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말의 두 모습

2023/04/25 11:25:47

말의 두 모습 말은 늘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아니 귀 옆에 있을 수도 있겠네요. 다양한 말이 허공을 떠돌기도 하고, 나의 선택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언어가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세밀한 차이 때문이고, 잠깐 달리 생각하면 엉뚱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품격이 있는 말이라고도 하고, 저렴하다고 하고, 속되다고도 하고, 뻐긴다고도 합니다. 말은 의사소통에서 양면, 다면을 갖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즐거운 상상의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너무’라는 말은 부정과 호응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가 ‘너무’를 긍정적인 표현과 함께 쓰면 틀렸다고 말합니다. 너무 완고한 생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는넘다와 관련이 있어서 넘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기에 이런 규칙 아닌 규칙이 생겨났을 겁니다. 하지만 넘치는 감정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너무 좋다, 너무 예쁘다, 너무 맛있다’에서 저는 어색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너무를 매우로 바꾸면 더 어색할 것 같습니다. 너무와 매우, 아주 등을 보면서 그 차이가 감정의 차이가 됨을 느낍니다. 강렬한 표현은 강렬한 감정을 보입니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이 좋다는 표현을 할 때 ‘와, 미쳤다!’라고 합니다. 강렬하지요. 물론 전에도 ‘죽인다’라는 표현이 아주 좋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에는 죽인다는 표현 못지않게 죽겠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사실은 무서운 말이지만 삶 속에서는 ‘죽다’만큼 센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가고 싶어 죽겠다, 보고 싶어 죽겠다처럼 죽으면 할 수 없는 일에도 사용을 합니다. 살고 싶어 죽겠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역설적이지요. 친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친구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의외로 친구는 비하의 장면에 주로 쓰입니다. 이 친구, 저 친구라는 말에서 종종 기분이 나빠집니다. 친구는 친구에게만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의 다른 말인 동무라는 말을 아무 데나 써서 진짜 동무가 사라진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과 지역이라는 약간 다른 단어로 썼을 뿐인데, 차별적인 느낌이 듭니다. 사실 표준어와 비표준어라는 말도 차별어인 셈입니다. 사투리나 방언은 지방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서울사투리, 서울 방언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자꾸 서울과 기타 지역을 구별하려고 합니다. 지방대학과 지역대학은 완전히 다른 느낌입니다. 지방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지방을 지역이라고 부르는 일에서 시작하여야 합니다. 아범과 아비, 아버지와 아버님도 다 다른 말입니다. 정확히 구별하여 쓰고자 하면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쓰는 사람도 적고, 그것마저도 어떤 것을 정확하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세상의 변화가 참 빠릅니다. 요즘에는 아범과 아비, 애비는 잘 쓰지 않는 말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말과 쉬운 말이 앞에 있을 때는 가능한 한 쉬운 말을 쓰기 바랍니다. 말의 목적은 소통에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어려운 말을 쓰기 원하는 경우라면 할 수 없이 어려운 말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쉬운 표현을 선택하면 됩니다. 그리고 나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하는 게 좋습니다. ‘유감입니다’보다는 ‘미안합니다’가 훨씬 좋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표현을 할 때는 조금 더 명료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보다는 ‘미안합니다’가 낫다는 의미입니다. 말이 내 앞에서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즐거운 고민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을 더 살맛 나게 해주세요. 내가 사용하는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꾸는 시작점이 됩니다. 언어가 곧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글의 마무리와 수정

2023/02/28 11:04:46

글의 마무리와 수정 글을 마무리한 후 자신의 글을 공적(公的)으로 내보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면서도 두려움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글을 활자화하기까지는 최대한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습니다. 생각보다 수정할 부분이 많이 보이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교정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글의 수정 방법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너는 우선 제가 쓴 글을 여러 번 읽어 봅니다. 이때 눈으로 읽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소리 내어 읽어 보는 것을 권합니다. 특히 저처럼 구어체, 혹은 준 구어체로 말하듯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의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금방 발견이 됩니다. 내용도 발견이 되지만 발음이나 문장의 길이, 호흡 등도 눈에 뜨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쓴 글이 그대로 강의록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로 할 때 필요한 글이기 때문에 구두로 읽어 보는 과정은 글의 음운적인 측면을 보강해 줍니다. 그리고 읽어 보면 의외로 틀린 부분도 잘 보입니다. 시각과 청각이 합쳐져서 감각을 깨우는 듯합니다. 감각은 합쳐질 때 위력을 발휘합니다. 외국어 공부를 할 때 쓰고, 읽고, 듣고, 말하는 기능을 한꺼번에 하면 훨씬 효율이 오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촉각을 더하기도 합니다. 저는 제 글을 가까운 사람에게 보여주는 편입니다. 활자화되면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글이니 미리 보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다른 이의 의견을 듣고 고치는 것이 출판된 후 아쉬워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보여주는 사람의 의견은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의견을 거부할 거라면 보여주는 의미가 없습니다. 보여주고 그 사람의 의견에 기분 나빠할 거라면 보여주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다른 사람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인다는 자세여야 하는 겁니다. 저의 경우는 아내나 아들, 제자, 벗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제 글의 주제에 관심이 있어 할 사람을 선별하여 보여줍니다. 제가 글을 보내주면 맞춤법에 틀린 부분이나 문장의 오류를 지적하여 조심스레 다시 보내오기도 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본인이 생각하는 글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지 못하였거나 일부러 뺀 부분이 덧붙어 오기도 합니다. 다시 글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됩니다. 수정할 게 많아져서 기쁘기도 합니다. 제 글 중에서 좋은 부분을 이야기해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역시 고마운 일입니다. 좋은 부분을 발견하려면 다른 부분도 읽어야 하기에 저를 이해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글을 쓸 때 좋다고 생각했던 부분과 의견이 일치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뜻밖의 문장을 좋아하는 경우는 제 글을 다시 들여다보게 됩니다. 어차피 글은 독자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즐겁게 오가는 글을 읽습니다. 최종적으로 글을 내보이게 될 때는 가능하면 전문가의 교정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출판사나 신문사의 교정, 편집 관계자도 좋고, 어문교정 전문가도 좋습니다. 저는 편집자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또한 어문교정의 경우는 제가 놓친 실수를 잡아주어서 고맙습니다. 물론 수정 작업이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이나 표현이 흔들리는 수준이어서는 안 되겠지요. 글의 마무리와 수정을 내 글을 정돈하고 돋보이게 하는 과정이지 내 글을 다시 쓰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 글의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면 이미 내 글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글을 잘 마무리하여 완성된 글로 세상에 보이는 것은 두렵지만 기쁜 일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증 이야기

2023/02/14 14:49:40

증 이야기 ‘증(症)’이라는 말이 붙으면 병과 관련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확하게는 병이라기보다는 병을 앓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태나 모양 등을 나타냅니다.(표준국어대사전) 그러니까 병이 아니어도 증이 붙을 수도 있고, 병의 증세니까 병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어지럼증도 그런 단어일 겁니다. 우울증이나 어지럼증은 여러 병의 증세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도 병인 느낌이 있습니다. 사실은 매우 심각한 병일 수도 있는 증세입니다. 한편 ‘의처증(疑妻症)’이나 ‘의부증(疑夫症)’ 같은 요사스런 증세도 있습니다. 이상하고 위험한 증세입니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화증(火症)’도 생각해 보면 병입니다. 그래서 ‘화병(火炳)’이라고도 했을 겁니다. 화병은 한자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몸과 마음속에서 불이 나는 겁니다. 비슷한 증세로는 짜증도 있습니다. 짜증은 늘 일어나는 증세는 아니지만 짜증이 일어나는 순간 어느 병보다도 전염성이 강합니다. 무서운 병이지요. 저는 짜증의 어원을 ‘짜다’에서 온 걸로 봅니다. 자신을 쥐어짜는 병이고, 마음속에 남의 자리를 없애는 병입니다. 짜증은 얼굴에도 나타납니다. 얼굴을 쥐어짜면 인상을 쓰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짜증은 치유가 가능합니다. 얼굴을 그저 펴면 됩니다. 짜증이 날 때마다 살짝 웃어보는 것은 치료의 명약입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웃음 띤 내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도 얼굴이 펴집니다. 전염이 사라지는 겁니다. 짜증처럼 용언의 어간에 증이 붙는 구성의 어휘로는 ‘싫증’이 있습니다. 싫증은 사전에서 ‘싫은 생각이나 느낌 또는 그런 반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염증(厭症)’이라는 한자어의 고유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염증의 염은 싫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싫증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왠지 부족한 느낌입니다. 싫증은 처음부터 싫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래 갖고 있어서, 자주 보아서 생긴 감정입니다. 신물이 난다고도 하고 식상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싫증 역시 치유가 가능한 병입니다. 잠깐 거리를 두거나 새로움을 찾으려 노력을 하다 보면 싫증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오히려 싫증이 익숙함과 편안함으로 재탄생합니다. 익숙함과 편안함은 싫증의 다른 모습입니다. 짜증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는 귀했던 것인데 귀함을 잊어버리면 짜증이 나는 겁니다. 그럴 때 쓰는 말이 ‘귀찮다’입니다. 귀찮다는 ‘귀하지 않다’가 줄어든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까이 와도 귀찮아서 밀어내게 됩니다. 말에도 가시가 돋습니다. 싫증과 짜증은 하루라도 빨리 치유해야 하는 증세입니다. 수많은 증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희망이 되는 증도 있습니다. 바로 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병이라고 이름 붙인 ‘궁금증’입니다. 이런 병이라면 앓아도 될 듯합니다. 인류의 발전은 궁금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자어로는 호기심이라고 하죠. 호기심은 기이하고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나와 다른 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눈이 반짝입니다. 궁금증은 아는 게 많을수록 커지는 병입니다. 병이 자라납니다. 병이 깊어질수록 배움의 깊이와 넓이도 달라집니다. 증세가 자라나서 기쁜 병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오늘의 ‘증 이야기’ 역시 궁금증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한참 동안 증과 병의 차이점을 생각하다가 생각이 꼬리를 문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한자로 본 탐진치(貪瞋痴) 세상

2023/02/03 16:51:18

한자로 본 탐진치(貪瞋痴) 세상 한자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점에서 고맙습니다. 한자를 사용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한자를 공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특히 한자에 담긴 생각이나 지혜, 깨달음을 찾아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생각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불교에 관한 책을 보다가 깨달음을 방해하는 삼독(三毒)에 대해서 살피게 되었습니다. 늘 접하는 부분이지만 저에게는 느낌이 잘 안 다가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삼독은 바로 ‘탐진치(貪瞋痴)’입니다. 욕심을 내고, 성을 내고, 어리석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은 간단해 보이나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무엇에 대한 것인가 생각해 보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무엇에 대한 욕심인지, 왜 화를 내는 것인지, 어째서 어리석다고 하는 것인지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탐진치의 한자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자를 가만히 나누어 보니 옛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찾아낸 것과 불교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한자를 만들고 썼던 사람들의 감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가 있었습니다. 한자는 옛 생각의 보물창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늘 새롭습니다. 탐(貪)이라는 말은 이제 금(今)과 조개 패(貝)가 합쳐진 말입니다. 한자의 구성을 보고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패는 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지금 눈앞에 있는 돈에 마음이 가 있는 게 욕심입니다. 여기에서 돈은 다른 것으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눈앞에 갖고 싶은 것, 취하고 싶은 것에 얽매여 앞을 보지 못한다면 깨달음은 이미 끝난 겁니다. 나는 무엇을 그리 손에 꼭 쥐고, 놓고 싶지 않은지 살펴봅니다. 그것을 남들은 모를 거라 생각하고 때로늘 초조해 하며 때로는 미소 지으며 말입니다. 성냄의 진(瞋)이라는 말은 목(目)과 진(眞)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이 구성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참된 것을 바라보는 게 화를 내는 것이라는 게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봐도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 관한 책을 읽다가 글의 한 부분이 여기에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은 어떤 경우라도 올바르다고 보는 마음이 성냄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언제나 참이라는 생각은 다른 이를 함부로 재단(裁斷)하고 평가하고 무시하고 차별합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니 참을 보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내가 참이라고, 나만 참이라고 보는 것이 바로 ‘진’입니다. 이 글자는 눈 목(目) 대신에 입 구(口)를 써서 진(嗔)으로 쓰기도 합니다. 나만 참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어리석음의 치(痴)는 알다(知)와 병들어 ‘기대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이 글자도 묘합니다. 의미는 다르지만 아는 것이 병이라는 격언이 떠오르는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아는 게 어리석다는 점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그렇게 아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게 아닙니다. 알았다고,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병이 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며 안다고 하는 사람만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부처께서도 깨달은 척하는 사람의 위험함을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사실 모르면 배우면 됩니다. 모르는 게 많아서 즐거우면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병은 치유가 되고 밝아집니다. 그제 바로 ‘지(智)’입니다. 밝은 깨달음, 지혜입니다. 저는 탐진치(貪瞋痴) 삼독의 한자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눈앞에 갖고 싶은 것에 얽매지 말고, 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르는 것이 많음을 기뻐하고 열심히 배운다면 이미 깨달음의 길에 선 것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꽃이 피는 계절, 산유화

2023/01/03 10:38:48

꽃이 피는 계절, 산유화 추위가 다 지나면 드디어 꽃이 핍니다. 꽃샘추위는 꽃 피는 계절까지 추위가 남는 특별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봄인데도 추운 거죠. 꽃 피는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세상이 밝아집니다. 아마도 당연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 겁니다. 예상이 되면 진부한 글이지요. 꽃은 이렇게 봄의 상징입니다만, 우리는 뜻밖에도 당연한 사실의 반대쪽을 놓치고 삽니다. 그것은 꽃은 종류에 따라 피는 시기를 달리한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봄이 되기 전에도 피는 꽃이 있습니다. 겨울 속에서 이르게 피는 동백이나 매화가 있습니다. 그래도 봄에 가까운 거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네요. 아예 서리를 이겨내며 가을에 피는 국화도 있습니다. 가을바람에 하늘하늘 어울리는 코스모스도 있지요. 그 뿐이 아닙니다. 한여름에 피는 해당화나 배롱나무도 있습니다. 여름에는 한번 피면 오랫동안 피어 있기도 합니다. 산에 오르다보면 꽃이 없는 계절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름 모를 꽃이 연이어 피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시사철 꽃이 핍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꽃이 핍니다. 이런 깨달음은 이미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시에도 나타납니다. ‘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 여기에서 ‘갈’이 가을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만, 늘 피고 지는 꽃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가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소월은 ‘산에는 꽃 지네/꽃이 지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지네’로 시를 마무리합니다. 피는 꽃은 지게 마련이지요. 늘 피어 있다면 조화일 겁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조화도 살아있는 꽃의 향기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꽃은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합니다. 사시사철 계절을 바꾸며, 종류를 달리 하며 새 꽃이 핍니다. 계절을 좇아 피는 꽃은 저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꽃이 종류에 따라 피기를 달리한다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봄에 꽃이 피지 않았다고 서러울 이유도, 초조할 이유도 없습니다. 한여름에 피었다고, 한겨울에 피었다고 못난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홀로 피었기에 더 귀합니다. 더 반갑습니다. 다 알고 있는 말이지만 우리의 삶속에 녹아들지 않은 내용입니다. 봄에는 봄꽃이, 가을에는 가을꽃이 어울립니다. 그래서일까요? 소월은 산유화에서 ‘산에/산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고 노래합니다. 남을 따라 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꽃을 간절히 피우는 것입니다. 저만치 혼자 피었다고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꽃의 친구가 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꽃은 세상과 함께 살아갑니다. 혼자서도 외롭지 않은 삶을 삽니다. 그래서 산유화에서는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꽃이 좋아/산에서/사노라네’라고 노래합니다. 꽃의 친구는 꽃도 있지만 새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넉넉한 산이 있습니다. 꽃이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피고, 그곳에서 벗을 만나고, 거기에서 집니다. 삶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그걸 꽃에게 무심히 배웁니다. 지금은 꽃이 피는 계절입니다. 날마다 꽃이 피는 계절입니다. 날마다 꽃이 지는 계절입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특별한 날입니다.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산유화 시를 자세히 보면 시를 배열한 모습이 산을 닮았습니다. 한자 뫼 산(山)의 모습도 보입니다. 소월의 꽃 같은 유머라고나 할까요.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반말이 높임말이다

2022/12/26 16:34:34

반말이 높임말이다 요즘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옛글 읽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단 세 명이서 한국 어원학회에서 하는 모임인데 신나는 모임입니다. 신나는 이유는 모르는 게 많아서입니다.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은 배울 게 많다는 것이고, 배우면 내 그릇이 커집니다. 신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주에는 높임말과 반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높임말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저는 정말로 높임말이 문제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문제라고 하는 일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 좋다고 하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높임법을 걱정하는 사람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한 높임법과 그 속에 담긴 권위적인 태도를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저도 그런 점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높임법이 사람을 차별하는 데 쓰이면 안 됩니다. 저는 높임법의 기본은 상대에 대한 존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높임의 귀한 가치는 누구나 높이는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존대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서로를 높입니다. 존중하는 것입니다. 높임을 지나치게 형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높임은 귀한 가치가 됩니다. 그 누구 하나 높이지 않아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무시하고 낮추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높임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저는 높임말도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면 건네는 말 한 마디에 세상은 아름답게 변합니다. 그런데 지난 모임에서 스스로 반성했던 이야기는 반말(半 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반말은 높임말의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높임말의 정확한 반대는 낮춤말이었던 겁니다. 반말은 높임말과 낮춤말의 중간에 있습니다. 반쯤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말은 높임도 낮춤도 아닙니다. 물론 높임을 써야 하는데 반말을 하면 낮춤이 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하겠죠. 반말하지 말라는 말은 이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말은 주로 낮춤을 쓰기에 애매한 경우에 쓰입니다. 그래서 저는 반말은 굳이 보면 높임이라고 봅니다. 주로 하게체가 반말에 해당합니다. 해라체가 아주 낮춤에 해당하기 때문에 함부로 쓰기가 어렵습니다. 하게체를 쓰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게체는 주로 교수가 제자들에게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이가 많은 제자도 있었고, 이미 학교에서 선생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어려웠겠죠. 이때 하게체를 씁니다. 장인, 장모가 사위에게 해라체를 쓰지 않고 하게체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딸의 남편을 높이는 것은 곧 내 딸을 높이는 것도 됩니다. 아무리 손아래 사람이라고 해도 아주 낮춤을 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모임에서 나왔던 이야기로는 부모의 종에게도 반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종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었다는 말입니다. ‘~ 하게’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낮추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준 겁니다. 반말의 의미가 요즘은 아주 낮춤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원래 반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함부로 낮추면 안 되는 상황에서 살짝 높임의 등급을 올려 상대를 대우해 주는 반말에는 배려도 느껴집니다. 반말도 높임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