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친하게 지내세요

2022/03/01 14:36:58

친하게 지내세요 ‘친하다’라는 말은 물론 한자 친(親)에 ‘하다’가 붙은 말입니다. 저는 1음절 한자에 ‘하다’가 붙는 말을 볼 때마다 우리말에 한자가 폭넓게 들어와 있음을 새삼 느낍니다. 친이라는 말은 혼자는 쓰이지 않는 말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친하다의 반대말은 한자로는 잘 나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굳이 만들어 쓰자면 ‘혐(嫌)하다’ 정도를 쓸 수 있을까요? 아무튼 반대말이 없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쁜 말은 가능하면 만들지 않고, 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말 쓰며 살기에도 짧은 세상 아닌가요? ‘친’이 들어가는 말은 다정한 느낌이 있습니다. 친의 기본적인 의미가 가깝다는 의미니까 그런 느낌이 들 겁니다. 친하다라는 말은 이런 느낌의 시작점입니다. 다른 단어도 생각해 볼까요? 친하니까 친구(親舊)이고 친척(親戚)입니다. 친밀하고 친숙하며 친절하다라는 말에서 정을 느끼게도 됩니다. ‘친’이 들어가는 표현을 많이 쓰며 살면 좋겠습니다. ‘친’을 쓰면서 가까운 사람도 많아지면 좋겠네요. ‘친’은 또한 닮았다는 의미입니다. 친의 가장 정확한 의미는 닮았다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당연히 닮았다는 말은 가깝다는 말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가까우니까 닮는 것이겠죠. 아는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은 많지만 ‘친’이 붙으면 그야말로 피를 나눈 사이입니다. 친형제와 아는 형은 전혀 다른 관계입니다. ‘친’이 붙으면 물보다 진한 사이라는 말입니다. 친형제와 잘 지내야겠습니다. 물만도 못한 피도 많습니다. 형제간의 다툼은 불효의 시작입니다. 사실 ‘친’ 중의 ‘친’은 부모님입니다. 나랑 가장 가깝고, 내가 가장 닮은 사람이 부모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은 양친(兩親)이라고 합니다. 나누어 말하면 모친(母親)과 부친(父親)이 됩니다. 친어머니, 친아버지, 친형, 친언니, 친누나, 친오빠, 친동생의 무게와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오륜 중에서 부자유친에도 친이 보이지요. 이때 친도 단순히 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닮았다는 의미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더 가까워야 합니다. 이런 ‘친’이 종종 나쁜 의미로도 쓰입니다. 가장 나쁘게 쓰이는 말이 친일입니다. 친일에 파까지 붙으면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 됩니다. 친북도 만만치 않습니다. 종북이라는 말도 사용하지만 시작점은 친북입니다. 친미나 친중도 관점에 따라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이 됩니다. 요즘엔 정치에도 ‘친’이 쓰입니다. 친노, 친박, 친이, 친문 등으로 쓰입니다. 자신이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지는 표현들입니다. 어떤 나라나 어떤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나쁜 일이 된다는 게 참 어려운 숙제입니다. ‘친’은 원래 좋은 것인데 말입니다. 친하게 지내고, 가깝게 있으며, 서로 닮아가려고 하는 사이인데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저는 ‘친’이라는 말이 문제가 될 때마다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친한 게 왜 잘못일까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친해서 싸우지 않으면 더 좋은 것일 텐데 친하다면서 편 가르기를 하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면 친의 역할을 잘못하는 것이겠죠. ‘친’은 싸우지 말자는 것이고, 평화롭게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류나 외교를 이야기하면서 친한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 외국인은 친한파라면서 칭찬을 합니다. ‘친’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말들입니다. 친한파도 누군가에게는 나쁜 표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친한파뿐 아니라 모든 ‘친’이 좋은 관계이기 바랍니다. 긍정적인 의미이고 따뜻한 느낌이기 바랍니다. 어찌 ‘친’이 나쁠까요. 저는 매국이라는 표현과 친일이 동일한 의미처럼 사용되어 친의 의미가 타락한 것이라고 봅니다. 매국은 매국으로 쓰고 친일은 좋은 의미로 쓸 수 있기 바랍니다. 일본과 친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요. 일본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일까요? 특히 친한은 좋다고 하면서 친일이나 친중이나 친미를 미워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친’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친’이 아닌데 그들이 ‘친’일 리가 없습니다. 혐하다는 말은 없는데, 세상에 온갖 저주의 말, 상처의 말, 혐오의 말이 난무합니다. 혐한이 생기고 혐일, 혐중이 생깁니다. 미워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말이 거칠어질수록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친(親)’은 평화와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놀이를 놀다

2022/02/18 09:50:57

놀이를 놀다 놀다는 말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장 원형적인 의미는 즐거움입니다. 사람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정의한 학자(호이징하)도 있을 정도로 놀이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기도 합니다. 놀이가 즐거움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일의 반대말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놀이는 일과 반대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놀이가 그대로 일이기도 합니다. 놀다의 다른 뜻에는 움직이다, 일하다가 있기 때문입니다. 관자놀이의 놀이는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손을 빨리 놀린다는 말도 손을 빨리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아이가 뱃속에서 노는 것도 아이가 움직인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는 것은 즐겁게 일한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놀이는 연주나 연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노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하는 이에게는 진지하면서도 즐거운 일입니다. 영어에서도 놀다에 해당하는 단어인 ‘play’가 연극을 의미하거나 연주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보면 사람의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이라고 했겠지요. 우리말에서는 연극적 요소가 강한 북청사자놀음이나 사물놀이 등에 놀다와 관련된 표현이 나타납니다. 우리말에서도 연극이나 연주는 기본적으로 즐거운 것이고, 신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물놀이는 북, 장구, 꽹과리, 징으로 이루어진 연주입니다. 원래는 훨씬 큰 규모로 이루어졌던 것인데, 1978년에 악기의 수와 규모를 줄여 공연에 적합하게 수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물놀이가 요즘에는 국악 연주의 대표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네 가지 타악기의 어우러짐은 환상의 조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많은 악기가 그렇습니다만 타악기는 듣는 사람보다 치는 사람의 몰입도가 깊습니다. 무아지경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접 배워서 타악의 리듬 속에 스스로를 맡기면 심리적인 고통을 벗어나는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물은 혼자서 하는 연주가 아니라는 점도 좋습니다. 다른 합주도 비슷하지만 사물의 경우에는 모든 참여자가 모든 악기를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구를 배워서 기본 장단을 익히고, 꽹과리, 북, 징을 익힙니다. 그 중 하나 또는 몇 개의 악기를 담당하지만 모든 악기에 익숙한 사람이 함께하는 연주는 조화의 깊이가 다릅니다. 공감의 깊이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남의 구별이 없어집니다. 여럿이 함께하면 공감의 에너지를 크게 합니다. 넷이서도 가능한 연주이지만 함께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그만큼 더 흥겹습니다. 흥겹다는 말에서 ‘겹다’라는 말은 ‘정도나 양이 지나쳐 참거나 견뎌 내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저절로’라는 말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흥이 오르면 어깨가 절로 들썩거리는 겁니다. 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절로 추임새가 나옵니다. 물론 흥에도 연습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절로 나오는 흥을 잘 이끌어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임새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혼자서는 어색한 흥을 불러 모아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흥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잘한다, 좋다, 얼쑤, 얼씨구’ 등의 말을 하고 들으면서 신이 더 납니다. 몸속의 신이 솟아납니다. 칭찬이 우리를 춤추게 하는 겁니다. 틀린 부분에서 웃음이 납니다. 웃음도 음악이 됩니다. 웃음소리도 공연의 일부가 됩니다. 지나치게 틀려서 당황해서는 안 되겠지만 웬만한 실수는 흐름을 따라 지나갑니다. 그렇게 실수도 흘러가는 겁니다. 실수가 집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은 과장되게 동작을 하여 보는 이, 하는 이의 공감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발림’이라고 합니다. 발림은 비어있는 시간의 공간을 메우기도 하지만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화려한 손동작이 소리를 빛나게 하는 겁니다. 과장된 모습은 감정을 전하는 힘이 됩니다. 사물놀이를 하면서 우리는 겹습니다. 흥겹고, 정겹습니다. 몸속에 있는 기운이 펄펄 날아다닙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천국이 따로 없다

2022/01/19 12:31:22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천국이 따로 없다 종교를 믿는 많은 사람의 소망은 천국이나 천당에 가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좋은 곳이라고 하니 가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고통스러우니 다음 세상에서는 꼭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겠죠. 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이나 다음 세상에서는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래도 사람들이 내세에 대한 확신은 있는 것 같아 놀랍습니다. 별로 종교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내세는 은연중에 믿고 삽니다. 좋은 곳으로 가기 바라는 거죠.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천국에 가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종교는 그 물음에 답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것이겠죠. 종교마다 약간씩은 차이가 있겠으나 대부분은 비슷합니다. 종교가 결국은 하나로 통한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종교라면 좀 의심을 해 봐야 합니다.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주로 다음과 같습니다. 살면서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많이 베풀고, 배려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살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국에 가는 건 쉬운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마저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복수를 계획하면 사실 괴로운 것은 자신입니다. 용서는 그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라는 말이 참으로 맞습니다. 아픈 이를 보면 고쳐주려고 하고, 힘든 이를 만나면 몸소 도와주려고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돈으로 돕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으나 내 몸으로 돕는 게 더 중요합니다. 내 작은 힘으로 그에게 힘이 된다면 기쁜 일입니다. 살면서 느끼는 보람입니다. 나도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자각, 그것을 인정받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욕심이야말로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돈 욕심으로 가족도 친구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 더 가지려는 마음 때문에 천국은 멀어집니다. 성(性)의 욕심도 말할 나위가 없겠죠. 지나친 욕심으로 수많은 관계가 망가집니다. 천국을 이야기할 때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이야기가 늘 따라오는 이유일 겁니다. 생각해 보면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행복의 상징 파랑새를 찾으러 다니다가 끝내 못 찾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 파랑새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쉽게 공감하는 것은 우리 모두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는 잘못 알려진 속설이라고 합니다만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운임에 비해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는 말은 감동적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삽니다. 그런데 모든 세 잎 클로버가 행복일까요? 분명 그 가운데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아픈 일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행복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순간을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행복한 삶이 될 겁니다. 행복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천국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많은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쩌면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아니 천국에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이 되는 겁니다. 많은 종교는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겁니다. 천국에 가려고 노력하면 지금이 천국이 됩니다. 내가 천국의 시작이 됩니다. 나도 내 주변도 모두 천국이 됩니다.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산으로 가다

2021/12/22 16:20:47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산으로 가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다가 주제에서 벗어난 말을 하거나 방향에 맞지 않는 말을 할 때 이야기가 산으로 갔다는 표현을 합니다. 정답과는 상관없는 방향을 향하는 것이기에 길을 잃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길로 가지 않고 산으로 가면 엉뚱하고 틀린 게 됩니다. 회의가 산으로 가면 답은 커녕 회의 자체가 진행이 안 되는 겁니다. 속담에 있듯이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간 것입니다. 이렇듯 산으로 간다는 말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일을 자의든 타의든 그만둔 사람도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원을 떠돌기도 하지만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년을 하면 본격적으로 산으로 갑니다. 산에 가면 뭐가 있냐고 하지만 아무튼 산으로 갑니다. 산은 내가 갖고 있던 것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을 때 자연스레 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산으로 간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곳에 비해 산은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건강한 곳이 산입니다. 우리는 산에 길을 잃어서도 가고 길을 찾으려고도 갑니다. 종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거나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도 산으로 갑니다. 산에 가서 하늘의 계시를 받는 장면은 익숙한 모습입니다. 험하고 깊은 산에 가면 얻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다시 태어남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산으로 간다는 것이 수행을 의미하기도 하고 신을 만나는 행위가 되기도 합니다. 신라의 화랑이 산천을 다니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그런 이유일 겁니다. 바람 따라 흘러 다녔기에 풍류(風流)라고도 했습니다. 단순히 노는 것이 풍류가 아닙니다. 산을 다니는 겁니다. 산을 오르고 자연을 느끼는 것이 풍류이고 도입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기에 도라고 했을 겁니다. 화랑을 다른 말로는 국선(國仙)이라고 했습니다. 선(仙)은 산을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산을 오래 다니면 신선이 됩니다. 종교의 많은 수행처가 산속에 있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산속에 자리하기도 했겠으나 기독교의 수도원도 그렇고 불교의 많은 절도 깊은 산속에 있습니다. 저는 종종 기도를 드리러 산에 오른 사람들은 산에 오르면서 이미 기도가 이루어졌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산에 오르면서 간절한 마음이 깊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약초를 캐는 사람이 약초를 먹는 사람보다 건강한 건 뜻밖의 진리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에게 제일 좋은 처방은 약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약초 캐는 법을 가르치는 겁니다. 약초와 독초를 구별하며 새로운 지식을 얻고, 약초를 캐기 위해 산을 오르고 땀을 흘립니다. 어느새 머리도 새로워지고, 몸도 새로워지고, 마음도 새로워집니다. 무엇보다도 집착이 옅어지고 자연과 하나가 됩니다. 더 이상 아픈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혼자 산에 오르는 이도 많습니다. 부부나 친구가 함께 산에 오르기도 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열심히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산에 오르는 것은 참 다행한 일입니다. 살면서 길을 잃어 산에 갔는데 산은 또 다른 길이 되었습니다. 산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길을 찾습니다. 산에서 만난 하나하나가 깨달음이 됩니다. 다음 산이 기다려지고, 다음 계절이 기대됩니다. 건강은 덤으로 주어진 행복입니다. 길을 잃고 세상이 싫어서 산을 올랐는데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고 위로하게 됩니다. 산에 오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산에서 만난 사람에게 기쁜 인사와 걱정의 안부를 나눕니다.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을 향하는 것이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나와 함께 지나간 것이 과거(過去)이고, 아직 내 앞에 오고 있는 것이 미래(未來)입니다. 지금 내가 모습을 내보이며 살고 있는 것이 현재(現在)입니다. 저는 산을 걸으며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현재를 느낍니다. 산을 또 걷습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덮어놓고

2021/10/14 10:29:41

덮어놓고 싸울 때 보면 덮어놓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화를 내는지 이유도 안 가르쳐주고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도 있지요. 이런 사람은 상대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보통은 소리부터 질러대는데요. 싸울 때 소리를 지르는 것은 하수(下手)의 일입니다. 동물도 센 동물은 큰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저음(低音)은 센 동물의 특징이자 특권이죠. 덮어놓고 소리를 지르는 것 보다 이유를 잘 설명하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덮어놓고>라는 말은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어서 큰 관심이 없었는데, ‘덮어놓고 믿는 사람이 있다’는 말에서 이 표현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덮어놓고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덮어놓고 대들기도 하고, 덮어놓고 울기부터 하는 사람도 있지요. 덮어놓고 칭찬이나 사과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보면 <덮어놓다>는 ‘옳고 그름이나 형편 따위를 헤아리지 아니하다.’라는 뜻으로 나오는데요. ‘무언가를 덮어놓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즉, 가려놓았다는 의미죠. 그래서인지 <무조건>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말인데요. 덮어놓고 화를 내는 것은 상대의 사정은 듣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남의 사정을 덮어버리고 무조건 화를 내고 있는 것이죠. 덮어놓고 울거나 덮어놓고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의 잘못은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은 이 자리를 모면하자는 의도가 있는 것이죠.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미안하다고 말하면 용서가 될 거라는 착각을 하는 겁니다. 말 그대로 착각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모르는데 미안한 마음이 생기기는 어렵겠죠. 운다고 해서 진심 일리도 없구요. 눈물은 생각보다 쉽게 흐르기도 합니다. 미안해서 흘리기도 하지만 억울해서 흐르기도 하죠. 덮어놓고 우는 건 좋은 게 아닙니다. 덮어놓고 칭찬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죠. 어디를 칭찬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하는 칭찬은 아부가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칭찬은 관심에서 비롯됩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람의 말을 잘 믿는 게 순수한 측면도 있지만 위험한 측면도 있습니다. 물론 믿는 게 나쁜 건 아니지요. 사람 간의 믿음은 귀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덮어놓고’에 있습니다. 우리가 덮어놓고 있는 것은 무얼까요? 맹목적인 믿음은 자신을 가둡니다. 아무리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게 되지요. 어쩌면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세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맹신을 키우고 있을지 모릅니다.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나 덮어놓고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의심이 문제가 아니고, 덮어놓는 것이 문제인데요. 우리말 <덮어놓고>는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무언지에 대해서 반성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뭘 덮어놓고 믿는 걸까요? 뭘 덮어놓고 있는 걸까요? 때로는 덮어놓는 게 좋은 의미일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 우리는 덮어놓고 행동을 해야 할까요?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을 도울 때는 덮어놓고 해야 합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절차를 고려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급박한 상황이니까요. 옳고 그름을 따질 겨를도, 내게 닥칠 해로움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냥 뛰어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급박한 상황에서 이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건데요. 세상의 많은 미담(美談)은 <덮어놓고>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일이 따지고서는 이타적이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렇게 계산한 후에 한 행동이라면 진정한 이타주의(利他主義)는 아닐테니까요. ‘덮어놓고’라는 말을 쓸 때마다 한 번쯤은 내가 지금 덮어놓은 것이 무언지, 이렇게 덮어놓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숲을 걷고 나서

2021/09/30 12:09:55

숲을 걷고 나서 숲이 보입니다. 나무가 보입니다. 풀이 보입니다. 눈을 조금 들면 나뭇가지가 보이고 그 끝으로 하늘이 보입니다. 구름이 그런 모습이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숲을 걷고 나서 길이 보입니다. 흙이 보입니다. 바위도 보이고 자갈도 보입니다. 정성껏 쌓아놓은 돌탑도 보이네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에는 돌탑이 참 많습니다. 걸으며 돌탑을 보면 온기가 느껴지고, 저도 돌 하나를 올려놓곤 합니다. 숲을 걷고 나서 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칡꽃이 천지네요. 바람꽃도 마타리도 배웁니다. 모르는 꽃이 많아 반갑습니다. 나무도 배웁니다.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편백나무, 자작나무 등등 숲은 그대로 나무의 집입니다. 그 깊은 초대에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나무가 떨어낸 또는 떨어뜨린 나뭇잎은 길을 덮고, 흙보다 더 흙 같은 모습으로 길을 보여줍니다. 숲길을 걷고 나서 새를 만나고, 곤충을 만납니다. 새는 소리입니다. 모습보다 소리가 먼저 나를 지납니다. 휘파람으로 따라해 봅니다만, 새가 웃겠네요. 어설픈 모방이나 새를 닮으려 애쓰는 것으로 이해해 주겠지요. 곤충은 때로 적응이 안 됩니다. 잠자리나 메뚜기나 방아깨비 등 익숙한 모습도 있지만 낯설거나 여전히 피하고 싶은 곤충도 많습니다. 길을 따라오면서 눈앞을 뱅뱅거리는 ‘눈에놀이’나 길을 막고 선 거미는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숲길을 걸으니 뜻밖에도 사람이 보입니다. 먼저 길을 걸었던 사람을 만납니다. 길은 한 사람의 뒤를 다른 한 사람이 이어갔기에 길이 되었을 겁니다. 쌓아놓은 돌탑도, 나무에 묶인 리본도 길을 보여줍니다. 발자국이 발자국을 덮습니다. 앉아서 곤한 다리를 쉬었을 평평한 바위도 만납니다. 분명 내가 처음이 아니었을 겁니다. 왠지 먼저 길을 걸었던 사람이 고맙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나처럼 걸었을 겁니다.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길을 걸으면서 옆을 봅니다. 함께 걷는 사람이 고맙습니다. 함께 숲길을 걷습니다. 새로운 숲을 만나고 새로운 하루를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내와 걷는 하루는 왜 아내가 반려자이고 동반자인지 알게 합니다. 반려자(伴侶者)라는 말은 짝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반(伴)도 려(侶)도 짝이라는 뜻입니다. 반이라는 글자가 예쁘네요. 나의 반이 되는 사람입니다. 나도 그의 반이 되어야겠지요. 동반자(同伴者)의 반도 같은 글자입니다. 어떤 일을 함께하는 나의 나머지 반이 동반자인 셈입니다. 반은 도반(道伴)이라는 말에도 쓰입니다. 도반은 함께 도를 닦는 벗이라는 의미이지만, 저에게는 함께 길을 걷는 짝이라는 의미로도 보입니다. 함께 걷는 벗이 있음은 고마운 일입니다. 같이 걷는 이가 모두 도반입니다. 도를 닦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우리는 종종 도(道)가 길의 의미라는 점을 잊습니다. 글자의 모양을 보면 산에 사는 사람이 선인(仙人)입니다. 산을 걷고 숲을 걸으면 선인이 됩니다. 도를 깨닫게 됩니다. 도가 엄청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자연에서 배웁니다. 숲에서 배웁니다. 숲길에서 깊이 느낍니다. 오늘도 나를 치유하는 숲길을 걷습니다. 위로와 희망의 숲길을 걷습니다. 걷기가 올곧게 위로입니다. 깨달음의 숲길입니다.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히 스스로를 바라보게 합니다. 한참 숲길을 걷고 나니 숲 밖의 세상도 보입니다. 사람도 보입니다. 숲길을 걸으니 앞이 보입니다. 길은 여러 모습으로 내 앞에 놓여있습니다. 제가 가야할 길이기에 한 걸음을 더 옮깁니다. 앞으로 말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