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신어 유행어의 세계, 언젠가는 지나간다

2022/04/18 14:13:13

신어 유행어의 세계, 언젠가는 지나간다 2020년은 20이 두 번 반복되어 왠지 기분이 좋은 해였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일본이 하계 올림픽을 그 해로 유치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2020년의 시작은 끔찍했습니다. 코로나가 급속도로 펼쳐지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에는 19라는 숫자가 붙어있지만 일반인의 인식 속에는 코로나라고 하면 20이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코로나 탓에 2020년에 동경 올림픽은 개최되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즐거운 일이 하나 줄어들었고, 2020년에 맞추어 준비해왔던 수많은 일이 어그러졌습니다. 2021년에는 통째로 기억에서 사라진 느낌입니다. 수많은 일이 있었을 겁니다. 1년 미루어진 동경 하계올림픽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답답해 하고 힘들어 하며, 하루하루를 지낸 해로 기억이 될 겁니다. 코로나 시대의 한 가운데인 셈입니다. 피시알 검사에 의한 확진자 수가 매일 발표되고, 자가격리자의 뉴스가 매일 나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 의한 영업시간 단축이나 모임인원 제한이 일상화되었습니다. 배달이 늘고 거리에는 오토바이 천지입니다. 비대면이 익숙해지고, 때로 편안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줌이 일상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네요. 2022년은 2가 세 번이나 들어가는 해이기에 왠지 기분이 좋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북경 동계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중국은 숫자의 상징에 관심이 많은 나라입니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숫자는 8입니다. 그래서 2008년 8월 8일에 북경 하계올림픽을 열었습니다. 2는 따로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기분이 좋은 것 같습니다. 2는 우리말로 둘인데, 둘은 함께 하면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짝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둘이지만 하나입니다. 대학에서는 22학번을 둘리 학번이라고 합니다. 둘과 2(리)를 합친 표현입니다. 아기공룡의 이름을 딴 것이어서 그런지 귀여운 느낌이네요. 2022년 2월 22일은 2가 여섯 번 들어간 아주 특이한 날이었습니다. 특이한 것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위의 내용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몇 년 사이에 새로운 말이 많아지고, 유행하는 말이 확 바뀌었습니다. 단기간에 코로나를 겪으면서 세상의 언어가 달라진 겁니다. 우선 코로나라는 말 자체가 새로 들어온 말입니다. 전문가 사이에서만 쓰이던 전문용어가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한참 동안 코로나를 ‘콜레라’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코로나가 콜레라의 괴로운 기억을 소환하였나 봅니다. 어려운 시기에 말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확진자라는 말은 확찐자라는 신어를 만듭니다. 집에만 있어서 살이 쪘다는 자조 섞인 표현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표현도 끔찍한 표현입니다. 가족이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는 시간이 몇 년 동안 흐르고 있습니다. 결혼식을 축하하지 못하고, 누가 돌아가셔도 함께 슬퍼하지 못합니다. ‘오미크론’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생소한 표현이었습니다. 델타까지는 알겠는데 오미크론은 도대체 뭔가 하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금방 오미크론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코로나와 오미크론은 나중에 이 시대를 회고할 때 중요한 단어가 될 겁니다. 오미크론이라는 말 자체가 오래 쓰이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델타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신어와 유행어는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하는 표현들입니다. 매년 신어와 유행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의미에서 신어와 유행어의 수명도 짧은 편입니다. 시대가 바뀌면 말은 다시 바뀌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끔은 신어의 유행이 지속되어 새롭게 사전에 담기기도 합니다. 저는 코로나 시대에 유행했던 표현들이 어서 그때를 회고하는 표현으로 남기 바랍니다.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 하는 표정을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다 지나갈 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호두 두 알

2022/03/15 11:22:25

호두 두 알 호두는 호도(胡桃)에서 온 말로 호(胡), 즉 중국에서 들어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복숭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호두는 주로 씨의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호두의 모양이 복숭아씨와 닮았습니다. 발목의 복숭아뼈도 호두 모양이네요. 호는 본래 오랑캐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정확히 중국은 아닐 수 있겠네요. 어쩌면 지금의 중국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습니다. 아무튼 호(胡)는 우리나라에서 중국을 가리킬 때 사용하던 몇 이름 중의 하나입니다.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당입니다. 우리는 중국이라고 하면 당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당은 중국이 가장 번성하던 시기를 가리킵니다. 당진(唐津)은 당나라로 가는 포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나라로 갔다기보다는 중국으로 가는 항구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일본 큐슈에도 똑같은 한자의 지명이 있습니다. 호가 쓰이는 말로는 호떡이 있습니다. 호떡은 중국 떡입니다. 호빵은 중국과는 관련 없는 빵으로 그저 상표라고 할 수 있으나 호떡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단지 추운 겨울에 ‘호~’ 하고 불어가며 먹는 따뜻한 느낌이 남아있습니다. 호주머니도 중국식 주머니입니다. 원래 우리 주머니는 옷에 달려있지 않고 따로 차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듯합니다. 복주머니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호박에도 호가 보입니다. 박은 우리말이지만 호는 중국을 나타냅니다. 한편 후추는 호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호추에서 바뀐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후추는 고쵸가 후추였습니다. 그런데 고쵸가 고추가 되면서, 호추로 바뀌었다가 후추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고추와 후추가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겠지만 영어에서는 후추와 고추가 모두 ‘Pepper’입니다. 후추보다 더 매운 고추가 들어오면서 세력이 약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월 대보름에는 부럼이라고 해서 딱딱한 것을 깨뜨려 먹습니다. 땅콩이나 호두, 밤 등을 깨서 먹습니다. 저는 언어적으로 보름과 부럼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부럼에서 부스럼을 떠올렸나 봅니다. 부럼을 먹으면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대보름이면 가득 차 있으니까 좋은 것이지만 다시 작아질 것이기에 그에 대한 준비도 필요하다는 의미로 기억합니다.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는 민요의 한 부분도 그런 의미입니다. 부럼을 깨는 소리에 귀신들도 놀라 달아날 겁니다. 어쩌면 우리의 자만도 깨질 수 있겠습니다. 깨뜨리면서 우리에게는 뜻밖의 즐거움도 있었을 겁니다. 깨뜨리는 것은 한계를 넘는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호두를 깨뜨리다가 두 알쯤은 남겨 둡니다. 그러고는 반질반질해지도록 두 알을 손바닥 위에서 비빕니다. 뽀드득 소리가 왠지 뿌듯하죠. 손 위에서 추억이 돌아가고 작은 즐거움이 됩니다. 물론 손바닥 혈을 자극하여 건강을 지켜주는 건 덤으로 얻은 행복입니다. 한참 지난 후 책상 서랍에서 호두 두 알을 발견하고 웃음 짓던 기억이 있습니다. 종종은 절대로 안 깨질 것 같던 호두가 한참의 세월을 지나 손안에서 툭 깨지는 경험도 합니다. 고통도 기쁨도 시간이 지나면 다 닳아버리는 체험입니다. 그사이 나는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자랍니다. 정월 대보름이었습니다. 지나가다가 호두를 한 되 샀습니다. 주변의 사람에게 두 알씩 나눠주며 마음과 몸의 행복을 기원했습니다. 자주 가는 카페의 직원에게도 두 알, 분식집 사장님께도 두 알, 부대찌개 주인께도 두 알씩 드렸습니다. 모두 웃습니다. 집에 와서 아내와 아들들에게도 두 알씩 주었습니다. 집이 온통 뽀드득 천지입니다. 소란스러운 행복이네요. 시끌벅적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친하게 지내세요

2022/03/01 14:36:58

친하게 지내세요 ‘친하다’라는 말은 물론 한자 친(親)에 ‘하다’가 붙은 말입니다. 저는 1음절 한자에 ‘하다’가 붙는 말을 볼 때마다 우리말에 한자가 폭넓게 들어와 있음을 새삼 느낍니다. 친이라는 말은 혼자는 쓰이지 않는 말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친하다의 반대말은 한자로는 잘 나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굳이 만들어 쓰자면 ‘혐(嫌)하다’ 정도를 쓸 수 있을까요? 아무튼 반대말이 없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쁜 말은 가능하면 만들지 않고, 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말 쓰며 살기에도 짧은 세상 아닌가요? ‘친’이 들어가는 말은 다정한 느낌이 있습니다. 친의 기본적인 의미가 가깝다는 의미니까 그런 느낌이 들 겁니다. 친하다라는 말은 이런 느낌의 시작점입니다. 다른 단어도 생각해 볼까요? 친하니까 친구(親舊)이고 친척(親戚)입니다. 친밀하고 친숙하며 친절하다라는 말에서 정을 느끼게도 됩니다. ‘친’이 들어가는 표현을 많이 쓰며 살면 좋겠습니다. ‘친’을 쓰면서 가까운 사람도 많아지면 좋겠네요. ‘친’은 또한 닮았다는 의미입니다. 친의 가장 정확한 의미는 닮았다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당연히 닮았다는 말은 가깝다는 말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가까우니까 닮는 것이겠죠. 아는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은 많지만 ‘친’이 붙으면 그야말로 피를 나눈 사이입니다. 친형제와 아는 형은 전혀 다른 관계입니다. ‘친’이 붙으면 물보다 진한 사이라는 말입니다. 친형제와 잘 지내야겠습니다. 물만도 못한 피도 많습니다. 형제간의 다툼은 불효의 시작입니다. 사실 ‘친’ 중의 ‘친’은 부모님입니다. 나랑 가장 가깝고, 내가 가장 닮은 사람이 부모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은 양친(兩親)이라고 합니다. 나누어 말하면 모친(母親)과 부친(父親)이 됩니다. 친어머니, 친아버지, 친형, 친언니, 친누나, 친오빠, 친동생의 무게와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오륜 중에서 부자유친에도 친이 보이지요. 이때 친도 단순히 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닮았다는 의미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더 가까워야 합니다. 이런 ‘친’이 종종 나쁜 의미로도 쓰입니다. 가장 나쁘게 쓰이는 말이 친일입니다. 친일에 파까지 붙으면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 됩니다. 친북도 만만치 않습니다. 종북이라는 말도 사용하지만 시작점은 친북입니다. 친미나 친중도 관점에 따라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이 됩니다. 요즘엔 정치에도 ‘친’이 쓰입니다. 친노, 친박, 친이, 친문 등으로 쓰입니다. 자신이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지는 표현들입니다. 어떤 나라나 어떤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나쁜 일이 된다는 게 참 어려운 숙제입니다. ‘친’은 원래 좋은 것인데 말입니다. 친하게 지내고, 가깝게 있으며, 서로 닮아가려고 하는 사이인데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저는 ‘친’이라는 말이 문제가 될 때마다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친한 게 왜 잘못일까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친해서 싸우지 않으면 더 좋은 것일 텐데 친하다면서 편 가르기를 하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면 친의 역할을 잘못하는 것이겠죠. ‘친’은 싸우지 말자는 것이고, 평화롭게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류나 외교를 이야기하면서 친한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 외국인은 친한파라면서 칭찬을 합니다. ‘친’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말들입니다. 친한파도 누군가에게는 나쁜 표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친한파뿐 아니라 모든 ‘친’이 좋은 관계이기 바랍니다. 긍정적인 의미이고 따뜻한 느낌이기 바랍니다. 어찌 ‘친’이 나쁠까요. 저는 매국이라는 표현과 친일이 동일한 의미처럼 사용되어 친의 의미가 타락한 것이라고 봅니다. 매국은 매국으로 쓰고 친일은 좋은 의미로 쓸 수 있기 바랍니다. 일본과 친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요. 일본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일까요? 특히 친한은 좋다고 하면서 친일이나 친중이나 친미를 미워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친’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친’이 아닌데 그들이 ‘친’일 리가 없습니다. 혐하다는 말은 없는데, 세상에 온갖 저주의 말, 상처의 말, 혐오의 말이 난무합니다. 혐한이 생기고 혐일, 혐중이 생깁니다. 미워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말이 거칠어질수록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친(親)’은 평화와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놀이를 놀다

2022/02/18 09:50:57

놀이를 놀다 놀다는 말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장 원형적인 의미는 즐거움입니다. 사람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정의한 학자(호이징하)도 있을 정도로 놀이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기도 합니다. 놀이가 즐거움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일의 반대말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놀이는 일과 반대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놀이가 그대로 일이기도 합니다. 놀다의 다른 뜻에는 움직이다, 일하다가 있기 때문입니다. 관자놀이의 놀이는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손을 빨리 놀린다는 말도 손을 빨리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아이가 뱃속에서 노는 것도 아이가 움직인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는 것은 즐겁게 일한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놀이는 연주나 연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노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하는 이에게는 진지하면서도 즐거운 일입니다. 영어에서도 놀다에 해당하는 단어인 ‘play’가 연극을 의미하거나 연주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보면 사람의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이라고 했겠지요. 우리말에서는 연극적 요소가 강한 북청사자놀음이나 사물놀이 등에 놀다와 관련된 표현이 나타납니다. 우리말에서도 연극이나 연주는 기본적으로 즐거운 것이고, 신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물놀이는 북, 장구, 꽹과리, 징으로 이루어진 연주입니다. 원래는 훨씬 큰 규모로 이루어졌던 것인데, 1978년에 악기의 수와 규모를 줄여 공연에 적합하게 수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물놀이가 요즘에는 국악 연주의 대표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네 가지 타악기의 어우러짐은 환상의 조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많은 악기가 그렇습니다만 타악기는 듣는 사람보다 치는 사람의 몰입도가 깊습니다. 무아지경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접 배워서 타악의 리듬 속에 스스로를 맡기면 심리적인 고통을 벗어나는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물은 혼자서 하는 연주가 아니라는 점도 좋습니다. 다른 합주도 비슷하지만 사물의 경우에는 모든 참여자가 모든 악기를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구를 배워서 기본 장단을 익히고, 꽹과리, 북, 징을 익힙니다. 그 중 하나 또는 몇 개의 악기를 담당하지만 모든 악기에 익숙한 사람이 함께하는 연주는 조화의 깊이가 다릅니다. 공감의 깊이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남의 구별이 없어집니다. 여럿이 함께하면 공감의 에너지를 크게 합니다. 넷이서도 가능한 연주이지만 함께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그만큼 더 흥겹습니다. 흥겹다는 말에서 ‘겹다’라는 말은 ‘정도나 양이 지나쳐 참거나 견뎌 내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저절로’라는 말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흥이 오르면 어깨가 절로 들썩거리는 겁니다. 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절로 추임새가 나옵니다. 물론 흥에도 연습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절로 나오는 흥을 잘 이끌어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임새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혼자서는 어색한 흥을 불러 모아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흥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잘한다, 좋다, 얼쑤, 얼씨구’ 등의 말을 하고 들으면서 신이 더 납니다. 몸속의 신이 솟아납니다. 칭찬이 우리를 춤추게 하는 겁니다. 틀린 부분에서 웃음이 납니다. 웃음도 음악이 됩니다. 웃음소리도 공연의 일부가 됩니다. 지나치게 틀려서 당황해서는 안 되겠지만 웬만한 실수는 흐름을 따라 지나갑니다. 그렇게 실수도 흘러가는 겁니다. 실수가 집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은 과장되게 동작을 하여 보는 이, 하는 이의 공감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발림’이라고 합니다. 발림은 비어있는 시간의 공간을 메우기도 하지만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화려한 손동작이 소리를 빛나게 하는 겁니다. 과장된 모습은 감정을 전하는 힘이 됩니다. 사물놀이를 하면서 우리는 겹습니다. 흥겹고, 정겹습니다. 몸속에 있는 기운이 펄펄 날아다닙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천국이 따로 없다

2022/01/19 12:31:22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천국이 따로 없다 종교를 믿는 많은 사람의 소망은 천국이나 천당에 가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좋은 곳이라고 하니 가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고통스러우니 다음 세상에서는 꼭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겠죠. 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이나 다음 세상에서는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래도 사람들이 내세에 대한 확신은 있는 것 같아 놀랍습니다. 별로 종교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내세는 은연중에 믿고 삽니다. 좋은 곳으로 가기 바라는 거죠.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천국에 가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종교는 그 물음에 답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것이겠죠. 종교마다 약간씩은 차이가 있겠으나 대부분은 비슷합니다. 종교가 결국은 하나로 통한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종교라면 좀 의심을 해 봐야 합니다.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주로 다음과 같습니다. 살면서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많이 베풀고, 배려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살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국에 가는 건 쉬운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마저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복수를 계획하면 사실 괴로운 것은 자신입니다. 용서는 그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라는 말이 참으로 맞습니다. 아픈 이를 보면 고쳐주려고 하고, 힘든 이를 만나면 몸소 도와주려고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돈으로 돕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으나 내 몸으로 돕는 게 더 중요합니다. 내 작은 힘으로 그에게 힘이 된다면 기쁜 일입니다. 살면서 느끼는 보람입니다. 나도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자각, 그것을 인정받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욕심이야말로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돈 욕심으로 가족도 친구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 더 가지려는 마음 때문에 천국은 멀어집니다. 성(性)의 욕심도 말할 나위가 없겠죠. 지나친 욕심으로 수많은 관계가 망가집니다. 천국을 이야기할 때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이야기가 늘 따라오는 이유일 겁니다. 생각해 보면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행복의 상징 파랑새를 찾으러 다니다가 끝내 못 찾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 파랑새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쉽게 공감하는 것은 우리 모두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는 잘못 알려진 속설이라고 합니다만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운임에 비해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는 말은 감동적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삽니다. 그런데 모든 세 잎 클로버가 행복일까요? 분명 그 가운데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아픈 일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행복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순간을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행복한 삶이 될 겁니다. 행복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천국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많은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쩌면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아니 천국에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이 되는 겁니다. 많은 종교는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겁니다. 천국에 가려고 노력하면 지금이 천국이 됩니다. 내가 천국의 시작이 됩니다. 나도 내 주변도 모두 천국이 됩니다.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산으로 가다

2021/12/22 16:20:47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산으로 가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다가 주제에서 벗어난 말을 하거나 방향에 맞지 않는 말을 할 때 이야기가 산으로 갔다는 표현을 합니다. 정답과는 상관없는 방향을 향하는 것이기에 길을 잃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길로 가지 않고 산으로 가면 엉뚱하고 틀린 게 됩니다. 회의가 산으로 가면 답은 커녕 회의 자체가 진행이 안 되는 겁니다. 속담에 있듯이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간 것입니다. 이렇듯 산으로 간다는 말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일을 자의든 타의든 그만둔 사람도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원을 떠돌기도 하지만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년을 하면 본격적으로 산으로 갑니다. 산에 가면 뭐가 있냐고 하지만 아무튼 산으로 갑니다. 산은 내가 갖고 있던 것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을 때 자연스레 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산으로 간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곳에 비해 산은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건강한 곳이 산입니다. 우리는 산에 길을 잃어서도 가고 길을 찾으려고도 갑니다. 종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거나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도 산으로 갑니다. 산에 가서 하늘의 계시를 받는 장면은 익숙한 모습입니다. 험하고 깊은 산에 가면 얻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다시 태어남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산으로 간다는 것이 수행을 의미하기도 하고 신을 만나는 행위가 되기도 합니다. 신라의 화랑이 산천을 다니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그런 이유일 겁니다. 바람 따라 흘러 다녔기에 풍류(風流)라고도 했습니다. 단순히 노는 것이 풍류가 아닙니다. 산을 다니는 겁니다. 산을 오르고 자연을 느끼는 것이 풍류이고 도입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기에 도라고 했을 겁니다. 화랑을 다른 말로는 국선(國仙)이라고 했습니다. 선(仙)은 산을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산을 오래 다니면 신선이 됩니다. 종교의 많은 수행처가 산속에 있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산속에 자리하기도 했겠으나 기독교의 수도원도 그렇고 불교의 많은 절도 깊은 산속에 있습니다. 저는 종종 기도를 드리러 산에 오른 사람들은 산에 오르면서 이미 기도가 이루어졌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산에 오르면서 간절한 마음이 깊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약초를 캐는 사람이 약초를 먹는 사람보다 건강한 건 뜻밖의 진리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에게 제일 좋은 처방은 약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약초 캐는 법을 가르치는 겁니다. 약초와 독초를 구별하며 새로운 지식을 얻고, 약초를 캐기 위해 산을 오르고 땀을 흘립니다. 어느새 머리도 새로워지고, 몸도 새로워지고, 마음도 새로워집니다. 무엇보다도 집착이 옅어지고 자연과 하나가 됩니다. 더 이상 아픈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혼자 산에 오르는 이도 많습니다. 부부나 친구가 함께 산에 오르기도 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열심히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산에 오르는 것은 참 다행한 일입니다. 살면서 길을 잃어 산에 갔는데 산은 또 다른 길이 되었습니다. 산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길을 찾습니다. 산에서 만난 하나하나가 깨달음이 됩니다. 다음 산이 기다려지고, 다음 계절이 기대됩니다. 건강은 덤으로 주어진 행복입니다. 길을 잃고 세상이 싫어서 산을 올랐는데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고 위로하게 됩니다. 산에 오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산에서 만난 사람에게 기쁜 인사와 걱정의 안부를 나눕니다.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을 향하는 것이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나와 함께 지나간 것이 과거(過去)이고, 아직 내 앞에 오고 있는 것이 미래(未來)입니다. 지금 내가 모습을 내보이며 살고 있는 것이 현재(現在)입니다. 저는 산을 걸으며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현재를 느낍니다. 산을 또 걷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