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반말이 높임말이다

2022/12/26 16:34:34

반말이 높임말이다 요즘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옛글 읽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단 세 명이서 한국 어원학회에서 하는 모임인데 신나는 모임입니다. 신나는 이유는 모르는 게 많아서입니다.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은 배울 게 많다는 것이고, 배우면 내 그릇이 커집니다. 신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주에는 높임말과 반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높임말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저는 정말로 높임말이 문제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문제라고 하는 일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 좋다고 하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높임법을 걱정하는 사람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한 높임법과 그 속에 담긴 권위적인 태도를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저도 그런 점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높임법이 사람을 차별하는 데 쓰이면 안 됩니다. 저는 높임법의 기본은 상대에 대한 존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높임의 귀한 가치는 누구나 높이는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존대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서로를 높입니다. 존중하는 것입니다. 높임을 지나치게 형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높임은 귀한 가치가 됩니다. 그 누구 하나 높이지 않아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무시하고 낮추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높임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저는 높임말도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면 건네는 말 한 마디에 세상은 아름답게 변합니다. 그런데 지난 모임에서 스스로 반성했던 이야기는 반말(半 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반말은 높임말의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높임말의 정확한 반대는 낮춤말이었던 겁니다. 반말은 높임말과 낮춤말의 중간에 있습니다. 반쯤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말은 높임도 낮춤도 아닙니다. 물론 높임을 써야 하는데 반말을 하면 낮춤이 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하겠죠. 반말하지 말라는 말은 이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말은 주로 낮춤을 쓰기에 애매한 경우에 쓰입니다. 그래서 저는 반말은 굳이 보면 높임이라고 봅니다. 주로 하게체가 반말에 해당합니다. 해라체가 아주 낮춤에 해당하기 때문에 함부로 쓰기가 어렵습니다. 하게체를 쓰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게체는 주로 교수가 제자들에게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이가 많은 제자도 있었고, 이미 학교에서 선생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어려웠겠죠. 이때 하게체를 씁니다. 장인, 장모가 사위에게 해라체를 쓰지 않고 하게체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딸의 남편을 높이는 것은 곧 내 딸을 높이는 것도 됩니다. 아무리 손아래 사람이라고 해도 아주 낮춤을 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모임에서 나왔던 이야기로는 부모의 종에게도 반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종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었다는 말입니다. ‘~ 하게’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낮추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준 겁니다. 반말의 의미가 요즘은 아주 낮춤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원래 반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함부로 낮추면 안 되는 상황에서 살짝 높임의 등급을 올려 상대를 대우해 주는 반말에는 배려도 느껴집니다. 반말도 높임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기쁘고 즐겁게 사세요

2022/12/06 13:23:44

기쁘고 즐겁게 사세요 감정을 나타내는 말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깨달음을 주는 말도 많습니다. 우리말에서 아주 기분이 좋을 때 쓰는 말은 기쁘다와 즐겁다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네 인생이 늘 기쁘고 즐거우면 좋겠습니다. 모두 그렇게 되기 바랍니다. 범사에 기뻐하라는 말은 평범한 일에도 기뻐하라는 뜻이고 결과적으로 모든 일에 기뻐해야 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늘 기쁜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쁘다와 즐겁다의 의미 차이를 저에게 묻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다른 질문과 달리 이 질문을 제게 하는 사람은 대부분 답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답을 안다는 점을 내세우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 실력을 시험해 보려고 하는 듯도 합니다. 아무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쉽게 대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둘 다 좋은 감정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 표현하는 말이기는 한데 어딘가 차이가 있습니다. 잘 살피면 범위를 달리하는 부분이 보입니다. 이런 유의어는 많은 경우에 동의어와 차이 없이 쓰입니다. 정확한 용어로 보면 동의어는 엄밀히 말해서 없습니다. 완전히 같은 말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동의어라는 용어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의어는 사실 모두 유의어인 셈입니다. 동의어 중에는 부분 동의라는 말도 있는데 유의어가 바로 부분 동의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유의어는 같은 말이 아니라 비슷한 말이고, 비슷한 말은 사실상 다른 말입니다. 따라서 유의어를 논할 때는 공통점 못지 않게 차이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기쁘다와 즐겁다는 같은 상황에서 쓸 수 있지만 분명한 차이도 있습니다. 기쁘다와 즐겁다를 구별하는 가장 명확한 문장은 논어의 첫구절의 예입니다. 우리가 보통 학이편(學而編)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 기쁠 열이 나옵니다. 그리고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訪來 不亦樂乎)’에 즐거울 락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기쁜 것은 배우는 것이고, 즐거운 것은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즉 기쁜 것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입니다. 배우는 것은 기쁨입니다.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때로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좋은 스승에게 배울 때 우리는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낍니다. 희열(喜悅)은 기쁨의 뜻이 반복된 말입니다. 기쁘고 또 기쁜 일입니다.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속에서 익을 때 더 기쁜 것입니다. 즐겁다는 기본적으로 혼자만의 감정이 아닙니다. 더불어 함께의 감정입니다. 논어에서는 붕우를 이야기했습니다. 벗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한자를 좋아합니다. 월(月)은 여기에서 육(肉)을 의미합니다. 몸은 곧 나입니다. 내 몸이 하나 더 있는 것이 바로 벗입니다. 벗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슷한 또래일 필요는 없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 함께 있고 싶은 사람,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은 모두 벗입니다. 그 사람이 멀리에 있었다면 무척 그리웠겠지요. 물론 만나지 않아도 늘 마음으로 함께 하는 존재이지만 만나면 몸과 몸이 가까이 있기에 더 좋습니다. 그때의 감정이 즐거움입니다. 저는 이 감정을 관계와 사회성의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 두 감정이 섞입니다. 그래서 두 감정의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누구와 함께 있어서 생긴 감정은 즐거움이지만 그 때 내 속에도 기쁨이 넘치니 즐거움과 기쁨은 통합니다. 나는 혼자 있으니 기쁜 감정일 테지만 마치 누구와 함께 하는 느낌이라면 즐거움이 됩니다. 노래를 듣고, 책을 읽을 때도, 사랑하는 이를 생각할 때도 즐겁습니다. 기쁨이 곧 즐거움입니다. 저는 우리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기 바랍니다. 혼자서도 기쁜 하루하루가 되고, 이왕이면 함께하는 즐거운 나날도 되기 바랍니다. 배워서 기쁘고, 함께 하여서 즐겁다는 그 말이 참 좋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체념과 깨달음의 세계

2022/11/07 11:17:47

체념과 깨달음의 세계 길을 걷다보면 갈림길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길을 택하면 다른 길을 포기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인생에서는 그런 장면이 많습니다. 둘 다 손에 넣을 수 없는 경우에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괴로운 순간입니다. 이 때 들려오는 단어가 체념입니다. 삶이라는 길에서 우리는 선택을 하고 체념을 합니다. 체념(諦念)이란 말을 들으면 포기(抛棄)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전에 저에게 체념과 포기라는 말의 의미 차이를 물으셨던 분이 생각납니다. 사실 체념과 포기를 구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체념이 곧 포기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하지만 체념과 포기는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 포기(抛棄)의 한자를 보면 던질 포에 버릴 기입니다.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이겠으나 권투 시합에서 게임을 포기할 때 코치가 수건을 던지기도 합니다. 던져 버리는 것이 포기를 의미하는 겁니다. 다 던져버리고 싶다는 말이 무섭게 들립니다. 일본어에서도 포기한다는 의미의 단어에 체(諦)를 씁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일본어에서도 포기와 체념이 잘 구분되지 않는 듯싶습니다. 주변에 수학 공부가 어려워서 포기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그런 학생을 수포자라고 합니다. 수학을 포기한 자라는 말입니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 정말 모르겠으면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바로 포기의 충동입니다. 마라톤을 할 때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주저앉아 일어나기 싫은 마음입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참 많습니다. 사는 게 포기의 연속이라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저는 포기라는 말과 체념이라는 말을 들으면 소유의 느낌이 납니다. 포기라는 말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다는 느낌인 반면, 체념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왠지 포기라는 말에는 아쉬움이 강하게 느껴지지만, 체념에는 그 정도의 느낌은 아닙니다. 체념에서는 오히려 달관의 경지마저 느껴집니다. 사실 체(諦)라는 말은 포기와 관련이 되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체는 깨달음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한자 체(諦)의 의미를 찾아보면 ‘살피다, 조사하다, 자세히 알다, 소리 내어 울다, 진실, 깨닫다’의 의미입니다. 이 중에서 ‘진실’과 ‘깨닫다’는 의미는 불교의 의미라고 합니다. 즉, 체념이라는 말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살피는 생각이고, 깨달음의 생각인 셈입니다. 세상을 살면서는 체념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 것이라고 딱히 이야기하기에는 곤란한 것이 많기 때문에 손에서 놓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착(執着)은 체념의 반대말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싶어 하고, 손을 놓지 못하는 수많은 것을 살피고, 조사해서 자세히 알아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진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본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념은 깨달음입니다. 나를 자라게 합니다. 저는 체념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동안은 포기하고 말았던 수많은 일들이 왠지 깨달음을 위한 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의 포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강박관념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내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 모든 것을 다 이루어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심한 고통이 될 수 있음도 알아야 할 겁니다. 살면서 우리에게는 종종 체념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집착의 마음을 옅게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고 알게 되는 일, 이것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일은 소중한 깨달음일 겁니다. 꽉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습니다. 마음이 편하네요. 엷은 미소를 짓게 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심심한 사과가 심심하다

2022/09/28 11:05:06

심심한 사과가 심심하다 문해력이라는 어려운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한국어 어휘 공부를 평생 하고 있는 저도 문해력이라는 말을 들은 지 그리 오래 안 되었고 사용해 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굳이 보자면 학술어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문해력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을 겁니다. 주로 문해력의 개념을 어휘력과 혼동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문해력이라는 어려운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한국어 어휘 공부를 평생 하고 있는 저도 문해력이라는 말을 들은 지 그리 오래 안 되었고 사용해 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굳이 보자면 학술어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문해력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을 겁니다. 주로 문해력의 개념을 어휘력과 혼동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저는 문해력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답답한 부분이 있습니다. 문해력이 없는 게 어찌 아이들만의 탓일까요? 아이들의 흥미를 고려하지 않은 내용, 비비 꼬아놓은 글을 읽고 답을 고르게 하는 평가, 쓰고 싶은 다양한 글감을 다루는 시간이 없는 등 교육의 문제는 없을까요? 문해력의 문제에는 많은 현상이 연결됩니다. 또한 지나치게 어려운 단어나 표현을 쓰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을까요? 최근에 ‘심심한 사과’에 대한 이야기가 문해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예로 등장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라 심심한 사과의 진정성에서 출발하였다고 봅니다. 요즘에는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에서 깊은 사과와 진정한 사과의 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 표현이 변명의 말처럼 들리는 것은 저뿐일까요? 마치 유감을 표명한다는 표현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저는 종종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잘못이 드러나서 기분이 좀 그렇다는 것인가 헷갈립니다. 변명의 느낌 아닌가요? 저에게는 변명으로만 들립니다. 그러니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오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솔직하게 하여야 문해력이 생깁니다.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만한 말로 하는 게 의사소통의 시작입니다. 저에게도 유감스럽지만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은 그저 심심한 찌개를 먹듯이 별 감흥이 없습니다. 의사소통은 내가 한 말을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이해해야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문해력은 상호적입니다. 어쩌면 현재의 문해력을 늘리는 지름길은 한자공부를 강화하는 것일 겁니다. 주로 모르는 어휘표현은 한자어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가능하면 책이나 신문에 한자를 병용하면 좋겠죠. 고전을 많이 읽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걸 원하는가요? 교육과정을 바꾸는 논의를 시작해 보면 어떤 결말이 나올까요? 제가 볼 때는 생산적 결말이 아니라 다툼만 일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 더 디지털 문해력이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요? 그 말이 더 어렵네요. 역시 이 말도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디지털 문해력이 부족해서 문제라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디지털 문해력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본인의 생각과는 많이 다른 뜻일 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늘 푸른 소나무는 늘 변하는 소나무

2022/09/14 16:05:28

늘 푸른 소나무는 늘 변하는 소나무 늘 푸른 나무라는 말은 한자어로 하면 상록수입니다. 심훈 선생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김민기 선생의 노래 제목이기도 합니다. 상록수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추억이 다를 것입니다. 상록수의 노래 가사와 힘든 역경을 이겨내는 장면들은 늘 감동적입니다. 늘 푸르고 싶다는 것, 거친 세상을 꿋꿋이 이겨내고 싶다는 희망을 안고 사는 것은 처절한 아름다움입니다. 푸르다는 풀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말의 푸른색은 풀색인 셈입니다. 푸르다라는 말이 하늘이나 바다를 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푸름의 기본은 풀이나 나뭇잎의 색깔입니다. 많은 언어에서 풀색과 하늘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색깔의 구분도 중요한 문화의 특징인 셈입니다. 우리말에서도 구별하지 못하는 색이 많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언어보다 세밀하게 색을 구분해 내기도 합니다. 푸름의 상징으로는 소나무를 들 수 있습니다. 보통 상록수라고 하면 소나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솔잎이 사철 푸르기에 생긴 상징일 겁니다. 애국가에도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소나무는 사군자 중의 하나가 아닌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란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보다 소나무를 더 좋아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철 푸르게 우리와 늘 함께 있기 때문이겠죠. 늘 푸르다는 말을 우리는 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생각하고 칭송합니다. 잎이 나고 자라고 색이 변하고 낙엽이 되는 나무와는 달리 늘 푸르기에 지조라든가 정절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산을 걷다가 소나무에 대한 설명을 보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사실일 텐데 무감각하게 지나간 것일지도 모릅니다. 늘 푸른 소나무의 비결을 설명해 놓은 글이었습니다. 소나무는 늘 잎이 떨어지고 다시 생겨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푸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죠. 한 번 생겨난 잎이 오랜 세월을 지켜나갈 수는 없겠죠. 늘 똑같은 잎으로 푸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상록수라는 말에서 같은 푸름, 변하지 않는 푸름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상록은 늘 같은 푸름이 아니고 늘 변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늘 푸른 소나무는 늘 변하는 소나무이고, 늘 새로운 소나무입니다. 저는 이 말을 쓰면서 가슴이 뜁니다. 달리 말하면 늘 새로워지는 나무가 상록수인 셈입니다.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어, 마침내 어제가 내일이 된 소나무입니다. 그래서 늘 푸른 소나무, 시시각각 새로운 소나무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소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늘 똑같기 때문이 아니라 늘 새롭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저는 걷는 일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답답한 마음을 떨치려 걸었는데 요즘에는 걷는 것 자체에 힘든 기쁨을 얻습니다. 몇 시간을 걷다보면 조금 전과 달라져 있는 스스로를 느끼게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걸으면서 땀을 흘리고 물을 마시며 새로운 내가 됩니다. 나를 바꾸고 있는 시간인 셈입니다. 바뀜을 느끼는 고마운 순간인 셈입니다. 제가 주로 걷는 숲에서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를 만납니다. 대관령과 안면도의 소나무 길도 참 좋습니다. 축령산의 잣나무 숲길은 위로와 치유를 선물합니다. 월정사의 전나무 숲은 참 평화롭습니다. 늘 푸르기에 계절마다 느끼는 감정도 다릅니다. 고마운 감정입니다. 문득 늘 새로우려면 늘 덜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늘 푸르려면 집착을 버리고 날마다 새로운 일을 찾아서 앞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감정의 위로

2022/08/02 11:19:53

감정의 위로 우리말은 감정에 대한 어휘가 발달한 언어입니다. 형용사가 발달하였다는 것도, 감각을 나타내는 말이 발달하였다는 것도 모두 감정과 연계됩니다. 의성 의태어나 색과 관련된 표현이 많은 것은 우리의 감정이 움직이고 보는 것의 다채로움을 알게 합니다. 어휘에 나타난 감정을 살피다보면 뜻밖의 위로를 얻게 됩니다. 마음이 참 편해집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아름답다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만, 중세국어에 나오는 아름은 ‘나’라는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름답다를 ‘나답다’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알맞아 보입니다. 이렇게 해석하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나다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내가 귀해야 모두가 귀한 거죠. 사랑한다는 말은 원래 생각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말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를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생각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기도 합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 있어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이겨내는 힘을 갖습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강하다는 말은 참으로 맞습니다. 울다와 웃다는 울림의 감정입니다. 슬픔이나 기쁨에 앞서는 울림입니다. 울다에 나온 울리다는 이런 감정의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는 것은, 그래서 웃는 것은 근본적으로 ‘혼자’하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 울면 같이 울고, 누가 웃으면 우리도 웃습니다. 감정이 울려옵니다. 거울효과라고도 하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합니다. 이건 노력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그대로 감정의 울림에 맡겨두면 되는 일입니다. 저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슬픔이 없는 인생은 불가능합니다. 헤어짐이 없는 삶이 없기에 슬픔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감정입니다. 그래서 싫었을 겁니다. 슬프다는 말과 싫다는 말은 어원이 같습니다. 슬픈 게 싫고, 싫은 게 많아서 슬픕니다. 여러 번 싫다와 슬프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슬픔을 피하는 방법이나 싫음을 이기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싫어하지 않으면 슬픈 일도 줄어듭니다. 기쁘다와 즐겁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둘 다 좋은 감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용하는 장면을 보면 기쁘다는 주로 개인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반면 즐겁다는 여럿이 함께 느끼는 감정입니다. 배우고 익히는 것이 기쁘고, 벗과 함께하니 즐겁다는 논어의 구절이 기쁘다와 즐겁다를 잘 나누어 보입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하루하루 자라는 기쁜 삶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바랍니다. 예쁘다는 보호하고 싶다는 감정입니다. 아름답다와 느낌이 다른 것은 보호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쁘다면서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꽃도, 아이도,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그렇습니다. 어여삐 여긴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아끼는 것입니다. 아낀다는 말도 아깝다는 말과 연관이 됩니다. 쥐면 터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자식을 예뻐하고 아끼던 부모님의 감정이 떠오르는 말입니다. 우리말은 감정이 발달한 언어입니다. 감정이 발달하였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고, 변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이야기한 감정에 대한 단어를 보면서 마음의 위로가 생겼기 바랍니다. 말은 마음이고 감정이고 힘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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