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숲을 걷고 나서

2021/09/30 12:09:55

숲을 걷고 나서 숲이 보입니다. 나무가 보입니다. 풀이 보입니다. 눈을 조금 들면 나뭇가지가 보이고 그 끝으로 하늘이 보입니다. 구름이 그런 모습이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숲을 걷고 나서 길이 보입니다. 흙이 보입니다. 바위도 보이고 자갈도 보입니다. 정성껏 쌓아놓은 돌탑도 보이네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에는 돌탑이 참 많습니다. 걸으며 돌탑을 보면 온기가 느껴지고, 저도 돌 하나를 올려놓곤 합니다. 숲을 걷고 나서 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칡꽃이 천지네요. 바람꽃도 마타리도 배웁니다. 모르는 꽃이 많아 반갑습니다. 나무도 배웁니다.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편백나무, 자작나무 등등 숲은 그대로 나무의 집입니다. 그 깊은 초대에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나무가 떨어낸 또는 떨어뜨린 나뭇잎은 길을 덮고, 흙보다 더 흙 같은 모습으로 길을 보여줍니다. 숲길을 걷고 나서 새를 만나고, 곤충을 만납니다. 새는 소리입니다. 모습보다 소리가 먼저 나를 지납니다. 휘파람으로 따라해 봅니다만, 새가 웃겠네요. 어설픈 모방이나 새를 닮으려 애쓰는 것으로 이해해 주겠지요. 곤충은 때로 적응이 안 됩니다. 잠자리나 메뚜기나 방아깨비 등 익숙한 모습도 있지만 낯설거나 여전히 피하고 싶은 곤충도 많습니다. 길을 따라오면서 눈앞을 뱅뱅거리는 ‘눈에놀이’나 길을 막고 선 거미는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숲길을 걸으니 뜻밖에도 사람이 보입니다. 먼저 길을 걸었던 사람을 만납니다. 길은 한 사람의 뒤를 다른 한 사람이 이어갔기에 길이 되었을 겁니다. 쌓아놓은 돌탑도, 나무에 묶인 리본도 길을 보여줍니다. 발자국이 발자국을 덮습니다. 앉아서 곤한 다리를 쉬었을 평평한 바위도 만납니다. 분명 내가 처음이 아니었을 겁니다. 왠지 먼저 길을 걸었던 사람이 고맙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나처럼 걸었을 겁니다.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길을 걸으면서 옆을 봅니다. 함께 걷는 사람이 고맙습니다. 함께 숲길을 걷습니다. 새로운 숲을 만나고 새로운 하루를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내와 걷는 하루는 왜 아내가 반려자이고 동반자인지 알게 합니다. 반려자(伴侶者)라는 말은 짝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반(伴)도 려(侶)도 짝이라는 뜻입니다. 반이라는 글자가 예쁘네요. 나의 반이 되는 사람입니다. 나도 그의 반이 되어야겠지요. 동반자(同伴者)의 반도 같은 글자입니다. 어떤 일을 함께하는 나의 나머지 반이 동반자인 셈입니다. 반은 도반(道伴)이라는 말에도 쓰입니다. 도반은 함께 도를 닦는 벗이라는 의미이지만, 저에게는 함께 길을 걷는 짝이라는 의미로도 보입니다. 함께 걷는 벗이 있음은 고마운 일입니다. 같이 걷는 이가 모두 도반입니다. 도를 닦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우리는 종종 도(道)가 길의 의미라는 점을 잊습니다. 글자의 모양을 보면 산에 사는 사람이 선인(仙人)입니다. 산을 걷고 숲을 걸으면 선인이 됩니다. 도를 깨닫게 됩니다. 도가 엄청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자연에서 배웁니다. 숲에서 배웁니다. 숲길에서 깊이 느낍니다. 오늘도 나를 치유하는 숲길을 걷습니다. 위로와 희망의 숲길을 걷습니다. 걷기가 올곧게 위로입니다. 깨달음의 숲길입니다.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히 스스로를 바라보게 합니다. 한참 숲길을 걷고 나니 숲 밖의 세상도 보입니다. 사람도 보입니다. 숲길을 걸으니 앞이 보입니다. 길은 여러 모습으로 내 앞에 놓여있습니다. 제가 가야할 길이기에 한 걸음을 더 옮깁니다. 앞으로 말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2021/09/03 14:25:13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일본의 신문기사를 보니 일본은 코로나19 전에 비해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두 배 이상 증가하였고 미국은 세 배 이상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약간은 예상을 했으나 제 예상보다도 급격한 증가로 보입니다. 몸도 마음도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면 코로나 시대를 힘겹게 지나고 있는 우리는 어떨까요? 모르긴 몰라도 우울증이 엄청나게 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코로나 때문에 병원에 잘 가지 않아서 통계가 정확히 잡히지 않고 있을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걱정입니다. 영국에서 고독 담당 장관을 신설하였다는 몇 년 전 기사와 고독 담당상을 지명했다는 일본의 기사는 저에게는 고마운 충격이었습니다. 나라가 외로운 사람을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현재 우울증의 통계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자살에 관한 끔찍한 뉴스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청소년 자살률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매우 높다는 조사결과는 우리를 더 우울하게 만듭니다. 저는 우리나라야말로 고독담당 장관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라가 잘 살펴봐 주어야 합니다. 더 심각해지기 전에. 오랜 방역 통제로 무너져 내린 자영업자나 실업으로 내몰린 수많은 사람들, 일자리를 잡지 못한 젊은이들의 우울함이 절망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심화하고 있는 부익부빈익빈의 현상들은 분노와 좌절을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치솟는 집값, 불공정한 사회의 모습은 점점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한없이 가라앉게 만듭니다. 우울을 마음의 감기라고 하지만 마음 감기약을 먹는 사람은 그다지 없습니다. 그런 약이라도 먹을라치면 나약한 인간 취급받기 십상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모든 걸 국가에 의존할 수는 없겠지만 나라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집합금지라는 무서운 말에 마음껏 종교에 의지하지도 못합니다. 교회도 절도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조건 참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겨낼지 도와주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가까운 이에게 위로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아픈 가족을 찾아가지 못하는 죄송함과 서러움의 수많은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한쪽에서 썩어가고 있는데 어찌할까요? 서로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난 후에 고독과 우울은 더 심각한 모습으로 다가올 겁니다. 아시다시피 힘들 때는 힘든 것을 이겨내야 하기에 마음 방역에 신경을 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지나가고 나면 세상은 더 큰 심리적 수렁에 빠지게 될 겁니다. 학교에 가지 못했던 아이들의 문제도 심각해 질 겁니다. 몇 년 간이나 이런 대학 생활을 보낸 학생들은 어떨까요? 취업 절벽의 고통을 온몸으로 맞닥뜨린 졸업생들은 어떨까요? 경제적 고통을 떠안은 엄마, 아빠들은 어떤가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외로움과 고통은 어떻게 치유가 될까요?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건강으로 평균 수명은 한동안 늘어날 겁니다. 하지만 몸은 건강한데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삶이 축복이 아니라 고통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을 개인에게만 맡기지 않아야 합니다. 가족에게만 짐을 지워서도 안 될 겁니다. 국가가 개인의 우울을 위로해 주는 차분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외로움과 우울을 담당하는 부서가 우리나라에도 상징적으로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인복(人福)이 있는 사람

2021/07/22 12:26:19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인복(人福)이 있는 사람 어떤 분을 만났는데 평생을 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말이 인복이 있어서 고마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인복이라. 인복은 사람 복이 있었다는 말로 나를 도와준 사람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인복이 있으면 좋은 겁니다. 저는 인복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행복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인복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사람을 만나서 행복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인복이 있으려면 인덕(人德)이 있어야 할 겁니다. 인복과 인덕은 상호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인복과 인덕은 같은 뜻으로 설명됩니다. 분명히 느낌이 다른 말인데도 같은 말로 설명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인복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겁니다. 인덕이 없는 사람에게 인복이 있을 리 없으니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덕이 있다는 증거도 될 겁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인덕을 베풀면 내게도 인복이 다가옵니다. 인덕은 주로 내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인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저 좋은 답만 들을지도 모릅니다. 인덕이 정말로 있어서 그런 대답을 듣는 것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대답을 하는 사람에게 괴로움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괴롭힌 것이니 나에게 인덕이 있었다고 볼 수 없겠네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인덕이 없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반면에 인복은 내가 다른 사람을 떠올리면 됩니다. 내가 인복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려면 내게 고마웠던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떠오르는가요? 나는 인복이 있는 사람인가요? 인복의 시작은 가족입니다. 내 부모를 다른 부모와 비교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죠. 나를 낳아준 부모가 안 고마운 사람이 있겠냐마는 실제로는 집안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만나지 않는 집안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인복의 시작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복이기 바랍니다. 복은 덕의 다른 말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좋은 벗은 인복의 핵심입니다. 여기에서 오해해서 안 되는 것은 벗은 어릴 때 만난 사람만 벗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평생 우리는 수많은 벗을 만납니다. 그래서 인복은 쌓여가는 겁니다. 인복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더욱 좋은 사람을 만나야 인복이 쌓입니다. 벗은 나이 차이와도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만나서 편한 사람도 인복입니다. 만나면 행복해지는 사람이 인복이기 때문입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만난 사람, 동네에서 만난 사람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인복이 있는 겁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내가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인복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인복이라 생각 못 하며 사는 순간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복이라는 말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괴로운 인간관계가 가득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봐도 인복은커녕 악연으로 보이는 사람이 잔뜩 있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내 가까이 있다는 게 더 괴롭기도 합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를 만나서 괴로운 사람도 있겠지요. 나를 만난 것이 행복인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더 많은 덕을 쌓아야겠습니다. 인덕(人德) 말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밝은 미래를 위해

2021/07/07 14:37:52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밝은 미래를 위해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과거라고 하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래라고 합니다. 불교에 관한 책을 읽다가 하녀였던 푼니카라는 성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푼니카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머니도 아기 때 세상을 떠난 고아였으며 하녀로서 힘든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늘 비참하였기에 분노 가득한 표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죠. 어느 날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성냄의 원인이 과거나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푼니카는 변화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노력에 따라 화의 원인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 후 푼니카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였으며 많은 이의 존경을 받고, 깨달은 이가 됩니다. 현재가 변하면 과거도 변하고 미래도 변합니다. 나의 지금을 바꾸려 노력하면 과거의 어두움은 지금의 나를 만든 거친 씨앗이 됩니다. 물론 다가오는 미래는 나를 밝게 인도합니다. 과거를 순우리말로는 옛날이라고 합니다. 옛날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옛날은 상대적이어서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들도 “내가 옛날에 어렸을 때는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웃깁니다. 지금도 어린데 어릴 때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옛날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더 어렸을 때가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하루라도 전 날이면 옛날인 것도 맞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정확히 쓴 셈입니다. 미래라는 말은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앞날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날을 모른다는 말이 미래를 의미합니다. 우리말에서는 내일이라는 말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내일은 옛말을 살펴보면 ‘올제’ 정도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의 문헌인 계림유사라는 책에서 추정이 가능합니다. 우리말에서 때를 나타내는 말에는 ‘제, 적’이 주로 담깁니다. ‘어릴 적, 어릴 제’가 그렇습니다. 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날을 나타내는 말에는 ‘어제’와 ‘그제’가 있습니다. 지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는 ‘이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내일을 나타내는 말은 앞으로 올 때라는 의미에서 ‘올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한자어로 ‘내일’을 사용합니다. 전에는 ‘명일(明日)’이라는 말도 사용하였습니다. 명일이라는 말을 보면 긍정적인 생각이 보여서 좋습니다. 내일을 밝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내일이 되면 해가 뜬다는 생각에서 명일이라고 했을 겁니다. 새벽이 오고 어둠이 물러가면 해가 뜹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겁니다. 새 날이 내일인 셈입니다. 사실 ‘새’라는 말도 해와 관계가 있습니다. 밝다는 뜻입니다. 밝을 명(明)에도 해 일(日)이 들어 있습니다. 내일은 밝은 날입니다. 밝아야 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날입니다. 저는 저의 옛 제자를 부를 때 ‘밝은 미래’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자의 편지에서 따온 말이었지만, 희망을 담아서 ‘밝은 미래’라고 불렀더니 제자는 스스로의 미래를 밝게 보는 듯했습니다. 부르는 저의 마음도 좋았습니다. 미래는 바뀝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따라서, 현재의 내 모습에 따라서 앞날의 모습은 밝아집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앞으로의 내 상태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여 우울해하고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은 밝습니다. 내일도 밝습니다. 그게 진리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몸살이 나다

2021/06/09 11:46:34

몸살이 나다 갑자기 몸살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궁금해졌습니다. 몸에 살이 붙어서 생긴 말이니 살의 의미만 알면 될 것 같았습니다. 전부터 저는 몸살은 몸에 살을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살을 맞는다는 말은 주로 무속 등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살을 맞아서 죽기도 하니 무서운 말이 아닐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몸살의 어원에 대해서 공부해 보면서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서 좀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몸에 살을 맞는다는 의미에서 몸살의 뜻을 우선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살을 맞는다고 할 때 살은 사전에서는 한자로 나옵니다. 살(煞)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죽인다는 뜻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흉신(凶神)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흉신은 흉물스러운 좋지 않는 귀신입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보면 살을 맞다와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찾아보았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관련된 관용어도 여러 가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이 끼다’나 ‘살이 붙다’라는 말은 사람이나 물건 따위를 해치는 불길한 기운이 들러붙는다는 의미입니다. ‘살이 뻗치다’나 ‘살이 서다’, ‘살이 오르다’라고도 표현합니다. ‘살이 가다’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도 공교롭게 해를 입다.’라는 뜻입니다. ‘살이 세다’는 말은 운수가 나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표준국어사전에서는 예로 ‘결혼한 남자마다 단명을 하니 참으로 살이 센 여자다.’를 들고 있을 정도로 무서운 말이기도 합니다. 사전에서 의미를 찾아보니 살을 맞았다는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몸살은 가볍게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심하게 앓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몸살을 앓았다고 표현할 때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죽을 만큼 아픈 경우도 있습니다. 몸살의 살이 살을 맞다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몸살, 감기 정도로 가볍게 치부할 수는 없는 증세라는 의미입니다. 코로나 사태의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의 끝은 백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직 완벽해 보이지는 않지만 백신말고는 다른 해결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에 따라, 지역에 따라, 연령에 따라 백신 접종의 속도도 차이가 납니다. 아무튼 모두 일상의 소중함으로 돌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저는 아직 접종 대상이 아니어서 좀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만,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맞아야겠다는 생각에 주변 병원에 잔여백신 예약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곧바로 연락이 와서 아내와 함께 백신을 맞게 되었습니다. 접종의 절차는 간단했습니다. 접종 후에 이상 증세가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 미리 준비한 약을 먹었습니다. 저는 접종 부위만 며칠 간 뻐근하였는데, 아내는 그야말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고열과 두통, 근육통으로 입맛까지 잃을 정도였습니다. 아내도 이틀 정도 고생을 하고 나니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몸에 잡균이 없으면 백신의 후유증이 심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의학적 정확성은 모르겠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제 친구 중 한 명은 백신을 맞고 아무 후유증이 없었다고 의사 선생님께 이야기했더니 후유증은 주로 젊은 사람에게 생긴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동안 우리가 알고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균이 몸속에 들어와 쌓여 있죠. 독감 주사를 자주 맞은 사람, 예방 주사를 많이 맞은 사람은 어쩌면 어떤 균이 들어와도 이겨낼지 모릅니다. 어릴 때 땅에 떨어진 것 같이 아무거나 먹고 힘들게 살았을수록 균에 저항력도 강할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몸이 안 좋은 사람이 오히려 백신에는 적응이 잘 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쪽이 좋은지 모르겠네요. 예방 주사는 사실 좀 아파야 정상이 아닐까 합니다. 예방이라는 게 아예 생기지 않는 게 아니라 약하게 경험하고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신을 맞고 몸살을 앓은 사람은 공통적으로 몸에 균이 들어왔음을 확실히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기도 합니다. 백신의 효과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오히려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제대로 맞은 것인지에 대해서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참 묘한 세상입니다. 백신 하나에도 이렇게 세상사가 다 담겨있습니다. 바이러스를 세상의 어려움이라고 생각해 보면 세상의 어려움을 겪어온 사람들의 아프지만 강인함을 알 수도 있습니다. 몸살을 앓고 나면, 고열에 오한을 겪고 나면 그만큼 자라납니다. 내 몸속에 있던 나약함도 치유할 겁니다. 몸살은 나를 죽이는 게 아니라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어머니

2021/05/14 10:53:29

어머니 우리나라만큼 어머니가 많은 나라가 있을까요? 우리는 자기의 어머니 말고도 어머니가 참 많습니다. 친척 중에도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할머니(한어머니가 변한 말)가 있습니다. 모든 언어에 이렇게 어머니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영어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에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일본어에서도 어머니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다른 언어도 다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외국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어머니를 제외하고 ‘어머니’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도 어머니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에서 친구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오면 외국 학생들은 무척 당황해 합니다. 같은 어머니의 자식이었는지 해석에 혼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부모와 상담을 하는 장면도 언어적으로는 복잡한 장면입니다. 학생의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외국인들의 혼동이 짐작이 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자주 가는 식당의 주인에게도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쯤 되면 ‘어머니’의 범위는 점점 미궁으로 빠지게 됩니다. 왜 이렇게 우리에게는 어머니가 많을까요? 아마 그 해답은 반대로 ‘우리 어머니’라는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외아들이어도 ‘우리 엄마’라고 부르는 것에서 이미 ‘어머니’는 나만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어머니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서일까요? 아닐 겁니다.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면, 친구의 어머니는 나를 자식처럼 여기게 됩니다. 물론 나도 어머님처럼 생각해야 하겠죠. 식당의 아주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면 마치 자기 자식에게 해 주듯이 음식을 차려주게 될 겁니다. 정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면 세상은 따뜻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나 철학에서 공통되는 원리는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생각하고, 남의 기쁨이 나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이 부처라는 생각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도, 사람과 하늘이 하나라는 생각도 모두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태도에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어휘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 엄마’고, ‘우리 집’이고, ‘우리 마을’이고, ‘우리나라’가 됩니다. ‘우리’라는 말은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별이 중요하지 않으면 모두 ‘우리 아들, 딸’이 되고, 모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자식’처럼 생각한다면, 지금처럼 메말라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르신들을 ‘부모님’처럼 생각한다면 노인 소외는 없어지겠죠. 물론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한 분이십니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죠. 하지만 우리 어머니도 내가 모든 어른들을 어머니처럼 생각하겠다는데 서운해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칭찬하시고 그리 살라고 어깨를 토닥이실 겁니다. 그게 우리나라에 어머니가 많은 이유입니다. 우리 민족이 넓은 의미에서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것도 다 이런 호칭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