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늘 푸른 소나무는 늘 변하는 소나무

2022/09/14 16:05:28

늘 푸른 소나무는 늘 변하는 소나무 늘 푸른 나무라는 말은 한자어로 하면 상록수입니다. 심훈 선생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김민기 선생의 노래 제목이기도 합니다. 상록수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추억이 다를 것입니다. 상록수의 노래 가사와 힘든 역경을 이겨내는 장면들은 늘 감동적입니다. 늘 푸르고 싶다는 것, 거친 세상을 꿋꿋이 이겨내고 싶다는 희망을 안고 사는 것은 처절한 아름다움입니다. 푸르다는 풀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말의 푸른색은 풀색인 셈입니다. 푸르다라는 말이 하늘이나 바다를 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푸름의 기본은 풀이나 나뭇잎의 색깔입니다. 많은 언어에서 풀색과 하늘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색깔의 구분도 중요한 문화의 특징인 셈입니다. 우리말에서도 구별하지 못하는 색이 많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언어보다 세밀하게 색을 구분해 내기도 합니다. 푸름의 상징으로는 소나무를 들 수 있습니다. 보통 상록수라고 하면 소나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솔잎이 사철 푸르기에 생긴 상징일 겁니다. 애국가에도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소나무는 사군자 중의 하나가 아닌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란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보다 소나무를 더 좋아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철 푸르게 우리와 늘 함께 있기 때문이겠죠. 늘 푸르다는 말을 우리는 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생각하고 칭송합니다. 잎이 나고 자라고 색이 변하고 낙엽이 되는 나무와는 달리 늘 푸르기에 지조라든가 정절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산을 걷다가 소나무에 대한 설명을 보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사실일 텐데 무감각하게 지나간 것일지도 모릅니다. 늘 푸른 소나무의 비결을 설명해 놓은 글이었습니다. 소나무는 늘 잎이 떨어지고 다시 생겨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푸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죠. 한 번 생겨난 잎이 오랜 세월을 지켜나갈 수는 없겠죠. 늘 똑같은 잎으로 푸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상록수라는 말에서 같은 푸름, 변하지 않는 푸름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상록은 늘 같은 푸름이 아니고 늘 변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늘 푸른 소나무는 늘 변하는 소나무이고, 늘 새로운 소나무입니다. 저는 이 말을 쓰면서 가슴이 뜁니다. 달리 말하면 늘 새로워지는 나무가 상록수인 셈입니다.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어, 마침내 어제가 내일이 된 소나무입니다. 그래서 늘 푸른 소나무, 시시각각 새로운 소나무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소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늘 똑같기 때문이 아니라 늘 새롭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저는 걷는 일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답답한 마음을 떨치려 걸었는데 요즘에는 걷는 것 자체에 힘든 기쁨을 얻습니다. 몇 시간을 걷다보면 조금 전과 달라져 있는 스스로를 느끼게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걸으면서 땀을 흘리고 물을 마시며 새로운 내가 됩니다. 나를 바꾸고 있는 시간인 셈입니다. 바뀜을 느끼는 고마운 순간인 셈입니다. 제가 주로 걷는 숲에서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를 만납니다. 대관령과 안면도의 소나무 길도 참 좋습니다. 축령산의 잣나무 숲길은 위로와 치유를 선물합니다. 월정사의 전나무 숲은 참 평화롭습니다. 늘 푸르기에 계절마다 느끼는 감정도 다릅니다. 고마운 감정입니다. 문득 늘 새로우려면 늘 덜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늘 푸르려면 집착을 버리고 날마다 새로운 일을 찾아서 앞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감정의 위로

2022/08/02 11:19:53

감정의 위로 우리말은 감정에 대한 어휘가 발달한 언어입니다. 형용사가 발달하였다는 것도, 감각을 나타내는 말이 발달하였다는 것도 모두 감정과 연계됩니다. 의성 의태어나 색과 관련된 표현이 많은 것은 우리의 감정이 움직이고 보는 것의 다채로움을 알게 합니다. 어휘에 나타난 감정을 살피다보면 뜻밖의 위로를 얻게 됩니다. 마음이 참 편해집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아름답다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만, 중세국어에 나오는 아름은 ‘나’라는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름답다를 ‘나답다’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알맞아 보입니다. 이렇게 해석하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나다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내가 귀해야 모두가 귀한 거죠. 사랑한다는 말은 원래 생각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말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를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생각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기도 합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 있어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이겨내는 힘을 갖습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강하다는 말은 참으로 맞습니다. 울다와 웃다는 울림의 감정입니다. 슬픔이나 기쁨에 앞서는 울림입니다. 울다에 나온 울리다는 이런 감정의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는 것은, 그래서 웃는 것은 근본적으로 ‘혼자’하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 울면 같이 울고, 누가 웃으면 우리도 웃습니다. 감정이 울려옵니다. 거울효과라고도 하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합니다. 이건 노력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그대로 감정의 울림에 맡겨두면 되는 일입니다. 저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슬픔이 없는 인생은 불가능합니다. 헤어짐이 없는 삶이 없기에 슬픔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감정입니다. 그래서 싫었을 겁니다. 슬프다는 말과 싫다는 말은 어원이 같습니다. 슬픈 게 싫고, 싫은 게 많아서 슬픕니다. 여러 번 싫다와 슬프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슬픔을 피하는 방법이나 싫음을 이기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싫어하지 않으면 슬픈 일도 줄어듭니다. 기쁘다와 즐겁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둘 다 좋은 감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용하는 장면을 보면 기쁘다는 주로 개인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반면 즐겁다는 여럿이 함께 느끼는 감정입니다. 배우고 익히는 것이 기쁘고, 벗과 함께하니 즐겁다는 논어의 구절이 기쁘다와 즐겁다를 잘 나누어 보입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하루하루 자라는 기쁜 삶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바랍니다. 예쁘다는 보호하고 싶다는 감정입니다. 아름답다와 느낌이 다른 것은 보호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쁘다면서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꽃도, 아이도,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그렇습니다. 어여삐 여긴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아끼는 것입니다. 아낀다는 말도 아깝다는 말과 연관이 됩니다. 쥐면 터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자식을 예뻐하고 아끼던 부모님의 감정이 떠오르는 말입니다. 우리말은 감정이 발달한 언어입니다. 감정이 발달하였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고, 변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이야기한 감정에 대한 단어를 보면서 마음의 위로가 생겼기 바랍니다. 말은 마음이고 감정이고 힘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심장이 뛰다

2022/07/05 15:36:15

심장이 뛰다 심장(心臟)은 순우리말로 염통이라고 하는데 가만히 보니 염통도 한자로 보입니다. 생각할 염(念)에 무엇을 담는 통(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북한에서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려고 할 때 혁명의 심장이라는 말을 혁명의 염통이라고 하면 어색하지 않겠냐고 했던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어쩌면 심장도 염통도 한자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염통의 염을 생각 염이 아닐까 추측한 것은 심장이 생각의 기관이라는 느낌이 문득 들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가슴으로도 합니다. 감정으로 느낄 때는 우리의 가슴이 생각의 주체입니다. 머리가 아픈 것과 가슴이 아픈 것을 떠올려 보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입니다. 가슴 속의 생각을 우리말로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몸과 분리된 것이 아니기에 우리 몸은 그대로 맘이기도 합니다. 가슴 부위를 몸통이라고도 하는 거로 봐서 비유이기도 하겠지만 가슴이, 몸이, 심장이 그대로 마음입니다. 심장은 뛰는 곳입니다. 뜨거운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심장이 뛸 때는 감정이 솟을 때입니다. 그래서 심장이 뛰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두렵고 걱정이 깊을 때 심장은 두근거립니다. 두근두근은 심장의 소리입니다. 심장이 뛰면 힘이 듭니다. 어쩔 줄 모르는 내 마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너무 심장이 뛰면 터질 것 같습니다. 높고 가파른 산을 오를 때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이라고 할까요? 숨이 막힐 지경으로 뜁니다. 심장은 내 맘대로 할 수 없어 더 힘이 듭니다. 어떨 때는 잘 때도 심장이 뜁니다. 가장 평온해야 하는 시간인데 말입니다. 아마도 꿈속에서 나도 모르는 괴로움에 염려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뛰는 게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심장이 뛰면 깊은 수면이 어렵습니다. 문득 새벽에 깨어나 어쩔 줄 몰라하거나 멍하니 앉아있는 것은 내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방법을 씁니다. 단전호흡이나 요가, 명상이 그런 겁니다. 좋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파도 소리나바람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자연의 소리에 내 심장의 박동을 맞추면 좀 낫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숲을 걷는다든지, 모닥불 앞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것도 모두 심장에 관한 일일 수 있겠습니다. 반대로 아예 심장을 최대한 뛰게 하기도 합니다. 그건 내 심장이 뛰는 상태에 내가 익숙하게 하려는 것이고, 폭발할 것 같았던 심장이 원상태로 돌아왔을 때, 내 심장의 박동에 편안함을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심장에서 비롯되어 심장으로 마무리됩니다. 불안이라든가 염려라든가 우울이라든가 고통이라든가 서러움이라든가 슬픔은 모두 심장으로 이어집니다. 요즘 저는 심장이 마구 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저도 모르는 불안 때문입니다. 어쩌면 알고 있는 가라앉음이겠네요. 가라앉아도 심장은 뜁니다. 가슴 속에 뛰고 있는 심장이 다스려지지 않아서 전에 배운 단전호흡을 하고 선인들의 수행을 따라 합니다. 조금은 나아집니다. 요즘은 차고 있는 시계에 심박 측정 기능이 있어서 가끔 눈길을 주기도 합니다. 어느 때 내 심장은 편안한가를 살펴봅니다. 오늘 책을 읽다가 문득 박동의 수치를 살폈는데 무척 낮게 나왔습니다. 마음이 편안했나 봅니다. 읽던 책이 고마웠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한국어 교육은 치유

2022/06/08 09:38:13

한국어 교육은 치유 인류의 진보가 계속되면서 가장 먼저 사라질 직업으로 번역가와 통역사를 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외국어 교육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기계가 통역과 번역을 능숙하게 하는데 왜 외국어를 배울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시대에는 외국어교육이 필요 없을까요? 자동번역의 시대에도 외국어교육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런 세상에서 한국어교육은 필요할까요? 인공지능 시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언어번역과 통역이 정확하게 이루어질 겁니다. 인공지능의 많은 명령이 언어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고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단순히 언어를 습득할 뿐 아니라 상황에 맞추어 인간과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인간을 위로하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어 교육, 학습은 필요할까요? 저는 이러한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정말 AI시대에 외국어공부가 필요할까요? 모든 통번역이 가능한 시대에 외국어는 왜 배워야 할까요? 외국어를 지식의 수단으로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외국어를 배우지 않는 것이 정답일 겁니다. 그러나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정보 습득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외국어를 배워서 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려는 것이고, 그들이 쓰는 문화를 배우고 느끼려고 배우는 겁니다. 외국어 학습을 통해 인간은 새로운 능력을 개발하기도 합니다. 언어는 단순히 정보가 아닙니다. 언어는 인간 그 자체라고 할 정도 수많은 인간의 사고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언어에는 문화가 반영되어 있죠. 따라서 언어를 배우면 인간에 대하여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게 됩니다. 즉 인간에 대해 공부하고, 말 속에 담긴 진리를 파악하는 것도 외국어 교육의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겁니다. 또한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행위는 그 자체로도 심리적 위안이 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외국어 교육을 경쟁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과 치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접근 방법이 다릅니다. 지금까지의 외국어교육은 경쟁의 도구였으며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점수가 중요하고 합격 기준이 되는 언어교육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언어교육은 경쟁 이외의 목적이 오히려 큽니다. 심리적인 치유가 언어 교육에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독서, 글쓰기 등을 활용한 치료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분야도 모두 언어교육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한 음악. 미술, 무용 등을 활용한 예술 치료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한류, 국악, 민요 등을 활용하는 한국학 교육의 범주에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겁니다. 학습자에 따른 맞춤 치유는 학습자의 동기 유발, 유지에도 도움이 됩니다. 또한 언어를 배우면서 새롭고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도 언어교육 치유는 앞으로의 세계에 꼭 필요한 언어교육 방안이 될 겁니다. 저는 한국어교육이 인간의 치유에 기여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 중에는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치유가 필요하지 않은 학습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한글학교에 다니는 재외동포 아이들, 한국에 온 유학생,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중도입국청소년, 해외입양인 등을 생각해 보면 느낌이 더 다가올 겁니다. 또한 급증하고 있는 한국어 성인학습자, 고령자 학습자를 생각해 보면 언어교육 치유가 언어교육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에게도 한국어교육이 치유의 방안임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행복해 졌다는 선생님도 아주 많습니다. 한국어교육은 치유입니다. 앞으로 꼭 기억해야 할 가치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기다리는 사람

2022/05/11 10:06:35

기다리는 사람 저는 요즘 기다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보통은 기다린다고 하면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겠지만 저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를 기다린다고 하니 마치 세월을 낚는 강태공이나 된 듯하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때마다 바뀌는 자연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생이 짧게 느껴지는 것은 기다리는 게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사실 지나간 것은 아득합니다. 내 옆을 지나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지난주 일이 까마득한 과거로 느껴집니다. 이상한 일도 아닐 겁니다. 요즘 기다리고 있는 일은 무언가요? 기다린다는 말은 보고 싶다는 말도 됩니다. 보고 싶으니까 기다리지 보기 싫은데 기다리지는 않겠죠. 아름답다는 말이 보고 싶다는 말이라는 이야기도 일리가 있습니다. 보기 싫은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마다 보고 싶은 것이 다를 테니 말입니다. 일률적인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그러니 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 될 겁니다. 저는 기다린다는 말에서 ‘길다’의 흔적을 봅니다. 길다와 관련이 있는 단어로는 ‘기다랗다’가 있습니다. 기다리다와 기다랗다가 닮아서 왠지 기분이 좋습니다. 어원적으로는 더 공부해봐야 하겠습니다만 감정적으로는 두 단어가 이어집니다. 물론 기다랗다는 구체적이고 기다리다는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이 추상적으로 변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그리다’가 그림을 그리다와그리워하다의 의미로 나누어지는 것도 그러한 예입니다. 저는 기다림이 많으면 삶을 길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서 인생을 짧게 사는 사람은 기다림이 적은 사람입니다. 기쁘게 기다리는 일이 없는 사람은 인생이 참 덧없고 허무하고 짧을 겁니다. 기다리면 시간이 느리게 갑니다. 단지 그래서 길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천천히 가기는 하지만 설레는 마음이 있기에 기다림은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가슴 두근거리며 하루를 살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어떤 날을 기다리며 사는가요? 저는 요즘 숲길을 걷고 산을 오릅니다. 걸음걸음마다 가장 고마운 일은 주변이 늘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계절마다 내보이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걸을 때마다 기대감이 한가득입니다. 현재를 즐기면서도 미래를 꿈꿉니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겨울 눈길을 걸으면 새하얀 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합니다. 그러면서도 금방 봄이 오면 이 산에도, 이 길에도 꽃이 필 거라고 기대합니다. 생각만으로도 기쁩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계곡에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고, 숲이 푸르기를 기다립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겨울에는 눈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꽃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돌고 돕니다. 그러니 기다림에는 끝이 없습니다. 작년에 봤을 텐데 늘 새롭습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비슷할 텐데 우리는 종종 기다림을 놓치고 사람을 놓칩니다. 사랑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만남을 기다리고, 웃음을 기다립니다. 새로운 만남에 기뻐하고 오랜 만남을 즐거워합니다. 기다림은 지침이 아니라 설렘입니다. 만약 기다림이 없다면 앞으로 시간이 오는 게 두렵겠죠. 두려우면 당연히 사는 게 힘들 겁니다. 세상을 살면서 기쁘게 기다리는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 사는 게 기다려지기 바랍니다. 나는 오늘도 걷는 사람입니다. 나는 오늘도 새로움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너무의 세계

2022/04/28 14:08:13

너무의 세계 너무는 <넘다>에서 온 말입니다. ‘넘’에 우가 붙어 만들어진 부사입니다. 사전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정한 한계를 넘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계를 넘는 것에는 좋은 의미도 있고 나쁜 의미도 있겠습니다만 너무라고 하면 주로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아예 설명을 할 때 부정적인 느낌에 쓰이는 표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너무를 강조할 때는 <너무나>라고도 합니다. 더 부정적이지요. 또한 너무에 ‘하다’가 붙으면 이런 느낌이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너무하다는 말 자체로도 지나치다는 느낌이 강한 겁니다. ‘너무해요’라는 말의 느낌은 어떤가요? ‘너무하지 않아요?’라는 말에서 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지나친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에서 부정적 느낌이 강조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넘다와 형제인 어휘로는 <남다>가 있습니다. 주로 이렇게 모음이 바뀌면 핵심적인 의미는 같지만 느낌은 확 달라지기도 합니다. 넘다가 지나침이 주 느낌이라면 남다는 넉넉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남다에서 온 말로는 <남짓>을 들 수 있습니다. 남짓은 조금 넘는 정도라는 의미입니다. 즉 넘기는 하지만 지나치지는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남은>도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열에서 조금 남는다는 의미입니다. 한자로 하자면 ‘십여(十餘)’가 됩니다. 너무 많이 넘는 것은 남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남다에서는 여유가 느껴집니다. 너무가 부정적이어서 그런지 너무가 앞에 붙으면 우리는 걱정이 됩니다. ‘너무 아프다, 너무 나쁘다, 너무 싫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부정의 느낌을 더욱 강조합니다. 너무 힘든 느낌의 어휘라고나 할까요? 어휘 자체에 부정적인 느낌이 없어도 너무가 붙으면 걱정거리입니다. ‘너무 크다, 너무 많다, 너무 달다’ 등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너무는 너무합니다. 크고, 많고, 단 게 나쁜 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너무라는 말이 감정을 부정적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실제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를 활용해서 자신의 감정을 좋게 분출합니다. 오히려 긍정을 강조하는데 쓰고 있는 겁니다. 너무 좋고, 너무 예쁘고, 너무 멋있습니다. 너무 맛있는 음식도 많고, 너무 가 보고 싶은 곳도 많습니다. 너무의 세계가 좋은 감정의 과잉분출로 나타난다는 점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너무’라는 말 대신에 <아주>나 <매우>, <정말> 등을 쓰면 맛이 안 나는 느낌도 있습니다. 특히 입말, 구어에서는 너무가 ‘딱’인 상황이 많습니다. 부정을 뛰어넘을 때 나타나는 긍정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주 좋아요, 정말 좋아요.’와 ‘너무 좋아요.’의 느낌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부정의 너무가 아니라 <긍정의 너무>를 사용할 일이 많기 바랍니다. 한편 뜻밖에도 너무가 부정의 표현과 어울려도 느낌이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가 지나치다는 의미로 쓰이다보니 지나친 장면을 말리는 경우에는 오히려 너무가 위로가 됩니다. 대표적인 표현이 바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걱정이 지나치면 힘이 듭니다. 잘 될 거라는 위로의 말을 할 때 지나침을 막는 말인 너무를 쓴 겁니다. 너무의 특별한 변신이지요. 너무 우울해 하지 마세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너무 의기소침해 있지 마세요. 다 잘 될 겁니다. 내가 옆에 있잖아요. 힘들면 이야기하세요. 같이 이겨내도록 해요. 오늘 날씨도 너무 좋은데 같이 걸으며 이야기 나눠요. 생각만 해도 너무 좋지 않습니까? ‘와! 너무 좋다~’ 한 번 입 밖으로 외쳐 볼까요.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