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반말은 무척 어렵다

2023/12/31 16:53:50

반말은 무척 어렵다 한국어는 높임법이 발달한 언어입니다. 그중에서도 상대높임법, 즉 청자높임법이 발달하였습니다. 상대높임법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높임의 등급을 달리하는 겁니다. 상대높임법이 발달한 언어는 한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자바어 정도만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한국인이 아니라면, 한국어가 모어가 아니라면 상대높임법은 어렵습니다. 그중에서도 뜻밖에도 반말이 높임 표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한국어에서는 주로 종결어미에 의해서 상대 높임이 실현됩니다. 상대 높임의 등급은 학교문법에서는 일반적으로 격식체 4단계, 비격식체 2단계로 나눕니다. 이 중에서 격식체의 ‘하게체’와 ‘하오체’의 사용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게체의 경우는 장인과 장모의 말투나 나이 든 교수의 말투에 조금 남아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찾아보기가 어려우며, 하오체의 경우는 문서에 ‘하시오’라고 남아있거나 사극에서만 들을 수 있는 말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재외동포나 외국인의 경우에는 주로 격식체 2단계 즉 ‘합쇼체’와 ‘해라체’, 비격식체 2단계 즉 ‘해요체’와 ‘해체’만을 학습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주높임 단계인 ‘하십시오체’와 두루높임 단계인 ‘해요체’는 높임으로 볼 수 있고, 아주낮춤인 ‘해라체’와 두루낮춤인 ‘해체’는 낮춤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낮춤을 반말이라고 합니다. 반말은 반말 말하는 짧은 투의 말이라는 기원도 있습니다. 또한 아주 낮추지 않고, 반만 낮추는 일종의 높임이라는 기원도 있습니다. 보통 하게체나 하오체가 주로 이런 의미의 반말에 속합니다. 듣는 이를 낮추지 않으려고 쓰는 말투라는 의미입니다. 사위나 나이가 찬 제자에게 쓰는 말투입니다.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 학습자에게 높임법의 사용에 대해서 질문하면 높임 표현에 대해서 아주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높임법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겁니다. 그런데 반말 사용에 대하여 질문하면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적다는 대답이 많습니다. 이는 재외동포 아이들과는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외동포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가정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경우 반말이 자유롭습니다. 특히 해요체는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하지만 집 밖을 나가는 순간 반말은 아주 어려운 말이 됩니다. 한국어 사용의 실수는 주로 반말 사용에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한국어를 가르칠 때 높임 표현보다는 어쩌면 낮추는 표현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말의 상대높임법은 단순히 나이와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나이뿐 아니라 지위와도 관련이 되고, 친분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나이는 아래지만 나보다 지위가 높은 경우에 반말은 어렵습니다. 직장에서 괴로운 상황에 부닥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나보다 어리더라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반말하면 큰일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질풍노도의 중고등학생은 조심해야 합니다. 한국어에서 높임과 낮춤의 복잡함은 한국어 학습자에게 반말 사용이 매우 어려운 부분이라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외국인의 경우는 이러한 반말의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용을 꺼립니다. 실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어린 상대나 심지어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낮춤의 사용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나타납니다. 따라서 한국인, 외국인, 재외동포의 반말 사용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한편 반말이 꼭 나쁜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듭니다. 저는 종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게 불편합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경우에는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로 평상시에 반말하던 사람이 갑자기 존댓말을 하기 시작하면 화가 났다는 의미가 됩니다. 부모가 아이를 혼낼 때, 부부가 화가 났을 때 갑자기 존댓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적절한 존댓말과 반말이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관계가 일률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나의 사전이 없다

2023/12/19 12:40:14

나의 사전이 없다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나폴레옹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사전을 찾아보면 ‘불가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순진하게 사전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말이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사전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종이사전이 집에 없는 사람이 많고, 자기 사전이 없는 사람은 아마 대부분일 겁니다. 특히 사전이 있다고 해도 외국어 사전일 가능성이 많고, 국어사전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어사전이 있다고 해도 보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요. 인터넷으로 손쉽게 어휘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 사전을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릴 때 저는 사전을 좋아했습니다. 사전에 있는 낱말의 설명이 재미있었고, 사전을 빨리 찾는 게 신이 났습니다. 사전 빨리 찾기 게임도 만들었습니다. 동생들과 집에서 서로 어휘를 부르면 몇 번에 어휘를 찾는가 하는 게임이었습니다. 사전 찾기 순서를 잘 알아야 하고, 어떤 어휘가 어디쯤 있는지 알아야 이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저는 그때 사전을 펼쳐서 한 번에 어휘를 찾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만큼 사전을 많이 봤다는 의미일 겁니다. 지금은 그때만큼 실력이 안 될 것 같습니다. 20대에 미국에서 1년 정도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빌딩을 청소하는 일이었는데 힘은 들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청소가 힘들지 않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것은 그때의 경험 덕분일 겁니다. 사무실을 청소하면서 놀란 것은 책상 위에 사전이 놓인 곳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영어가 어휘도 많고, 비슷한 말이 많아서 사전을 찾는 것이 우리보다는 더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전을 가까이 두고 늘 보면서 편지를 쓰고, 문서를 만드는 모습은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요즘 저와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은 사전이 많습니다. 대략 500권 정도 된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 500권은 넘어 보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도 제가 가지고 있는 사전을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국어사전이 여러 종류 있습니다. 갈래사전이나 분류사전도 있고, 방언사전과 어원 사전, 고어 사전, 이두 사전도 여러 종류 있습니다. 문법 사전도 있고, 동의어 사전, 반의어 사전, 속담 사전, 고사성어 사전 등도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외국어 사전도 있습니다. 영어, 일어, 한자 사전이 여러 종류 있습니다. 좀 특이한 사전도 눈에 띕니다. 전에 샀던 드라비다어 사전, 아이누어 사전, 산스크리트어 사전, 라틴어 사전, 만주어 사전, 몽골어 사전 등이 보입니다. 시어 사전, 한국문화 상징 사전, 민족 생활어 사전, 야생 문화 사전, 언어학 사전, 응용언어학 사전, 국어학사전, 한국어교육학 사전, 영어교육 사전도 공부할 때 가까이해야 하는 사전들입니다. 교육학 사전도 여러 권짜리가 눈에 뜨입니다. 북한에서 나온 사전이나 중국 조선족 출판사에서 나온 사전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종종은 한국어 관련 사전을 북한이 더 자세하게 만든 경우도 있습니다. 의성어, 의태어 사전은 공부에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사전도 세밀한 종류에 따라 사전이 많습니다. 유어(類語) 사전과 연어 사전이 몇 권씩 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조선어 사전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단어 설명이 어떤 것은 논문 수준입니다. 이 밖에도 영어 어원사전, 일본어 어원사전 등도 여러 권씩 있네요. 저도 사전이 백 권은 넘겠네요. 최근 치매라는 단어를 공부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인 문세영 선생의 조선어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치매라는 단어가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말인데 우리가 아무 스스럼 없이 사용하기에 예전 사전으로 원 의미를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문세영 선생의 조선어 사전에는 치매를 한 단어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멍청이’. 우리 할아버지는 치매라는 말이 얼마나 나쁜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치매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전을 보는 게 즐겁기 바랍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나의 이름은

2023/11/07 15:55:20

나의 이름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내 이름을 쓸 일은 많이 있는데 부르는 일은 극히 적어짐을 느낍니다. 내가 이런저런 문서에 내 이름을 남겨야 하는 일은 많지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적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내 이름이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나라 여성의 경우는 더 심하고, 특히 주부인 경우는 자신의 이름을 들을 일이 더더욱 없어집니다. 누구 엄마라는 호칭이나 사모님 등으로 바뀌는 겁니다. 이는 사실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 아빠나 직책이 그대로 호칭이 되곤 합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으로는 부모, 형제, 친구가 있습니다. 나이가 먹으면 형제들도 서로 이름을 부르는 일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시면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사라진다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물론 자식이 성인이 되고 나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부모도 많습니다. 역시 결혼 후에는 ‘애비, 애미’로 호칭이 변하기도 합니다. 이름은 우리말에서 복잡한 특성을 갖습니다. 다른 언어에 비해서도 매우 특징적입니다. 이름은 사실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름에 온갖 좋은 뜻을 담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저희 삼형제만 해도 이름에 용(龍), 성(星), 왕(王)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주 거창합니다. 막내는 누군가의 실수로 왕이 비슷한 글자인 옥(玉)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름짓기도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우리 삼형제의 이름을 보면 용이 나타나고, 별이 보이며, 왕이 됩니다. 거창한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이름에 참 진(眞)이 쓰이고, 착할 선(善)이 쓰입니다. 덕(德)이나 인(仁) 등도 단골로 쓰입니다. 물론 성별에 따라 혁(赫)이나 철(鐵) 등이 쓰이기도 하고, 숙(淑)이나 희(希)가 쓰이기도 합니다. 성 차별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부모님이 바라는 바가 아들과 딸에 따라 달랐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성과 관계없이 부르기 좋고 발음이 예쁜 이름도 많이 쓰입니다. 물론 그 속에서도 여전히 성의 차이는 느껴집니다. 저의 경우도 이제는 제 이름을 쓸 일은 많으나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부모님조차 제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가끔가다 제 이름 전체를 부르는 사람을 만나면 깜짝 놀랍니다. 어색함을 느낍니다. 학생이 제게 ‘조현용 교수님’이라고 부르면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사실 선생님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은 누군가에게 지칭하는 것은 가능하나 직접 부르는 것은 불가합니다. 때로는 이름이 불리지 않아서 섭섭하고,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들도 점점 이름을 안 부릅니다. 이름이 살아지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최근 기독교 ‘성경 인명 지명 사전’을 보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경의 이름에는 그 나름의 뜻이 있습니다. 어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노아는 위로, 다윗은 사랑함,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 요한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안나는 은혜, 한나는 자비라는 의미라고 나와 있네요. 저에게는 무척이나 놀라운 이름도 있었습니다. 르우엘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이고, 아히야는 여호와의 동생이라는 설명입니다. 놀랐습니다. 오늘 글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람의 이름은 그 뜻을 좇아가며 읽고 부르면 느낌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종종 이름은 결실이 되기도 합니다. 희망을 갖고 부르는 이름은 주문처럼 뜻을 이루어 주기도 합니다. 나의 이름을 다시 새겨 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숨바꼭질의 어원

2023/10/27 15:02:33

숨바꼭질의 어원 숨은 인간 그 자체입니다. 숨이 있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숨을 쉰다는 말은 살아있다는 뜻이고, 숨을 멈추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달리 표현하여 숨을 거두었다거나 끊어졌다고도 합니다만 아무튼 숨을 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을 나타낼 때 목숨이라고 합니다. 주로 숨은 목에 걸려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목을 막으면 숨을 더 이상 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숨을 죽인다고 하면 오히려 죽었다는 뜻이 아닌 것은 흥미롭습니다. 숨죽이고 가는 것은 들키지 않는 행위입니다. 반면에 숨은 활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활력이 사라진 것은 숨이 죽었다고 합니다. 주로 나물이나 나무가 시들었을 때 숨이 죽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숨이 인간을 살리기도 하는 것은 한숨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걱정이 있어도 한숨을 쉬고, 안심할 때도 한숨을 쉽니다. 이런 한숨은 안도의 한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크게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습니다. 물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입니다. 한숨은 내 답답한 가슴을 뚫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앞두고 긴장이 되면 크게 숨을 쉬고 일을 시작합니다. 숨은 그런 의미에서 수행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명상이나 수련 등을 보면 늘 호흡법이 중요합니다. 깊게 호흡하는 것이, 단전으로 호흡하는 것이 수련의 시작입니다. 숨은 뜻밖의 단어로 이어져 나갑니다. 앞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서 숨을 죽인다고 표현하였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로 숨다입니다. 숨는 것은 숨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 숨을 참는 것입니다. 숨소리도 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숨다와 관련된 숨기다 역시 숨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숨고 숨기는 것은 긴장되는 일입니다. 긴장이 되면 자연스럽게 숨이 멎습니다. 여기에서 재미있게 추론이 가능한 것은 바로 숨바꼭질입니다. 숨바꼭질에 관해서 여러 가지 어원이 있습니다만, 옛말에서는 숨박질이라고 하였고, 이 말은 자맥질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자맥질의 기본은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것입니다. 숨 쉬지 않는 모습을 자맥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숨박질의 옛말에는 숨막질은 숨을 막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숨바꼭질의 기본은 숨어서 숨을 쉬지 않는 겁니다. 술래가 가까이 오는 긴장된 순간에 숨을 쉬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입을 틀어막아서라도 숨을 참아야 하는 겁니다. 숨바꼭질에는 아이들이 놀면서 물속에 숨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숨이라는 말과 가장 가까이 있는 단어는 바로 쉬다입니다. 숨을 쉰다고 하는데 쉬다라는 말 역시 어원적으로는 숨과 관련이 있습니다. 보통 동사의 어간이 어원과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숨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보면서 숨을 잘 쉬는 것은 어쩌면 잘 쉬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숨을 쉬다는 말과 휴식을 취한다는 말은 같은 어원으로 보입니다. 잘 쉬어야 숨을 잘 쉴 수 있기 때문이고, 숨을 편히 쉬는 것이 휴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숨 차오르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벅차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겁니다. 숨쉬기가 힘들다고 하고, 숨이 막힌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위험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가슴을 치기도 하고, 가슴을 쥐어뜯기도 합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답답한 겁니다. 우리는 그럴수록 숨을 가다듬고, 좀 쉬어야 합니다. 한숨 돌리고, 좀 쉬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겁니다. 그늘에 앉아서 잠깐 쉴 때, 어릴 적 숨바꼭질 생각을 떠올려 보세요. 입가에 웃음이 지어질 겁니다. 저는 어릴 때 꼭꼭 숨어있었더니 술래가 찾는 걸 포기하고 집에 가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한참 동안 숨어있었네요.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얕보지 말고 속을 깊이 보라

2023/10/11 10:54:21

얕보지 말고 속을 깊이 보라 사람을 보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우리말에는 사람을 보는 방법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스레 보고, 그윽하게 보는 것 역시 보는 방법이겠으나 주로는 강하게 보는 느낌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노려보는 게 있습니다. 겁을 주기 위해서 화가 났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옆으로 보면 주로 째려본다고 합니다. 눈을 옆으로 째고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을 치뜨고 보기도 합니다. 주로 작은 사람이나 힘없는 사람이 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올려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려본다는 말에는 부러움이나 존경이 담기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보는 것에 추상적인 의미를 더한 것입니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에는 반대의 의미가 담깁니다. 주로는 천시(賤視)의 느낌이 됩니다. 이럴 때 쓰는 표현이 바로 ‘얕보다’입니다. 얕보다는 말은 얕게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깊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여 얕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예 밑바닥까지 내려놓고 보기도 합니다. 이 경우는 ‘깔보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깔보는 것은 내가 눈을 아래로 깔고 보는 겁니다. 상대를 저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쁜 일입니다. 비슷한 말로는 낮보다가 있습니다. 이는 낮추보다의 줄임말입니다. 상대를 낮추어 보는 것입니다. 이때 주로 하는 행위가 바로 ‘깎아내리다’ 입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가 아닌 깎아서 더 작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래로 본다는 표현도 이때 쓰는 말입니다. 눈을 내리깔고 상대를 보는 것이니 어른이나 윗사람의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 앞에서 아랫사람은 눈을 치뜨게 되는 겁니다. 반항의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올려다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겁니다. 남을 깊게 보지 않고 얕보는 행위를 한자에서는 ‘멸시(蔑視)’라고 합니다.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해석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업신여기다는 어원을 ‘없이 여기다’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없이 여긴다는 말은 있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투명인간 취급했다는 요즘 표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따돌림의 현장에서 자주 사용하는 악한 행동입니다. 가장 사람의 자존감을 무너뜨립니다. 멸시의 다른 말은 그래서 무시(無視)입니다. 무시라는 말 역시 보지 않는 것이니 못 본 체하는 것입니다. 보이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 무시하는 겁니다. 저는 보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보는 게 중요한데 어떻게 보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렇게나 보면 안 됩니다. 보고도 없는 사람 취급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깊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럼 저절로 존경심이 생겨납니다. 누구나 사람은 그 속에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영어에서는 인터뷰(interview)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면 모든 이에게 존경심이 생기게 됩니다. 인터뷰를 통해서 단점도 발견하지만 장점도 보게 됩니다. 가벼운 겉모습도 보게 되지만 깊은 어둠도 보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사람의 깊은 속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 인터뷰하는 삶이었으면 합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표현을 부정적인 장면이 아니라 이해와 용서의 장면에서 쓰기 바랍니다. 한편 우리말에는 보는 것에 묘한 표현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다’입니다. 여기는 것은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보는 것에 생각을 담은 겁니다. 생각하면서 보면 달리 보입니다. 그것을 우리말에서는 ‘눈여겨보다’라고 합니다. 사람도 자연도 눈여겨보면 달리 보입니다. 새롭게 보입니다. 귀하게 보입니다. 서로 눈여겨보고, 얕보지 말고 깊이 보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귀한 사람이 될 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씨 없는 이름

2023/09/26 17:18:24

씨 없는 이름 우리말은 변화 속도가 참으로 빠릅니다. 따라잡기가 버거울 정도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엉킴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변한 말을 쓰는 사람과 예전대로 사용하는 사람 사이의 엉킴입니다. 특히 호칭의 변화는 놀랍습니다. 그야말로 변화무쌍(變化無雙)합니다. 양반과 상놈을 따지는 신분제 사회에서, 독재 정권의 사회, 철저한 자본주의의 사회를 거쳐서 어쨌든 겉보기에는 민주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높임법을 중요시하는 한국어의 특성상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호칭이나 지칭이 그렇습니다. 그중에서 이름 뒤에 붙는 ‘씨’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요즘 신문기사를 보면 알려진 사람에게는 씨가 붙지 않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씨를 붙이는 경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씨가 높이는 표현이었다면, 이제는 모르는 사람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범죄자에게 붙어있는 씨를 보면서 이게 민주적인가, 인권인가 하는 생각에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저런 사람도 존중해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한편 어떤 이에게 직위가 없으면 그냥 씨로 통일하는 느낌도 있습니다. 물론 씨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름 + 씨’의 경우는 다른 씨에 비해서는 친근한 느낌이 있습니다. 예전에도 이름에 씨를 붙이는 것은 주로 연인 사이에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성 + 씨’는 예전에는 그렇게까지 기분 나쁜 호칭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거의 낮춤으로만 쓰입니다. 직위도 직업도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합니다. ‘김 씨!’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면 어떨까요? 반대로 내가 ‘박 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무래도 성에 씨만 붙이면 불편한 느낌이 커졌습니다. 아마도 ‘김 씨, 이 씨’처럼 불러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성 + 이름 + 씨’는 객관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내용도 주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아직도 공공기관 등에서는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현용 씨!’라고 부르는 거죠. 예전에는 아주 당연한 호칭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씨가 점점 기분이 나빠지면서 이런 호칭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씨’ 대신에 ‘-님’을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아직도 님을 붙이는 게 어색합니다. 어색은 하지만 그런 변화라는 것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말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저는 ‘손님’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저를 부르는 사람은 주로 ‘고객님’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고객(顧客)은 사실 손님이면서 단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다지 그 가게에 고객이 아닌데, 저를 고객 취급해 주는 겁니다. 처음 갔는데 말입니다. 고마워해야 할지, 어색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많습니다. 손님이라는 말은 손에 ‘님’이 붙은 말입니다. 저는 종종 손이라는 표현만으로도 매우 좋은 느낌이 있습니다.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라는 성불사의 밤이라는 곡의 가사를 들을 때마다 손의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손을 높인 표현이 손님인데, 말의 인플레이션이 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문을 보면 금방 씨 없는 이름들이 보일 겁니다. 정말 어떤 이름에는 씨를 붙이고, 어떤 이름에는 씨를 뺍니다. 씨만 자세하게 들여다봐도 세상의 변화를 느낍니다. 여러분은 어떤 씨입니다. 어떤 씨로 불리고 어떤 씨를 부릅니까? 그럴 바에야 아예 씨를 없애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씨가 불평등의 요소가 되는 듯도 하니 말입니다.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만, 갑자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이 생각나서 미소 짓게 됩니다. 씨로 인해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지 않기 바랍니다. ‘감히 누구한테 씨야!’라는 말도 씁쓸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