 어려웠습니다. 문학 교육이 오히려 문학 향유에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문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높고, 절묘한 가락을 담은 시조를 가르치고 기억하게 한다면 시조를 즐기는 사람도 더 많아질 겁니다. 여러 작가가 노력하고 있지만, 시조는 우리 문학에서 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좋은 시조나 가사, 고려가요, 향가를 문학적으로 깊게 이해하고 감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라 향가가 일본의 만엽집처럼 많이 남아있다면 좋을 텐데요. 현존하지 않는 향가집 삼대목이 발견되기 기대해 봅니다. 남아있는 신라시대의 향가 14수에서 향가의 매력을 다 찾아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저는 ‘삶과 죽음이 여기에 있음에 나는 간다고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는가(제망매가)’에서 누이를 잃은 깊은 슬픔에 동감합니다.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고려가요는 우리의 감정을 더 깊이 드러냅니다. 민요와 이어지는 깊은 연계도 느낍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가시리)’나 ‘살어리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청산별곡)’의 운율과 솔직함을 만납니다. 시조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황진이)’ 등의 묘사에서 낭만을 만납니다. 향가에서 고려가요로, 다시 시조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우리 노래들입니다. 시조의 매력을 잘 살피고,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에게도 알리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고, 우리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넘어서는 공통의 감정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미처 알리지 못한 매력을 찾아내어 세계 속으로 잘 소개해야겠습니다. 좋은 번역이 필요한 이유도 되겠습니다. 시조(時調)의 시는 때라는 뜻입니다. 한 시절을 노래하는 시(詩)가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가짜의 세상

2025/03/13 16:22:13

가짜의 세상 가짜는 말 그대로 거짓입니다. 참 세상이 진짜이니 가짜와 진짜는 반대인 셈입니다. 가짜는 예전에도 많았습니다. 예전의 가짜는 주로 물건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가짜는 명품을 흉내 낸 것이겠죠. 명품은 모습이나 기능보다는 가치를 사는 것입니다. 가짜는 아무리 똑같이 만들어도 가짜입니다. 가치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이 지점이 가치를 볼 때 혼란스러운 지점입니다. 종종은 가짜인데도 진짜처럼 속습니다. 보는 사람도 깜빡 속습니다. 가짜와 진짜의 경계는 무얼까요? 도자기나 그림도 가짜가 많았습니다. 진짜가 훨씬 비쌌기 때문에 가짜를 만들어 수익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따로는 가짜로라도 대리만족을 하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짜인 줄 알면서 가지고, 가짜인 줄 알기에 부러움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가짜들은 심각하지 않은 가짜입니다. 가짜가 엄청난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의 가짜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가짜와 진짜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가짜는 진짜로 믿고, 진짜는 가짜로 믿게 만듭니다. 온통 뒤죽박죽의 세상입니다. 자기는 진짜이고, 남은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짜로 밀어붙입니다. 자신의 신념과 믿음과 종교는 진짜고, 남의 신념과 믿음과 종교는 가짜로 매도합니다. 도대체 타협이나 이해나 배려가 보이지 않습니다. 가짜가 제일 많은 붙는 장면은 뉴스입니다. 양극단을 치닫는 현실에서 가짜 뉴스는 큰 해악(害惡)입니다. 정치적인 가짜 뉴스는 더 이상 현상이 아닙니다. 모두가 진짜라고 믿는 ‘가짜’ 속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짜를 위한 수많은 장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짜를 위한 그럴 듯한 수많은 가짜 증거가 미혹(迷惑)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카더라’, ‘유비통신’ 등의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라고 하더라’가 줄어든 말인 ‘카더라’와 ‘유언비어(流言蜚語)’기 줄어든 유비통신은 가짜 뉴스의 원조인 셈입니다. 가짜를 이야기할 때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가 내 이야기를 가짜로 본다는 점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이 ‘가짜’를 대하는 나의 자세입니다. ‘가짜’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속’과는 다른 것입니다. 민간어원에서 ‘속’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속이다’라고 설명하는데 재미있는 접근입니다. 하긴 거짓이라는 말도 ‘겉짓’으로 볼 수 있습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이 거짓의 시작입니다. 그러고 보면 ‘거짓’과 ‘가짜’는 수없이 내 속에서 솟아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거짓이 내 몸을 거쳐 밖으로 나옵니다. 아닌 척, 안 그런 척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소박한 척, 착한 척, 겸손한 척 하지만 내 마음 속 욕망과는 전혀 다릅니다. 겸손한 척, 부족한 척 하지만 타인을 보는 내 시선은 저만치 위에서 내려 보고 있습니다. 도통 ‘참’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가짜가 주는 가장 큰 해로움은 세상을 믿지 못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서로가 가짜라고 하니 누굴 믿을까요? 자기편만 믿으면 갇힌 세상을 살게 됩니다. 갇혀 있는 사람은 답답해하며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깨부수고 싶어 합니다. 그 근저에는 나만 옳다는 가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짜 세상을 잘 살아가는 방법은 우선 나의 가짜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 양쪽 날개로 세상을 나는 것입니다. 나를 제대로 보면 세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때로는 잠깐 기우뚱하겠죠. 하지만 두 날개로 날면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글/사진 조현용)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누리와 나라와 나

2025/02/25 17:24:30

누리와 나라와 나 우리말에서 ‘누리’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온 누리’라는 말은 온 세상을 의미하지요.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누리이기에 살아간다는 말을 ‘누리다’라고 합니다, 보통 누리다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입니다. 복을 누린다든지, 천수를 누린다든지 할 때 쓰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좋은 의미로 보았습니다. 사는 게 좋은 것이죠. 삶이 고통이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과 만나는 하루 하루는 분명 행복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바로 누리는 삶입니다. 누리가 모양을 바꾸면 나라가 됩니다. 나라가 꼭 국가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나라라는 개념도 불분명하였습니다.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모여 사는 곳이면 나라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하면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라가 곧 누리인 셈입니다. 내 나라라고 생각하는 곳이 넓어지면 누리입니다. 당연히 나라의 경계도 넓었습니다. 이곳이 힘들면 저곳으로 가고, 저곳이 힘들면 이곳으로 찾아옵니다. 떠나는 이를 욕하지 않고, 찾아온 이를 내쫓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그래서 이민과 귀화의 역사입니다. 한민족만 하여도 수많은 이민과 귀화가 있었습니다. 조선족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중국에 가서 중국인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땅이 힘드니 건너가서 살았던 것이죠. 고려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민은 나의 선택이었습니다. 미국에도 수많은 이민이 있습니다. 미국 자체가 이민으로 이루어진 곳이니 한민족은 조금 늦게 이민 간 것뿐입니다. 먼저 이민 온 사람이 늦게 이민 온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가여운 일입니다. 어느 나라의 역사책을 봐도 모두 이민과 귀화의 역사입니다. 사서삼경을 보아도, 불경을 보아도, 기독교 성경을 보아도 모두 이동하며 살아갑니다. 인구가 많아지는 방법은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고, 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는 이 나라가 살기 싫어지는 겁니다. 살고 싶지 않은 나라에 갈 이유가 없고, 나도 살기 빠듯한데 아이를 낳아 키울 이유도 없습니다. 인구 걱정이 된다면 나라를 올바로 세워야 합니다. 백성이 행복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민자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좋지 않으면 안 올 겁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우리나라로 이주해 오는 사람도 급격히 줄 겁니다. 유학생도, 이주노동자도, 결혼이민자도 올 이유가 없겠지요. 한국이 살 만한 나라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나가고 싶은 나라였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죠. 이민은 여기보다 그곳이 나아서 움직이는 겁니다. 재외동포가 많은 게 자랑은 아닌 겁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봐도 한민족이 많습니다. 그게 우리의 과거입니다. 유학생도 많았습니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어느 곳에 가 봐도 한국 유학생이 정말 많았습니다. 인구수 대비 늘 1등이었습니다. 유학생이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 것도 맞지만 꼭 자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한국 젊은 여성이 일본이나 미국 등으로 결혼 이민을 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결혼 이민이 이민의 물꼬이기도 했죠. 나라가 누리가 되고, 누리가 나라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라 안에만 갇혀있을 필요도 없고, 내 나라가 아니라고 배척하거나 차별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비자가 늘고, 국경의 개념이 희미해지면서 오히려 세계는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와 과거를 돌아보면서 부디 내 나라 속에 갇혀 살지 않기 바랍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구별하고, 차별하고, 혐오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런 차별의 나라라도 좋다고 찾아주는 이들에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글로벌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는 노력할 필요도 없는 말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글로벌 세계를 사는 방법입니다. 한편 ‘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죠. 그런데 보통은 ‘나, 민족, 사람’ 등에 해당하는 말은 같은 어원인 경우도 많습니다. 나를 의미하는 말이 사실은 사람이라는 뜻이 되고, 사람이라는 말이 민족명, 국가명인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명을 보면 그 나라에서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사람’도 신라, 사로 등과 어원이 같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저는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옛 우리말에서는 ‘나, 노, 라’ 등이 땅의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라’도 땅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새 땅 또는 동쪽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새’가 동쪽을 의미하고 태양을 의미합니다. 나는 나라에 살고, 누리에 사는 나입니다. 너와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내가 꿈꾸는 나라

2025/02/13 12:28:57

내가 꿈꾸는 나라 내가 꿈꾸는 나라는 너무 단순해서 꿈까지 꿀 필요가 있을까 하는 나라입니다. 우선 어른이 존경받고 아이가 사랑받는 나라입니다. 존경할 어른이 없다고 말하지만, 존경하는 젊은이도 적습니다. 아이들이 엉망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아이를 더 사랑해주는 어른도 적습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꿈꿉니다. 이게 무슨 꿈이냐고 하겠지만,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는 세상에서 남녀의 사랑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꼭 결혼해야 하고, 꼭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결혼과 아이가 부담스럽다면 그건 잘못된 세상입니다. 아이들은 집 밖에서 뛰놀기를 꺼리고, 부모는 아이들을 밖에 내놓기 두렵습니다. 이제 그만 놀고 들어오라고 어둑한 밤길을 찾아다니는 부모는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바랍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세상을 원합니다. 하기 싫은 것을 미래라는 이름으로 준비하게 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교육이 폭력이 되고, 교훈이 억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확천금을 노릴 수밖에 만들어진 현실이 한탄스럽습니다. 젊은이는 열심히 살아도 집을 살 수 없고, 노인은 집에 묶인 돈 때문에 허덕이며 삽니다. 흐르지 않는 경제에 경기는 더 나빠지고,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니라 일하고 싶은 자리가 없는 게 답답합니다. 빈부의 격차는 실제보다 심리적으로 확대되고, 높은 곳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합니다. 증오는 다시 혐오를 낳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이를 혐오합니다. 특정한 국가를 혐오하고, 특정한 인종을 차별하며, 사람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장의 방식도 폭력적입니다. 말이 통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말로 해도 그냥 말이 아닙니다. 온갖 더러운 말과 분노의 말이 한가득입니다. 이해는 남의 이야기입니다. 용서와 관용은 없습니다. 배려와 양보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것을 미워하면서 세상이 온통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부자연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정치는 바르지 않습니다. 경제는 가진 자의 경제입니다. 종교는 평화에서 멀어집니다. 학문은 실용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세대가 갈라지고, 남녀가 나뉩니다. 아름다운 가치를 이야기하면 이상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상은 환상 취급을 받습니다. 환상은 미친 짓으로 규정됩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렇습니다. 꿈꾸는 것조차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다시 어른을 존경하고, 존중하기 바랍니다. 다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어른들은 그 아이를 아껴주기 바랍니다. 종교와 철학이 귀한 대접을 받아야 세상이 바뀝니다. 종교와 철학에 욕심이 없어야 그 대접을 받습니다. 실용에 가치를 더한 세상이 되기 바랍니다. 달라서 더 특별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극단의 세상을 걷어내야 합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서로 존중하고, 조화로운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꿈입니까? 꿈이어야 합니까? 원래 그래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 태초의 가치를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큰 꿈은 나부터 꾸어야 합니다. 내 꿈을 다른 이가 대신 꾸어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뀝니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귀한 책을 읽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기 바랍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나라에 대하여

2025/01/30 17:30:49

나라에 대하여 나라가 지금은 국경으로 명확히 나누어지지만, 예전에는 나라끼리 분명히 구별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넘어가기도 하고 넘어오기도 하는 곳이지요. 옆에 있는 나라가 좋다고 하면 건너가서 살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쓰는 어휘가 ‘귀화(歸化)’입니다. 귀화의 귀는 돌아간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 귀화는 임금의 덕에 감화를 받아 그 나라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나라가 덕이 많으면 당연히 백성이 늘어납니다. 물론 반대로 나라가 엉망이면 백성이 줄어들지요. 우리가 모여 사는 곳을 마을이라고 하고 나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이 나라인 셈입니다. 내가 모이면 집안이 되고, 집안들이 모이면 나라가 됩니다. 나라는 그에 머무르지 않고, 나라가 모여서 세상과 천하가 됩니다. 이때 쓰는 말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죠. 수신이 곧 제가고 제가가 곧 치국이며, 치국이 곧 평천하입니다. 평천하, 치국, 제가의 시작은 모두 나입니다. 내가 올바로 서야 모든 게 달라집니다. 내가 귀한 줄 알고, 가족이 귀한 줄 알고, 나라가 귀한 줄 알면, 세상이 귀한 줄 압니다. 내가 귀한 줄 아는 사람은 남이 귀한 줄 알고, 내 집안이 귀한 줄 아는 이는 집 밖도 귀한 줄 압니다. 내가 사는 나라를 귀히 여기는 자는 다른 나라도 귀히 여깁니다. 그러면 천하가 모두 귀한 세상이 됩니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서로를 귀히 여기고, 아끼는 세상이죠. 그런데 나만 귀한 줄 알면 나도 귀하지 않습니다. 바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가 되는 순간입니다. 내 집안만 귀한 줄 아니까 혈연(血緣), 학연(學緣), 지연(地緣)이 내 눈과 귀를 가로막습니다. 내 나라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이 국가 간 분쟁을 만들고, 싸움을 일으키고 혐오를 낳습니다. 그러니 세상은 온통 아수라장입니다. 지금의 우리 세상이 이렇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을까요? 사람으로서 도리를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며 사람답게 살려고 했더니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이 우리를 좋아해 주고 우리도 세상을 좋아합니다. 우리 문화가 세계 속에서 큰 관심을 받고, 인기가 높아집니다. 우리말을 배우려는 사람이 늘고, 한국어의 재미에 푹 빠져있습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일로 치유가 되었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고마움을 잊고 나를 드러냅니다. 내가 뛰어나고 남이 못난 줄 압니다. 우리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무시하고 차별하고 혐오합니다. 외국인을 무시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혐오합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 사이에 가득한데 나라가 잘 될 리 없습니다. 그렇게 악하게 변해갑니다. 그러면 이야기의 결말이 보입니다. 우리 앞에도 많은 나라가 그렇게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경제와 민주주의와 문화를 함께 이룬 나라라고 스스로 자랑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빈부의 극심한 대립이 경제 성장이라면 그런 경제가 자랑할 만한 건가요? 문화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때를 묻히는 것투성이라면 선한 영향력일까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배려 없는 주장만 어지러이 춤을 춥니다. 독선이 민주가 아닌데 내 이야기만 하고 남의 이야기는 무시합니다. 모두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 문화 이야기이고, 우리나라의 모습입니다. 극단으로 달려가면 나뉘고 쪼개질 수밖에 없지요. 중도(中道)는 가운데가 아니라, 양극단이 아닌 자리입니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에 분노와 우울감이 앞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걱정입니다. 하지만 나라 걱정하는 이가 많으니 좋아지겠죠. 그렇겠죠.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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