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얕보지 말고 속을 깊이 보라

2023/10/11 10:54:21

얕보지 말고 속을 깊이 보라 사람을 보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우리말에는 사람을 보는 방법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스레 보고, 그윽하게 보는 것 역시 보는 방법이겠으나 주로는 강하게 보는 느낌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노려보는 게 있습니다. 겁을 주기 위해서 화가 났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옆으로 보면 주로 째려본다고 합니다. 눈을 옆으로 째고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을 치뜨고 보기도 합니다. 주로 작은 사람이나 힘없는 사람이 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올려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려본다는 말에는 부러움이나 존경이 담기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보는 것에 추상적인 의미를 더한 것입니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에는 반대의 의미가 담깁니다. 주로는 천시(賤視)의 느낌이 됩니다. 이럴 때 쓰는 표현이 바로 ‘얕보다’입니다. 얕보다는 말은 얕게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깊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여 얕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예 밑바닥까지 내려놓고 보기도 합니다. 이 경우는 ‘깔보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깔보는 것은 내가 눈을 아래로 깔고 보는 겁니다. 상대를 저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쁜 일입니다. 비슷한 말로는 낮보다가 있습니다. 이는 낮추보다의 줄임말입니다. 상대를 낮추어 보는 것입니다. 이때 주로 하는 행위가 바로 ‘깎아내리다’ 입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가 아닌 깎아서 더 작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래로 본다는 표현도 이때 쓰는 말입니다. 눈을 내리깔고 상대를 보는 것이니 어른이나 윗사람의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 앞에서 아랫사람은 눈을 치뜨게 되는 겁니다. 반항의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올려다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겁니다. 남을 깊게 보지 않고 얕보는 행위를 한자에서는 ‘멸시(蔑視)’라고 합니다.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해석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업신여기다는 어원을 ‘없이 여기다’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없이 여긴다는 말은 있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투명인간 취급했다는 요즘 표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따돌림의 현장에서 자주 사용하는 악한 행동입니다. 가장 사람의 자존감을 무너뜨립니다. 멸시의 다른 말은 그래서 무시(無視)입니다. 무시라는 말 역시 보지 않는 것이니 못 본 체하는 것입니다. 보이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 무시하는 겁니다. 저는 보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보는 게 중요한데 어떻게 보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렇게나 보면 안 됩니다. 보고도 없는 사람 취급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깊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럼 저절로 존경심이 생겨납니다. 누구나 사람은 그 속에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영어에서는 인터뷰(interview)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면 모든 이에게 존경심이 생기게 됩니다. 인터뷰를 통해서 단점도 발견하지만 장점도 보게 됩니다. 가벼운 겉모습도 보게 되지만 깊은 어둠도 보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사람의 깊은 속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 인터뷰하는 삶이었으면 합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표현을 부정적인 장면이 아니라 이해와 용서의 장면에서 쓰기 바랍니다. 한편 우리말에는 보는 것에 묘한 표현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다’입니다. 여기는 것은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보는 것에 생각을 담은 겁니다. 생각하면서 보면 달리 보입니다. 그것을 우리말에서는 ‘눈여겨보다’라고 합니다. 사람도 자연도 눈여겨보면 달리 보입니다. 새롭게 보입니다. 귀하게 보입니다. 서로 눈여겨보고, 얕보지 말고 깊이 보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귀한 사람이 될 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씨 없는 이름

2023/09/26 17:18:24

씨 없는 이름 우리말은 변화 속도가 참으로 빠릅니다. 따라잡기가 버거울 정도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엉킴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변한 말을 쓰는 사람과 예전대로 사용하는 사람 사이의 엉킴입니다. 특히 호칭의 변화는 놀랍습니다. 그야말로 변화무쌍(變化無雙)합니다. 양반과 상놈을 따지는 신분제 사회에서, 독재 정권의 사회, 철저한 자본주의의 사회를 거쳐서 어쨌든 겉보기에는 민주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높임법을 중요시하는 한국어의 특성상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호칭이나 지칭이 그렇습니다. 그중에서 이름 뒤에 붙는 ‘씨’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요즘 신문기사를 보면 알려진 사람에게는 씨가 붙지 않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씨를 붙이는 경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씨가 높이는 표현이었다면, 이제는 모르는 사람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범죄자에게 붙어있는 씨를 보면서 이게 민주적인가, 인권인가 하는 생각에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저런 사람도 존중해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한편 어떤 이에게 직위가 없으면 그냥 씨로 통일하는 느낌도 있습니다. 물론 씨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름 + 씨’의 경우는 다른 씨에 비해서는 친근한 느낌이 있습니다. 예전에도 이름에 씨를 붙이는 것은 주로 연인 사이에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성 + 씨’는 예전에는 그렇게까지 기분 나쁜 호칭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거의 낮춤으로만 쓰입니다. 직위도 직업도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합니다. ‘김 씨!’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면 어떨까요? 반대로 내가 ‘박 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무래도 성에 씨만 붙이면 불편한 느낌이 커졌습니다. 아마도 ‘김 씨, 이 씨’처럼 불러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성 + 이름 + 씨’는 객관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내용도 주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아직도 공공기관 등에서는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현용 씨!’라고 부르는 거죠. 예전에는 아주 당연한 호칭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씨가 점점 기분이 나빠지면서 이런 호칭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씨’ 대신에 ‘-님’을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아직도 님을 붙이는 게 어색합니다. 어색은 하지만 그런 변화라는 것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말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저는 ‘손님’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저를 부르는 사람은 주로 ‘고객님’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고객(顧客)은 사실 손님이면서 단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다지 그 가게에 고객이 아닌데, 저를 고객 취급해 주는 겁니다. 처음 갔는데 말입니다. 고마워해야 할지, 어색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많습니다. 손님이라는 말은 손에 ‘님’이 붙은 말입니다. 저는 종종 손이라는 표현만으로도 매우 좋은 느낌이 있습니다.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라는 성불사의 밤이라는 곡의 가사를 들을 때마다 손의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손을 높인 표현이 손님인데, 말의 인플레이션이 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문을 보면 금방 씨 없는 이름들이 보일 겁니다. 정말 어떤 이름에는 씨를 붙이고, 어떤 이름에는 씨를 뺍니다. 씨만 자세하게 들여다봐도 세상의 변화를 느낍니다. 여러분은 어떤 씨입니다. 어떤 씨로 불리고 어떤 씨를 부릅니까? 그럴 바에야 아예 씨를 없애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씨가 불평등의 요소가 되는 듯도 하니 말입니다.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만, 갑자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이 생각나서 미소 짓게 됩니다. 씨로 인해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지 않기 바랍니다. ‘감히 누구한테 씨야!’라는 말도 씁쓸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스러움에서 다움으로

2023/08/28 16:12:17

스러움에서 다움으로 한국어의 ‘-스럽다’와 ‘-답다’는 접미사입니다. 주로 명사 다음에 붙어서 형용사로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스럽다와 답다는 서로 다른 단어에 붙기도 하고, 같은 단어에 붙기도 합니다. 물론 같은 단어에 붙더라도 의미나 뉘앙스의 차이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른 단어에 붙는 경우에는 그 의미가 좀 더 뚜렷해집니다. 예를 들어 사랑스럽다는 가능하지만, 사랑답다는 어색합니다. 남자답다는 가능하지만, 남자스럽다는 어색합니다. 어른스럽다와 어른답다는 모두 가능합니다. 스럽다와 답다는 각각의 기능이 있고, 의미의 차이도 분명해 보입니다. 스러움은 그런 느낌을 나타내는 반면, 다움은 그러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어른스럽다는 말은 어른의 느낌이 있다는 말이지만, 어른답다는 어른으로서의 행위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어른스럽다는 주로 아이에게 쓸 수 있는 말이고, 어른답다는 어른에게는 쓰는 말입니다. 스럽다와 답다가 구별되어 사용하는 경우는 주로 사람에 해당하는 명사입니다. 물론 사람에 해당한다고 해서 두 접미사가 모두 쓰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궁금해지는 겁니다. 스럽다와 답다에 사람이 오지 않는 경우에는 의미를 구별하거나 설명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믿음직스럽다, 정성스럽다에는 믿음직한 느낌, 정성이 가득한 느낌을 나타낸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정답다는 정 그 자체라는 의미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름답다의 경우는 아름이 독립적으로 쓰이지 않기 때문에 어원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아름이라는 단어를 중세국어에서 나를 의미하는 아름으로 연결하는 것은 답다 앞에 주로 사람에 해당하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스러움은 강조되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에 사용되기에 사회언어학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어른스럽다는 가능하지만 아이스럽다는 안 됩니다. 여성스럽다는 가능하지만 남성스럽다는 어색합니다. 여기에서 어른이나 여성은 사회적 가치를 요구받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하고, 여성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겁니다. 아이나 남자에게는 ‘스러움’은 필요하지 않고, ‘다움’만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가치가 작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이 스럽다이고, 그 자체의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 답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답다에는 다양한 행동의 주체가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를 정의하는 가치에 걸맞다는 의미를 나타내게 됩니다. 나답다, 너답다, 그답다, 그녀답다, 한국답다, 미국답다, 서울답다, 부산답다 등의 말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답다는 접사 중에서는 매우 열려있는 접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적인 접사인 것입니다. 다만 다움이 긍정적인 가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범인이나 악마에도 범인다움이나 악마다움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움과 스러움을 보면서 여러 사회적인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때로는 다움은 필요하지만 스러움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성다움과 여성스러움의 간격을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아이는 아이다우면 되는데, 어른스러움을 요구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편으로는 다움도 일종의 규정지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자가 꼭 남자다울 필요도 없습니다. 여자가 꼭 여자다워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규정지음으로 인해 그 세상에 갇혀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러움과 다움의 벽을 벗어나는 사고도 필요한 세상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한류의 몰락

2023/08/01 11:51:15

한류의 몰락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화에도 흥망성쇠가 있습니다. 한류라는 한문화의 현상이 예쁨을 받음은 반갑고 고마운 일이지만 이도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생각보다 빠르고 급작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나쁜 마무리가 아니기를 빌고 있습니다. 한류가 세계 속에 널리 자리한 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한류는 결코 기적이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후의 참혹한 상황을 떠올리면 기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기적은 아닙니다. 한민족은 오랜 역사 속에서 이미 세계적인 문화 수준을 가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효나 퇴계의 정신세계는 불교나 유학에서 높은 경지에 있었습니다. 고려청자나 종묘의 미, 판소리 풍류 같은 흥은 세계 속에서도 훌륭한 모습입니다. 먼 옛날 북을 치며 신을 맞는 부여의 영고(迎鼓), 춤을 추면서 제를 올리는 예의 무천(舞天)은 신명의 세계였습니다. 정신도, 예술도, 흥도 한류 속에 깊이 담겨있습니다. 대중음악이나 영화, 드라마의 인기도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닙니다. 이미 6,70년대에도 수많은 영화를 찍어 왔고, 서양의 대중음악을 우리 것으로 훌륭히 소화해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청중과 시청자, 관객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성공하면 세계에서 성공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한류는 듣는 이, 보는 이, 하는 이가 함께 만드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날개가 더해져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넉넉해지면서 더욱 연예계에 투자되는 액수가 커졌음도 사실입니다. 더 좋은 인재가 모이기도 했죠. 민주화로 상징되는 한국의 사회 분위기는 다양한 모습을 담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영화, 드라마의 다양한 소재와 표현방식은 민주화의 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용 속에는 민주화를 비롯해 고통을 이겨낸 역사의 자취가 담깁니다. 일제강점기, 분단, 독재는 상처이면서 귀중한 경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한류는 모든 한국인의 공입니다. 그런데 한류를 한류답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가 있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한국 드라마가 세계 속에서 호평을 받은 이유는 가족의 따뜻함, 사랑이 기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나 가수의 겸손하고 노력하는 자세, 나누는 모습이 한류 열풍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류에 열광하는 사람은 한국 가수나 배우를 따라서 기부를 하고, 때로는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배우의 이름으로 나눕니다. 한국 드라마처럼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겁니다. 허나 한류가 조금씩 위험한 길로 가기도 합니다. 자칫 잘못 디딘 한 걸음은 한류를 몰락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사람보다 돈이 중요시되어 수많은 간접 광고로 작품을 망치거나 다른 문화를 가볍게 여기기도 합니다. 쉽게 차별을 용인하거나 차별의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나 대중음악이 점점 말초적으로 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말초는 말초를 부릅니다. 자극은 더 큰 자극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극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무너지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한류의 몰락입니다. 언젠가 한류는 다른 문화에 자리를 내어 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한류가 가졌던 좋은 가치는 좋은 기억으로 남기 바랍니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울고 웃고, 신명 나게 표출하면서도 나눌 수 있던 모습 말입니다. 얼마 전 방탄소년단의 10주년 기념행사가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팬들이 자발적으로 깨끗이 뒷정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한류의 희망이 다시 보였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맛나게 먹다

2023/07/19 16:35:34

맛나게 먹다 맛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의 생각은 어떨까요? 어떤 게 맛있는 음식일까요? 우리말은 맛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맛은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지만, 있다면 그것은 분명이 좋은 겁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표현이 바로 ‘맛있다’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맛은 있으면 무조건 좋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맛이 좋다’는 표현은 있지만, 맛이 나쁘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맛은 있으면 좋은 것이고, 맛이 좋지 않으면 우리는 ‘맛이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왜 맛은 있으면 무조건 좋다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그것은 맛의 다양함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맛은 단맛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음식은 써도 맛있고, 짜도 맛있습니다. 물론 시어도 맛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자면 달아도 맛이 없을 수 있고, 써도 맛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묘하지요. 그렇게 보면 맛은 맛을 보는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맛은 달라집니다. 저는 맛에 관한 우리말 감각 표현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짠맛도 아주 다양한 표현이 있습니다. 우선 간은 짠맛에 해당합니다. 간이 맞았다는 말도 짠맛이 적당하다는 의미입니다. 간간하다는 말은 짜기는 한데 괜찮은 느낌입니다. ‘간이 세다’라든지, ‘간이 부족하다’는 말도 대부분 짠맛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음식의 짠맛을 결정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간장’입니다. 간장은 짠맛을 조절합니다. 또한 ‘짜다’라는 말은 다양한 변신을 합니다. 사실 짜다는 말 자체는 약간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짜다가 반복이 되면 느낌이 좋아집니다. 짭짤하다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짭조름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역시 좋은 짠맛입니다. ‘짭조름’이 변하면 ‘찝찌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달다’도 비슷합니다. 달다는 말 자체로는 부정적인 경우도 있습니다만, ‘달달하다, 달콤하다, 달짝지근하다’는 좋은 느낌을 줍니다. ‘시다’는 겹쳐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만, 모양을 바꾸어 나타납니다. 바로 ‘새콤하다’입니다. 시큼보다 새콤은 좋은 신맛의 느낌입니다. ‘새콤’은 그래서 ‘달콤’과 짝을 이루기도 합니다. ‘새콤달콤’은 맛있는 맛의 예쁜 표현으로 보입니다. ‘쓰다’의 경우에 ‘씁쓸하다’는 약간 어두운 느낌입니다. 그래서 좋은 느낌을 나타내고자 할 때는 ‘쌉쌀하다’로 바뀝니다. ‘새콤’이나 ‘쌉쌀’은 밝은 모음으로 바꾸어 맛도 밝게 만든 겁니다. 한편 맛은 먹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결정이 되기도 합니다. 즉 먹는 마음 자세에 따라 맛이 음식 속에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음식은 맛있어 집니다. 그럴 때 쓰는 표현이 바로 ‘맛나게 먹다’입니다. 맛이 나오게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음식을 아주 맛나게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복스럽게 먹는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음식도 맛없게 깨작거리며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맛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을 가장 맛나게 먹는 방법은 좋은 사람과 먹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과 먹으면 음식은 맛이 더 생겨납니다. 우리말에서는 이런 관계를 식구(食口)라고 합니다. 먹는 입이라는 의미로 가족과는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나랑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식구입니다. 식구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행복한 겁니다. 보통 사이가 안 좋은 사람에게 ‘밥맛이 떨어지다’, ‘밥맛이 없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 역으로 밥맛이 나는 사람은 좋은 관계인 겁니다. 저는 요즘 산에서 도시락을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 귀찮을 수는 있지만 정성이 가득이어서 좋습니다. 오늘도 산에 올라 좋은 사람과 함께,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맛이 참 좋다, 정말 맛나게 먹었다.’라고 말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삼왕(三王) 이야기

2023/07/01 11:22:39

삼왕(三王) 이야기 ‘왕이 세 명 있었다’라고 하면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왕은 여자인 왕입니다. 제가 굳이 여왕이라는 표현을 피하는 것이 여왕이 특별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신라 시대에는 세 명의 여자인 왕이 있었습니다. 선덕왕, 진덕왕, 진성왕이 그들입니다. 세 왕의 칭호에는 원래 여왕이라는 말은 붙지 않습니다. 그냥 왕이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굳이 구별을 지으려고 여왕이라고 했던 것뿐입니다. 신라 시대에 여자인 왕이 셋이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혹시 한 명이었다면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셋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당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덕왕과 진덕왕, 진성왕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요? 여자이기 때문에 후대의 역사가들이 편견을 담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왕을 성별에 따라 구별하였다면, 남왕, 여왕이라고 하였어야 하지만 굳이 여왕만 ‘여’를 붙여 구별하는 것은 사회를 반영합니다. 이런 것을 언어학에서는 유표라고 합니다. 아직도 이런 현상은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여교수라는 말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선덕왕은 신라의 제27대 왕입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왕입니다. 선덕왕에 대해서 다양한 평가가 있습니다만, 황룡사 9층 목탑이나 분황사를 짓는 등 신라의 대표적인 건축물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다음 왕인 진덕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봐서 여자인 왕의 평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당태종이 선덕왕을 여자라고 하여, 사신에게 폐위하기를 이야기하나 결과적으로는 다음 왕 역시 여자가 왕이 되는 겁니다. 여자인 선덕왕이 문제가 있었다면 또 여자에게 왕위를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진덕왕은 삼국사기에 보면 키가 7척으로 나옵니다. 그야말로 당찬 왕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왕위에 올랐지만 김유신 등을 시켜서 백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무엇보다도 진덕왕은 신라의 왕 중에서 성골의 마지막 왕입니다. 다음 왕은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으로 이때부터는 진골이 왕이 됩니다. 진덕왕 시절에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활약하던 시기는 선덕왕과 진덕왕 시절인 겁니다. 세 번째 여왕인 진성왕도 명민하고 체격이 장부 같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진성왕은 역사책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각간 위홍과 염문이 있었고, 젊은 관료와도 염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이라는 위치를 생각해 볼 때, 여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루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였기 때문에 왕이었음에도 차별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진성왕 시절에 향가를 집대성한 삼대목이 만들어졌음은 주목할 만합니다. 다만 삼대목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음은 무척이나 아쉬운 일입니다. 국어사, 국문학사가 완전히 달라질 책입니다. 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진성왕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여전히 삼대목을 찾으러 다닙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세 왕은 모두 여자였습니다. 어쩌면 세 왕이 신라에서 나온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은 박혁거세와 함께 성인으로 불렸습니다. 원화는 선덕왕이 등극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던 신라의 여성 리더 조직입니다. 저는 신라에서 여자인 왕이 나온 곳은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름에 여왕을 붙여 부르는 것은 폄하하는 태도라고 봅니다. 선덕왕, 진덕왕, 진성왕으로 원래 이름을 불러야 할 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