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한자로 본 탐진치(貪瞋痴) 세상

2023/02/03 16:51:18

한자로 본 탐진치(貪瞋痴) 세상 한자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점에서 고맙습니다. 한자를 사용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한자를 공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특히 한자에 담긴 생각이나 지혜, 깨달음을 찾아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생각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불교에 관한 책을 보다가 깨달음을 방해하는 삼독(三毒)에 대해서 살피게 되었습니다. 늘 접하는 부분이지만 저에게는 느낌이 잘 안 다가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삼독은 바로 ‘탐진치(貪瞋痴)’입니다. 욕심을 내고, 성을 내고, 어리석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은 간단해 보이나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무엇에 대한 것인가 생각해 보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무엇에 대한 욕심인지, 왜 화를 내는 것인지, 어째서 어리석다고 하는 것인지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탐진치의 한자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자를 가만히 나누어 보니 옛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찾아낸 것과 불교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한자를 만들고 썼던 사람들의 감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가 있었습니다. 한자는 옛 생각의 보물창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늘 새롭습니다. 탐(貪)이라는 말은 이제 금(今)과 조개 패(貝)가 합쳐진 말입니다. 한자의 구성을 보고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패는 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지금 눈앞에 있는 돈에 마음이 가 있는 게 욕심입니다. 여기에서 돈은 다른 것으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눈앞에 갖고 싶은 것, 취하고 싶은 것에 얽매여 앞을 보지 못한다면 깨달음은 이미 끝난 겁니다. 나는 무엇을 그리 손에 꼭 쥐고, 놓고 싶지 않은지 살펴봅니다. 그것을 남들은 모를 거라 생각하고 때로늘 초조해 하며 때로는 미소 지으며 말입니다. 성냄의 진(瞋)이라는 말은 목(目)과 진(眞)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이 구성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참된 것을 바라보는 게 화를 내는 것이라는 게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봐도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 관한 책을 읽다가 글의 한 부분이 여기에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은 어떤 경우라도 올바르다고 보는 마음이 성냄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언제나 참이라는 생각은 다른 이를 함부로 재단(裁斷)하고 평가하고 무시하고 차별합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니 참을 보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내가 참이라고, 나만 참이라고 보는 것이 바로 ‘진’입니다. 이 글자는 눈 목(目) 대신에 입 구(口)를 써서 진(嗔)으로 쓰기도 합니다. 나만 참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어리석음의 치(痴)는 알다(知)와 병들어 ‘기대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이 글자도 묘합니다. 의미는 다르지만 아는 것이 병이라는 격언이 떠오르는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아는 게 어리석다는 점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그렇게 아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게 아닙니다. 알았다고,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병이 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며 안다고 하는 사람만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부처께서도 깨달은 척하는 사람의 위험함을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사실 모르면 배우면 됩니다. 모르는 게 많아서 즐거우면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병은 치유가 되고 밝아집니다. 그제 바로 ‘지(智)’입니다. 밝은 깨달음, 지혜입니다. 저는 탐진치(貪瞋痴) 삼독의 한자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눈앞에 갖고 싶은 것에 얽매지 말고, 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르는 것이 많음을 기뻐하고 열심히 배운다면 이미 깨달음의 길에 선 것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꽃이 피는 계절, 산유화

2023/01/03 10:38:48

꽃이 피는 계절, 산유화 추위가 다 지나면 드디어 꽃이 핍니다. 꽃샘추위는 꽃 피는 계절까지 추위가 남는 특별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봄인데도 추운 거죠. 꽃 피는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세상이 밝아집니다. 아마도 당연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 겁니다. 예상이 되면 진부한 글이지요. 꽃은 이렇게 봄의 상징입니다만, 우리는 뜻밖에도 당연한 사실의 반대쪽을 놓치고 삽니다. 그것은 꽃은 종류에 따라 피는 시기를 달리한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봄이 되기 전에도 피는 꽃이 있습니다. 겨울 속에서 이르게 피는 동백이나 매화가 있습니다. 그래도 봄에 가까운 거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네요. 아예 서리를 이겨내며 가을에 피는 국화도 있습니다. 가을바람에 하늘하늘 어울리는 코스모스도 있지요. 그 뿐이 아닙니다. 한여름에 피는 해당화나 배롱나무도 있습니다. 여름에는 한번 피면 오랫동안 피어 있기도 합니다. 산에 오르다보면 꽃이 없는 계절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름 모를 꽃이 연이어 피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시사철 꽃이 핍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꽃이 핍니다. 이런 깨달음은 이미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시에도 나타납니다. ‘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 여기에서 ‘갈’이 가을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만, 늘 피고 지는 꽃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가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소월은 ‘산에는 꽃 지네/꽃이 지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지네’로 시를 마무리합니다. 피는 꽃은 지게 마련이지요. 늘 피어 있다면 조화일 겁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조화도 살아있는 꽃의 향기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꽃은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합니다. 사시사철 계절을 바꾸며, 종류를 달리 하며 새 꽃이 핍니다. 계절을 좇아 피는 꽃은 저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꽃이 종류에 따라 피기를 달리한다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봄에 꽃이 피지 않았다고 서러울 이유도, 초조할 이유도 없습니다. 한여름에 피었다고, 한겨울에 피었다고 못난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홀로 피었기에 더 귀합니다. 더 반갑습니다. 다 알고 있는 말이지만 우리의 삶속에 녹아들지 않은 내용입니다. 봄에는 봄꽃이, 가을에는 가을꽃이 어울립니다. 그래서일까요? 소월은 산유화에서 ‘산에/산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고 노래합니다. 남을 따라 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꽃을 간절히 피우는 것입니다. 저만치 혼자 피었다고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꽃의 친구가 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꽃은 세상과 함께 살아갑니다. 혼자서도 외롭지 않은 삶을 삽니다. 그래서 산유화에서는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꽃이 좋아/산에서/사노라네’라고 노래합니다. 꽃의 친구는 꽃도 있지만 새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넉넉한 산이 있습니다. 꽃이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피고, 그곳에서 벗을 만나고, 거기에서 집니다. 삶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그걸 꽃에게 무심히 배웁니다. 지금은 꽃이 피는 계절입니다. 날마다 꽃이 피는 계절입니다. 날마다 꽃이 지는 계절입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특별한 날입니다.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산유화 시를 자세히 보면 시를 배열한 모습이 산을 닮았습니다. 한자 뫼 산(山)의 모습도 보입니다. 소월의 꽃 같은 유머라고나 할까요.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반말이 높임말이다

2022/12/26 16:34:34

반말이 높임말이다 요즘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옛글 읽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단 세 명이서 한국 어원학회에서 하는 모임인데 신나는 모임입니다. 신나는 이유는 모르는 게 많아서입니다.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은 배울 게 많다는 것이고, 배우면 내 그릇이 커집니다. 신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주에는 높임말과 반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높임말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저는 정말로 높임말이 문제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문제라고 하는 일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 좋다고 하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높임법을 걱정하는 사람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한 높임법과 그 속에 담긴 권위적인 태도를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저도 그런 점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높임법이 사람을 차별하는 데 쓰이면 안 됩니다. 저는 높임법의 기본은 상대에 대한 존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높임의 귀한 가치는 누구나 높이는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존대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서로를 높입니다. 존중하는 것입니다. 높임을 지나치게 형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높임은 귀한 가치가 됩니다. 그 누구 하나 높이지 않아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무시하고 낮추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높임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저는 높임말도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면 건네는 말 한 마디에 세상은 아름답게 변합니다. 그런데 지난 모임에서 스스로 반성했던 이야기는 반말(半 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반말은 높임말의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높임말의 정확한 반대는 낮춤말이었던 겁니다. 반말은 높임말과 낮춤말의 중간에 있습니다. 반쯤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말은 높임도 낮춤도 아닙니다. 물론 높임을 써야 하는데 반말을 하면 낮춤이 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하겠죠. 반말하지 말라는 말은 이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말은 주로 낮춤을 쓰기에 애매한 경우에 쓰입니다. 그래서 저는 반말은 굳이 보면 높임이라고 봅니다. 주로 하게체가 반말에 해당합니다. 해라체가 아주 낮춤에 해당하기 때문에 함부로 쓰기가 어렵습니다. 하게체를 쓰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게체는 주로 교수가 제자들에게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이가 많은 제자도 있었고, 이미 학교에서 선생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어려웠겠죠. 이때 하게체를 씁니다. 장인, 장모가 사위에게 해라체를 쓰지 않고 하게체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딸의 남편을 높이는 것은 곧 내 딸을 높이는 것도 됩니다. 아무리 손아래 사람이라고 해도 아주 낮춤을 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모임에서 나왔던 이야기로는 부모의 종에게도 반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종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었다는 말입니다. ‘~ 하게’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낮추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준 겁니다. 반말의 의미가 요즘은 아주 낮춤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원래 반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함부로 낮추면 안 되는 상황에서 살짝 높임의 등급을 올려 상대를 대우해 주는 반말에는 배려도 느껴집니다. 반말도 높임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기쁘고 즐겁게 사세요

2022/12/06 13:23:44

기쁘고 즐겁게 사세요 감정을 나타내는 말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깨달음을 주는 말도 많습니다. 우리말에서 아주 기분이 좋을 때 쓰는 말은 기쁘다와 즐겁다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네 인생이 늘 기쁘고 즐거우면 좋겠습니다. 모두 그렇게 되기 바랍니다. 범사에 기뻐하라는 말은 평범한 일에도 기뻐하라는 뜻이고 결과적으로 모든 일에 기뻐해야 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늘 기쁜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쁘다와 즐겁다의 의미 차이를 저에게 묻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다른 질문과 달리 이 질문을 제게 하는 사람은 대부분 답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답을 안다는 점을 내세우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 실력을 시험해 보려고 하는 듯도 합니다. 아무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쉽게 대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둘 다 좋은 감정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 표현하는 말이기는 한데 어딘가 차이가 있습니다. 잘 살피면 범위를 달리하는 부분이 보입니다. 이런 유의어는 많은 경우에 동의어와 차이 없이 쓰입니다. 정확한 용어로 보면 동의어는 엄밀히 말해서 없습니다. 완전히 같은 말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동의어라는 용어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의어는 사실 모두 유의어인 셈입니다. 동의어 중에는 부분 동의라는 말도 있는데 유의어가 바로 부분 동의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유의어는 같은 말이 아니라 비슷한 말이고, 비슷한 말은 사실상 다른 말입니다. 따라서 유의어를 논할 때는 공통점 못지 않게 차이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기쁘다와 즐겁다는 같은 상황에서 쓸 수 있지만 분명한 차이도 있습니다. 기쁘다와 즐겁다를 구별하는 가장 명확한 문장은 논어의 첫구절의 예입니다. 우리가 보통 학이편(學而編)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 기쁠 열이 나옵니다. 그리고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訪來 不亦樂乎)’에 즐거울 락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기쁜 것은 배우는 것이고, 즐거운 것은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즉 기쁜 것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입니다. 배우는 것은 기쁨입니다.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때로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좋은 스승에게 배울 때 우리는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낍니다. 희열(喜悅)은 기쁨의 뜻이 반복된 말입니다. 기쁘고 또 기쁜 일입니다.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속에서 익을 때 더 기쁜 것입니다. 즐겁다는 기본적으로 혼자만의 감정이 아닙니다. 더불어 함께의 감정입니다. 논어에서는 붕우를 이야기했습니다. 벗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한자를 좋아합니다. 월(月)은 여기에서 육(肉)을 의미합니다. 몸은 곧 나입니다. 내 몸이 하나 더 있는 것이 바로 벗입니다. 벗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슷한 또래일 필요는 없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 함께 있고 싶은 사람,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은 모두 벗입니다. 그 사람이 멀리에 있었다면 무척 그리웠겠지요. 물론 만나지 않아도 늘 마음으로 함께 하는 존재이지만 만나면 몸과 몸이 가까이 있기에 더 좋습니다. 그때의 감정이 즐거움입니다. 저는 이 감정을 관계와 사회성의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 두 감정이 섞입니다. 그래서 두 감정의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누구와 함께 있어서 생긴 감정은 즐거움이지만 그 때 내 속에도 기쁨이 넘치니 즐거움과 기쁨은 통합니다. 나는 혼자 있으니 기쁜 감정일 테지만 마치 누구와 함께 하는 느낌이라면 즐거움이 됩니다. 노래를 듣고, 책을 읽을 때도, 사랑하는 이를 생각할 때도 즐겁습니다. 기쁨이 곧 즐거움입니다. 저는 우리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기 바랍니다. 혼자서도 기쁜 하루하루가 되고, 이왕이면 함께하는 즐거운 나날도 되기 바랍니다. 배워서 기쁘고, 함께 하여서 즐겁다는 그 말이 참 좋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체념과 깨달음의 세계

2022/11/07 11:17:47

체념과 깨달음의 세계 길을 걷다보면 갈림길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길을 택하면 다른 길을 포기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인생에서는 그런 장면이 많습니다. 둘 다 손에 넣을 수 없는 경우에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괴로운 순간입니다. 이 때 들려오는 단어가 체념입니다. 삶이라는 길에서 우리는 선택을 하고 체념을 합니다. 체념(諦念)이란 말을 들으면 포기(抛棄)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전에 저에게 체념과 포기라는 말의 의미 차이를 물으셨던 분이 생각납니다. 사실 체념과 포기를 구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체념이 곧 포기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하지만 체념과 포기는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 포기(抛棄)의 한자를 보면 던질 포에 버릴 기입니다.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이겠으나 권투 시합에서 게임을 포기할 때 코치가 수건을 던지기도 합니다. 던져 버리는 것이 포기를 의미하는 겁니다. 다 던져버리고 싶다는 말이 무섭게 들립니다. 일본어에서도 포기한다는 의미의 단어에 체(諦)를 씁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일본어에서도 포기와 체념이 잘 구분되지 않는 듯싶습니다. 주변에 수학 공부가 어려워서 포기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그런 학생을 수포자라고 합니다. 수학을 포기한 자라는 말입니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 정말 모르겠으면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바로 포기의 충동입니다. 마라톤을 할 때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주저앉아 일어나기 싫은 마음입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참 많습니다. 사는 게 포기의 연속이라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저는 포기라는 말과 체념이라는 말을 들으면 소유의 느낌이 납니다. 포기라는 말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다는 느낌인 반면, 체념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왠지 포기라는 말에는 아쉬움이 강하게 느껴지지만, 체념에는 그 정도의 느낌은 아닙니다. 체념에서는 오히려 달관의 경지마저 느껴집니다. 사실 체(諦)라는 말은 포기와 관련이 되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체는 깨달음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한자 체(諦)의 의미를 찾아보면 ‘살피다, 조사하다, 자세히 알다, 소리 내어 울다, 진실, 깨닫다’의 의미입니다. 이 중에서 ‘진실’과 ‘깨닫다’는 의미는 불교의 의미라고 합니다. 즉, 체념이라는 말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살피는 생각이고, 깨달음의 생각인 셈입니다. 세상을 살면서는 체념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 것이라고 딱히 이야기하기에는 곤란한 것이 많기 때문에 손에서 놓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착(執着)은 체념의 반대말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싶어 하고, 손을 놓지 못하는 수많은 것을 살피고, 조사해서 자세히 알아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진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본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념은 깨달음입니다. 나를 자라게 합니다. 저는 체념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동안은 포기하고 말았던 수많은 일들이 왠지 깨달음을 위한 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의 포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강박관념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내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 모든 것을 다 이루어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심한 고통이 될 수 있음도 알아야 할 겁니다. 살면서 우리에게는 종종 체념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집착의 마음을 옅게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고 알게 되는 일, 이것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일은 소중한 깨달음일 겁니다. 꽉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습니다. 마음이 편하네요. 엷은 미소를 짓게 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심심한 사과가 심심하다

2022/09/28 11:05:06

심심한 사과가 심심하다 문해력이라는 어려운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한국어 어휘 공부를 평생 하고 있는 저도 문해력이라는 말을 들은 지 그리 오래 안 되었고 사용해 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굳이 보자면 학술어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문해력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을 겁니다. 주로 문해력의 개념을 어휘력과 혼동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문해력이라는 어려운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한국어 어휘 공부를 평생 하고 있는 저도 문해력이라는 말을 들은 지 그리 오래 안 되었고 사용해 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굳이 보자면 학술어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문해력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을 겁니다. 주로 문해력의 개념을 어휘력과 혼동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저는 문해력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답답한 부분이 있습니다. 문해력이 없는 게 어찌 아이들만의 탓일까요? 아이들의 흥미를 고려하지 않은 내용, 비비 꼬아놓은 글을 읽고 답을 고르게 하는 평가, 쓰고 싶은 다양한 글감을 다루는 시간이 없는 등 교육의 문제는 없을까요? 문해력의 문제에는 많은 현상이 연결됩니다. 또한 지나치게 어려운 단어나 표현을 쓰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을까요? 최근에 ‘심심한 사과’에 대한 이야기가 문해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예로 등장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라 심심한 사과의 진정성에서 출발하였다고 봅니다. 요즘에는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에서 깊은 사과와 진정한 사과의 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 표현이 변명의 말처럼 들리는 것은 저뿐일까요? 마치 유감을 표명한다는 표현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저는 종종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잘못이 드러나서 기분이 좀 그렇다는 것인가 헷갈립니다. 변명의 느낌 아닌가요? 저에게는 변명으로만 들립니다. 그러니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오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솔직하게 하여야 문해력이 생깁니다.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만한 말로 하는 게 의사소통의 시작입니다. 저에게도 유감스럽지만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은 그저 심심한 찌개를 먹듯이 별 감흥이 없습니다. 의사소통은 내가 한 말을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이해해야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문해력은 상호적입니다. 어쩌면 현재의 문해력을 늘리는 지름길은 한자공부를 강화하는 것일 겁니다. 주로 모르는 어휘표현은 한자어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가능하면 책이나 신문에 한자를 병용하면 좋겠죠. 고전을 많이 읽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걸 원하는가요? 교육과정을 바꾸는 논의를 시작해 보면 어떤 결말이 나올까요? 제가 볼 때는 생산적 결말이 아니라 다툼만 일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 더 디지털 문해력이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요? 그 말이 더 어렵네요. 역시 이 말도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디지털 문해력이 부족해서 문제라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디지털 문해력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본인의 생각과는 많이 다른 뜻일 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