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심장이 뛰다

2022/07/05 15:36:15

심장이 뛰다 심장(心臟)은 순우리말로 염통이라고 하는데 가만히 보니 염통도 한자로 보입니다. 생각할 염(念)에 무엇을 담는 통(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북한에서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려고 할 때 혁명의 심장이라는 말을 혁명의 염통이라고 하면 어색하지 않겠냐고 했던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어쩌면 심장도 염통도 한자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염통의 염을 생각 염이 아닐까 추측한 것은 심장이 생각의 기관이라는 느낌이 문득 들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가슴으로도 합니다. 감정으로 느낄 때는 우리의 가슴이 생각의 주체입니다. 머리가 아픈 것과 가슴이 아픈 것을 떠올려 보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입니다. 가슴 속의 생각을 우리말로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몸과 분리된 것이 아니기에 우리 몸은 그대로 맘이기도 합니다. 가슴 부위를 몸통이라고도 하는 거로 봐서 비유이기도 하겠지만 가슴이, 몸이, 심장이 그대로 마음입니다. 심장은 뛰는 곳입니다. 뜨거운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심장이 뛸 때는 감정이 솟을 때입니다. 그래서 심장이 뛰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두렵고 걱정이 깊을 때 심장은 두근거립니다. 두근두근은 심장의 소리입니다. 심장이 뛰면 힘이 듭니다. 어쩔 줄 모르는 내 마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너무 심장이 뛰면 터질 것 같습니다. 높고 가파른 산을 오를 때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이라고 할까요? 숨이 막힐 지경으로 뜁니다. 심장은 내 맘대로 할 수 없어 더 힘이 듭니다. 어떨 때는 잘 때도 심장이 뜁니다. 가장 평온해야 하는 시간인데 말입니다. 아마도 꿈속에서 나도 모르는 괴로움에 염려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뛰는 게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심장이 뛰면 깊은 수면이 어렵습니다. 문득 새벽에 깨어나 어쩔 줄 몰라하거나 멍하니 앉아있는 것은 내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방법을 씁니다. 단전호흡이나 요가, 명상이 그런 겁니다. 좋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파도 소리나바람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자연의 소리에 내 심장의 박동을 맞추면 좀 낫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숲을 걷는다든지, 모닥불 앞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것도 모두 심장에 관한 일일 수 있겠습니다. 반대로 아예 심장을 최대한 뛰게 하기도 합니다. 그건 내 심장이 뛰는 상태에 내가 익숙하게 하려는 것이고, 폭발할 것 같았던 심장이 원상태로 돌아왔을 때, 내 심장의 박동에 편안함을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심장에서 비롯되어 심장으로 마무리됩니다. 불안이라든가 염려라든가 우울이라든가 고통이라든가 서러움이라든가 슬픔은 모두 심장으로 이어집니다. 요즘 저는 심장이 마구 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저도 모르는 불안 때문입니다. 어쩌면 알고 있는 가라앉음이겠네요. 가라앉아도 심장은 뜁니다. 가슴 속에 뛰고 있는 심장이 다스려지지 않아서 전에 배운 단전호흡을 하고 선인들의 수행을 따라 합니다. 조금은 나아집니다. 요즘은 차고 있는 시계에 심박 측정 기능이 있어서 가끔 눈길을 주기도 합니다. 어느 때 내 심장은 편안한가를 살펴봅니다. 오늘 책을 읽다가 문득 박동의 수치를 살폈는데 무척 낮게 나왔습니다. 마음이 편안했나 봅니다. 읽던 책이 고마웠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한국어 교육은 치유

2022/06/08 09:38:13

한국어 교육은 치유 인류의 진보가 계속되면서 가장 먼저 사라질 직업으로 번역가와 통역사를 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외국어 교육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기계가 통역과 번역을 능숙하게 하는데 왜 외국어를 배울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시대에는 외국어교육이 필요 없을까요? 자동번역의 시대에도 외국어교육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런 세상에서 한국어교육은 필요할까요? 인공지능 시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언어번역과 통역이 정확하게 이루어질 겁니다. 인공지능의 많은 명령이 언어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고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단순히 언어를 습득할 뿐 아니라 상황에 맞추어 인간과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인간을 위로하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어 교육, 학습은 필요할까요? 저는 이러한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정말 AI시대에 외국어공부가 필요할까요? 모든 통번역이 가능한 시대에 외국어는 왜 배워야 할까요? 외국어를 지식의 수단으로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외국어를 배우지 않는 것이 정답일 겁니다. 그러나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정보 습득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외국어를 배워서 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려는 것이고, 그들이 쓰는 문화를 배우고 느끼려고 배우는 겁니다. 외국어 학습을 통해 인간은 새로운 능력을 개발하기도 합니다. 언어는 단순히 정보가 아닙니다. 언어는 인간 그 자체라고 할 정도 수많은 인간의 사고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언어에는 문화가 반영되어 있죠. 따라서 언어를 배우면 인간에 대하여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게 됩니다. 즉 인간에 대해 공부하고, 말 속에 담긴 진리를 파악하는 것도 외국어 교육의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겁니다. 또한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행위는 그 자체로도 심리적 위안이 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외국어 교육을 경쟁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과 치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접근 방법이 다릅니다. 지금까지의 외국어교육은 경쟁의 도구였으며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점수가 중요하고 합격 기준이 되는 언어교육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언어교육은 경쟁 이외의 목적이 오히려 큽니다. 심리적인 치유가 언어 교육에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독서, 글쓰기 등을 활용한 치료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분야도 모두 언어교육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한 음악. 미술, 무용 등을 활용한 예술 치료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한류, 국악, 민요 등을 활용하는 한국학 교육의 범주에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겁니다. 학습자에 따른 맞춤 치유는 학습자의 동기 유발, 유지에도 도움이 됩니다. 또한 언어를 배우면서 새롭고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도 언어교육 치유는 앞으로의 세계에 꼭 필요한 언어교육 방안이 될 겁니다. 저는 한국어교육이 인간의 치유에 기여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 중에는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치유가 필요하지 않은 학습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한글학교에 다니는 재외동포 아이들, 한국에 온 유학생,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중도입국청소년, 해외입양인 등을 생각해 보면 느낌이 더 다가올 겁니다. 또한 급증하고 있는 한국어 성인학습자, 고령자 학습자를 생각해 보면 언어교육 치유가 언어교육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에게도 한국어교육이 치유의 방안임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행복해 졌다는 선생님도 아주 많습니다. 한국어교육은 치유입니다. 앞으로 꼭 기억해야 할 가치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기다리는 사람

2022/05/11 10:06:35

기다리는 사람 저는 요즘 기다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보통은 기다린다고 하면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겠지만 저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를 기다린다고 하니 마치 세월을 낚는 강태공이나 된 듯하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때마다 바뀌는 자연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생이 짧게 느껴지는 것은 기다리는 게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사실 지나간 것은 아득합니다. 내 옆을 지나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지난주 일이 까마득한 과거로 느껴집니다. 이상한 일도 아닐 겁니다. 요즘 기다리고 있는 일은 무언가요? 기다린다는 말은 보고 싶다는 말도 됩니다. 보고 싶으니까 기다리지 보기 싫은데 기다리지는 않겠죠. 아름답다는 말이 보고 싶다는 말이라는 이야기도 일리가 있습니다. 보기 싫은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마다 보고 싶은 것이 다를 테니 말입니다. 일률적인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그러니 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 될 겁니다. 저는 기다린다는 말에서 ‘길다’의 흔적을 봅니다. 길다와 관련이 있는 단어로는 ‘기다랗다’가 있습니다. 기다리다와 기다랗다가 닮아서 왠지 기분이 좋습니다. 어원적으로는 더 공부해봐야 하겠습니다만 감정적으로는 두 단어가 이어집니다. 물론 기다랗다는 구체적이고 기다리다는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이 추상적으로 변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그리다’가 그림을 그리다와그리워하다의 의미로 나누어지는 것도 그러한 예입니다. 저는 기다림이 많으면 삶을 길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서 인생을 짧게 사는 사람은 기다림이 적은 사람입니다. 기쁘게 기다리는 일이 없는 사람은 인생이 참 덧없고 허무하고 짧을 겁니다. 기다리면 시간이 느리게 갑니다. 단지 그래서 길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천천히 가기는 하지만 설레는 마음이 있기에 기다림은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가슴 두근거리며 하루를 살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어떤 날을 기다리며 사는가요? 저는 요즘 숲길을 걷고 산을 오릅니다. 걸음걸음마다 가장 고마운 일은 주변이 늘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계절마다 내보이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걸을 때마다 기대감이 한가득입니다. 현재를 즐기면서도 미래를 꿈꿉니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겨울 눈길을 걸으면 새하얀 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합니다. 그러면서도 금방 봄이 오면 이 산에도, 이 길에도 꽃이 필 거라고 기대합니다. 생각만으로도 기쁩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계곡에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고, 숲이 푸르기를 기다립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겨울에는 눈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꽃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돌고 돕니다. 그러니 기다림에는 끝이 없습니다. 작년에 봤을 텐데 늘 새롭습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비슷할 텐데 우리는 종종 기다림을 놓치고 사람을 놓칩니다. 사랑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만남을 기다리고, 웃음을 기다립니다. 새로운 만남에 기뻐하고 오랜 만남을 즐거워합니다. 기다림은 지침이 아니라 설렘입니다. 만약 기다림이 없다면 앞으로 시간이 오는 게 두렵겠죠. 두려우면 당연히 사는 게 힘들 겁니다. 세상을 살면서 기쁘게 기다리는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 사는 게 기다려지기 바랍니다. 나는 오늘도 걷는 사람입니다. 나는 오늘도 새로움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너무의 세계

2022/04/28 14:08:13

너무의 세계 너무는 <넘다>에서 온 말입니다. ‘넘’에 우가 붙어 만들어진 부사입니다. 사전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정한 한계를 넘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계를 넘는 것에는 좋은 의미도 있고 나쁜 의미도 있겠습니다만 너무라고 하면 주로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아예 설명을 할 때 부정적인 느낌에 쓰이는 표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너무를 강조할 때는 <너무나>라고도 합니다. 더 부정적이지요. 또한 너무에 ‘하다’가 붙으면 이런 느낌이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너무하다는 말 자체로도 지나치다는 느낌이 강한 겁니다. ‘너무해요’라는 말의 느낌은 어떤가요? ‘너무하지 않아요?’라는 말에서 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지나친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에서 부정적 느낌이 강조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넘다와 형제인 어휘로는 <남다>가 있습니다. 주로 이렇게 모음이 바뀌면 핵심적인 의미는 같지만 느낌은 확 달라지기도 합니다. 넘다가 지나침이 주 느낌이라면 남다는 넉넉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남다에서 온 말로는 <남짓>을 들 수 있습니다. 남짓은 조금 넘는 정도라는 의미입니다. 즉 넘기는 하지만 지나치지는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남은>도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열에서 조금 남는다는 의미입니다. 한자로 하자면 ‘십여(十餘)’가 됩니다. 너무 많이 넘는 것은 남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남다에서는 여유가 느껴집니다. 너무가 부정적이어서 그런지 너무가 앞에 붙으면 우리는 걱정이 됩니다. ‘너무 아프다, 너무 나쁘다, 너무 싫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부정의 느낌을 더욱 강조합니다. 너무 힘든 느낌의 어휘라고나 할까요? 어휘 자체에 부정적인 느낌이 없어도 너무가 붙으면 걱정거리입니다. ‘너무 크다, 너무 많다, 너무 달다’ 등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너무는 너무합니다. 크고, 많고, 단 게 나쁜 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너무라는 말이 감정을 부정적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실제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를 활용해서 자신의 감정을 좋게 분출합니다. 오히려 긍정을 강조하는데 쓰고 있는 겁니다. 너무 좋고, 너무 예쁘고, 너무 멋있습니다. 너무 맛있는 음식도 많고, 너무 가 보고 싶은 곳도 많습니다. 너무의 세계가 좋은 감정의 과잉분출로 나타난다는 점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너무’라는 말 대신에 <아주>나 <매우>, <정말> 등을 쓰면 맛이 안 나는 느낌도 있습니다. 특히 입말, 구어에서는 너무가 ‘딱’인 상황이 많습니다. 부정을 뛰어넘을 때 나타나는 긍정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주 좋아요, 정말 좋아요.’와 ‘너무 좋아요.’의 느낌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부정의 너무가 아니라 <긍정의 너무>를 사용할 일이 많기 바랍니다. 한편 뜻밖에도 너무가 부정의 표현과 어울려도 느낌이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가 지나치다는 의미로 쓰이다보니 지나친 장면을 말리는 경우에는 오히려 너무가 위로가 됩니다. 대표적인 표현이 바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걱정이 지나치면 힘이 듭니다. 잘 될 거라는 위로의 말을 할 때 지나침을 막는 말인 너무를 쓴 겁니다. 너무의 특별한 변신이지요. 너무 우울해 하지 마세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너무 의기소침해 있지 마세요. 다 잘 될 겁니다. 내가 옆에 있잖아요. 힘들면 이야기하세요. 같이 이겨내도록 해요. 오늘 날씨도 너무 좋은데 같이 걸으며 이야기 나눠요. 생각만 해도 너무 좋지 않습니까? ‘와! 너무 좋다~’ 한 번 입 밖으로 외쳐 볼까요.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신어 유행어의 세계, 언젠가는 지나간다

2022/04/18 14:13:13

신어 유행어의 세계, 언젠가는 지나간다 2020년은 20이 두 번 반복되어 왠지 기분이 좋은 해였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일본이 하계 올림픽을 그 해로 유치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2020년의 시작은 끔찍했습니다. 코로나가 급속도로 펼쳐지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에는 19라는 숫자가 붙어있지만 일반인의 인식 속에는 코로나라고 하면 20이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코로나 탓에 2020년에 동경 올림픽은 개최되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즐거운 일이 하나 줄어들었고, 2020년에 맞추어 준비해왔던 수많은 일이 어그러졌습니다. 2021년에는 통째로 기억에서 사라진 느낌입니다. 수많은 일이 있었을 겁니다. 1년 미루어진 동경 하계올림픽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답답해 하고 힘들어 하며, 하루하루를 지낸 해로 기억이 될 겁니다. 코로나 시대의 한 가운데인 셈입니다. 피시알 검사에 의한 확진자 수가 매일 발표되고, 자가격리자의 뉴스가 매일 나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 의한 영업시간 단축이나 모임인원 제한이 일상화되었습니다. 배달이 늘고 거리에는 오토바이 천지입니다. 비대면이 익숙해지고, 때로 편안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줌이 일상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네요. 2022년은 2가 세 번이나 들어가는 해이기에 왠지 기분이 좋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북경 동계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중국은 숫자의 상징에 관심이 많은 나라입니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숫자는 8입니다. 그래서 2008년 8월 8일에 북경 하계올림픽을 열었습니다. 2는 따로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기분이 좋은 것 같습니다. 2는 우리말로 둘인데, 둘은 함께 하면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짝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둘이지만 하나입니다. 대학에서는 22학번을 둘리 학번이라고 합니다. 둘과 2(리)를 합친 표현입니다. 아기공룡의 이름을 딴 것이어서 그런지 귀여운 느낌이네요. 2022년 2월 22일은 2가 여섯 번 들어간 아주 특이한 날이었습니다. 특이한 것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위의 내용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몇 년 사이에 새로운 말이 많아지고, 유행하는 말이 확 바뀌었습니다. 단기간에 코로나를 겪으면서 세상의 언어가 달라진 겁니다. 우선 코로나라는 말 자체가 새로 들어온 말입니다. 전문가 사이에서만 쓰이던 전문용어가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한참 동안 코로나를 ‘콜레라’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코로나가 콜레라의 괴로운 기억을 소환하였나 봅니다. 어려운 시기에 말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확진자라는 말은 확찐자라는 신어를 만듭니다. 집에만 있어서 살이 쪘다는 자조 섞인 표현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표현도 끔찍한 표현입니다. 가족이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는 시간이 몇 년 동안 흐르고 있습니다. 결혼식을 축하하지 못하고, 누가 돌아가셔도 함께 슬퍼하지 못합니다. ‘오미크론’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생소한 표현이었습니다. 델타까지는 알겠는데 오미크론은 도대체 뭔가 하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금방 오미크론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코로나와 오미크론은 나중에 이 시대를 회고할 때 중요한 단어가 될 겁니다. 오미크론이라는 말 자체가 오래 쓰이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델타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신어와 유행어는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하는 표현들입니다. 매년 신어와 유행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의미에서 신어와 유행어의 수명도 짧은 편입니다. 시대가 바뀌면 말은 다시 바뀌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끔은 신어의 유행이 지속되어 새롭게 사전에 담기기도 합니다. 저는 코로나 시대에 유행했던 표현들이 어서 그때를 회고하는 표현으로 남기 바랍니다.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 하는 표정을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다 지나갈 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호두 두 알

2022/03/15 11:22:25

호두 두 알 호두는 호도(胡桃)에서 온 말로 호(胡), 즉 중국에서 들어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복숭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호두는 주로 씨의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호두의 모양이 복숭아씨와 닮았습니다. 발목의 복숭아뼈도 호두 모양이네요. 호는 본래 오랑캐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정확히 중국은 아닐 수 있겠네요. 어쩌면 지금의 중국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습니다. 아무튼 호(胡)는 우리나라에서 중국을 가리킬 때 사용하던 몇 이름 중의 하나입니다.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당입니다. 우리는 중국이라고 하면 당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당은 중국이 가장 번성하던 시기를 가리킵니다. 당진(唐津)은 당나라로 가는 포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나라로 갔다기보다는 중국으로 가는 항구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일본 큐슈에도 똑같은 한자의 지명이 있습니다. 호가 쓰이는 말로는 호떡이 있습니다. 호떡은 중국 떡입니다. 호빵은 중국과는 관련 없는 빵으로 그저 상표라고 할 수 있으나 호떡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단지 추운 겨울에 ‘호~’ 하고 불어가며 먹는 따뜻한 느낌이 남아있습니다. 호주머니도 중국식 주머니입니다. 원래 우리 주머니는 옷에 달려있지 않고 따로 차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듯합니다. 복주머니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호박에도 호가 보입니다. 박은 우리말이지만 호는 중국을 나타냅니다. 한편 후추는 호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호추에서 바뀐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후추는 고쵸가 후추였습니다. 그런데 고쵸가 고추가 되면서, 호추로 바뀌었다가 후추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고추와 후추가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겠지만 영어에서는 후추와 고추가 모두 ‘Pepper’입니다. 후추보다 더 매운 고추가 들어오면서 세력이 약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월 대보름에는 부럼이라고 해서 딱딱한 것을 깨뜨려 먹습니다. 땅콩이나 호두, 밤 등을 깨서 먹습니다. 저는 언어적으로 보름과 부럼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부럼에서 부스럼을 떠올렸나 봅니다. 부럼을 먹으면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대보름이면 가득 차 있으니까 좋은 것이지만 다시 작아질 것이기에 그에 대한 준비도 필요하다는 의미로 기억합니다.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는 민요의 한 부분도 그런 의미입니다. 부럼을 깨는 소리에 귀신들도 놀라 달아날 겁니다. 어쩌면 우리의 자만도 깨질 수 있겠습니다. 깨뜨리면서 우리에게는 뜻밖의 즐거움도 있었을 겁니다. 깨뜨리는 것은 한계를 넘는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호두를 깨뜨리다가 두 알쯤은 남겨 둡니다. 그러고는 반질반질해지도록 두 알을 손바닥 위에서 비빕니다. 뽀드득 소리가 왠지 뿌듯하죠. 손 위에서 추억이 돌아가고 작은 즐거움이 됩니다. 물론 손바닥 혈을 자극하여 건강을 지켜주는 건 덤으로 얻은 행복입니다. 한참 지난 후 책상 서랍에서 호두 두 알을 발견하고 웃음 짓던 기억이 있습니다. 종종은 절대로 안 깨질 것 같던 호두가 한참의 세월을 지나 손안에서 툭 깨지는 경험도 합니다. 고통도 기쁨도 시간이 지나면 다 닳아버리는 체험입니다. 그사이 나는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자랍니다. 정월 대보름이었습니다. 지나가다가 호두를 한 되 샀습니다. 주변의 사람에게 두 알씩 나눠주며 마음과 몸의 행복을 기원했습니다. 자주 가는 카페의 직원에게도 두 알, 분식집 사장님께도 두 알, 부대찌개 주인께도 두 알씩 드렸습니다. 모두 웃습니다. 집에 와서 아내와 아들들에게도 두 알씩 주었습니다. 집이 온통 뽀드득 천지입니다. 소란스러운 행복이네요. 시끌벅적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