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어울리는 사람의 어울림

2020/10/04 12:49:44

‘어울리다’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하나는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같이 지낸다는 뜻이다. 참 절묘한 조합이다. 그러고 보면 어울리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 어울린다는 말은 나와 똑같다는 뜻이 아니다. 나랑 모든 게 같으면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나와는 다르지만 나를 밀어내지 않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나와 어울리는 사람이다. 어울리는 것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나에게 어울리는 장식품이 있고, 나에게 어울리는 옷이 있다. 반지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목걸이나 귀고리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화장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맨 얼굴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있다. 치마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바지가 어울리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어울린다는 말은 종종 나답다는 의미가 된다. 내게 어울리게 꾸며야 한다. 내게 어울리지 않으면 그저 붕 떠있는 장식일 뿐이다. 유행을 숨 가쁘게 따라가다 보면 나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나에게는 뭐가 어울리는가? 내게 어울리는 말도 있고 행동도 있다. 어떤 사람은 말을 잘하니 말을 해야 하고, 어떤 이는 생각이 깊으니 사색에 잠겨야 한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은 노래를 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 남이 잘 하는 것을 나도 잘 해야 하는 것이 아닌데, 괜히 주눅이 들고 자책을 한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찾아야 한다. 공부를 잘 하고, 시험문제를 잘 푸는 게 능력이어서는 안 된다. 공부는 방편이다. 평생 동안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그것만큼 큰 행복이 없다. 일이 좋아야 한다. 일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서로 다른 사람일수록, 서로 다른 문화일수록 어울리는 점이 많다. 한국인 끼리보다는 다른 나라 사람과 만나면 재밌는 점이 많다. 다르니까 느낄 수 있는 재미다. 외국어는 생존을 위해서도 배우지만 재미를 위해서도 배운다. 내가 그 사람의 말을 하면 그 사람은 반가워한다. 내가 다른 말 속에 담긴 문화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내 그릇도 커지고 더 많은 문화를 담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 어울리려면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 소 닭 보듯이 해서는 어울릴 수 없다. ‘어울리다’라는 말을 친구 사이에 가장 많이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나는 것과 어울리는 것은 다르다. 어울림에는 기본적으로 즐거움이 있다. 보통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어울린다. 같이 음악을 듣고, 춤을 춘다. 같이 음식을 먹고, 술도 마신다. 그런데 자칫하면 이런 것이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다. 자기 음악만이 좋다고 하거나, 자기의 춤이 더 낫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만남은 다툼이 된다. ‘다투다’라는 말은 경쟁에서 왔다. ‘일 이등을 다툰다.’는 말을 생각해 보라. 그 정도면 충분한데도 자꾸 1등을 하려 한다. 당연히 서로 돕는 일은 없다. 음식도 잘 못 먹으면 안 되고, 술도 잘못 마시면 안 된다. 비싼 음식이 좋은 게 아니고 비싼 술이 좋은 게 아니다. 자꾸 좋은 음식 타령을 한다. 술과 음식은 좋은 사람과 먹어야 더 맛있다. 술마다 어울리는 안주가 있고, 음식마다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 있다. 먹는 거야말로 어울림이 생명이다. 지난주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한, 유럽 세종학당 워크숍이 있었다. 나는 특별강연자로 참가하게 되었다. 한국어 교육의 열기,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워크숍이 끝난 후 한국과 유럽의 문화 교류 축제가 있었다. 모든 순서가 감동적이었지만 특히 우리의 악기인 가야금, 대금, 해금과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만들어낸 어울림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연주가 끝난 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서로의 느낌이 잘 어울리는 연주였다. 진정한 어울림은 따뜻하다. 행복하다. (*본 칼럼 내용은 지난 2016년에 개재되었던 내용임을 밝힙니다 : 편집자주) :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오’ 이야기

2020/09/17 16:46:14

‘오’는 입술이 모아지는 음입니다. 입술이 앞으로 밀려나오는 모습입니다. 입술을 동그랗게 하는 음이어서 원순모음(圓脣母音)이라고 합니다. 밝은 모음이어서 감탄사로 표현하면 기분이 좋거나 칭찬의 느낌을 줍니다. ‘오!’의 느낌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우’ 역시 입술이 앞으로 나오는 음이지만 무거운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감탄사로 ‘우!’를 표현하면 주로 불만이나 야유를 나타냅니다. 주로 저음(低音)으로 표현합니다. 무겁게 발음하는 겁니다. ‘오’의 글자를 보면 오가 보여준 느낌을 글자에 그대로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글자는 땅을 나타내는 ‘으’에 아래아를 더한 글자입니다. 즉, 땅 위에 하늘이 있는 것으로 해가 뜨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와의 차이는 오의 경우는 해가 위로 뜬다는 점입니다. 아는 동쪽에서 뜨는 것인데 말입니다. 태양이 위로 뜬다는 점에서 입을 모으고 위로 벌리는 느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양성 모음이라도 글자에 느낌을 담아 구별하고 있는 겁니다. 아와 오를 설명할 때 이렇게 글자의 느낌도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오는 해가 뜨는 모양을 글자에 표현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따뜻한 느낌도 있습니다. 계절 중에서 ‘봄’에 오가 들어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같은 입김이라도 ‘호’와 ‘후’의 느낌이 다릅니다. ‘호~’라고 하면 따뜻한 온도가 느껴집니다. 따뜻한 입김입니다. 아가의 상처에 엄마가 불어주는 바람, 얼어붙은 아이 손에 부는 입김이기에 온도와 사랑이 있습니다. 이렇게 바람을 부는 것을 ‘호호’라고도 합니다. ‘호호’는 엄마의 웃음소리를 표현하기도 하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아가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병이 다 나았을 때 기뻐하는 엄마의 웃음소리가 떠오릅니다. 호호는 행복한 기억이고, 호호는 행복한 마음입니다. 해가 뜨는 것이니 당연히 위로 올라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첫음절에 ‘오’가 들어가는 순우리말 단어 중에는 상승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어휘가 많습니다. ‘오르다, 솟다, 돋다’ 등의 어휘가 전부 오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올라가고, 솟아오르고, 돋아납니다. 오가 들어감으로써 움직이는 방향을 명확히 하는 느낌입니다. 모음 글자를 볼 때 점의 위치와 방향을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많이 나올 겁니다. 오는 원순모음이어서 원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오라고 발음을 하면 왠지 눈도 동그랗게 뜨게 됩니다. 약간은 놀라는 느낌을 줍니다. 눈도 동그랗게 뜨고, 입도 동그랗게 벌리고 있으니 놀란 모습이기는 한데, 재미있는 느낌입니다. 알파벳에서도 ‘O’는 동그라미로 표현합니다. 입을 동그랗게 하고 내는 소리이기에 동그라미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우리말에서는 동그라미를 목구멍의 모양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응(ㅇ)이라는 글자입니다. 텅 비어있는 느낌을 표현한 겁니다. 같은 동그라미지만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말에서도 ‘오’는 입모양에서부터 동그란 느낌을 담고 있습니다. 글자가 아니라 소리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동그랗다’라는 단어에 오가 들어있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동그랗다’라고 발음을 하려면 입을 동그랗게 해야 하는 겁니다. ‘돌다’라는 단어에도 오가 들어갑니다. 원을 만들며 움직이는 행위입니다. 김밥을 ‘돌돌’ 마는 것에도 오가 들어가네요. 오의 글자는 태양이 떠오르는 밝고 따뜻한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상승의 이미지도 표현합니다. 오의 소리는 동그란 입을 통해서 나오기에 원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오의 글자와 소리의 미묘한 조화에 감탄하게 됩니다. 한글 모음 글자의 매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우리는 참 다행이다

2020/09/01 14:40:32

세상을 살면서 어려운 일을 참 많이 만납니다. 몸에도 마음에도 병이 생기고, 주변에 친구나 가족에게 불행한 일이 닥쳐옵니다. 오죽하면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했을까요? 고통의 바다처럼 괴로움의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온다는 뜻일 겁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면 이런 고통을 이겨낼 자신도 사라집니다. 그럼 더 우울해 집니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도 걱정이 되어 괴롭힙니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일도 미리 당겨서 걱정을 하지만 힘든 생각을 피할 방법을 알지 못해 더 괴롭습니다. 걱정하지 않는 방법을 수많은 책에서 제시하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그렇게 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겁니다. 감기약의 종류가 많은 것과 같은 이치일 수 있겠네요. ‘다행’이라는 말을 공부하다가 다행은 주로 불행한 일이 있을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을 듣고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다행(多幸)이라는 단어는 행운이 많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단어를 불행한 상황에 사용한다니 참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가장 불행한 순간에도 우리는 행복을 찾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불행한 순간조차도 우리에게는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하기 다행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세상입니다. 더 큰 불행을 맞지 않은 것만 해도 운이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난 어떤 일이 다행일까요? 다행이라는 말이 행운이 많다는 의미이니 우리가 갖고 있는 행운의 수를 세어보면 어떨까요? 받아들이기 힘든 분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엄청난 행운입니다. 수많은 실패를 뚫고 우리는 엄마, 아빠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말조차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괴로운데 태어난 게 무슨 행복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태어난 게 행운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를 세상에 나오게 해 주신 분이 있다는 것, 나를 가엽게 생각해 준 분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부모님이 어떤 분이든지 감사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행운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인간은 함께 삽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참 다행입니다. 나를 위로해 주고, 내가 위로해 줄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이 잘 안 보인다면 내가 위로할 사람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주변에 나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가 정말 힘들다면 더 힘든 사람을 찾아 위로를 건네 보세요. 위로는 상호적이어서 위로를 하면서도 위로를 받습니다. 내가 위로를 받는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겁니다. 사실 우리가 힘든 것은 위로받는 것조차 두렵고 부끄러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위로하는 사람도 내게 위로를 받는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행이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적이 부른 노래인데, 많은 이들이 무척 좋아한 노래였습니다. 멜로디도 좋았지만 특히 가사가 우리에게 공감을 주었습니다. 좋은 가사가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보여주는 노래입니다. 가사 끝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다행이다’라는 말은 힘든 마음에 위로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큰 행복입니다. 가사 속에는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어서’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위로를 주고받는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누구를 위로하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다행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은 내 옆에 서있는 사람 덕분입니다. 나도 그에게 다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있으나 기억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행복을 생각해 봅니다. 참 행복한 사람인데, 우리는 종종 그걸 잊고 삽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사흘 이야기

2020/08/20 12:46:48

한동안 사흘이 입길에 올랐습니다. 사흘을 ‘4일’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처음에는 사흘을 4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웃었는데,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좀 놀랐습니다. 사흘의 ‘사’와 4의 혼동이겠네요. 왜 혼동되게 만들었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그것도 어이없지만 재미있는 일입니다. 갑자기 병사의 계급 순서를 ‘일병, 이병, 삼병’이라고 했다는 사람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것도 농담이었겠지요. 순우리말 수사와 한자어 수사가 비슷해 보이는 것에는 ‘이틀’도 있습니다. 이틀과 2가 닮아있습니다. 요즘에는 2틀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사흘과 4를 더 혼동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흘을 잘못 들어서 4일로 들었다면 이해가 가지만 사흘의 뜻을 ‘4일’로 알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과장이 있는 듯합니다. 아무리 국어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한자어 수사는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 이십, 삼십, 사십’ 등이지만 순우리말 수사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스물, 서른, 마흔, 쉰’ 등으로 전혀 다릅니다. 한국어의 계통을 말할 때 다른 언어와 우리말 수사의 일치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한국어와 제일 비슷하다는 일본어도 수사는 한국어와 전혀 다릅니다. 또한 한국어의 수사는 뒤의 명사를 꾸며줄 때는 모양이 약간씩 바뀌기도 합니다. ‘한, 두, 세, 네, 스무’ 등이 그렇습니다. ‘석, 넉, 닷’ 등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순우리말에서 수를 나타내는 말은 날짜를 셀 때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여드레, 아흐레, 열흘 등입니다. 하루를 제외하고는 뒤에 ‘흘’이나 ‘새, 에’가 붙어있습니다. 새와 에는 서로 관계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닷’이나 ‘엿’에 ‘애’가 붙은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수를 나타내는 ‘읻, 사, 나, 닷, 엿, 일, 여들, 아흘, 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며칠이라는 말의 어원도 ‘몇 일’이 아니라 ‘몃흘’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일’이라고 쓰지 않고, ‘며칠’이라고 쓰는 겁니다. 순 우리말 수사를 정리해 보면 ‘하루와 하나’ ‘둘과 읻’ ‘셋과 사’ ‘넷과 나’ ‘다섯과 닷’ ‘여섯과 엿’ ‘일곱과 일’ ‘여덟과 여들’ ‘아홉과 아흘’ ‘열과 열’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언뜻 봐도 대부분 쉽게 연결이 가능합니다. 모습으로는 ‘둘과 읻’이 완전히 달라 보입니다. 그런데 ‘읻’의 경우는 ‘이듬해’와 관련성이 보입니다. 다음, 두 번째 정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셋과 사’, ‘넷과 나’는 달라 보이지만 ‘사나흘’과 ‘서너 개’를 비교해 보면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와 서, 나와 너가 모음이 교체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음이 교체되어 새로운 어휘를 만드는 예는 우리말에 아주 많습니다. ‘사’가 3의 의미로 쓰이는 재미있는 예는 동물의 나이를 셀 때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동물의 세 살을 의미하는 말이 사릅입니다. 한 살은 하릅, 두 살은 두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의 ‘하룻’이 사실은 하루가 아니라, 하릅이라는 연구도 재미있습니다. 즉, 한 살 먹은 강아지는 눈에 보이는 게 없다는 의미입니다. 젊으면 용감하기도 하고, 무모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렇게 사흘에서 시작한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우리말 수사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편 일본어의 수사는 지금의 우리말과는 닮지 않았지만, 고구려의 수사와는 매우 닮아있다는 점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일 신기하게 생각하는 수사는 바로 ‘마흔과 쉰’입니다. 다른 단어와 연관성을 찾는 게 쉽지 않습니다. 수사에도 수수께끼가 한 가득입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힘을 빼다

2020/08/05 10:11:57

‘힘’이라는 말은 정의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힘이 세다, 힘이 들다, 힘을 내다, 힘을 주다, 힘이 빠지다 등 함께 쓰이는 표현도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힘은 참 중요한 어휘입니다.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이루고 싶은 일도 있고, 말 한마디에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살기가 힘들다는 말을 들으면 안쓰럽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힘이 들어가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 힘이 빠져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몸에 힘을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이 들어가야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힘이 생겨나야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밥도 먹습니다. ‘밥심’이라는 말은 ‘밥힘’이라는 뜻입니다. 먹어야 힘을 내고,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주먹을 쥐는 것도 다른 말로 하면 몸에 힘을 주는 것입니다. 가슴에 힘을 주고, 어깨에 힘을 줍니다. 힘을 주는 게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목에 힘을 주고 다닌다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거만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힘은 필요할 때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늘 힘을 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뜻밖에도 살아가면서 힘을 빼야 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생활의 현장에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힘을 빼라는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힘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상하지요. 힘을 빼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언제 힘을 빼라는 소리를 듣게 되나요? 언제 힘을 주고, 언제 힘을 빼야 할까요? 저는 미용실에서 머리 감을 때 목에 힘을 빼라는 이야기를 들은 게 생각이 납니다. 미용사가 머리를 감아줄 때 목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제대로 감기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편하게 누워서 힘을 빼라는 말을 듣지만 막상 목에 힘을 빼는 게 쉽지 않습니다. 목에 힘을 주고 사는 버릇은 되어 있는데 목에 힘을 빼는 버릇은 없었나 봅니다. 몇 번의 시도 끝에야 겨우 목에 힘을 빼게 됩니다. 주사를 맞을 때도 힘을 빼라고 하지만 오히려 긴장해서 힘을 더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힘을 빼라는 말이 우리를 긴장시키는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운동을 배울 때도 힘을 빼라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특히 수영을 배울 때 제일 자주 들은 소리가 힘을 빼라는 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힘을 주면 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야기를 들어도 처음에는 힘을 뺄 수도 없습니다. 힘을 빼면 더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물론 힘을 빼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겁니다. 힘을 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에 새삼 놀랍니다. 우리는 보통 때 힘을 주고 있지 않고 있음을 새삼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힘을 빼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힘을 주는 겁니다. 힘을 주지 않고 힘을 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무엇을 배우거나 세상을 살아갈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힘껏 살지 않고서 힘을 뺄 수는 없습니다. 힘이 드는 것은 힘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어야 힘을 뺄 수가 있습니다. 집착을 없애려면 집착이 있었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요즘 저는 장구를 배우고 있습니다. 장구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은 일단 세게 치라고 합니다. 세게 칠 줄 알아야 나중에 힘을 빼고 칠 수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세게 쳐서 제대로 소리를 낸 후 점차 힘을 빼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장구와 함께 민요도 배우고 있는데, 민요도 마찬가지입니다. 큰소리로 부를 수 있어야 낮고 깊은 소리도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목청을 틔우고 나서야 세밀한 소리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겁니다. 세상을 사는 것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힘든 삶일수록 더 스스로에게 힘을 주었으면 합니다. 특히 어깨에 힘을 주었으면 합니다.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은 자신감을 의미합니다. 목에 힘을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힘이 들더라도 앞을 향해 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자신감을 갖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나서 서서히 힘을 빼는 겁니다. 힘을 빼고 옆을 봐야 합니다. 힘을 빼고 나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일 겁니다. 늘 힘만 주고 살고 있다면, 반대로 늘 힘이 빠져 살고 있다면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 힘을 주고 빼면 힘만 들어갑니다. 그야말로 힘든 겁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조현용입니다

2020/07/22 13:40:04

자기를 남에게 소개할 때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인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은 특별한 고민 없이 자기 이름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조현용입니다.’라고 하거나 ‘제 이름은 조현용입니다.’라고 소개하면 됩니다. 나보다 어른에게 소개를 할 때는 성을 빼고 이름만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전화를 걸 때 ‘선생님, 현용입니다.’라고 표현하는 게 예의를 갖춘 표현입니다. 자기를 남에게 소개할 때 고민이 되는 장면은 지위가 붙어 있는 경우일 겁니다. 자신이 높은 사람이면 이름 뒤에 지위를 붙여서 소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아무개 국장입니다.’라든가 ‘저는 무슨 회사에 아무개 사장입니다.’라고 소개하는 모습입니다. 어떤가요? 자연스러운 느낌인가요? 좀 어색하지는 않은가요? 이런 장면은 수도 없이 나타납니다. 학생들 앞에서 자신을 아무개 교수라고 소개하거나, 아무개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는 예도 자주 보입니다. 대학에서는 자신을 아무개 학장이나 아무개 처장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교수끼리 서로 소개하는 자리에서도 자신을 무슨 과의 아무개 교수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무척 어색하게 들리는데, 사람들은 하도 들어서인지 덤덤하거나 오히려 이러한 표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은 전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틀렸다는 것을 알고도 그렇게 소개한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겠죠. 단순하게 설명을 하자면 지위는 그 사람을 높여서 부를 때 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보통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소개를 해 줄 때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강연을 해 주실 분은 아무개 학장님이십니다.’와 같은 표현을 쓰는 거죠. 마찬가지로 아무개 교수, 아무개 사장, 아무개 실장 등의 표현도 당연히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올 때 존경의 표현이 됩니다. 자신이 자신을 존경하는 모양새가 되면 어색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소개할 때는 이름 뒤에 지위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럼 자신의 지위를 꼭 표시해야 할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경우에는 ‘무슨 대학에 학장으로 있는 아무개입니다.’라고 표현을 하거나 ‘무슨 회사의 대표 아무개입니다.’라고 표현하면 됩니다. 이름을 소개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면 그냥 ‘무슨 부서의 무슨 과장입니다.’라고 표현하면 됩니다. 저와 같은 경우라면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 원장입니다.’,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 원장으로 있는 조현용입니다.’, ‘국제교육원 원장 조현용입니다.’와 같은 표현이 가능하겠지요. 물론 제가 원장인 것을 알지 않아도 되는 사람 앞에서는 굳이 원장이라는 표현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냥 ‘경희대학교 교수 조현용입니다.’라고 표현하면 충분합니다. 한편 우리말에서는 직업명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하는 일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농부라는 말보다는 농사를 짓는다는 말을 선호하죠. 그런 의미에서 교수라는 말보다는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좋겠습니다. 제가 저를 소개할 때 제일 많이 쓰는 표현은 ‘경희대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조현용입니다.’ 또는 ‘한국어 어휘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는 조현용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소개라는 생각입니다. 자기소개도 문화이고 예의입니다. 어떻게 소개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보여주기도 하고, 수준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언젠가는 이런 소개 방식도 달라질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는 태도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소개가 세상을 만나는 첫 방법이니까요.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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