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친나왓 가문, 20년 권력 투쟁의 종착점

작성자 : 관리자 날짜 : 2025/09/10 11:46

태국 친나왓 가문, 20년 권력 투쟁의 종착점

패텅탄 총리 헌재 해임....“제도적 쿠데타”의 반복
20여 년간 태국 정치 지형을 좌우해온 친나왓 가문의 권력이 또다시 무너졌다. 지난 8월 태국 헌법재판소는 패텅탄 친나왓 총리에 대해 윤리 규정 위반을 이유로 해임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탁신 친나왓(2006년), 잉락 친나왓(2014년)에 이어 친나왓 가문 출신으로는 세 번째로 사법부나 군부에 의해 권력에서 축출되는 수모를 겪게 됐다.

캄보디아 통화 유출이 결정타
패텅탄 총리의 몰락은 캄보디아 훈센 전 총리와의 전화 통화 내용이 공개되면서 시작됐다. 통화에서 패텅탄 총리는 태국-캄보디아 국경 분쟁과 관련해 자국 군 고위 장성을 비판하고 캄보디아 측에 유리한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간 국경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터진 이 발언은 태국 내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군부와 보수 세력은 즉각 반발했고, 거리에서는 총리 퇴진 요구 시위가 벌어졌다. 연립정부의 핵심 파트너인 품짜이타이당마저 지지를 철회하면서 패텅탄 총리는 정치적 고립에 빠졌다.

헌재는 결국 “총리가 국가 이익보다 개인적 관계를 우선시해 윤리 규정을 위반했다”며 해임을 결정했다.

20년 반복된 “친나왓 제거” 메커니즘
이번 사태는 친나왓 가문이 태국 보수 엘리트와 벌여온 구조적 권력 투쟁의 연장선이다. 탁신 전 총리는 2006년 부패 혐의로 군부 쿠데타에 의해, 잉락 전 총리는 2014년 권력 남용 혐의로 헌재 판결에 의해 각각 실각했다.

친나왓 가문의 정치적 무기는 농촌 지역을 겨냥한 포퓰리즘 정책이었다. 탁신 전 총리가 도입한 서민 복지 정책으로 농촌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확보했지만, 군부와 왕실 중심의 보수 엘리트는 이를 ‘정치적 야망’으로 간주하며 지속적인 견제를 펼쳤다.

특히 태국 헌법재판소는 구조적으로 보수 성향을 띨 수밖에 없다. 재판관 전원이 군부 주도 개헌으로 구성된 상원의 추천을 받아 국왕이 임명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헌재는 친나왓 가문 총리들을 해임시키는 “권력의 거수기” 역할을 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태국 정치 ‘삼국지’ 혼돈...차기 총리 선출 두고 세 진영 격돌

오렌지-레드-블루 진영, 9월 5일 총리 선출 앞두고 막후 공작 치열
패텅탄 총리 해임으로 태국 정계는 새로운 권력 재편 국면에 돌입했다. 9월 5일로 예정된 차기 총리 선출을 앞두고 세 개 정치 진영이 ‘삼국지’ 구도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캐스팅보트 쥔 ‘오렌지 진영’ 국민당
정국의 열쇠는 의회 최대 단일 정당인 국민당(People’s Party)이 쥐고 있다. 국민당은 자체 총리 후보를 내세우지 않았지만, 이들의 선택에 따라 새 정부 구성 여부가 결정된다.

국민당은 “4개월 내 하원 해산 및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를 조건으로 다른 정당 총리 후보를 지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정부 참여는 거부하고 야당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블루 vs 레드, 국민당 쟁탈전

각 진영은 국민당 확보를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품짜이타이당(블루 진영)은 선제적으로 움직였다. 아누틴 찬위라꾼 대표는 패텅탄 총리 해임 판결 직후 곧바로 국민당을 찾아 모든 조건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연정 이탈 세력들을 규합하며 아누틴의 총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프아타이당(레드 진영)도 만만치 않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직접 나서 진보운동위원회 타나톤 쯩룽르앙낏 위원장에게 접촉, 프아타이당 후보 차이까셈 니띠시리에 대한 지지를 타진했다. 8월 31일에는 프아타이당 지도부가 국민당 지도부와 직접 면담을 가졌다.

4개월 시한부 정부의 ‘긴급 미션’
국민당이 어느 한쪽을 지지할 경우, 새 정부는 4개월이라는 촉박한 시간 안에 의회 해산과 개헌 준비라는 중대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각 진영은 다가올 총선에서의 승리를 위한 전략적 행보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레드 진영의 전략은 공격적이다. 품짜이타이당과 연관된 상원 공모 사건과 카오끄라동 토지 분쟁을 신속히 처리해 정적을 제거하는 한편, 내무부 장관직을 활용한 지방 공무원 인사로 선거 조직을 강화할 계획이다. 동시에 20밧 전철 요금제, 농가 부채 탕감 등 포퓰리즘 정책을 통해 지지층을 결집시키려 한다.

블루 진영은 방어에 치중한다. 카오끄라동 분쟁 처리를 동결시키고 상원 공모 사건을 무마하는 등 기존 권력 기반을 사수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아울러 레드 진영이 단행한 내무부 고위직 인사를 재조정해 권력 구조를 재편하려 한다.

끝나지 않는 정치 불안정의 굴레
이번 사태는 태국이 여전히 선출된 정부와 비선출 권력 간의 구조적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군부와 왕실로 대표되는 보수 엘리트는 사법부를 통해 민주적 선거 결과를 지속적으로 무력화시켜 왔으며, 이로 인해 태국은 만성적인 정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차기 총리가 누가 되든 임기는 4개월에 불과하다. 경제 발전이나 장기 정책보다는 다가올 총선에서의 승리를 위한 단기적 정치 공학에 매몰될 가능성이 높다.

태국 정치의 향방은 결국 탁신 친나왓, 느윈 칫촙, 타나톤 쯩룽르앙낏 등 거물급 정치인들의 라이벌 구도와 국민당의 최종 선택에 달려 있다. 20년간 이어진 친나왓 가문의 권력 투쟁이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