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진국 함정에 갇힌 태국, 무너진 교육이 성장의 발목을 잡다
❖ 예산은 쏟아붓는데 빈곤은 세습… 외국기업들 "혁신 인재 없다" 아우성
태국 경제가 전형적인 ‘중진국 함정(Middle-Income Trap)’에 빠져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때 동남아시아의 경제 맹주로 군림하며 고속 성장을 구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부가가치 첨단 산업으로의 전환에 실패하며 저성장의 늪에 갇힌 모양새다.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전문가들과 태국 진출 글로벌 기업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가장 뼈아픈 뇌관은 다름 아닌 ‘교육 시스템의 실패’다. 태국 정부는 역사적으로 국가 예산의 막대한 비중(약 20% 수준)을 교육에 쏟아부어 왔으나, 현실의 교육은 빈곤을 구제하기는커녕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매서운 비판에 직면해 있다.

무상교육의 환상과 ‘두 개의 태국’
태국은 지난 20년 가까이 15년 무상교육 정책을 최대 치적으로 자랑해 왔다. 하지만 최근 정책 전문가들과 학생 대표들이 모인 ‘네이션 비저너리 클럽(Nation Visionary Club)’ 라운드테이블에서 나온 진단은 참담했다. 교육평등기금(EEF)의 끄라이욧 빠따라왓(Kraiyos Patrawart) 이사는 지난 20년간의 데이터를 근거로 "태국의 교육은 결코 무료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취약계층 학생 수는 급증했다. 정부의 보조금에도 불구하고 하위 10%의 빈곤층 가구는 자녀 1명당 연간 약 1만 바트라는 벅찬 교육비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다. 반면 상위 10%의 부유층은 이보다 7.5배 많은 금액을 교육에 투자한다. 비용의 격차는 곧장 '결과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휩쓰는 극소수의 엘리트가 존재하는 반면, 전체 학생의 약 3분의 2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기준 기본 학력조차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끄라이욧 이사의 표현대로, 값비싼 비용을 감당하며 낮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 빈곤층과 고액 투자를 통해 양질의 교육을 독점하는 부유층으로 나뉜 이른바 '2차원적 불평등'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현실을 외면한 하향식 커리큘럼과 고질적인 자원 배분 실패
태국 교육 혁신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교육부의 '학생 수 기준(Per-pupil funding)' 예산 배정 방식이다. 농촌에 위치한 120명 미만의 소규모 학교들은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린다. 그 결과 6개 학년이 있는 초등학교에 배정된 교사가 6명도 채 되지 않아, 교사 한 명이 두 개 학년을 한 교실에서 동시에 가르치는 촌극이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방콕 외곽에서 태어나는지, 북부 산간 오지에서 태어나는지가 아이의 미래를 결정짓는 셈이다.
하향식의 획일적인 교육과정도 문제다. 쭐라롱껀 대학교의 끄라이 사따락(Krai Satarak) 학생 대표는 난(Nan) 주의 사례를 들며 현장과 괴리된 커리큘럼을 비판했다. 농사일을 돕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는 농촌 아이들에게 정작 절실한 것은 토양화학이나 식물생물학 같은 실용적이고 직업적인 기초 과학 지식이지만, 국가 표준 커리큘럼은 미적분과 같은 추상적 학문에만 매달려 있다. 이는 아이들의 학업 흥미를 앗아가고 잠재력을 질식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뽑을 사람이 없다" 글로벌 기업들의 인재난 경고
이러한 공교육의 붕괴는 태국 산업계에 치명타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 등 주요 국제기관의 보고서와 외국계 기업들의 반응을 종합하면, 태국의 가장 큰 리스크는 ‘숙련된 전문 인재의 고갈’이다.
과거 제조업 조립 라인이나 서비스업을 떠받칠 단순 노동력 배출에는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태국이 중진국 함정을 뚫고 나가기 위해 필요한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컴퓨팅, 소프트웨어 개발 등의 하이테크 인재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아가 글로벌 기업들은 전문 기술뿐 아니라 비판적 사고, 문제 해결 능력, 원활한 소통 능력을 갖춘 인재를 요구하지만, 태국의 단순 암기(Rote memorization) 위주 주입식 교육과 낡은 관료주의는 창의성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최근 제기능을 못하는 독해력 저하 문제, 일명 '기능적 문맹'의 증가는 외국 자본의 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우수한 역량을 갖춘 극소수의 인재들마저 더 나은 대우를 찾아 해외로 떠나는 '두뇌 유출(Brain Drain)' 현상도 심화하고 있다.
행동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전문가들은 지금 당장 전면적인 구조 개혁에 나서지 않는다면 태국은 향후 10년 내에 기회와 단절된 '잃어버린 세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 경고한다.
무엇부터 바뀌어야 하는가. 정책 전문가들과 학생 대표들의 라운드테이블(Nation Visionary Club) 발표 및 제안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솔루션이 제안되고 있다.
첫째, 예산 배정 기준을 학생 수가 아닌 '필요 기반(Needs-based)'으로 전환하여 열악한 환경의 학교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둘째, 지역 경제의 현실과 특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개별 학교와 지역사회에 교육과정 편성 자율성을 대폭 위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가교육법 개정을 통해 단순 암기와 자격증 취득에 매몰된 과거의 모델을 폐기하고, AI와 양자 컴퓨팅 시대를 주도할 '학습자 중심'의 비판적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무상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불평등을 방치하는 시대는 끝났다. 껍데기만 남은 제도를 허물고 실질적인 '교육 평등'과 '질적 혁신'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태국 경제의 엔진은 이대로 영영 멈춰버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